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아홉, 이제부터 어린이 마음으로 살자
박재원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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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박재원 작가의 <예순아홉, 이제부터 어린이 마음으로 살자>는 나이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를 다루는 에세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달리 이 책은 휴식이나 은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과 성취가 삶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는 과정을 짚고, 그로 인해 삶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돌아본다.

항해사, 교수, 경영자로 살아온 작가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공간을 겹쳐 사유한다. '어린이 마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익숙해진 판단에서 잠시 물러나 삶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을 뜻한다.





박재원 작가는 예순아홉이라는 나이에 이르러 묻는다. 무엇을 더 이뤄야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 수 있을까. 그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책임과 기대를 자연스럽게 떠안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한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문이 남는다. "나는 정말 나답게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이다. 거울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그 의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비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느새 자신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인도네시아 여행은 휴식이나 탈출이 아니다. 작가는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우붓, 플로레스 섬을 거치며 장소에 쌓인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함께 꺼내 놓는다. 자카르타의 순다 켈라파 항구에서는 제국의 욕망과 쇠락을, 족자카르타와 보로부두르 사원에서는 문명의 영광과 잊힘을 마주한다. 특히 보로부두르가 천년 가까이 화산재에 묻혀 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묻혀 있던 자신의 내면과 겹쳐 읽힌다.

발리 우붓과 플로레스 섬의 대비도 인상 깊다. 신과 제단으로 가득한 우붓의 풍경과 달리, 라부안 바조에서는 소박하고 조용한 삶의 결이 느껴진다. 그곳에서 작가는 과거 필리핀 민다나우에서 겪었던 사업 실패의 기억을 떠올린다. 무장 반군의 위협과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 속에서 버텨야 했던 시간은, 그가 왜 그토록 삶의 무게를 끌어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중심에는 니체의 사유가 자리한다. 인간 정신은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이 단계로 나아간다는 이야기. 박재원 작가에게 어린이는 철없음의 상징이 아니다. 짐을 내려놓고 스스로의 삶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이 책의 여행은 관광지가 아니라 질문의 연속이다. 나는 아직도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이미 끝난 경쟁을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예순아홉, 이제부터 어린이 마음으로 살자>는 노년을 미화하지도, 인생을 바꾸는 정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삶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 애쓰는 대신 조금 내려놓는 것, 더 증명하는 대신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조용한 제안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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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으로 가난을 샀습니다 - 불안을 설렘으로 바꾼, 두 사람의 인생 반전 스토리
고우서 지음 / 슬로우리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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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고 쓴 글입니다. 




삶이 벅차고 불안할 때, 우리는 종종 떠남을 꿈꾼다. 하지만 떠남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한 선택일 때 더 큰 울림을 준다. 고우서 작가의 <전 재산으로 가난을 샀습니다>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부부의 세계 여행 기록이다.

유튜브 <쑈따리> 채널을 통해 이미 많은 팬들과 소통해 온 저자가 글로 남긴 이 여정은, 현실의 불안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찾고 싶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고우서 부부의 첫 여행지는 러시아였다. 춥고 말이 통하지 않으며 낯선 곳. 하지만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다. 책은 여행지를 멋지게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스쳐간 친절, 말없이 건네받은 도움 같은 장면을 오래 붙잡는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얼굴이다. 어디를 갔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만났는지가 남는다.

책 제목에 들어있는 '가난'은 이 책에서 결핍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돈이 부족해지자 오히려 하루를 느끼는 감각이 또렷해졌다고 말한다. 작은 친절 하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들. 물질이 줄어든 자리에서 감각이 살아난다. 그 과정이 미화되지 않아서 더 설득력 있다.





부부 여행기지만 감정 과잉의 로맨스는 없다. 대신 함께 견디는 시간, 불안 앞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태도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여행은 두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기보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의 관계 서사는 현실적이다.

튀르기예에서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들으며 느낀 미안함. 인도에서 마주한 혼돈과 불편함, 바라나시에서 경험한 삶과 죽음의 공존은 이 책의 무게를 더한다. 특히 바라나시 장면에서는 한 도시를 하나의 감정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통과 생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 앞에서, 삶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된다.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의외로 평범한 일상이었다. 익숙한 언어, 늘 가던 식당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을 때 더 분명해진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이 책은 여행을 부추기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 중 나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 재산으로 가난을 샀습니다> 는 떠난 이야기이면서, 결국 돌아오기 위해 읽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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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패턴 : 모든 성공에는 패턴이 존재한다
성공패턴 (홍인기)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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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고 쓴 글입니다.




