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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 2018년 4월
평점 :
국정농단의 국민적 공분이 한참이었던 2016년 말.
처참하게 무너진 현실을 뉴스를 통해서 한참 확인하던 시기.
이전까지는 오후 5시에 특별히 뉴스를 볼 일이 없었지만
그때는 뉴스라도 틀어놓지 않으면
황당하고 답답한 상황에 화병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했던 jtbc의 <정치부회의>.
뉴스를 쇼처럼 재미있게 전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는
이전에는 없었던 독특한 형식의 뉴스로
각기 다른 개성이 넘치는 반장들의 발제를 듣는
재미에 빠져 한동안 즐겨보았었다.
개그맨 뺨칠 정도로 끼가 넘치는 양반장과는 달리
금요 정다방을 운영하는 정반장, 정강현 기자는
감성적인 균형을 맞추며 무게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언젠가 9시 뉴스룸이 끝나고 하는 소셜라이브에
직접 출현해 정치부회의 뒷얘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때 정반장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일보에서 오랜 시간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문학, 음악 등 문화적인 감각을 키워오던 저자가
갑자기 jtbc로 발령이 나면서 '정치부회의' 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기자가 하루아침에 방송을 하게 되는 환경이
정말 황당하고 쉽지 않았겠지만 정반장은 잘 적응하여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 것이다.
사실 <소소한 책수다>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였던 터라
방송이 영 낯선 것은 아니었을테지만
그럼에도 TV 방송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을텐데
훌륭히 잘 적응을 하여
지금은 자연스러운 진행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만의 특기를 살려
'금요 정다방'이나 '한끼정치'와 같은
따뜻한 시선과 인간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코너를 만들어 그의 색깔을 입혀 진행하고 중이다.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는 그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소설집도 1권 있으니 이제는 작가라는 말도
어색하지 않은 그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사실상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첫 산문집이라고는 하지만 기자라는 역할에
익숙한 그이기에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회에 대한
연민과 고민, 공감의 시선이 깊게 묻어난다.
"사십대 초입에 서서 돌이켜보니, 내 삶을 흐르게 한 것은 결국 눈물이었다. 나는 슬퍼서, 기뻐서, 서러워서, 감격해서 울고 또 울면서 성장했다. 삶의 곡절마다 눈물로 출렁이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 눈물 덕분에 내 삶은 한껏 단단해졌다. 그러므로 내게 눈물은 단지 슬픔의 기호가 아닌 것이다. 조그맣게 자부하며 말하거니와, 눈물은 내 삶을 길러낸 거의 절대적인 자양분이었다. 나는 눈물로 자랐다."
---p.10~11 <책머리에> 中
제목이 이해는 되었지만 선뜻 와닿지 않았는데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이들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경험상으로도 그렇다.
삶의 구비구비 눈물을 흘리며 버티고 견디었던
그 경험은 타인의 상황에서도 역시 눈물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때나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이제는 그렇게 민망해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크게 4부로 구성했다. 1~3부는 연대기와는 무관하게 글을 독해하는 정서적 리듬을 고려해 배치한 글들이다. 그래서 가급적 1~3부를 순차적으로 읽기를 권하지만, 실은 아무페이지라도 펼쳐서 아무렇게나 읽더라도 무방한 것들이다.
다만, 4부에 관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4부의 타이틀 '시와 음악사이'는 푸른봄에서 운영했던 팟캐스트 <소소한 책수다> 속 코너명이다. 나는 그 팟캐스트의 공동 진행자로 1년 8개월 남짓 활동했는데, 당시 '시와 음악 사이'란 별도 코너를 꾸려었다. 그 코너에서 나는 시를 골라서 해설하고, 해당 시와 어울리는 음악을 선별해 틀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4부 '시와 음악 사이'에 담긴 글은 당시 진행했던 방송 스크립트를 토대로 했으되, 온전히 새로 작성한 산문이다. 4부에 담긴 글을 읽을 때는 각 시마다 짝지은 음악을 직접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p.13~14
아무리 문화부 기자였지만
이렇게 감성이 말랑말랑한 그에게
팩트를 전달하는 기자로서만의 생활은
힘들고 답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권의 산문집은 아마도 그런 답답한 공간에서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의 탈출구가 아니었나 싶다.
