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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령 -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이순원 외 지음 / 현대문학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두 달 전에 읽었던 책의 감상을 이제서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게 영 찜찜하기만 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 왔던 것을 이제라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들겨 보건만, 횡설수설할 것이라는 예감은 벗어나지 못할 듯 하다. 즉 내 찜찜함은 책이 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과 표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무작정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 이럴 때는 답답하기만 하다. 내내 읽어 내린 모든 것들이 한 데 뒤섞여, 사실과는 다른 기억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허나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아련하고도 은은하게 남아 있다. 수상작인 <은비령>과 자선작 1편을 비롯하여 수상후보작 7편, 역대수상작가 최근작 2편으로 이루어진 <1997 현대문학 수상소설집>은 그렇게 한 편으로는 기분 좋은, 그리고 한 편으로는 서늘한 감정으로 내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단편들 가운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사실 수상작인 <은비령>도 그렇다고 수상후보작이나 김문수나 박완서의 최근작도 아니었다.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였다. 수상작가인 이순원의 자선작이다.
- 그런데도 나는 여기 있는 것은 물이든 뭐든 다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물 따라 바다까지 내 발로 걸어가봤는데도. ……난 대관령 이쪽 사람들은 어디서 죽든 혼이 다 거기로 가 모여 있을 거 같은데. 산에 묻어도 비에 씻기고 물에 씻기고 해서. (131~132쪽)
친구 영해의 기이한 죽음과 그의 기일에 만난 이상한 여인. 죽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가겠다던 20여년 전의 친구의 죽음을, 1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며 겪는 묘한 이야기이다. <은비령>에 비해 길이도 짧고 단순한 구조와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가장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은비령>의 바람꽃이나 죽은 친구의 아내, 산, 바람, 별, 천체, 2,500년을 둔 윤회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왜 이리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가 깊이 와닿아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 그 호수를 믿고 싶은 것일까.
그 외에 김병언의 <금색 크레용>이나 이윤기의 <뱃놀이>, 박완서의 <참을 수 없는 비밀> 등도 읽을만 하다. 다만 이 10년 전의 단편들에게선 하나같이 씁쓸하기도 하고 비릿하기도 한 입맛이 감돈다. 수면 아래로 침체되어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사놓은 2007 현대문학상과는 어떻게 다를지, 10년 동안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2007년 12월 31일 사형된 23명의 이름 모를 죄수들이 떠오른다. 사형 판결이 난 죄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 행해지지 않은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2007년의 마지막 날까지 단 1명의 죄수도 사형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실제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된다고 한다. UN에서 지정하기로, 사형이 실행되지 않은 기간이 10년인 지나면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다. 10년이라는 적잖은 시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 단편 문학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 운동의 여운이 남아 있던, 전경린의 <고통> 속에 담긴 그런 마음이 세상 이곳 저곳에서 맴돌았던…….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교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쪽수를 차지하던 운동에 관한 기사가 10년 사이 점점 줄어, 이제는 단 한 건도 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한다.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사형을 실행했다던 기억이 아직 우리에게 있지만, 그런 기억들 때문에 우리가 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사회가 원했던 강하고 폭력적인 무언가가 이제는 유순하고 싱싱한 무언가로 변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무언가로 변해간다. 책 속에 담긴 대부분의 문장들은 현대에 막 발표되어서도 통할 만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 시대 속에 생동하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기에 이 책의 의미는 그대로일 테다. 시대의 흐름에 나 또한 몸을 맡긴 채 변해가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도. 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