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도 - 사이코 북스 05
로저 케네디 지음, 강신옥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리비도는 프로이트의 정신성욕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로저 케네디의 <리비도>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의 초기 입장에 서서 리비도를 보고 있다. 먼저 리비도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의 초기 이론 관점에서 보며, 인생 단계에서 나타나는 리비도의 발달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성욕이라는 것이 청소년기, 즉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소아성욕설이 등장한 후 많은 부분에서 인식이 바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소아 성욕 발달 단계에 관해서는 '성격 발달 단계', '심리 성적 발달 단계' '성격 발달 5단계'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것의 개념에 대해서는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본 것일 테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라는 이 5단계의 발달 속에서 소아는 심리적, 성적, 성격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이 단계적 발달에서 어느 한 단계에 지나친 만족감을 갖거나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발달 장애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 이론이다.

 

 로저 케네디는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대상관계 이론에 대해서도 잠깐 소개한다. 대상관계 이론은 프로이트 이론이 개인의 내면세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 주체와 그 환경 간의 관계, 특히 어머니와 유아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론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내면세계를 벗어나 외면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분석학의 범위를 더 넓혀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이론에서는 성욕이 차지했던 영역을 제치고 더 높은 지지를 얻어 내었다.  현대 정신분석학 안에서는 더이상 리비도를 가장 바른 개념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역시 기본적으로 리비도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단계에서 리비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각 발달 단계에서 오는 심리 성적 에너지를 리비도라 칭한다. 책에서는 이것을 신경증, 정신증, 성도착증, 나르시시즘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발달 5단계를 적절히 넘기지 못한 소아들은 어느 한 부분에 고착하게 되어 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 상태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장애라 할 수 있다. 특히 발달 단계 도중 금욕, 즉 리비도의 억누름은 정신적 장애나 공황 상태를 더욱 더 심한 지경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한 부분뿐만 아니라 각 발달 단계에서 부분적인 충동들이 모여 정신적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변형된 회로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그의 이론을 더욱 더 난항에 빠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일뿐, 프로이트는 물론 로저 케네디는 그것을 능숙하게 풀어낸다.

 

 케네디는 마지막으로, 리비도적 문명이 다가올 것을 예견하며 이 책을 덮는다. 억압적인 문명이 해체하고 리비도적 문명이 오게 되면,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할 시간이 더 많이 찾아올 것이며, 소외된 노동자를 없애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 문화에서는 이런 리비도적 문명이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것이라 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로저 케네디가 말하는 리비도적 문명이라는 것에 완전한 동감은 할 수 없으며, 프로이트의 남성 중심적인 심리 이론에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노력하고 있었기에, 책에 완전히 동화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인 프로이트 이론이 갖고 있는 핵심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다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탁환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를 미치게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 책을 탐독하는 '열하광'의 <열하광인>들이 살해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살해범을 잡는 것을 끝난다.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면모를 띄고 있으나 또 그렇다고 단정짓기에는 역사적 사건을 맛깔나게 재구성한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팩션들을 읽으며, 몇 안 되게 손꼽고 싶은 작품인 것이다. 지인 중에 김탁환을 찬미하는 이가 있어, 그의 작품들을 읽어 보려 마음은 먹었으나 이제서야 그를 접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물론 즐겁게 읽었고, 나 또한 지인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나 따끔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몇몇 있기는 하다. 정확히 511개의 주석들이 독자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했고, 그로 인해 자칫 현학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는 주석이 없는 단어들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 있어 어렵기도 했으나 실은 내 무지에 민망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객관적으로 보기에 나뿐만이 아닐 듯 하다. 또한 결말에서 진범을 찾아 내었을 때는 생각지 못함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황스러웠다. 초반에 단 한 번 등장했던 인물이었던 데다가 독자에게 그 인물에 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추리해 낸다는 것은 억지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허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옛스러운 단어들의 향연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살려 내었기에 매력적일 수 있었고, 어렵게 느꼈던 탓은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더불어 추리 소설을 잘 접하지 않는 내가 그런 결말에 대해 논하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부라 할지라도 현학적인 면모가 비친다는 점, 소설의 몰입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그 탓에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열하광인>을 읽으며 내용적으로 의아했던 점을 몇 꼽자면, 개혁 군주였던 정조가 어째서 백탑파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그들을 최초의 서리로 임명했으면서도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멀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꽃미치광이(花狂)인 김진이 '군왕은 오직 군왕의 도리만을 따른답니다.(하, 246쪽)'라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던 말로써 수긍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간서치(看書癡) 이덕무가 자송문을 찢어 버리는 장면도 쉽게 수긍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참회로 가득한 자송문을 쓴 것도 나로서는 의아하기만 한 것이다. 개연성의 부족으로 납득하기 힘든 것인지 나의 논리로서만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는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말이다. 사실 아무리 어명이라 하더라도 이명방 자신이 속한 열하광을 색출하고 감시하라는 명을 받아 들인 것 자체가, 또 이미 변해버린 정조를 끝까지 믿고 따르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의이지 않던가.

