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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스릴러 -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서 발견한 가장 어둡고 강렬한 이야기
정해연 외 지음 / 마티스블루 / 2025년 1월
평점 :
1. 관심을 끌어당기는 기획력 x 기획을 살리는 역량 있는 작가들
<마티스x스릴러>는 이름도 똑떨어지는 출판사 마티스블루의 신간 앤솔로지입니다. 앤솔로지는 "꽃을 따서 모은 꽃다발"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 둘째 졸업식을 위해 꽃다발을 사는데, 감각 있게 꽃다발을 잘 만드는 곳을 찾아 동네가 아닌 먼 곳까지 가서 사 온 기억이 납니다. 집 근처에도 꽃집이 많은데 멀리까지 가서 사 온 이유는 그 꽃집의 구성이 좋고, 패키지 기술은 물론 결과물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꽃을 따서 모은 꽃다발"인 앤솔로지는 각각의 꽃인 작품들이 좋아야 하고, 그 작품들의 구성이 조화로와야 하며, 기획과 디자인, 마케팅 등이 감각 있고 세련되어야 합니다.
<마티스x스릴러>는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기획이 상당히 좋습니다. 제목이 직관적이라 마티스의 작품이나 작풍을 떠올리며 스릴러 소설과 어떻게 연결될지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표지는 강렬하면서도 심플해 인상적입니다. 진정성 넘쳐 보이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한 출판사 이름까지 하나의 잘 짜인 기획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장르 소설에 있어 저의 페이보릿 삼대장이라 할 수 있는 정해연x조영주x정명섭의 조합만으로도 전자동 오토매틱 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 앤솔로지를 읽기도 전에 계몽되었습니다.
사실 그림은 저에게 매우 어려운 장르입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 좋은 거 같기는 한데,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고, 작가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쉬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림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시간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감상하는 입장에서 미술 작품은 시간의 한 점에 턱하고 떨어진 공간입니다. 일정한 크기의 2차원 공간이 저에게 난데없이 주어집니다. 공간뿐인 작품에서 감춰진 시간을 불러와 삼차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따라 차원 높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그저 이해 안 되는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마티스x스릴러>가 매력적인 앤솔로지인 이유는 인상적이고 괴랄하지만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미술 작품에서 출발해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이 각자의 시선과 상상력과 구라 능력을 동원해 생명력을 불러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너무 신선하고 질이 좋지만 손질하고 요리해 맛을 내기 매우 어려운 재료를 가지고 유명한 세프들을 불러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요리해서 내어놓게 한 오마카세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프들이 잘 만들어낸 요리를 먹으면서 재료에 놀라고 요리 기술에 놀라고 그 맛에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리를 못하지 먹는 걸 못하는 건 아니니까.
2. 의외의 그림 x 의외의 스토리가 제공하는 행복한 시간
이 앤솔로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니들이 예상 못 했던 이야기를 내어 놓겠다고 천명하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독자들을 만족시키려면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어떤 측면에서든 예상을 웃도는 임팩트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 뽀인트가 이 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유로 충분한 임팩트가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해 서로 다른 그림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풀어낼 때마다 개성 넘치는 특징들이 읽기에 즐거웠습니다. 이쪽 장르에 특화된 정해연 작가가 선봉입니다. 첫 작품 "피아노 레슨"은 호러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소설입니다. 자세히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갈수록 긴장감을 고조하다가 결말에서 똭 때리는 임팩트가 맛깔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짱입니다.
조영주 작가의 "유서"는 굉장히 신기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인데 싶은 생소함과 신선함에 작가가 원래 잘하는 특기들이 다량 붙어 있는 고론 애매하면서도 감탄스러운 느낌이랄까? 감상만 들어서는 도대체 뭔 소설이라는 것이냐?라고 반문하겠지만 저도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강렬한 캐릭터 설정과 섬세한 감정 표현이 도드라지면서 결말까지 파탄스러운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임팩트가 좋았습니다.
정명섭 작가의 "좀비 여인의 초상"은 정말 정명섭 다운 초심이 살아있는 정겨운 작품이었습니다. 정명섭 작가의 팬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전반적인 설정과 세계관은 정명섭 작가의 극 초기작 <폐쇄구역 서울>을 그대로 따 왔습니다. 2012년에 출간된 소설이니 벌써 13년이나 흘렀네요. 지금 생각해도 스토리텔링과 액션, 캐릭터의 매력 등에서 너무 좋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이름도 똑같습니다. 정명섭 작가야 마츠모토 세이초급 다작 실력에 갈수록 안정감이 더해가는 작가시니 본인의 작품을 재활용해도 자기복제라는 느낌보다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라 읽는 내내 흐뭇했달까, <폐쇄구역 서울>의 속편이 나왔으면 하는 팬심으로 읽었습니다.
3. 의외의 그림 x 의외의 스토리, 같은 상황 다른 느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의 차원이지만 생면 부지, 초면인 후반부 두 작품은 느낌이 꽤나 달랐습니다. 박산호 작가님의 "사냥의 밤"은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읽는 재미 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인물의 설정이나 당위성 면에서 약간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는 설정에 있어 각 캐릭터들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데 독자 입장에선 저 양반이 저럴 이유가 없어. 명분이 없달까? 그래서 결말에서 '으잉?'하는 기분이 살포시 들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박상민 작가의 "체크메이트"입니다.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면서 웅장한 결말로 깔끔하게 앤솔로지를 클로징 하면서 체크메이트 해주어야 하는데, 저에게는 이게 뭔가 싶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언어로 단순화하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류의 작품입니다. 문제는 제가 이런 계열의 소설을 유난히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한정된 공간에 밀어 넣고 전지적 인물이 사람들을 조정하는 그런 설정이 너무나 작위적이라 딱 싫어하다 보니 이 소설의 작품성이나 글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저는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솔직히 읽을 때는 다섯 작품 다 재미있게 읽어놓고 취향의 문제로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감상문에서 걸리는 부분을 또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만 두둔하고 잘 모르는 작가의 작품을 박하게 평가하는 것 같아서 뒤통수가 뜨끔합니다만 감상이란 게 지극히 취향의 문제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후반부 두 작품의 작가님들 작품은 앞으로 더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겠습니다.
<마티스x스릴러>는 기획이 매우 뛰어나고 다분히 관심을 많이 받기 좋은 훌륭한 앤솔로지입니다. 참여하신 작가님들의 수준도 높고 작품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습니다. 상상력이 빈약한 저로서는 작가들의 구라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수록 작품마다 개성이 다 달라서 다양한 즐거움을 주는 좋은 책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앤솔로지가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