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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죽지 않는다 - The Gifted Nobless Club 19
이슬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하드 보일드와 판타지의 만남.  

책의 머리말에서도 이렇게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대부분 화려한 마법이나 무협의 경계를 넘나드는 검술로 과장되기 쉬운 판타지라는 세계와, 철저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서술하는 하드보일드의 결합. 마치 마른 오징어와 김치의 조합처럼 생경맞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껏 그런 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관심을 갖고 읽어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본 국내에서 발간된 추리 소설 중 가장 재미있다. 

얀 트로닉의 세계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단, 다른 요소보다는 오직 두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판타지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 가지는 기프트라는,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능력. 다른 하나는 마법, 인간이 스스로 개발한 능력. 두 능력 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주 강력한 권능이다. 이 두 능력을 제외하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르가 거닐던 시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시대로 보인다. 셜록 홈즈와 에르큘 포와르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범죄와 법과 처벌은 존재하며, 주인공 얀 트로닉은 그 범죄를 막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탐정이다.

'탐정은 죽지 않는다'의 장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대부분의 판타지에서는 그저 구색 맞추기를 위해 그 세계가 차용되곤 한다. 말하자면, 그냥 모든 판타지에 마법이 나오니까 내 글에도 마법을 써야지, 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기프트와 마법, 두 강력한 권능은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동인이자 근원이다. 단순히 판타지라는 세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이 전체 스토리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실에서 보는 범죄가 아닌, 색다른 이유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와 그 해결 방식을 구경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다.

또한 글의 진행과 마무리가 화끈하다는 점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몸으로 직접 뛰며 다소의 무력이라도 불사하며 해결하는 탐정이라는 컨셉은 어느새 하드보일드의 특징처럼 되어버릴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하드보일드를 쓰게 될 경우, 결국 궁극적인 대결 자체는 몸이 아닌 머리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몸을 써봤자 중간중간 진행하는 과정이고, 그나마 화기의 위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판타지라는 특성을 살려, 아예 중화기는 책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해봤자 크로스보우 정도이다. 오히려 마법과 기프트 능력이 훨씬 강력한 무기이다. 그럼으로써 몸으로 부딪치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하드보일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특히 액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최종 보스와 대결하는 느낌을 주는 마지막 씬이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이른바 모든 사건의 근원, 악의 축이 직접 탐정을 처리하러 오는 것은, 마법이라는 권능이 있기에 가능한 스토리 구성이 아니었을까.

사건의 진행 역시 간결하고 무난하다. 적당히 단서를 던지며 진행되는 글은 아주 간결한 문체로 절제되어 표현되며, 글을 읽는 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건의 실타래가 풀릴수록 밝혀지는 이야기들 역시 작가의 공들인 구성의 흔적이 묻어난다. 단순히 탐정 소설로만 보아도 다른 소설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책이다. 

얀 트로닉의 다른 사건을, 조용히 펍만 지킨 일레느가 보다 활약하는 모습을, 에이레네가 견습 탐정으로 사무소에서 일하는 모습을, 좀더 보고 싶은 것은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바람이리라.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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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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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발간된 추리 소설 자체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느낌이다. 

우선 너무나도 단조롭고 상투적인 문체가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관습적인 문장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해서 읽다 보면 몰입에 방해를 줄 정도다. 게다가 재기 넘치거나 아름다운 문장도 거의 없어, 그저 사건을 전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사용한 듯한 기분이다. 심지어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마저도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본 듯한 흔한 이름들이라 이러한 기분을 더욱 진하게 한다. (크리스, 라일라, 패트릭 등등..) 문학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헐리우드 시나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또한 추리소설답지 않게 전지적 시점을 사용한 것도 몰입에 상당히 방해를 준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의 경우 직접적인 심리 묘사는 최대한 피하고, 간접적인 인물의 묘사 등을 통해 심리를 조금씩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악의 추억'에서는 심리를 그냥 직접적으로 써버린다. 그것도 한 인물의 시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건 전개 도중 거의 모든 인물의 심리를 서술해버리기 때문에, 긴장감이 상당히 떨어지고 몰입감이 떨어진다. 딱 잘라 말해서 읽는 재미가 너무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은 글쓴이와 독자 간의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얼마나 많은 패를 갖고 있다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느냐. 그런데 대부분의 패를 공개해버리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가장 중요한 패를 하나 들고 있다고는 해도, 그걸 공개하는 건 결국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시간까지 무슨 의욕을 가지고 이 단조로운 문장을 읽어내려 가라는 말인가?

결정적으로 사건 자체가 식상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라는 점이 가장 문제다. 기억을 잃어버려 이중 인격으로 행동하는 살인자? 물론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 자체는 새롭게 짰지만, 기본 모티브 자체가 굉장히 익숙하다. 가뜩이나 문체도 단조롭고 네이밍 역시 눈에 익으며 심리 묘사도 직설적이라 긴장감이 떨어지는데, 핵심 사건 자체도 이처럼 흔하디흔한 모티브를 울궈먹었으니 재미가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데니스와 크리스가 동일 인물이라는 마지막 반전을 통해 재미를 주려 했지만, 그까지 가는 과정이 지루하기 짝이 없고 그 반전 역시 흔하디흔해 진작부터 예측이 가능할 정도다. 이런데 읽을 맛이 나겠는가...

