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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ㅣ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 어려운 개념과 용어를 아무렇지도 일상언어인냥 던져주는 대가의 센스.
저는 이 책에서 나오는 철학적 고찰들을 진지하게 풀어놓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책의 리뷰를 통해 뭔가 철학적이고 지적인 풍모를 풍기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느낀 점은 이렇습니다. "괜히 리뷰한다고 어줍잖게 깝치지 말자. 절반정도 읽을 때까지 이거이 뭔 소리인공? 하고 멍하지 않았던가?" 사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초반에는 헤매이는 저지만 이 책은 좀더 심해서 딱 절반까지도 꽤나 헤매었던거 같습니다. 그렇기에 왠지 읽다가 중간에 성질내며 집어던져 버리면 나면 저의 지적수준을 비관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질 듯하야(그래봐야 몇분 안되겠지만) 악착같이 끊어 끊어 읽었던 것입니다.
테드 창이 일단 다들 대단하다고 하시니 저도 그런갑다 했습니다. 읽어보니 이양반 상당히 다양한 각도에서 거시적인 시각을 탑재하고 있고, 섬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글속에 담은 부분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 독자? 나 SF 작가! 이정도는 알고 있지?' 하는 식의 패기가 이 작품의 시작부터 느껴집니다. 그냥 생판 처음듣는 용어들이 난무하는데 이거 모른다고 하면 바보되는 느낌으로다가 막 던져줍니다. 그런데 거부감이 크게 들지 않습니다. 이지점에서 이 양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온통 생소한 용어에 생소한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담담하게 설명을 계속해 나가면서 위화감을 자연스럽게 없애줍니다. SF를 많이 읽으셨거나 평소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어쩌면 저의 이런 표현 자체를 이해 못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뭐가 어려워?' 이러실지도.. ㅋㅋ 여튼 중요한건 어려운걸 어렵지 않게(솔직히 그래도 어렵더라 뭐..) 설명해 주시는 창 형님의 능력(설마 동생은 아니것지...아.. 다행히 나보다 열살이나 많다...)이 대단하더라는 겁니다.
#2. 소프트웨어 객채의 생애주기라...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시절들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그 옛날 피씨통신의 막강 파워에 깜작 놀랐던 기억, 프리챌의 뜬금없이 성급한 유료화로 카페를 이동하며 여기저기 전전하던 기억, 언제부터인가 유령화된 싸이월드 내 미니홈피, 트위터가 신기해서 막 팔로워 늘려서 4000명인가 만들어놓고선 어지러운 타임라인에 염증을 느끼고 오프라인 친목과 병행한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소통하다가 지나친 정치색에 질려 뜸해졌던 일들. 이런 것들은 그 소프트웨어의 주기라기 보단 한 개인의 유저로서의 변화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플랫폼이 변하고 유행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가끔 가상의 객체에 심한 애정을 투사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제 형의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집에 있을 무렵 집에 있던 형이 리니지라는 온라인 게임상 캐릭터를 키우겠다는 엄청난 집념으로 하루 4시간 수면을 유지하며(그렇게 공부했으면 당신을 서울대졸업장을 땄겠지...) 밥조차 허겁지겁 먹으며 그 사이에 저에게 칼 휘두르는 키를 클릭해달라는 애절한 부탁을... 하.. 정말 문화충격이라고나 할까? 무언가에 그리 깊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정말 이해불가!!! 그거 키워서 어디다 취직이라도 시킬건가? 하며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피씨방에서 새벽까지 오락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혀를 찼었는데 내 친형도 이럴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이 컸었죠.
아마도 점점 그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이유는 이미 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와 애정을 거기에 투자했기 때문일겁니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여 주인공 애나도 역시 이 작품에서의 표현인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주고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플랫폼 이식을 통해 디지언트의 정지를 피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실생활 속의 자신이 희생할 각오까지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대하면서 가상 세계속의 소프트웨어 객체에 지나지 않는 디지언트가 현실세계의 관계들 -이를테면 가족- 보다 중요해 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 골치아픈 이야기는 이정도만... 각자 읽어보시길. 창작노트도 있고 작품해설도 있으니 제가 굳이 떠들 필요가 없고 읽어보시면 된다는^^)
#3. 그러나 재미는 글쎄...SF는 내 취향이 아니던가...
저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이지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을 많이타고 SF계의 진리라고 하는 테드 창의 작품인 이 책은 읽을수록 심오하면서도 광대하고, 핵심을 찌르며 디테일까지 잘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재미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찬사를 보낼만큼 또 엄청 재미있지는 않더라는 것이죠. 누군가 저에게 당신이 SF를 잘 몰라서 재미가 없는거라고 말하더라고 반박할 수는 없지만 그런 관점이라면 SF를 잘 아는 사람만 읽어야하는 책으로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식의 접근도 적절하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제 생각에 대중 독자에게 주어지는 책이라는 것이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나고 그 속에 담긴 철학이 심오해도 교과서가 아닌 이상에야 무조껀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까칠한 저는 유명세나 작품의 가치 때문에 재미없는 소설을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독서를 하는 태도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게 의미가 없지만 저에게 있어서 재미없는 소설을 테드 창이기 때문에 또 읽으라고 한다면 저는 좀 망설일거 같습니다. 오로지 잘난 척을 하거나 누가 말을 꺼낼 때 끼어들어 아는척을 하기 위해서만 이 양반의 책을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저의 이 안타까움을 다른 작품은 해소시켜 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