 

 어찌 되었든 간에 <열하광인>에서 등장하는 실존 인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인물, 허구적 인물들의 조화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자연스러웠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설정들의 조화도 비교적 훌륭하다.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손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흡인력과 긴박감 또한 감탄할만 하다. 이름만 들어왔던 김탁환을, 백탑파 시리즈의 세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전작들도 접하고 싶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최근에서야 이인로의 <파한집>, 이이의 <동호문답>, 박제가의 <북학의> 등을 읽으며, 우리 고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로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또한 탐독해 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김탁환을 소설가가 되도록 한 시발점이었다는 <열하일기>, 늘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만만치 않은 두께와 가격에 혀를 내두르지 않았던가. 조만간 나 또한 <열하일기>를 탐독하고, 그의 전작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앞선 긴 이야기보다 이 한 줄의 소망만으로도 이 책을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겨우 두번째 접하는 이순원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약간 달랐달까. 하지만 그것이 실망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따뜻한 면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그를 깊이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이순원을, 아니 정확히는 이순원의 소설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은비령>에서는 바람꽃을 매개로 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밤나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장 최근에 자연물을 의인화한 소설을 읽어 본 것이 김훈의 <개>였으니,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라 더욱 즐거웠다.

 

- 얘야, 첫 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단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 가는 풀들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 (14쪽)

 

 표지에 또박또박 적혀있는 이 구절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겨 가벼운 마음으로 또 따뜻한 마음으로 얇지만 무거운 이 한 권을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사실 처음부터 나무가 말을 하리라곤 생각치 않고 책장을 넘겼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나무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빠져 들었던 것이다.

 

 여덟살 난 손자나무는, 냉이에게 왜 수선화처럼 예쁘지 않고 못 생겼냐며 놀렸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대추나무에게 왜 그리 게으르냐고 핀잔을 주었다가 할아버지의 나무의 말씀을 듣고 창피해 하기도 하고, 작년에 떨어 뜨리고 만 밤알을 아쉬워 해 밤알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있다가  가지를 잃어버릴 뻔 하기도 하지만 결국 첫 열매를 온전히 익혀내며 조금 더 성장한다. 백살이 넘은 할아버지나무가 손자나무를 잘 이끌어 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흐뭇하여 즐거워 진다.

 

-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얘기가 그렇다는구나. 산 위의 참나무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자기 짐작에 왠지 흉년이 들 것 같은 해는 일부러 꽃을 많이 피워 열매를 잔뜩 맺고, 풍년이 들 것 같은 해는 꽃을 적게 피워 열매도 적게 맺는다는 게야. / 왜요? / 들농사 흉년이 들면 아무래도 사람이고 짐승이고 먹을 것이 부족할 거 아니냐? 그럴 때 제몸의 도토리라도 풍년이 들게 해서 산 식구와 들 식구의 부족한 식량을 채워 주었던 거지. (154쪽)

 

 다만 안타까운 점은 전형적인 나무의 입장이라기 보다 우리 사람들이 나무가 이런 생각을 하기를 바라는 면면이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쉽기도 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인간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기에 그런 것으로 그리고 있는 탓이다. 우리가 나무를 해치고, 동물을 해치고, 그리하여 자연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표현이 없어 약간 아쉬웠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일뿐, 그들이 인간에게 득이나 실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허나 그것이 의인화물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덕에 이리도 따뜻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득 할아버지나무와 손자나무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문득 나무 한 그루를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손자나무에게, 할아버지나무가 그러기 위해서는 화분 속에 담기는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래도 그것은 싫다고 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나무를 키워 보려면 화분에 담아 키우는 수밖에 없기에 은근슬쩍 미안해 진다.

 

 몇 년 전, 친구의 집들이에 행운목을 선물하며, 나도 길러 볼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하였으나 죽여 버리고 말 것 같아 포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그 행운목을 잊지 못하고 길러 보려, 지난번 그것을 샀던 장터에서 어슬렁거려 보았으나 구하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다 말고 행운목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매번 식물을 말려 죽이거나 썩혀 죽이기가 허다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잘 키워 보리라.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비령 -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이순원 외 지음 / 현대문학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두 달 전에 읽었던 책의 감상을 이제서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게 영 찜찜하기만 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 왔던 것을 이제라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들겨 보건만, 횡설수설할 것이라는 예감은 벗어나지 못할 듯 하다. 즉 내 찜찜함은 책이 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과 표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무작정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 이럴 때는 답답하기만 하다. 내내 읽어 내린 모든 것들이 한 데 뒤섞여, 사실과는 다른 기억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허나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아련하고도 은은하게 남아 있다. 수상작인 <은비령>과 자선작 1편을 비롯하여 수상후보작 7편, 역대수상작가 최근작 2편으로 이루어진 <1997 현대문학 수상소설집>은 그렇게 한 편으로는 기분 좋은, 그리고 한 편으로는 서늘한 감정으로 내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단편들 가운데,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사실 수상작인 <은비령>도 그렇다고 수상후보작이나 김문수나 박완서의 최근작도 아니었다.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였다. 수상작가인 이순원의 자선작이다.

