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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ㅣ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알쓸신잡"에 출연해서 알게 된 저자,
20대엔 건축학도로 서울대 공대 800명 동기생 중 유일한 여학생으로,
30대엔 미 MIT 도시계획 박사로,
40대엔 "타임"지가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인' 중 유일한 한국인으로,
50대엔 국회의원으로,
60대엔 TV와 라디오에 나와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
활동하는 김진애 씨의 별명은 '김진애너지'랍니다.
별명처럼 정말 자신이 맡은 일에 열정을 보이고, 활기차게 인생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해온 작업을 묶어서 책을 만들었는데요,
'도시 3부작'으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는 그중 첫 번째 책입니다.
12가지 '도시적' 콘셉트(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로 예찬, 대비로 통찰,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로 도시를 읽습니다.
12가지 도시적 콘셉트는 각 콘셉트마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을 맺어,
궁금한 내용을 펼쳐 읽으면 됩니다.
저는 그중에서 익명성, 기억과 기록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번 볼게요.

'도시란 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공간=익명성'이 도시의 근본적 속성입니다.
도시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저자는 '길'이라고 합니다.
도시의 가장 근본 조건인 '익명성'과 도시 공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길'이 만나면서
도시는 다채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길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도시에서 길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입니다.
'성'의 존재감이 준 후에야 길의 존재감이 커졌어요.
격자 도시의 역사를 알아보면 도시에서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광장 또한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길이 자연스럽게 생겼듯이 모일 곳이 필요했고,
유사시 군대를 꾸려야 했고, 권력은 세를 과시할 공간이 필요했으며,
상인들에게는 장이 설 곳이 필요했으니깐요.
광장은 공간감, 찬란함, 수많은 사람의 존재, 다양한 활동들의 체험 때문에 매혹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피가 흐르는 처절한 공간입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처형식과 갖은 마녀사냥이 행해졌던 공간이죠.
우리 도시에서 광장은 그리 환영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적어도 2002년 월드컵 전까지 말입니다.
일제의 도시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계획 광장들은 교통광장이거나 분수 광장이었을 뿐입니다.
광장은 '우리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강력히 통제된 공간'이었습니다.
광장 자체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광장 정신만큼은 활발했습니다.
광장 정신은 시민 정신이 됩니다. 진정한 시민의 탄생은 익명성으로부터 시작되니깐요.
도시 역시 도시적으로 도시답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마을, 성, 동네에서 이루었던 뿌리 공동체적인 개념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로
또 겁 많은 이방인들이 꾸려가는 도시적 공동체 개념을 상상해야 합니다.
건네는 인사와 말 한마디가 필요한 반면
서로 적절히 모른 척하고 서로 지나쳐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지켜야 할 공공의 약속은 엄격하게 지켜야 도시 공동체가 지속됩니다.
이런 역학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공간이 도시의 공공 영역, 그중에서도 길과 광장입니다.

'사실이 역사로 남는 게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 역사로 남는다.'
기록에 대해선 '남겨야 한다'라는 명분과 '지우고 싶다'라는 속마음 사이의
양가적인 감정에 빠집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기억은 물론, 아프고 절망스러운 기억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기록에 대한 생각이 컸고 관심도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공간의 기록'은 어떤 의미일까요?
'기념관, 박물관, 기록관, 미술관' 등의 전시와 저장 공간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문화 유적, 생가, 역사적 사건의 배경, 기념 조형물' 등의 공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도 쓰이고 있는 집과 사찰, 서원 등의 건축물과 동네, 도시 등을
보존하고 보전하고 복원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공간에 남은 흔적은 기억을 생생하게 만드는 힘, 현장의 아우라에서 나오는 감동,
그리고 나보다 더 오래가리라는 믿음에서 효과가 뚜렷합니다.
조선 시대 이전의 건물과 마을은 보존하고 복원할 대상이 되고,
근대의 건물과 동네는 보전과 재생으로 떠오르고, 아픈 역사의 현장들도 발굴해서
열심히 기억하고자 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이 시대의 공간을 어떻게 후대에 남기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없습니다.
당대에 아주 유명했던 건물들이 그냥 사라집니다.
궁리 끝에 서울시에서는 '미래 유산'이라는 제도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래 세대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
즉 건물, 거리, 광장, 식당, 나무 등등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 인간이 사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이 기억과 기록은 씨앗이 됩니다.
기록은 기억의 단초가 되고, 기억은 이야기의 원천이 됩니다.
기록이 풍부할수록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여럿이 또는 동시대인이 같이 공유하는
집합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시간을 뛰어넘는 집합 기억으로 이어집니다.
도시는 온전히 그러한 집합 기억의 풍요로운 저장소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타인이 풍겨오는 익명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며 나는 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조여 올 듯한 권력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왜 어떤 것은 기억하려 애쓰고 어떤 것은 지울 애쓸까?',
'가슴 뛰던 첫 경험의 떨림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문화를 체험하며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나는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으며 또 할 수 있을까?',
'공간에 심어진 무언의 메시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의 신에 가위눌리지 않고 살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인생을 살아갈수록 커지는 부패에의 유혹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나도 이방인의 신선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과 표에 속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방식의 변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는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도시에서 12가지 생각을 추출해서 도시와 연계해
이야기를 풀어쓴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살아가는 도시를 아무런 인식 없이 보고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도시가 이야기가 되면 더 알게 되고, 더 알고 싶어지고, 더 좋아하게 된답니다.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를 통해 내가 사는 도시를 아끼고,
도시를 탐험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고, 좋은 도시에 대한 바람도 키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