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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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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정보화 시대"이다. 인터넷이라는 혁신적 매체를 통해  정보의 공유도 빨라지고, 정보를 얻기도 쉬워진다. 바꿔 말하면, 정보를 은폐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예전처럼 기자가 발로 기사 하나 써서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거에는 얘기가 달랐다. 신문조차도 없고 사람들간의 입소문만이 정보 공유의 수단의 전부였을 때, 정보 은폐는 단지 몇몇 사람의 입만 막으면 가능했다. 마을을 위해 살인조차도 숨겨지고 죄 없는 자에게 죄가 씌워지며 평범한 소녀는 바보가 된다.
괴로움을 쓰라리게 겪어 본 자만이 다른 괴로움을 동정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불길한 일의 시작이 되었다며 모두의 원한을 사는 가가 님은, 바보라는 이름을 낙인처럼 갖고 있지만 결코 바보가 아닌 호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고, 글씨를 가르치고, 셈을 가르친다. 그리고 바보의 호가 아닌, 방향의 호라는 이름을 준다.

그러나 글의 전개는 편집자의 표현 그대로 고통스럽다.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번의 이익을 위해 제거당한다. 너무도 건조하고, 담담하게 죽어간다.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갔다. 죽음이라는 것을 대면해 본 적이 없어 그 슬픔을 알지도 못하는 아홉 살 난 꼬마 아이가 된 것처럼. 별 실감 없이 그 많은 죽음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의 한 줄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났다.

"네 이름은 이제, 보물의 호[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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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que 판타스틱 1년 정기구독
판타스틱 편집부 엮음 / 페이퍼하우스(월간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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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리 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장르문학 전문 잡지를 발간한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이 판타스틱은 그야말로 징르 문학의 전도서라고 할 수 있다.

받을 것 하나 기대하지 않고 순수히 즐거운 것을 남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도서.

 

정기구독 신청은 그 용기에 대해 바치는 헌사이자,

재미있는 글들을 매달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폴 윌슨의 다이디 타운,

배명훈의 마구로,

코니 윌리스의 디벙커는 귀신을 믿지 않아,

조지 R.R. 마틴의 샌드킹,

등등...

 

모두 이 책이 아니었으면 접할 수 없었을 명작이다.

지금처럼만,

꾸준히 책을 계속 내어주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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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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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_~

 

추리, 라는 장르는 꼭 탐정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리저리 던져져 있던 사실의 조각들이 합쳐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면 - 그것이 독자에 의해서건, 혹은 탐정에 의해서건 - 그것만으로 추리라고 부를 수 있다. 탐정이 나오고 그 조수가 탐정의 유능한 추리를 - 알아듣지는 못하는 채로 - 기록하고 유능한 독자가 조수가 받아적은 단서들을 보고 탐정의 머릿속을 알아내는 방식만으로 추리를 한정지으려 하는 건 정말정말! 아까운 일이다. 물론 저런 방식의 추리가 주는 재미도 있지만, 좀더 다양한 방식의 추리가 있을 수 있고, 그것들이 다양한 방식의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형식의 추리 소설이 가장 많은 이유는, 조수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전개된다는 장점 때문이다. 비겁하게도 조수가 보지 못한 사실로 추리해내는 탐정이 가끔씩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조수와 탐정은 똑같은 현장을 관찰하고 똑같은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추리 소설은 철저하게 그 조수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최후에 탐정이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그러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라고 말할 때까지, 모든 견해는 조수의 견해, 혹은 말을 통해 전달되는 탐정의 견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가 조수에게 이입하게 하는 것, 그것이 추리 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추리 소설이 추리하는 문제는 바로 '살인 사건'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행위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든 - 김전일씨가 사는 세계는 다르지만 - 사건이기도 하고, 인간 관계가 살인으로 이르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스토리가 따라붙을 수도 있다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독자가 탐정과 조수에게 이입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대부분 '인간적인' 캐릭터에 호감을 지닌다. 인간에 대해 애정을 보이고, 불의에 분노하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라는 것은, 정말 죽일 놈을 죽였든 했든, 어쨌든 "한 타자의 목숨을 다른 타자가 앗아갔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는 생각보다도 매우 커서, 심지어 정당방위였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일단은 "나쁜 놈"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의 심정은 이해하오. 하지만 그런 당신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소."

