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로 모비딕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 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전혜선 옮김 / 모비딕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1. 세이초의 단편이란...

 

 세이초옹의 단편은 참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뭔가 심심한 듯 담백하면서도 씹으면 씹을수록 육즙이 흘러나오는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읽고나면 '이거 뭐 이래?' 하는 공허한 마음과 '흠.. 역시 훌륭해'하며 감탄하는 마음이 번갈아 출렁거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어볼 법한, 또는 옆에서 지켜보았을 법한 뻔한 이야기들의 표면적 전개 속에서 은은하게 꾹꾹 눌러 놓은 주제의식이 맛깔나게 요리되어 있습니다. 언듯보면 심심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단편을 써낸 세이초옹의 태도를 상상하면 뭐랄까요? 쿨하달까? 악착같이 쓴 글이 아니라 '거 뭐. 이런 이야기지뭐...'하는 느낌으로 무덤덤하게 써놓은거 같은 기분이 듭니다. 머리를 쥐어짜내며 탄생시킨 역작이라기보다는 '이까이꺼' 하는 느낌이랄까요? 아마도 이 양반이 늦게 작가 데뷰를 한 것과 이런저런 일들로 고생을 좀 하셨던 것이 이런 느낌을 받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처럼 뜬금없이 갑자기 소설을 써보면 재미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은 이런 세이초옹을 보며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딴 짓 하다가 느지막에 소설을 써서 성공한 롤모델이자 로망이랄까요? 사실상 이양반의 소설이 얼마나 재미지냐보다 이런 배경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제가 세이초옹을 사랑하는 이유일 겝니다.  

 

 

 

#2. 쇼와시기라...

쇼와시대[昭和時代]

1926~1989년까지의 64년간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시대를 말한다. 쇼와(昭和) 2년(1927)에 금융공황이 일어남에 따라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불안을 벗어나기 위하여 군부와 우익지도자는 중국 대륙의 진출을 도모해 정부의 의향을 무시하고 쇼와 6년(1931)에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다음 해 5ㆍ1사건에 의해 정당내각의 시대는 끝나고, 2ㆍ26사건에 의해서 군부독재의 파시즘체제가 확립되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데 이어,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일본국 헌법을 공포하고 전후 대개혁을 실시하여 국민주권ㆍ기본적 인권의 존중, 평화를 내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민주국가로서 재탄생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의 재건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특수경기 및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에 의해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였으며 1989년(쇼와 64년)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으로 쇼와시대는 막을 내리고 헤이세이(平成)시대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쇼와시대 [昭和時代] (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역로의 단편들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쇼와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식백과에 나온 저런 정보는 '역로'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 쇼와시대의 배경하에 놓여있던 서민들, 특히 전후 재건시기의 별 특별할 것 없는 소시민들의 형편과 정서를 대충 상상하면 이 단편들을 읽고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쟁 직후 경제 재건시대는 불안정한 시기입니다. 눈치 빠르고 수완있는 사람에게는 안정된 계층사회보다 훨씬 기회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별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힘들고 고달픈 시기일 뿐입니다. 정부와 대기업 주도하에 성장을 해 나가는 시기는 가난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지만 한편으로 부와 성공의 불평등과 편차에 의해 상실감이 더 커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역로에 등장하는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결같이 지지리 궁상 서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공한 능력있는 인물들도 아닙니다. 그저 랜덤으로 뽑기에서 나온 듯한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적절히 등장합니다. 하나하나 읽어나가면 세이초옹이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도 그 구조속에서 겪게 될 부조리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좋은 작가는 글솜씨 뿐만 아니라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이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3. 불륜인데... 몽땅 불륜인데 불륜스럽지 않아...

 

[불륜(不倫)]

명사

사람으로서 지켜야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

 



  공교로운 건지 모르겠지만 '역로'에 소개된 여덟개의 단편들은 모두 불륜이 스토리의 기본 골격입니다. 모양새는 많이들 다르지만 결국은 불륜의 모양새입니다. 물론 [권두시를 쓰는 여자]나 [어느 하급 관리의 죽음]은 조금 비켜나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다'라는 불륜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특성이야 전작 '잠복'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니 크게 놀랍거나 의아할 것도 없는 세이초옹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뷸륜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남녀간의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을 열거하는 종류의 불륜과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불륜조차 담담하게 처리합니다. 불륜이라는 상황속에서 얽혀있는 인물들간의 복잡한 심경이 잘 드러납니다. 독한 사이코패스 또는 쳐죽일 범인이 등장하거나 뛰어난 두뇌로 종횡무진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도 딱히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들이 진행이 매끄럽고 짜임새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편 한편 읽어 나갈수록 마음이 착찹해집니다. 쇼와시대의 일본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속에서 등장해도 하나도 낮설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인간의 악하고 아둔한 면모와 복잡다난하게 얽혀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가 적나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4. 역로를 역로스럽게 읽는 방법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는 '역로'가 심심하고 지루할 가능성이 꽤나 있습니다. 짜릿하고 속도감 넘치는 미스터리물을 많이 접한 분 일수록 단편집을 탐탁치 않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연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류에 조예가 없는 저는 현 시점에서 상당히 행복한 셈입니다. 그저 읽어나가면 즐겁고 새롭고 재미지거든요. 벌써부터 역로를 읽으면서 '흠... 잠복에서 이미 한차례 경험했던 패턴이라 그런지 약간은 감흥이 떨어지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비교해서 좋은 책을 골라내는 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점점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역로를 즐겁게 재미있게 읽으시려면 책을 놓고 차를 한잔 끓인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먼저 찾으신 후 천천히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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