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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기쁨 믿음의 글들 19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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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 루이스가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회심에 대한 부분은 11장에서 시작하여 13장에 이르러 깊어 지고 14장 <체크 메이트>에나 와서야 제대로 다루고 있다. 루이스의 회심 이야기는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철저하다. 어떤 심오한 깨달음을 가졌다기 보다 이성에 의해 단단하게 무장한 한 사람이 보다 이성적인 절대자에 의해 깨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회심에 대한 루이스의 서술은 중심을 다루지 못한 듯 하다. 마치, 자신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듯 했다. –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루이스는 그물을 꽤 넓게 펼쳤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시야를 넓히게 된 과정을 서술했고, 탁월한 교사 노크 선생님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군 생활에 대해 잠깐 다루다가 교수 생활을 하던 중 회심의 사건을 겪게 된다.


1_무언가를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행복

 

   
  자유로이 하고픈 바를 만끽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_p25  
   


C. S. 루이스는 자유롭게 하고픈 바를 만끽하는 행복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C. S. 루이스가 문학적 분야에 몰입하게 된 동기는 그에게 지독히도 손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그는 엄지 손가락의 관절 하나가 구부러지지 않아 세밀한 동작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를 공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것이 이야기 쓰기였다. 그렇게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서 오는 한계를 피하다 보니 문학적 동기를 얻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놀이방 탁자 위에 세워진 멋진 장난감 마분지 성보다는 이야기 속의 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법’이라고 고백했다(p24). 그에게 글쓰기는 여러 가지 가운데서의 선택이 아닌 힘들게 찾아 낸 길이지만 그것이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자유롭게 드나 들고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선택을 하든 어쩔 수 없는 길이든 상관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자유와 행복을 위한 공간과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찾아 내야 한다.

 

2_ 지적 오만과 역설적 모순 상태


루이스는 올디와 샤르트르, 와이번이라고 불리는 세 학교 생활을 하면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었다. 올디는 고독한 절대권력 속에서 사는 학교장의 별명으로 지독한 체벌이 있던 곳이었다. 루이스는 그곳에서 한 친구가 기하 증명을 하지 못해 올디에게 심한 체벌을 받는 모습을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한다. 열세 살이 되면서는 예비학교 샤르트르에 입학했다. 이곳 생활은 시야를 넓히게 해 주었지만 루이스는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는 스스로 규칙 - ‘기도할 때, 생생한 상상과 감동이 없이는 단 한 구절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규칙’_p92 - 을 정했다. 모친을 일찍 여의고 감성적 대화가 부족해서인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지는 모르겠다. 지나치게 폭압적인 올디에서의 생활 때문이었을까? 루이스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를 통해 외부의 것을 함부로 받아 들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그의 지적 경향으로서 깊은 염세주의도 한 몫을 했다. 여기에, 청소년기 시절 와이번 학교 생활은 그의 염세주의적 경향을 더 부추기게 되었다.

   
  왜 피조물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도 않았는제 존재햐야 하는 버거운 짐을 져야 하는가?_p107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탁월함을 보인 루이스는 북유럽 신화의 고전 <사슬에 묶인 로키>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지적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 루이스는 염세주의자로,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분개했다. 동시에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인 오만을 보였고 그와 함께 스스로 어떻게 판단할 수 없는 모순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만해 보이기는 했지만, 루이스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올디의 폭압적 환경은 동일하게 세상의 폭압적 환경을 대변한다. 와이번의  생활은 사회적 모순 구조를 그대로 빼다 박은 것으로 철저하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진 루이스의 방어 태도는 이해할 만 하다. 그는 거대한 권위적 구조 속에서, 그리고, 경쟁적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적 영역을 그토록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탐색한 것이 아닐까?