  그리고 "나쁜 놈"을 쫓는 조수는 "인간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피해자의 앞에서 눈물이라도 떨구면 더할 나위가 없다. 아주 상투적이고 뻔한 얘기지만, '''사람 죽인 사람'을 쫓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 즉, 살인 사건에 분개해 사건을 파헤치려 눈에 불을 켠 탐정은 (진부하긴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매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탐정의 활약을 모조리 읽어치운 독자는, 권선징악에 행복해하며 베개에 머리를 뉘일 수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말하기에 앞서 이렇게 진부한 얘기를 꺼내놓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 소설은 공감하도록 요구하나, 공감하려는 찰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는 도저히 공감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는 그 공감하라고 강요하는 의도가 의심스러워진다.

  그것이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이다.

  발상은 정말 신선하다. 정말 웬만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발상이다. 그 발상을 둘러싼 트릭과 메세지 등도 거의 완벽에 가깝다. "겉으로는 기하학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다." 이 메세지는 단 한 줄로 이 사건의 진실을 함축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과, 지극히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 간결하지만 정확한 문장을 통해 흘러나온다. 매력적이다. (그 현실적인 흐름과, 현실적인 캐릭터들과, 현실적인 사건들 탓에 마지막의 비현실적이기조차 한 반전이 더욱 충격적이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전모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진부하지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 배후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 탐정과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입장. 그 말에 자연스레 동감하게 된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정말 재미있었다"며 한숨을 내쉬고 나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작가가 깔아놓은 비현실적인 정답은, 살인을 위한 또다른 살인이다. 이시가미는 그렇게 함으로써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불가피한 경우가 생긴다면 - 이 이야기에서처럼, 유가와와 같은 자가 수수께끼를 풀어버렸을 경우 - 자신이 대신 죄를 뒤집어쓸 각오를 했다. 죽은 사람 하나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 없는 사람의 자리를 '살 의지가 없는 사람'인 노숙자로 메꾸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노숙자를 살해해, 그 죽은 사람으로 위장했다.

  물론 비현실적이지만,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반전으로 인한 충격과 비교하자면 비현실성을 비난하기보다도 발상에 박수를 쳐줄 만하다. 그리고 그 전까지의 사건들과 캐릭터들이 대단히 현실적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 범인과 주인공 두 사람을 너무 천재로 치켜세우는 부분은 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 그 반전 역시 현실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추리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언제일까? 물론 지금까지의 수수께끼가 모두 풀리는 그 순간이다. 조각나 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결합하고, 결국 그 사실이 범인을 지목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순간을 보기 위해 추리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는 그것만큼이나, 혹은 그것보다도 더욱 사람을 끌어당기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 범인이 "왜 그랬는가" 이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용납될 수 없는 행위.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가. 얼마나 깊고 큰 미움이 있었기에, 혹은 간절함이 있었기에, '사람의 목숨을 끊는다'는 극단적인 행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온갖 감정들이 폭발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극단을 치닫는 인간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독자는 범인을 증오하게 될 수도 있고, 범인을 동정하게 될 수도 있고, 범인에게 공감할 수도 있다. 탐정과 조수에게 그대로 이입한 채로. 탐정이 범인을 증오하며 "너는 사형대로 갈 것이다" 라고 말하면 박수를 치고 끝낼 수 있고, 탐정이 범인에게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 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을 수 있고, 범인이 탈출하고 탐정이 "제기랄!" 하면 이 무능한 놈! 하며 책을 던질 수 있고, "이런 짓까지 하다니 역시 난 죽을 놈이야" 하며 극단까지 몰린 범인이 자살하려 하면 탐정이 "흐흐흐.. 그래 넌 죽어야 해.." 하며 방관... 아무튼 범인에 대한 탐정의 입장에 "공감하며" 책을 덮는 것이 추리 소설의 수순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왜 그랬는가"에 대한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 깊고도 넓은 사랑 때문에 살 의지를 잃은 노숙자를 죽여 그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베푼 이시가미에 대해, 물론 잘못된 일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위해, 다른 누군가(아무 관계없는)를 죽일 정도로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모두 대단하다고 느끼며 연민을 베푼다.

