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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그 한 시간 반의 공백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K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어젯밤 아내와의 전야제에서 K가 아내의 몸을 냉동된 시체를 만지듯 생소하게 느낀 것은 그 한 시간 반 사이의 불가사의한 공백 때문이 아닐까. 또한 오늘 아침,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현상들의 잇따른 출몰도 어젯밤 그 한 시간 반의 미스터리 때문이 아닐까.
7시에 울리는 알람소리에 잠에서 깬 K는 낯익은 공간, 낯익은 풍경, 낯익은 사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오늘이 주말이라는 것과 주말에 알람이 울린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이 평소 쓰던 스킨이 바뀌어 있음을 깨닫고, 주변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낯익던 모든 것들에게서 낯설음을 느끼게 된 K는 어제 저녁에 소실된 기억이 있음을 깨닫고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K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강아지가 적의를 보이며 K를 낯선 침입자 취급을 한 것처럼 낯익은 아내와 낯익은 딸, 낯익은 휴일 아침의 모든 풍경이 한 순간 갑자기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꾸미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와 태평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일치단결해 K를 속이고 K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딸과 아내를 잘 이끌어나가는 모범적인 가장이며,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며, 주말마다 미사에 참석하는 신앙인이며, 태어나서 한번도 거짓말을 해보지 않은 인간인 이 작품의 주인공인 K는 자신에게 맞는 틀과 사회에 맞춰진 배역에 충실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현대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런 K는 어느 날 집안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자신을 물고, 아내에게서 살의와 같은 낯섬을 느끼게 됩니다. 익숙한 것들이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을 느끼며 사실 낯설게 된 것은 주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에서 K는 마네킹으로 위장한 사람을 보며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도 하고, 마치 가면무도회와 같은 사람들의 관계를 보며 충격을 받기도 하며, 결국에는 자신의 견고하던 삶이 진실된 삶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리타분하고 따분할 줄 알았던 최인호 작가의 책은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보는 듯 한 속도감 있는 이야기 진행과 대단히 감각적이면서도 세세한 묘사, 그리고 유머러스한 문체를 보여줍니다. 갑자기 주변 모든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는 K. 그리고 그 K가 보는 낯익지만 낯선 주변 사람들을 묘사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속에 담긴 최인호 작가의 의도를 곰곰히 생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온갖 것들을 풍자하는 유머러스함에는 웃음을 짓기도 했고, 선정적인 내용에서는 약간의 흥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최인호 작가가 속에 담은 이야기를 자세히 파악했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겠지만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여 이 책에서 느낀 것이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진의인지 확신할 수 없는 점은 아쉽기도 합니다. 무언가 해설이 나와있을까 싶어서 후기를 읽었지만 소설가들이 적은 후기여서 그런지 소설 본편보다 어려운 후기에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최인호 작가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떠오른 책이 마이조 오타로(舞城王太郞)의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好き好き大好き超愛してる)라는 책 안에 담긴 '드림홀 인 마이 브레인'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최인호 작가는 이 책에서 K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낯설어진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는 이야기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지만 마이조 오타로는 '드림홀 인 마이 브레인'에서 꿈을 꾸고, 꿈에 갇히고, 꿈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꿈이 있고,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것으로 인해 다른사람이 된다 = 성장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두 작가 모두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어려운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또 다른 나'를 통하여 '성장'을 표현했다는 부분이나 유머러스하면서도 성적인 표현력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인호 작가의 소설이 더 정돈된 느낌인 반면,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은 과격하고, 성적이면서도 거친, 젊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줬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가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지만 사실 마무리는 아쉬웠습니다. 한 편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처럼 진행되어 갔지만 마무리는 다소 뻔한, 이미 다른 책에서도 많이 다루어진 소재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죠. 그것에 더하여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워레인저'나 '세일러문' 같은 소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돈된 분위기던 이 소설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듯한, 거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을 책인듯 합니다. 문장 자체는 재미있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지만 다소 어렵게도 느껴질 수 있는 책이라 쉽게 추천하기는 힘드네요.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출처 : http://tlqtown.blogspo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