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 음악의 연주 분석 작품의 해석 세아 이운형 문화재단 총서 6
음악미학연구회 엮음, 오희숙.이혜진 책임편집 / 음악세계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장 로렌스 크레이머의 글:

p.80 위 여섯째 줄: ‘신비한 직관은 그 자체로 공허함으로 들어난다는 문장은, 앞 문장 ‘~ 사람들이 유념해야 하는 침묵의 명령 ~’과 뒤 문장 초월적 침묵은 스스로 말할 수는 있기에 완전한 말 없음은 아니다라는 문장들과 맥락상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공허함의 원본에서의 용어가 emptiness였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그렇다면 공허함보다는 공성(空性)이 적합하며, 이래야 맥락도 맞게 된다. 불교나 선 명상 혹은 심리학 분야에서는 emptiness를 공성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성은 언어와 개념 혹은 분석적 사고의 특징인 분절성과 제한성을 부정하는 무 분절 무규정 성을 뜻하고, 비교 분석되어 제한적으로 규정된 언어와 개념이 아니기에, 분절 이전의 모든 걸 다 포함할 수 있어 부정에 의한 공허함이 아니라 충만함을 의미한다(텅 빈 충만). 저자도 케노시스 담론 혹은 아포페틱 진술은 무효 혹은 부정의 관계에 의해 단순히 비어있게 될 위험회피하고 충만함과 귀인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p. 77. 아래 다섯째 줄 ~ p. 78 위 넷째 줄). 그래서 음악은 제한적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엄밀하게는 해석이 아닌 그저 느끼는 대로 즐길뿐!, p. 84, 위 열째 줄), 이게 바로 입체화법(p. 83, 위 첫째 줄)이고 말 하지 않는 사유; 아포페틱 담론(p. 74; 역주)이며, ‘음악의 고유한 양식(p. 78 위 열 째줄)일게다.

물론 언어의 벽(형용할 수 없는 것)에서 온갖 의미가 상실된 상태를 넘지 못하고 단지 무질서와 허무만을 느끼는 경우라면(p. 79; 둘째 문단, 호프만스탈의 찬도스경. 유사한 예;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다가 두려움과 부조리 및 구토를 느끼는 로캉탱) emptiness공허함으로 번역 하는게 맞지만, 언어의 벽을 넘어 공허함이 아닌 충만함을 느끼는 경우(예술 분야나 선불교 등)에는 emptiness충만함으로 번역해야 적절하다. (저자에 의해 인용된 찬도스경의 언급은 일부분뿐이어서 지나치게 부정적이지만, 호프만스탈의 저서 전체적인 맥락에 의하면 찬도스경의 상태는 완전한 허무와 공허함은 아니고 이미 충만함에로의 첫발을 디딘 상태로서 로캉탱의 상태와는 다르다. 로캉탱이 언어의 벽에 올라앉아 있는 거라면, 찬도스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벽 너머로 막 뛰어내린 상태랄까? 찬도스경의 눈에는 이미 성속과 미추가 분리되지 않기 시작했다. 전연 경험한 적 없는 상태라서 혼란스럽게 느껴질 뿐.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불가에서는 스승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특히 불가에서는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공 속에 색이 있고 색 속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바, 이는 언어 너머에 혼돈이 있는게 아니고 질서정연한 화엄 세상이 있다는 의미다(p. 80, 아래 여덟째 줄; ‘피타고라스 유형’. 호프만스탈의 번역본에는 음악과 대수학처럼’, p. 118, 위 열한 번째 줄), 분석적 사고가 특성인 서양과는 달리 종합적 사고가 특성인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언어 너머의 충만함을 간파했으리라.

(출판 관계자께: 혹시 emptiness가 아니라면 리뷰는 삭제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