최소한 끝까지 읽긴 했기에 별점을 한 개 준다. 한 마디로 말해 책값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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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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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의 소설 이래로, 장르소설이 아닌 소설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건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모텔이라는 곳은 정말 외설적인 장소다. 쉬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더 강할 뿐, 결코 머무르는 숙소가 될 수는 없다. 그 모텔을 전전하는 주인공의 상황은, 이 넓고 넓은 도시에서 머무를 곳 하나 없는 그 고독 자체다. 다만, 와조라는 귀여운 개 한 마리 덕택에 고독에 파묻히는 대신, 고독 속에서 소통을 시도하기 위해 애쓴다. 그 소통의 수단이 바로 편지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소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편지라는 아날로그적 소통을 시도하지만, 도무지 성공하질 못한다. 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번호로 기억하는 주인공의 디지털적 사고와 맞물려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소박한 소통의 시도가 절망과 오기 사이에서 방황할 때, 주인공은 한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작가이자 장사꾼이다. 즉, 자신이 쓴 책을 직접 판다. 이 상황 자체가 매우 재미있다. 책에서도 말하듯, 글쟁이들은 워낙 수줍은 사람들이라 자신이 쓴 책을 직접 판다는 건 차마 낯뜨거워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작가는 상상했다. 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발상 자체가 대단히 신선하고 재미있다. 나도 한번 책을 직접 써서,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로. 
 책이라는 것 역시 작가가 독자와 소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렇기에 주인공과 여자,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작가와, 편지를 통해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여행자. 두 사람은 개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죽어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선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1차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엔딩 직전의 차가운 현실을 직면하면 마음은 더욱 차가워진다. 결국 작가는 소통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렇게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상황에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갑자기 식스 센스를 능가하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이 훈훈함이란! 그야말로 지금까지 언급해왔던 그 고독과 절망과 단절의 아픔을 모두 씻어버릴 만큼 훈훈하다. 가히 판타지에 가까울 만큼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는 것은 사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이 정말 좋다. 이렇게 서로 소통하기 때문에, 서로를 통해 자신을 채워나가기에, 우리는 이 힘든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거니까.
 책을 다 덮고 나니,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장은진이라는 작가에게, 고맙다고.
 나와 소통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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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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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강력한 재산이다. 인간은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이렇게 타인과 소통함에 있어, 외모의 중요성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심하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외모에 집착한다. 상대적으로 능력을 높게 평가받는 남자보다도, 여자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이 21세기의 한국이라는 시공간은, 못생긴 외모를 지닌 여자에게는 지옥일 뿐이다.  

마이너한 것에 관심을 표해왔던 박민규의 이번 작품은 바로 그 못생긴 외모를 지닌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부 한 장과 뼈 몇 조각에 불과한 그녀의 얼굴은, 피부 한 장을 벗겨내면 아무 의미도 없을 그 얼굴은, 그녀의 그 피부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변형시켜 버릴 만큼 그녀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그녀의 성격과, 습관과, 행동 방식과, 나아가서 결국 인생 자체가 모두 바뀌어 버린다. 그녀의 못생긴 얼굴, 그 하나 때문에. 적어도 현대 한국 사회라는 이곳에서, 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가치를 누리는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과욕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믿기 힘든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수십번을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그녀 자신에게 수십번은 되물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이 책은 "못생긴 여자의 사랑", 이 짧은 구문이 품고 있는 그 헤아릴 수 없는 눈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민규의 시선은 담담하다. 그는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못생긴 여자가 감당해야 할 그 모든 것들을 차분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서술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슬픔은 더욱 진하게 전해진다.  

추함을 죄로 여기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아니 누려야만 하는 최소한의 가치가 있다. 박민규는 그녀에게도 그것이 주어졌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녀가 주인공을, 요한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아니, 바꿔 말하면 주인공이, 요한이 그녀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그를 통해, 어느샌가 이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며 하루에도 수십번 추함을 단죄하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녀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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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에서 2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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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책들 중, 검은 방 이상가는 작품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신세계에서'를 읽고 솔직히 정말 놀랐다.

인간들에게 초능력, 흔히 말하는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대답과도 같은 소설이다. 그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소수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 그 공간 속에 숨어 있는 비밀.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의 구성이 정말 압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시 유스케는 정말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능 하나는 대단한 것 같다. 일본에서 이 정도의 'SF'를 읽게 될 줄은 몰랐고, 그 작가가 기시 유스케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전체적으로 글이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매끄럽다. 후반부의 요괴쥐들과의 전쟁 장면이나, 악귀와의 싸움 장면 등, 때로는 장엄하고 떄로는 긴박감이 넘치는 등 순간순간 변화하는 서술이 일품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이 유토피아를 탄생시켰고, 그 이면에 숨은 비밀은 무엇인가 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 과정 역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 책의 재미는 그것만이 아니다. 1반에 속한 5명의 소년소녀들이 어린 시절을 공유하며 서로 쌓아나가는 추억들. 결국 그 모든 것이 배드엔딩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만은 찬란하게 빛나고 생명력이 약동한다. 마치 스티븐 킹의 '그것'에서 6명의 아이들이 어울리는 그 모습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 아이들이 공부하고, 놀고, 슬퍼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그 순간순간마다 넘쳐나는 사람 냄새, 그게 정말 좋았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SF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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