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1. 잔잔하고 차분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긴장감이 넘치는 명작

 

   언젠가부터 TV를 통해 음악을 경연하는 프로그램이 오디션 프로그램과 함께 붐을 일으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마도 경연프로그램은 "나는 가수다"가, 오디션 프로그램은 "슈퍼스타K"가 시발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런 경연 프로그램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나름의 코드가 있습니다. 오래된 명곡을 감각적으로 잘 편곡하고, 후렴구에 폭팔적인 부분을 추가해서 기-승-전-결 구조로 짜서 관객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두가지의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한가지는 "와, 저 곡을 저렇게 멋들어지게 편곡했구나,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하는 감탄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다른 한가지는 '아.. 역시나 원곡이 최고로구나. 아무리 멋져도 원곡의 그 정취와 감성은 흉내내는 것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곡을 만들어서 크게 히트를 치려면 필수불가결한 두가지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후크"와 "사비"인데, 반복되는 부분으로 쉽게 따라부르고 중독성 있게 해야하고, 후렴에서 빵 터트려서 '와우~' 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세계적으로 오랜시간 동안 사랑 받는 명곡들을 보면 의외로 잔잔하고 부드러운 곡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예전에 소개드린 '사이먼 &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같은 곡이나 갠자스의 [더스트 인더 윈드] 같은 곡이라든가, 심지어 마이클 잭슨의 곡중에도 잔잔한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조비의 [(You want to) Make a Memory]도 생각이 나네요

 

   장황하게 음악에 대해서 말씀드린 이유는 일본 미스터리의 선구자 겪인 세이초옹의 첫 장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점과 선] 역시나 올타임 명곡들처럼 잔잔하고 담백한 느낌의 명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와서 보면 무언가 좀 심심한 구석이 있고 화끈한 맛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1957년에 연재를 시작한 작품으로 저보다 20년 형님인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더 즐겁게 읽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로서는 거의 시초인 사회파 추리소설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워낙 다양하고 정교하게 발전을 해왔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어지고 긴장감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 [점과 선]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작이자 정수

 

   사실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라고 말을 하지만 제대로된 사회파 추리소설을 얼마나 읽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거 뭐, 그냥 그런거 같다는 거지 뭘 따져?"라고 해야할 만큼 딱히 읽어본 걸 꼽으라면 궁색해 집니다. 그러나 [점과 선]을 읽고나니까 제가 정말 사회파 미스터리가 잘 맞는다고 확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본격 추리소설이나 하드보일드 등과 비교하면 나름 구분되는 포인트들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점은 작가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해석된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들의 부조리와 모순, 애환들이 잘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서 독자인 제가 제 나름대로 작가의 문제 제기에 대해 반응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맞장구를 칠 때도 있고,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작가의 시각이 편협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점과 선]에 등장하는 배경은 "oo성 "으로 표현하고 있는 정부기관의 부정와 부패,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부추기는 업체들과의 유착관계가 핵심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이초옹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조직적인 부정과 부패가 제 3자를 통해 드러날 위기에 놓였을 때, 권력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인데,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국 힘없는 실무자가 희생되는 사회적 착취구조를 적나라하게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지를 고발합니다. 이 때 어떻게든 성공하고픈 하위직 관리의 심리상태나 동기도 한 몫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과학수사가 발달해서 지문이나 머리카락, 또는 CCTV, 모든 이동수단에 따라붙는 전산자료 등으로 범죄자가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통해 범죄 사실을 밝히기가 수월하지만 그 당시는 그저 탐문하거나 증인의 증언 등에 의존해야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던지라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추리를 해 나가고 확인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역시나 사회파 답게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늘 따라오다니는 것이 "왜?"입니다. 범인은 왜? 피해자는 왜? 이 사람들은 왜? 늘 이런식의 이유가 따라붙게 되죠. 사회파에서 범죄동기와 이유는 매우 중요한 팩터입니다.  

 

 

#5. 수퍼 히어로가 없어서 매력적인 미스터리 

 

   다행히 세이초옹의 추리소설에는 초울트라 슈퍼 우주 히어로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홈즈를 필두로 영웅 사기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물을 어지간해서는 읽지 않는 이유는 지나치게 초현실적인 캐릭터가 몰입과 공감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딴나라 세상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요? 어떤 말도 안되는 사건이 일어나도 '에이, 주인공이 알아서 다 풀어낼텐데 뭘..'하고 긴장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 [점과 선]에는 그런 슈퍼 히어로가 전혀 없습니다. 혼자 힘드로 척척 헤쳐나가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주인공이 처음부터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주조연 겪인 늙은 형사 도리카이가 먼저 등장해 사건 전체를 이어가는 범인의 트릭에 의문을 제기하고는 뒤이어 등장한 주인공 미하라에게 슬쩍 바통을 넘겨줍니다. 그렇게 등장한 주인공 미하라도 딱히 히어로는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성실하게 하나하나 조사를 해가다가 소소하게 하나씩 간과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문제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갑니다. 그러다가 상사에게도 도움을 받고 다른 서에서도 협조를 받고 처음에 등장했던 주조연 도리카이에게 다시 조언을 얻고 이러저러해서 사건을 해결하고는 다시 두 사람이 손잡고 같이 등장해 독자에게 인사하고 퇴장하는 방식입니다.  

 

   그 흔한 등장인물간의 갈등도 없고 화목하고 협조적으로 트릭 파헤치기에만 몰두하는 직선적인 구조입니다. 그래서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주인공의 성향은 독자에게 쉽게 동일화와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멍한 경우가 많은 저같은 사람이 미하라가 머리를 싸매는 모습에 공감하다가 '아' 하며 뭐라도 하나 알아채면 '그래 그게 뭔데? 뭔데? 뭐???' 이러면서 뭔 내용인지 궁금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가 재미있네 없네 따질 형편이 못되는 것입니다.  

 

 

#4. 세이초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철도,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세계

 

   세이초의 작품에는 늘 이동수단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철도가 중요한 요소이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장소들을 공간적으로 이어주는 선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점과 선]에서는 '4분간의 트릭'이라고 불리는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중요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열차의 출발, 도착시간과 역들을 적절히 잘 이용해서 시 공간을 교차하는 핵심 세계를 형성합니다. 이 트릭을 풀어헤치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다 테스야의 '스트로베리 나이트'시리즈에서 점과 선에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같은 10계 주임인 쿠사카와 레이코는 서로 다른 성향으로 수사를 합니다. 여주인공 레이코의 경우는 감으로 범죄자의 심리를 예측하는 감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러나 쿠사카의 경우는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해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며 사건의 핵심에 다가갑니다. 쿠사카는 늘 감을 앞세운 레이코의 추즉을 들으면 늘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레이코, 그건 너의 예단일 뿐이야.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점과 같은 단서들에 불과해. 그 단서들을 이어주는 선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추측은 위험하다." 쿠사카의 말처럼 각 장소, 시간, 또는 이동수단 등에 부여된 각각의 점과 같은 사소한 단서들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해서 관련있는 단서들끼리 정확히 이어야만 선으로 이루어진 실체가 닭인지 돼지인지 코끼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이초의 첫번째 장편 [점과 선]을 읽어가다보면 각각의 점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유추하는 과정중에 실수와 혼란을 겪으면서도 꾸역꾸역 선으로 연결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 과정을 즐기며 이야기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이해관계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을 자연스레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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