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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2년 7월
평점 :
- P. 616, 셋째 문단: “문명의 이기가 ~~ 그러나 논의가 명료하지 않다”
P. 617, 둘째 문단: “후반부를 정확히 번역해보려고 ~~ 논의가 되어야 한다”
- 저자는 ‘정(鼎)’괘에 대한 정이천의 해설에 대해, 이천의 해설 내용이 “명료하지 않다”, “명료한 개념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송유의 페단티즘의 한 유폐에 불과하다”고 까지 혹평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오독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감히 오독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 첫째 이유: 원문 ‘曰制器, 取於象也’(P. 615)를 저자는 “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에서 취한 것이라 말하곤 한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괘의 상을 먼저 보고서 힌트를 얻어 세발솥(鼎)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바로 뒤의 문장 “괘가 실제의 그릇보다 앞선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라는 문장과 모순이 된다. 그러니 논의가 명료하지 않다고 여기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러운 사실을 왜곡하는 비합리적인 태도인데도 이렇게 해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이를 바로잡으려는 이천의 의도와도 배치되는 해석이다.
- 둘째 이유: 저자가 ‘상(象)’의 개념을 ‘괘의 상’만으로 한정하기 때문인 듯하다. 상은 ‘괘상’ 만이 있는 게 아니라 ‘물체의 상’도 있으며,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여 문맥이 이해되지 않았나 싶다.
- 대안; ‘曰制器, 取於象也’를 “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을 취하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라고 해석하면(허사 ‘於’는 ‘에서’ 대신에 ‘을’로도 읽을 수가 있다), 괘와 상의 선후 문제 자체가 해소 되기에, ‘상’이 ‘그릇’보다 선행한다는 모순도 해결된다. 아울러 이때의 ‘상’은 ‘괘상’이 아니라 ‘물체의 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면, 문장 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제작된 물체(器)는 일정 공간을 점유하며 형상(象)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게 바로 “그릇을 제작하는 것은 그 상을 취하는 것”의 의미다. 이리 해석해야만 617쪽의 마지막 문장에 있는 ‘인위’나 ‘자연’ 관련 담론도 문맥이 일관되며 매끄럽게 이해된다. 물체(器)의 형상을 결정할 때는, 그 형태가 사용하기에 적합해야 한다(形制如是則可用). 이천은 '형태가 기능을 결정한다'는 20세기의 구호를 이미 선취하고 있다! ‘솥(鼎)’을 만들 때 세 발로 하면 바닥이 평탄하지 않아도 솥이 기우뚱거리지 않지만, 네 발로 하면 바닥이 평탄하지 않을 때는 솥이 기우뚱거리게 되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象의 측면: 중력과 역학의 원리). 또한, 삶을 재료를 담는 그릇 부분을 아래에 두고 위에서 불을 때면, 불기가 위로만 가기 때문에 삶아질 수가 없다(義의 측면; 불은 위로 향하고 물은 아래로 향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이치). 그러니 익힐 부분은 위로하고 불을 피울 공간을 다리를 이용하여 아래에 마련할 수밖에 없다. 정(鼎; 세발솥)이 그 모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게 바로 “정괘가 성립하게 된 소이연을 말하자면, 그 상에서 취한 바도 있고 또 그 의에서 취한 바도 있다”는 뜻이다(P. 615, 하단 문단).
- 즉, 그릇을 만드는 건 사람의 일로서 인위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자연의 순리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게 바로 “인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워야 한다(”此非人爲, 自然也)”의 의미다.
- 저자에게 물(鼎)의 상 개념이 없으니 괘와 상에 관한 담론 중에 갑자기 ‘인위’와 ‘자연’이 등장하는 게 엉뚱하게 느껴지고, 정괘의 소이연인 자연 담론이(自然也) 해석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정확히 번역해보려고 자세한 주의를 기울였으나 결코 그 뜻이 정확하게 우리에게(정확히는 저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하며, ‘이천’이 “명료한 개념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거라며 ‘이천’만을 탓하고 있다.
- 616쪽 셋째 문단 첫 부분 “그렇다면 괘가 만들어지는 ~~ 만들어졌다고 할 것인가?”는 원문에 “왈(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질문 역시 누군가의 의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상’과 ‘괘’의 선후 문제나 '정(鼎)이 자연의 상이냐 인위냐'라는 질문들은, 그 당시 ‘이천’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담론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대해 ‘이천’이 평소의 ‘격물치지’적 관점에서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소한 페단티즘이 아니고 학인의 치열한 격물치지적 자세다!
- 617쪽 첫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615쪽 셋째 문단의 “정괘가 성립하게 된 소이연을 말하자면, 그 상(象)에서 취한 바도 있고 또 그 의(義)에서 취한 바도 있다‘는 문장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부분이다.
- ’이천‘은 저자가 그리 가볍게 폄하 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 ’역‘은 기본적으로 ’기호‘를 다루는 책이기에, 역에 관한 저자의 기호학적 담론을 기대했었는데 전무하여 매우 아쉽다(저자가 다방면으로 매우 박식하다는 걸 알기에). 저자는 음과 양 두 ’효‘를 ’심볼‘이라고 표현하는데, 퍼스의 기호이론에 따르면 ’심볼‘ 대신 ’아이콘‘이 적합하다. ’효‘와 ’괘‘ 및 ’효사‘ 등은 기호적으로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퍼스의 기호이론에 따라 ’아이콘‘과 ’인덱스‘ 및 ’심볼‘등으로 구분하여 접근하면, ’상(象‘)과 ’괘‘및 ’사‘에 관한 설명이 기호의 위계에 따라 설명될 수도 있어 훨씬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듯하고, ’역‘을 기호이론으로 해석하려는 논문들도 국내에 이미 많이 있기에 의아하기도 하다. 저자는 국내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