 

- 그런데도 나는 여기 있는 것은 물이든 뭐든 다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물 따라 바다까지 내 발로 걸어가봤는데도. ……난 대관령 이쪽 사람들은 어디서 죽든 혼이 다 거기로 가 모여 있을 거 같은데. 산에 묻어도 비에 씻기고 물에 씻기고 해서. (131~132쪽)

 

 친구 영해의 기이한 죽음과 그의 기일에 만난 이상한 여인. 죽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가겠다던 20여년 전의 친구의 죽음을, 1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며 겪는 묘한 이야기이다. <은비령>에 비해 길이도 짧고 단순한 구조와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가장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은비령>의 바람꽃이나 죽은 친구의 아내, 산, 바람, 별, 천체, 2,500년을 둔 윤회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왜 이리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가 깊이 와닿아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 그 호수를 믿고 싶은 것일까.

 

  그 외에 김병언의 <금색 크레용>이나 이윤기의 <뱃놀이>, 박완서의 <참을 수 없는 비밀> 등도 읽을만 하다. 다만 이 10년 전의 단편들에게선 하나같이 씁쓸하기도 하고 비릿하기도 한 입맛이 감돈다. 수면 아래로 침체되어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사놓은 2007 현대문학상과는 어떻게 다를지, 10년 동안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2007년 12월 31일 사형된 23명의 이름 모를 죄수들이 떠오른다.  사형 판결이 난 죄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 행해지지 않은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2007년의 마지막 날까지 단 1명의 죄수도 사형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실제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된다고 한다. UN에서 지정하기로, 사형이 실행되지 않은 기간이 10년인 지나면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다. 10년이라는 적잖은 시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 단편 문학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 운동의 여운이 남아 있던, 전경린의 <고통> 속에 담긴 그런 마음이 세상 이곳 저곳에서 맴돌았던…….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교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쪽수를 차지하던 운동에 관한 기사가 10년 사이 점점 줄어, 이제는 단 한 건도 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한다.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사형을 실행했다던 기억이 아직 우리에게 있지만, 그런 기억들 때문에 우리가 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사회가 원했던 강하고 폭력적인 무언가가 이제는 유순하고 싱싱한 무언가로 변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무언가로 변해간다. 책 속에 담긴 대부분의 문장들은 현대에 막 발표되어서도 통할 만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 시대 속에 생동하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기에 이 책의 의미는 그대로일 테다. 시대의 흐름에 나 또한 몸을 맡긴 채 변해가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도.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흑소소설>이라, 제목부터 기묘하다. 시쳇말로 썩소를 날리고 있는 여성이 그려진 표지에서부터 따라 해야할 것 같은 느낌에 피식거리게 된다. 다소 황당무계한 소재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입가에 담뿍 물게 만든다. 센세이셔널리즘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3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윤리적인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상냥한 미소를 가장한 채,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취하는 이들에 대한 일갈을 날리는 것이다.
 

 나는 센세이셔널리즘을 싫어한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멸한다고 보아야 겠다. 황금만능주의에 휩싸인 채, 대중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경멸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비난하기보다는 다소 비켜서서 블랙유머를 전파한다. 진한 교훈이나 내세워 자랑하고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감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내려다 보는 것이 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더불어 마냥 유쾌한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묘미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가상의 세계에서 다른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비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어쩌면 그렇게 비틀린 심사를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뒤 겪게 되는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흑소소설>은 하나하나의 단편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개별적으로 보기에는 무리인 것들도 있다. <최종심사>나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은 기본적인 등장인물들이 비슷하다. 책 전체 목차에서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그 사이에 등장하는 단편들은 이것들 속에 등장하는 단편들이 아닐까, 하는 망상도 들게 한다. 반전의 묘미는 크지 않지만, 이런 소소한 궁금증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일본 작가라고는 하나,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읽는 나로서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서, 이 작품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이 작품 자체만으로써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팬이 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전체적인 평가를 해보자면, 쉬이 여길 성질의 작품은 아닐 듯 하다. <흑소소설> 한 권만으로 따져 보면 박민규나 성석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으나, 박민규보다는 구성력이 뛰어나고 덜 황당하며, 성석제보다는 가독성이 좋고 덜 산만한 점이 마음에 든다. 약간의 텁텁함과 비릿함이 입안을 감돌지만, 이 책 한 권으로 깨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