 

3_  도전, 체크


나름대로 자기 삶에서 철저하게 방어 진지를 쳐 놓고 이만하면 됐지 하던 가운데 루이스는 결정적 도전(체크)을 맞게 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순간은 ‘지식은 한껏 늘되 즐거움은 그만큼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고 ‘열심히 신전을 지었는데 마침내 신이 머물지 않고 날아가 버렸음을’ 화들짝 깨닫게 되었다. 꽃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다. _p240 루이스는 두 가지 치명적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


첫째, 그는 관심과 욕망이 어떤 것에 온전히 쏠릴 때 찾아오는 전율을 원하고 있었다. 전율은 부산물이다. 그저 이미지들의 소용돌이와 감각, 한 순간의 몽롱함뿐이다. 전율에 대해 루이스는 ‘믿음을 자기도취적인 사치로 만들고 사랑을 자위행위로 만든다’_p244고 했다.
둘째, 전율이란 잘못된 목표를 설정해 놓은 다음 그 상태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는 본질에 대한 잘못된 전제로 인해 늘 천박해져 버렸다. 냄새를 잘못 맡은 사냥개처럼 마침내 루이스는 그 쾌락이 궁극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내 상상의 삶은 이상과 같았다.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자리에 지적인 삶이 있었다. 내 정신을 이루고 있었던 이 두 반구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에는 시와 신화의 다도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얄팍한 ‘합리주의’가 있었다._p247  
   


무엇보다 루이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권위에 대한 증오감과 개인주의, 그리고 무법성이었다. 그는 간섭받기 싫었고 그래서, 자기 영혼의 내밀한 곳에 아무도 상관할 수 없는 영역을 원하고 있었다.

4_존귀한 어부


옥스포드에서 첫 2년을  보내고 있던 중 루이스는 지적으로 새로운 외양 New Look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 외양은 한꺼풀씩 벗겨지고 만다. 더 이상 염세주의도 자기연민도 없었으며, 초자연적 요소나 낭만적인 환상도 꿈꾸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최대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던 차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자극을 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로 인해 루이스는 존귀한 어부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 목회를 그저 생계 수단으로 삼을 뿐, 신앙을 잃어버린 아일랜드계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불멸성이라는 주제를 역겨워했다. 둘, 미쳐 가고 있는 사람의 거의 열나흘 밤낮을 함께 보낼 기회를 가졌다. 셋, 새로운 심리학에 쉽게 영향을 받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마지막으로, 베르그송을 접하게 되면서 신의 한 가지 속성인 ‘필연적인 존재’라는 속성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필연적인 존재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우주를 그 주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베르그송 때문에 그는 절대자를 믿게 되었다.


절대자는 루이스보다 더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외적인 자극은 약간만 주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다가오면서 틈을 보일 때 마다 그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어 필연적인 존재를 찾아내게 하니 말이다.

5_ 체크 메이트!


체크 메이트. 체스 경기에서 상대의 말이 더 이상 꼼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가 되면 경기는 끝이 난다. 루이스의 회심에서 체크 메이트를 부르는 몇 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실재론을 내려놓았다. 그 동안 새롭게 갖추고자 했던 외양이 훼손되어 버렸다. 두 번째 수, “무엇이 내 갈망의 대상이냐?”에서  “누가 내 갈망의 대상이냐?”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 대상은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갈망의 대상이다. 세 번째 수, 실재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갖는 기쁨은 어디까지나 절대자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이 부분에 대한 루이스의 설명은 정말 상당히도 관념적이다). 루이스는 그때까지 원심적인 사고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구심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네 번째 수, 루이스는 ‘절대자’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신비화의 색을 덧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겼었다.

C. S. 루이스는 그렇게, 그렇게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지만 마지막에 두개의 문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반대편을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쪽을 택하기로 선택했다. 그의 표현대로 ‘문을 열기로, 갑옷을 벗기로, 고삐를 풀기로’_p321 선택했다. 존 스토트 역시, 그의 회심기에서 그리스도를 ‘천국의 사냥개’로 표현했었는데, 루이스도 자신을 지독하게 쫓아오는 대상을 ‘사냥개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 사냥개들의 무리에 자신이 마음을 두는 모든 이들(플라톤, 단테, 맥도널드, 허버트, 바필드, 톨킨, 다이슨, 기쁨 자체까지_p322)이 포함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몰리던 루이스는 지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붙들려 버렸다.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 본다.

