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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에서 기다리는 너에게
이누준 지음, 이은혜 옮김 / 알토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이누준 작가의 <종착역에서 기다리는 너에게>는 '이별'이나 '상실'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정리할 기회를 건네는 소설이다. 배경이 되는 시즈오카의 작은 역에는 '추억 열차'라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누군가를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열차를 통해 종착역에서 만남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 설정은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가 섞여 있어 작품의 정서를 안정적으로 잡아준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니토'라는 역무원이 있다. 그는 기적과 현실 사이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 한 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향을 다시 잡을 수 있도록 돕고, 각자의 종착역까지 여행을 함께 한다.
이 소설은 4명의 인물이 각자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옴니버스 구조로 되어 있어 독자는 여러 감정선을 유연하게 따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외할머니의 치매를 마주하기 두려웠던 소녀의 이야기다. 따뜻함과 사랑의 상징이었던 존재가 변해 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문을 미루다, 결국 죄책감에 짓눌린 소녀가 중심인물이다.
니토의 안내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소녀는 치매 이전의 할머니를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제야 마음속 깊은 곳에 묶여 있던 감정이 풀려나간다.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야기는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지만, 그마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다른 이야기 역시 '서로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품고 있다. 진심을 고백하지 못한 채 이별을 겪은 약혼자, 어릴 적 엄마에게 버려진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딸, 남편이 남긴 마지막 꿈을 이어가려는 아내까지. 이들은 모두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잔상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과한 감정 묘사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말투와 섬세한 시선으로 그 마음의 결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야기의 무게가 과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다.
특히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대다수의 판타지 감성 소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재회를 다루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살아 있지만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어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더해져 이야기 밀도를 높인다. 물리적인 거리, 감정의 틈, 미뤄둔 관계 등 현실적인 이유에 더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등장인물들의 선택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또한 각각의 이야기가 완전히 분리된 단편처럼 보이지만, 다음 이야기에서 이전 인물이나 그 가족들이 병원, 레스토랑, 기차 등에서 자연스럽게 엑스트라처럼 등장해서 서로 느슨하게 이어진 세계관을 만들어 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익숙한 등장인물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점도 독서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는 지점은 네 인물 모두 눈물겨운 순간보다 '다시 일어서는 순간'에 더 많은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추억 열차를 통해 만남을 이울 수는 있지만 결국 종착역에서 돌아가는 건 각자의 선택이다. 기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계기로 스스로 변화 하려는 마음을 깨닫는 순간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종착역에서 기다리는 너에게>는 복잡한 줄거리를 가진 작품은 아니다. 대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또렷하다. 오래 미뤄둔 마음, 외면했던 기억, 주고받지 못한 말이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자기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직면하는 순간, 삶은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지친 하루 끝에 조용히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 혹은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