팩트와 대척점에 있는 소설까지 쓴 것 역시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잘난 팩트의 세계라면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게 세계의 진실이라면서, 보도 행위를 하는 게 내업이니까. 하지만 그 잘난 팩트의 세계가 지닌 치명적인 오류도 나는 안다. 팩트의 세계란, 감수성을 발라낸 앙상한 세계다. '잘 느끼는' 사람보다는 '잘 아는' 사람이 대접받는 곳이다. 그곳이 치명적인 이유는 '타인'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이 아파하는 걸 느끼는게 아니라, 그 아픔의 정확한 근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된 곳이 바로 팩트의 세계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잘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수록 더 따뜻한 세계가 되지 않을까. 우리 공동체에 고통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이 세계만큼 좋은 소설 작품도 없을 것이다." ---p108~109 <고통의 감수성에 대하여> 中
그런 좋은 소설 같은 세상을 꿈꾸며
그는 팩트의 세계에서 타인을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현직 기자이다 보니 글 속에는 현재진행형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사건들과 이슈들이 많이 나온다.
세월호 한가운데에서 취재를 담당했던 그였기에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무게감보다
그는 훨씬 더 큰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꽤 많은 페이지가 그 고통의 공감을 풀어내는 공간으로
되어 있지만 그 여백에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감정, 이야기들이 수북하다.
세월호 속에서 아이를 낳고 아빠가 된 그에게
공감의 고통은 세월과 함께 성장해버렸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해도 하기 힘든 그런 세상.
그 세상으로 들어와 그는 또다른 아픔을 느끼게 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의 관심사가
'시'와 '음악'으로 압축되는 것을 느낀다.
물론 팟캐스트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시와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나 호기심을 보면
단순히 뭔가 준비를 위한 것만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을 인터뷰하면서 시란 무엇인지,
시는 어떻게 써야하는지 등과 같은
그 스스로가 정말 궁금해하고 답을 찾고 싶어하는
질문들을 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나름의 시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할 때면
그는 시를 정말 사랑하고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시에는 의도적으로 생략된 언어의 구멍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시를 처음 읽을 때는 그 구멍이 다소 걸리적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하여 시를 읽다 보면 그 구멍에 오래 머물러 사색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발굴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이 발굴해놓은 새로운 말들이 가지런한 리듬으로 출렁일 때, 당신은 상투적인 일상에서 달아나는 체험을 할 것입니다. 시는 반복되는 일상에 느닷없이 주어지는 휴식같은 것입니다. 시를 읽는 순간이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스펙을 쌓기 위한 것도 아닌, 아무런 목적이 없는 무목적의 시간입니다. 오로지 나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오직 내 것인 시간. 그 사색의 시간이, 시에 있습니다."
---p.238~239 <시를 읽어야 할 이유> 中
기자라는 업을 삼고 있는 저자라서 그런지
보통의 산문집과는 글의 결이 좀 다르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장에
육하원칙까지는 아니지만 폐부를 찌르는 듯한 논리성,
여기에 솔직함과 따뜻한 감수성이 배어있다.
기자 출신의 작가는 많이 있지만
저자의 글은 또다른 색깔의 또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정치부 회의> 기자들은 바쁘다던데
언제 이렇게 글까지 썼을까.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속엣말을 내뱉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야근을 밥먹듯 하는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다듬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심지어는 지쳐가는 일상조차도 글로 뱉어내고야 만다.
"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이 봄날의 벚꽃처럼 보여서 나는 조금 들뜨기도 했는데, 방송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매몰차게 커튼을 다시 내리고 말았다.
그러곤 다시 시집을 펼쳤는데, 문득 시를 읽는 것이 무슨 노동처럼 느껴졌다. 시 읽기는 내게 거의 유일한 휴식이었는데. 방송이라는 목표를 향해 시를 노동하고 있는 내가, 나는 측은했다. 노동의 연장으로 시를 읽어야 한다면, 이따위 시가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시집을 덮어버렸다.
커튼을 다시 올리자 이러다 밤하늘이 주저앉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형광등 스위치를 내리고 오랫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밤하늘을 씻어 내리는 눈송이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몇 분쯤 흘렀을까. 나는 어떤 목적도 없는 시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p.190 <고독이라는 사치에 대하여> 中
아무리 좋은 것도 일로 다가오면 짐이 될 때가 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숙제처럼 해치워가는 요즘.
내가 지금 딱 이 상황이다.
다 덮어버리고 잠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저자 역시 같은 상황에 몰리고 있었던가 보다.
이렇게 고독한 휴식을 즐길 줄 아는 저자는
아마도 꽤 오랜 시간 글을 쓸 것 같다.
그때는 기자가 아닌 작가, 저자로서가 더 자연스러워지겠지.
비슷한 세대는 아니지만 꽤 많이 공감을 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과 기반도
그의 글이 가슴을 때리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시간층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글에서
나는 추억까지도 선물받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맑은 세계가 아닌 거칠고 투박한 세계를
맑고 투명하게 닦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그의 글을
그렇게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