성공은 단순히 운이나 재능의 결과일까, 아니면 반복되는 사고와 행동의 구조일까.

홍인기의 <성공 패턴>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성공을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로 보지 않고, 누구나 설계하고 적용할 수 있는 '패턴' 으로 정의한다. 책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고 습관과 행동 방식을 분석하며, 독자가 자신의 삶에 맞게 성공 패턴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성공 패턴>은 성공을 정의하거나 공식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이 책이 집중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극단적인 환경에서 출발해 인생을 바꾼 인물들, 수천 번의 실패 끝에 목표를 이룬 사람들, 바닥까지 내려간 뒤 다시 올라온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저자는 이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요소를 추려낸다. 그것이 바로 '성공의 패턴'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배경은 제각각이다. 노숙자였던 소년, 극심한 비만과 가난 속에서 살던 청소부, 수천 번의 실패를 견뎌낸 도전자까지, 상황은 다르지만 그들이 선택에는 닮은 점이 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핑계를 만들지 않았고, 외부의 시선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도중에 멈추지 않았다. 성공의 핵심은 재능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태도'라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다만 이 책은 구체적인 실행 매뉴얼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성공을 이루는 세부 전략이나 단계 별 방법보다는, 성공한 사람들이 서사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례가 주는 힘은 분명하다. 수천 번의 실패, 수년 간의 고통을 이기는 이야기 앞에서 지금의 좌절이 결코 절대적인 한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버티기'와 '행동'의 차이를 분명히 짚는 부분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히 견디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시도하고, 방향을 점검하며, 다시 움직이는 과정을 포함한다. 저자는 성공을 만든 힘이 인내가 아니라 '회복 탄력성'에 있었다고 말한다. 넘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지 가 결국 결과를 바꾼다는 것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생각의 폭을 넓히는 사고 법과 함께 '퇴로를 남기지 않는 결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돌아갈 길이 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집중력을 약화 시킨다는 관점은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강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성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안전한 선택보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에너지를 집중했다.

<성공 패턴>은 과학적 증명이나 이론 서 에 가깝지는 않다. 대신 수많은 인생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성공은 특별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끝까지 움직이는 사람이 만들어낸 흔적이라는 점이다. 성공을 꿈꾸고 있지만 방향을 잃은 사람, 지쳐서 멈추고 싶은 순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다시 한번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성공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움직인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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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괴담
온다 리쿠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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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일상 속 가장 평범한 공간, 커피숍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이렇게 서늘할 수 있을까? 온다 리쿠의 <커피 괴담>은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장치 없이도 독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독특한 소설이다. 카페, 집, 여행지처럼 누구나 한 번쯤 머물렀을 법한 장소에서 작은 어긋남이 반복되며, 독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을 놓지 못한 채 끝까지 끌려간다.