   
  마침내 내 모든 행위와 갈망과 생각이 그 보편적인 영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지극히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나 자신을 점검해 보았다. 그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정욕의 우리, 야망의 도가니, 두려움의 온상, 애지중지 가꾼 증오의 하렘이 거기 있었다. 내 이름은 ‘군대’였다._p324  
   


   
  …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에 있던 ‘절대 영’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진짜 문제에는 아직 도달하지도 못했다. 진짜 무서운 사실은 ‘하나님’ 내지는 내가 말한 바 ‘영’ 같은 존재를 진지하게 믿는 즉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는 데 있었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움직여 서로 들어맞어 벌떡 일어섰듯이, 지적인 장난거리에 불과했던 철학 이론이 울룩불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수의를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산 존재가 되어 버렸다._p325  
   


   
  …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이런 조건의 회심자까지 받아주신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그래도 제발로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화를 내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기회를 찾는 탕자에게도 하늘의 높은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그 누가 찬양하지 않으랴? ‘끌고 오라’는 것은 악한 사람들이 너무 남용한 탓에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말이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잴 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준엄함은 인간의 온화함보다 따뜻하다. 그의 강요는 우리를 해방시킨다._p328
 
   


루이스는 지옥의 단 한 가지 법칙인 “나는 내 것이다.” 주장을 인용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자신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하던 시절이 지옥의 시간이었음을 루이스는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나는 하나님 당신 것입니다.”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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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스탠리 존스 지음, 김상근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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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스탠리 존스는 인도에 그리스도의 길을 소개함에 있어 일생을 헌신하였다. 1907년 24세의 나이에 미 감리교 선교국의 파송으로 인도 선교사역에 평생을 헌신했다. 스탠리 존스의 그리스도의 길 냄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 백프로 솔직할 것 ② 어느 누구의 종교도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먼저 확인시켜 줄 것 ③ 종교 간의 대화를 마칠 때에는 참가자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④ 집회가 열리는 도시의 비기독교 지도인사를 집회의장으로 세운다 ⑤ 기독교는 그리스도로 정의되어야 한다 ⑥ 그리스도는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경험에 의해 해석되어져야 한다. 나중에 그는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을 더했다. ㉮ 나는 ‘기독교’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는 반드시 인도의 방식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이 지침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 ⓐ 아주 겸손하다.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임했다. ⓑ 기독교는 공격적인 특성이 크기 마련이다. 그는 이 부분을 최소화시킨 것 같다. ⓒ 일방적이지 않고 아주 예의 바르며 성급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을 존중했고 대화를 통한 정중한 접근을 하였다. ⓓ 일반적 접근 방식은 대부분 교리적인 접근이었으나 그는 복음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 됨을 놓치지 않았다.

 

2.
만약,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나에게 주려고 가져왔는데 냄새도 좋고 모양도 좋아 보여 그 음식을 받으려고 보니 음식을 담은 그릇 상태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깨끗하지 않은 그릇이고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서 모양이 적절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담는 그릇의 모습과 상태에 따라 그 전달력은 커다란 차이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인도에게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보였던 것 같다. 담겨진 복음과 그리스도는 참 귀한데 진리를 담아 가지고 온 서양 기독교란 그릇의 상태는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스탠리 존스는 인도 사람들이 주는 환영과 적대의 역설적인 반응을 수 없이 받아 내면서 활동했다. 그런 스탠리 존스에게 마하트마 간디의 도전은 예리하고 무거운 칼날이었다.


㈎ 우선 당신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 당신들은 반드시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타협을 하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 나는 당신들이 사랑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 정신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들이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를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들은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 속에 있는 장점들을 찾아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들이 그들에게 접근할 때 보다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이런 간디를 통해 인도를 볼 수 있었다. 인도는 영적으로 상당히 열려 있는 곳이다. 그들은 어색하고 깨끗하지 않은 그릇에 담아 온 그리스도를 던져 버리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복음을 담아 온 그 이방의 그릇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스탠리 존스는 이 부분에서 자신과 자신의 기독교를 반성하는 시간들을 가져왔고 간디가 인도를 대표했듯이 자신을 통해 기독교의 참 됨과 그리스도를 인도에게 성실하게 소개해 갔다.

