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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ㅣ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1.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뜻밖의 감동.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긴 제목의 책은 기본적으로 만화책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재형식으로 기고했던 4컷 만화와 저자의 짧은 글들을 엮어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예순의 대머리 아들이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어머니를 모시다가 요양소로 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일상을 담담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리고 감동적이게 그린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이 책이 저의 손에 들리기까지의 과정은 상당히 독특하고 이례적입니다. 일본에서 이렇다할 두각없이 지내던 무명 만화가가 자비를 들여 단행본을 출간하고 지역서점에 내놓았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가 늘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올리게 되는 성공스토리의 입지전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케이스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 아니라 그런 거 같습니다. 현대는 소비자의 소비패턴을 분석하고 감성을 자극할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준비에 의해 기획된 작품, 아니 상품이 자본의 힘으로 팔리는 시대니까요.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이 책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치매가 있는 노인 분들을 너무나 귀엽게 그렸습니다. 이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 참으로 재미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게다가 너무 귀엽게 그려진 저자의 어머니 '미쓰에'와 대머리 저자 '유이치'의 일상의 이야기가 가슴 따뜻하게 펼쳐집니다. 저자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찮고 족쇄처럼 여길만도 한데(물론 그런 실제적인 어려움은 굳이 그림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겠지만) 겸손하고 공손하게 어머니를 모십니다. 저자가 효자도 아니고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노령화 문제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과연 내 부모님을, 장인, 장모님을 잘 모실 여력이나 있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부모에게 잘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2. 일본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에 관계없이 원폭에 대지진에 상처받은 아픔이 묻어나는 이야기들
저자의 어머니 '미쓰에'씨는 원폭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입니다. 그리고 세대를 넘어 저자 '유이치'씨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습니다. 그 아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이 책 곳곳에서 뭍어납니다. 이 분들은 당연히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무겁기만 합니다. 대지진은 그렇다 치더라도 원폭 문제는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한국인으로써의 감정이 좋을리가 없습니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일원으로 바라보면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맙니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일본이라는 나라의 복잡한 관계를 떠올리자 이 책을 읽던 저는 자칫 길을 잃을 뻔 했습니다.
뜬금없이 '전쟁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습지만 그렇습니다. 전쟁은 물론 분쟁도 나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옵니다. 이해관계의 차이는 욕심에서 발현됩니다. 도덕적이고 선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국가는 안타깝게도 참으로 비도덕적입니다. 조그만 욕심들이 뭉쳐서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 거대한 덩어리가 충돌하면 큰 분쟁이 생깁니다. 누군가 명확하게 잘잘못을 가려줄 방법도 없습니다.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만 상처받고 아파하게 됩니다.
동일본 대지진은 참으로 무시무시했습니다. 아직도 이와테현은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합니다. 지금도 생선 썩은 냄새같은 것이 여전히 난다고 합니다. 산 아래까지 밀려들어온 커다란 선박을 기념으로 보관하자, 철거하자 의견이 분분하다가 선박을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는 유족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철거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한편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연일 관련 보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성금 모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직접 도우러 떠난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역사가 있는 나라를 이렇게 돕자고 나서는 이 나라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이를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한감정으로 극단적인 퍼포먼스까지 하는 극일단체들의 모습도 저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한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저렇게 분노속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항상 평화와 배려보다는 밟고 일어서고 차지하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단면이 떠올라 쓰라리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어려운 상황에 막닥뜨렸을 때, 어딘가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속성도 인간의 연약함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시한번 그 피해자가 내가 속한 대한민국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3. 늙는다는 것, 삶을 이어간다는 것의 아름다움
저는 아직도 늙는 것이 싫습니다. 그저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뛰어다녀도 피곤함도 모르는 아이이고 싶습니다. 뭔가 마음대로 못하고 내 한몸 추스리기도 힘들어지는 시기가 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찬찬히 읽다보니 나이가 드는 것도 꼭 나쁜 것 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때로는 어머니가 부럽기도 하다. 치매로 어머니 안에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셨으니까 치매에 걸리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p.195
치매는 정말 무섭고 생각하기 싫은 질병입니다만, 치매를 통해서 그리운 과거와 만나고 어린시절로 돌아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종종 만난다는 사실은 꼭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치매에 걸려서 꼭 만나고 싶은 존재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꽉 짜여진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행위의 일종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무기력한 어린 아이에서 청년으로, 장년으로 성장했다가 노년에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모습에서 인생의 수레바퀴를 떠올립니다. 돌아가다보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지요. 물론 도는 만큼 시간은 지나가 있지만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인생이, 여러분의 인생이 돌고 돕니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일로 수레바퀴가 부셔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무난하게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는 단순한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인생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책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만화라는 형식으로 접근하기 쉽게 풀어내었기 때문에 더욱 훌륭한 책입니다. 여러분도 귀여운 '미쓰에'씨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