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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평점 :
1. 익숙하지만 흥미로운 스파이 소설
<스파이 코스트>는 고령화 사회에 어울리는 주인공인 은퇴한 전직 CIA 요원이 주인공인 스파이 소설입니다. 아시다시피 영미권에서 전직 특수 요원은 현직보다 약 백만 배 정도는 더 강하기 때문에 당연히 먼치킨류 소설을 상상하기 쉽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리적으로 약한 쪽에 가까운 60대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시린 무릎을 무여잡고 평안한 일상을 방해하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텐션을 고조시키는 빌드업이 능수능란하고 문장이 매끄럽다는 점입니다. 빌드업이 좋다 보니 끝까지 흥미가 떨어지지 않고 소설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문장까지 좋아서 읽는 맛이 좋다 보니 술술 잘 읽힙니다. 장르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잘 발휘된 셈입니다. 아주 간혹 보이는 오타가 흠이라면 흠이지만 전작에서 검증된 박지민 님의 자연스러운 번역 또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입니다.
스토리 좋고 문장이 좋으면 장르소설은 성공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 캐릭터까지 훌륭합니다. 매력적일 뿐 아니라 상황에 따른 캐릭터의 미묘한 심리묘사가 기가 막힙니다. 저자 테스 게리첸은 의사 출신 소설가지만 필력이 절대 만만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상당히 고오급스러운 느낌이 은은하게 묻어 있는 글을 쓰십니다. 개 부럽습니다.
전직 CIA 요원이 은퇴하고 신분 세탁한 후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일상을 깨고 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사건을 노련하게 해결한다. 솔직히 이런 스토리는 정말 익숙하다 못해 식상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시작부터 계속 재밌습니다. 스토리를 비트는 대단한 반전은 1도 없습니다. 그냥 필력으로 조집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너무 그럴듯하게 맛깔나게 하니까 저도 모르게 '어, 그래? 그렇지. 그렇구먼.'하면서 군소리 없이 멱살 잡혀서 계속 읽게 됩니다.
2. 고령화 스파이와 그 친구들
이 소설을 즐기는 키포인트는 은퇴한 요원들의 공조입니다. 주인공 매기를 비롯해 주변에 함께 은퇴 이후를 보내는 노친내들이 등장합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매력적인 영화 "더 레드"를 연상케합니다. 현실 속 은퇴한 요원은 영화처럼 강력한 힘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육체적 능력은 줄어듭니다. 근력이나 기동력이 필요한 부분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대신 정보력, 인맥, 숙련도 등은 유지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OB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중에 마티니 클럽이라고 명명되는 5명의 OB 멤버들은 그들의 경험과 인맥, 정보력 등을 최대한 활용해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이 소설의 미덕은 말도 안 되는 먼치킨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없다는 점입니다. 매우 현실적입니다. 정보와 분석력은 좋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얼렁 뚱땅 전직이라 뭐든 가능하다는 식의 설정에 기대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적의 실체를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런 정확한 현실 인식과 한계에 대한 가르마가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입니다.
아직 늙지 않았고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만 실상은 육체적 능력과 몸담았던 기관을 활용하는 부분에서 제약이 큽니다. 심지어 모종의 이유로 기관에서 본인들을 제거하려 시도하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기댈 곳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들끼리 공조, 협조해서 서로를 지키려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입니다.
주인공인 매기 버드의 심리적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묘사도 유려합니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신의 커리어와 운명적인 사랑 사이의 갈등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 불안한 긴장감을 유도하는 요소입니다. 스파이에게 필수적인 냉정함과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매기의 모습이 좋습니다. 전체적으로 인간적인 냄새가 풀풀 나면서 긴장감 속에 따뜻함을 놓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마티니 클럽이 함께 일을 해결했다고 보기 어려운 모양새로 마무리가 되어서 결말 부분이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결말까지도 현실에 있을 법하게 정리한 일관된 흐름이 좋습니다. 다만 장르 소설에서 기대하는 빵 터지는 마무리가 없어 좀 약한 느낌입니다. 기가 막힌 협력체계 속에 사건이 마무리되고 마티니 클럽은 다음 에피소드를 기약하며 마무리되었으면 했는데 저자도 고령이시라 속편을 기약하기는 싫으셨나 봅니다.
3. 고령화 사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스파이 소설을 읽고 고령화 사회를 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조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한쪽 머릿속으로는 자연스럽게 은퇴 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 속에서처럼 한적한 시골마을에 드넓은 집을 사서 생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평범한 우리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합니다. 거 뭐, 폐지나 줍지 않으면 다행 아닌가 싶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 특수부대나 기관 요원들처럼 몸을 만들어야 하나 싶은 고민도 해봅니다.
시국이 시끄러워서 더욱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상상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살상 부대의 존재나 심리전단, 특작부대, 공수부대, 벙커 등의 용어가 신문지상을 도배하는 시대입니다. 45년 만에 계엄이 선포되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시민이 특수부대 목덜미를 잡고 국회 진입을 막아내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어지간한 소설은 갖다 대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니 내가 속한 삶의 터전이 안녕한 것인가 의심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는 더욱 남들 모르게 숨어 지내던 특수 요원의 존재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어딘가에도 마티니 클럽 같은 은퇴한 특수 요원들의 모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행복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반인은 해서는 안 될 작전을 수행하며 은원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테스 게리첸의 <스파이 코스트.는 요원 출신의 은퇴자들이 그동안 벌였던 작전의 여파로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험과 과거 사건의 감춰진 전말 등이 잘 버무려진 흥미진진한 스릴러 소설입니다. 익숙한 설정임에도 긴장감 넘치는 요소가 매력적입니다. 긴 글을 읽기 어려운 시기에 집중해서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과 앞으로의 미래를 점검해 보기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는 재미와 의미가 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