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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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의 상실, 지인의 부재 앞에 놓인 살아남은 자의 삶...


   '우와 이 소설 대박입니다'라는 비토사마의 표현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읽기 시작한 이 작품은 와 정말 대박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스따일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취향, 스타일이란게 있는 한 건가 저도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쓸쓸하지만 처절하지 않고, 처연하지만 일상을 버리지 않는 쿨함도 동시에 보이는 캐릭터들이 총 출동하는 전형적인 일본 소설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삶의 핵심인 균형미가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잘 잡힌 내용앞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균형이 잡혀있는 내용이라 함은 이런거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어요. 너무 슬퍼요. 그런데 또 살아가요. 도저희 죽은 사람이 이해가 안되서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죠. 그런데 또 살아가요. 어쩌겠어요? 원망도 하고 추억도 하고 자책도 하지만 또 하루하루 살아요. 어쩔 때는 정신을 놓고 죽을 것만 같다가도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챙기며 살아가요. 어느날은 길을 걷다가 와르르 무너져 처절하게 울어요. 하지만 추스르고 일상을 돌아가요."


   이런 식이죠. 표제작인 중편 [환상의 빛] 뿐만 아니라 단편 [밤 벚꽃], [박쥐], [침대차] 모두 너무 가까운 가족이거나 혹은 알지만 그리 가깝지 않은 지인의 죽음앞에 놓인 살아남은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 현실적이다보니 오히려 환상적이예요.




 #2. 삶과 죽음의 경계, 그러나 산 사람은 일단 살아간다...


      어떤 면에서는 삶이란 참으로 구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또한 죽기 직전까지는 숭고한 노력입니다. 아무리 상실감이 크고 상처가 크더라도 하루만 멍하니 있으면 배가고파 미칠 것 같은 것이 인간이 아닐까요? 급히 라면을 끓여 찬밥까지 말아먹고는 자신을 보며 '허 참...'하고 허탈하게 헛웃음짓는 것이 인간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본질, 그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표제작 [환상의 빛]이 가장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주인공 유미코가 서간체로 이어가는 남편에 대한 고백, 또는 대화가 강하게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자살에 대한 감정정리가 도저히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재혼을 선택하는 유미코의 행동과 독백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멋진 완성이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문장만 발췌해 놓아도 유미코의 독백을 통해 삶의 다면적인 속성을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귀찮지만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에도 아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깝고 정겨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그만 황홀해질 때가 있습니다. 가깝고 정겨운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일까, 저에게는 이것저것 다 알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p14~15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 위에 회색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약간 등을 구부린 특유의 모습으로 혼자 묵묵히 이슥한 밤의 선로 위를 걷고 있는 당신의 뒤를 좇으면서 저는 열심히 그 마음속을 알려고 기를 썼습니다." p23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따라다니는 풍경에서, 소리에서, 냄새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제 가슴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햇볕이 쨍쟁 내리쬐는 한신 국도 서쪽으로 멀어져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별안간 애가 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아직 개찰구에 내내 서 있을 게 틀림없는 어머니한테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p40


"저는 와지마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바깥에 시선을 둔 채 죽어버린 당신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저 혼자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을 거는 당신은, 선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의 당신이었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가워져버리는 그 뒷모습에 말을 걸면, 저의 또 하나의 마음은 분명히 무엇가에 빠져들어 황홀해지는 신기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p46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p47


"아마가사키에 살았을 때는 쉴 새 없이 두리번두리번 움직였던 유이치의 눈이 부드럽고 차분해진 것을, 저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재혼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p56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시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p60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리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해 각별히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략) 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위태롭게 시들어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릅니다." p80


    아, 길다. 힘들다... 불화도 없던 남편의 자살로 충격도 크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은 허물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 와중에 재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삶을 이어갑니다. 산자는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살아갈 의욕이 막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삶을 지탱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재혼한 남편과 아이가 스스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어있었습니다. 떠나간 남편이 아닌 실제하는 존재가 이제 자신을 지탱해주고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자는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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