  조금 유치하게 말해보겠다.

  "그럼 노숙자는 죽여도 되나?"

  여기서 노숙자의 생존권에 대해 주장할 생각은 없다. 확실한 것은 유가와 역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거야." 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즉, 작가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시가미가 한 일을 냉정하게 돌이켜보자. 예를 들어보겠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사람을 죽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나가던 다른 사람을 죽여서 그 사람 시체로 위장해놓고, 들키지 않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들켜버리자 그냥 자기가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나섰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의 사랑이 대단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아버지의 사랑이 대단하긴 하다. 아들을 위해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러나 네이버에 만약 저 기사가 떴다면? 장담하건대 리플의 90%는 "미친 놈 아냐?" 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에 대해 "아버지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구나. 아들을 저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놀라운 것은 읽다 보면 작가가 요구하는 입장에 대해 공감할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정말 너무나도 놀랍고 깊은 사랑이다, 라고 잠깐 공감했다가,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한참 생각해보고 고개를 저었을 정도니까. 그만큼 잘 써지고, 충격적인 반전과 이어지는 부분이라 더욱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적어도 '놀랍고 깊은 사랑' 이라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까지는 사실이니까. 잘못된 일이다. 라는 말도 모두들 공감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할 것인가이다.  "잘못된 일이지만, 놀랍고 깊은 사랑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놀랍고 깊은 사랑이지만, 잘못된 일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는가, 그 점에 있어서 작가는 '놀랍고 깊은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 그것은, '틀린' 일이다.

  이시가미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 왜 그를 연민하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살인을 숨겨주기 위해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다. 차라리 스토킹을 하라. 스토킹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스토킹은 살인보다 나쁜 짓이 아니다. (읽다 보면 스토커로서의 이시가미는 살인자로서의 이시가미보다 더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다.)

  추리 소설은 감정보다는 이성에 의거해 진행된다. 그 이성의 핵심, 논리적인 트릭의 톱니바퀴가 추리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결정짓는다. 그래서 언뜻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는 논리의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톱니바퀴들을 구성하는 것은 강철로 된 날이 아니다. 이성적인 머리와 마찬가지로 펄떡이는 심장을 지닌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은, 마지막 순간 인간들의 이야기에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가 없다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만 빼고는,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추리 소설의 핵심은 트릭이다. 하지만 그 트릭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다. 사람 얘기를 할 때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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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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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글에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의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적인 추리 소설과 달리, 미야베 미유키는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됐나'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됐나, 또한 그 사건으로 한 사람이 얼마나 변화하게 되는가, 그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모방범은 그러한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범인, 범인의 친구, 피해자, 피해자의 가족, 피해자의 옆집 누나의 동생, 기자, 경찰, 경찰의 사돈의 팔촌... 등등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너무나도 재미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사람이 절실해지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피스"는 오히려 그 인물에 대한 관찰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 관찰은 작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읽는 우리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면, 피스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인간들에 대한 묘사는 피스라는 인간을 각각 한 조각씩 설명해준다. 퍼즐처럼 맞춰진 조각이 마지막에 완성되며 피스는 가면을 벗는다.

"나는 모방범이 아냐!"

그 마지막 한 마디는 십 년 동안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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