커피라는 매개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모이게 하고,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스며들며 괴담이 된다. 무섭다기보다 낯설고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이 책은,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는 불가사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커피 괴담>은 레코드 회사 프로듀서 다몬, 외과의사 미즈시마, 작곡가 오노에, 검사 구로다, 이렇게 4명의 중년 남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이들은 계절과 도시를 옮겨 다니며 찻집을 순례하고,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들었거나 겪었던 괴담을 하나씩 풀어 놓는다. 교토의 한여름, 요코하마의 초겨울, 도쿄 진보초, 고베와 오사카를 거쳐 다시 교토로 돌아오는 흐름 속에서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야기의 구조는 독특하다. 한 찻집에서 한 사람만 괴담을 이야기하고, 가게를 나서는 순간 다시 잡담으로 돌아간다. 다음 이야기는 다른 찻집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각 에피소드는 길지 않고, "마치 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데..."로 시작하는 대화처럼 흘러간다. 처음에는 공포의 밀도가 낮다고 느껴질 수 있다. 자극적인 사건도, 분명한 결말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쌓일수록 묘한 감각이 남는다. 옷장 안에서 사람처럼 보였던 그림자, 분명 존재했던 것 같은데 사라진 잡지, 이유 없이 닫히는 문 같은 경험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하지만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넘겨온 순간들이다. 다몬은 이런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기시감을 느끼고 그 감각은 이야기 뒷편에서 계속 독자를 따라다닌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네 사람이 무척 겁이 많다는 사실이다. 서로 괴담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지만, 작은 이상 징후에도 쉽게 동요한다. 그래서 이 모임은 무서운 이야기 대결이라기보다, 오랜 친구들 사이에 친목 모임처럼 보인다. 바쁜 삶 속에서도 낮의 거리를 천천히 걷고, 커피를 마시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오히려 부럽게 느껴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들이 나눈 괴담은 현실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각자가 겪었던 일들이 점점 구체성을 띠고 '불가사의한 일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다몬이 과거의 장면이나 보이지 않은 존재를 인식하는 듯한 묘사는 이야기 전체의 은근한 긴장을 남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괴담 대부분이 실제로 들었거나 경험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이 사실이 알려주는 공포는 소설 속 장면보다 더 오래 남는다. <커피 괴담>은 큰 반전이나 한방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그 소소함 자체가 이 작품의 정체성이라는 걸 알게 된다. 커피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문득 떠올라 등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야기. 시작보다 끝이 더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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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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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정고요 시인의 에세이 <산책자의 마음>은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이동'이 아니라, 방향없이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경험을 담아낸다. 저자는 골목과 공원, 계절의 변화 같은 일상 풍경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읽는다기보다는 함께 걷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산책자의 마음은 형식부터 정해 두지 않은 책이다. 서문처럼 읽히는 글도 독자를 안내하는 문장도 없다. 대신 시와 산문, 짧은 이야기가 산책의 동선처럼 이어진다. 어디까지가 시작이고 어디서부터가 다음 장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모호함이 오히려 이 책의 리듬을 만든다. 읽는 사람은 따라가며 정리하기보다, 잠시 멈추거나 건너뛰어도 괜찮은 상태가 된다. 이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돈된 독서보다 흘러가는 읽기를 허락한다.

이 책의 산책은 운동이 아니라 사위에 가깝다. 풍경을 설명하기보다는 그 풍경 앞에서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기록한다. 사물이 겉모습보다 그 이면에 붙어 있는 감정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심각하지도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저 시인 눈에 비친 세계를 말할 뿐이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목록은 특히 인상 깊다. 눈물을 밀봉한 용기, 코피를 막았던 솜뭉치, 시를 써 내려간 종이, 정수리에서 뽑은 머리카락의 일부 같은 것들. 쓸모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저자가 소수를 좋아한다는 고백도 오래 남는다. 1과 자신만 약수로 가진 숫자라는 이유가 시답지 않으면서도 정확하다.

'장소를 사랑하기' 에서는 강원도, 그중에서도 강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지나치게 높은 건물이 없으며,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선택이 가능한 도시. 저자는 강릉으로 이사 온 해부터 나이를 다시 계산한다고 말한다. 공간이 삶의 감각을 얼마나 바꾸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도 예민하다. '옆'과 '곁'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곁은 만들어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옆에는 설 수 있지만, 곁은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렇지 않게 써오던 단어들이 시인의 설명을 만나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평행 우주 산책'에서는 죽은 반려묘 호떡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이와 함께 사는 세계가 저자에게는 또 하나의 우주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 역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이미 떠났지만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존재들. 그런 세계가 정말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곳곳에 실린 일기들은 장소의 공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과감한 표현 없이도 장면이 또렷이 그려지는 건, 시인이 관찰에 얼마나 섬세한 지를 보여준다. 산책과 내면의 옷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걷는 풍경을 담는다'라는 문장이 오래 남는다. 걷는다는 행위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보다 잘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과거에 대한 고백도 인상 깊다. 놓지 못했던 시간들, 계속 따라붙던 기억들, 나이가 들면서 그것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젊을 때의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사람을 무디게도, 살게도 만드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섬세하다고 느꼈던 문장들이 읽을수록 머릿속에서 장면으로 살아난다. 달빛이 쏟아지는 바다, 바람 없는 날의 파도 소리,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물 하나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고지식하게 눈앞에 것만 보던 나에게, 이 책은 세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광포한 아름다움'이라는 바다의 표현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특별한 다짐 대신 조용히 밖으로 나가 걷고 싶어진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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