 

3.
어떤 맛집을 소개해 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집에 데려가 그 맛집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위치와 가격과 인테리어와 기타 등등의 모습들을 구구절절 소개하기보다 그냥 함께 가서 주문하여 먹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진리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구절절 분석하고 설명하려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가?

스탠리 존스는 전통 기독교가 그런 식의 선교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을 전하려는 방식이 수 많은 논쟁과 다툼만 일으킬 뿐이고 대신 '누구'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현자가 아니라 구원자이다. 관리자가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게 할 사람이다. 진실이 아니라 생명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는 잘못된 질문이다. 올바른 질문은 '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이어야 한다.
그 '누구'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소개하는 것이 선교이다. 그에 '대하여' 전하는 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스탠리 존스는 이 사실을 인도에서 여실히 체험하며 살았다. 선다 싱 역시 다른 종교에서 없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새롭게 찾은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서슴없이 "예수 그리스도!" 라고 했다. 스탠리 존스 역시 다른 종교에는 없지만 기독교에만 있는 것에 대한 질문에 그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호하게 응답했다. 그리스도만 계시다면 다른 것들이 필요 없지 않은가? 어째서 지금의 교회들은 그리스도 외의 것들을 끼워 팔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무심기는 오랜 인내를 요하는 일이다. 백 년 정도는 지나야 그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 스탠리 존스의 사역은 나무심기와 같은 그런 일이었다. 그 길 냄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약하고 부족한 그릇이었음에도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평생의 섬김으로 그리스도께서 인도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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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
스티븐 코비 지음, 김경섭 옮김 / 김영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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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8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일했다. 그렇다면, 지금 쯤은 보람과 함께 가슴이 뿌듯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히려 공허하기만 했다. 왜 그럴까? 주도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고 나름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도 해 보았으나 그래도 여전히 아니었다. 그런 내게 <8번째 습관>은 책장을 넘길 때 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고, 때론 무릎을 치게 하였다.

2. 선택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반응을 선택할 힘과 자유가 나온다.
그 선택 속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들어 있다. _ p74

저자 스티븐 코비가 어느 날 우연히 큰 도전과 영감을 받은 구절이다. 그의 유명한 책 <7가지 습관>과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에 이미 소개된 부분이다. 거듭 생각하고 생각해 봐도 옳은 말이다. 그 어떤 자극이든 우리에겐 반응하기 위한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환경과 구조에 의해 불가 항력의 상황에 갇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택의 자유는 있다. 모든 문제를 타인들에게 돌리던지 자신을 자학하는 식으로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주도적인 선택을 못해서였다.


3. 공동의존과 기능적 인간

이 책에서 '공동의존(Codependence)'이란 새로운 말을 배웠다. 공동의존은 오랫동안 아무런 조처 없이 참고 살아가는 세칭 착한 사람의 증상을 일컫는다. 이 상태에 빠진 이들은 결정을 기피하고 무의식적으로 감독 당하는 데 동의한다. 주도적 행동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웬만해선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책의 첫 부분에서부터 도전이 되었다. 공동의존은 나와 내가 속한 조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에서 늘 움직이는 생각은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아니다'였다. 그러면서, 결국 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알고 그대로 참고 지내고 있다.

스티븐 코비는 그렇게 방관하지 말라고 한다. 가슴 속에서 소리치는 내면의 소리를 줄이지 말고 그 소리를 찾아 더 크게 소리치게 만들라고 한다. 그 다음 다른 사람도 그 소리를 찾도록 고무하고 잠재능력을 발휘하여 위대함에 이르자고 한다. 이 과정은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순차적 과정이다. 전인적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가 아니라면 주위 환경의 틀에 갇힘과 동시에 점차 기능적 인간화 되어갈 수 밖에 없다. 내면의 소리를 줄어들고 다른 이들도 찾지 못하게 한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다.

 

4. 시의 적절한 통찰

내가 속해 있는 곳은 그 어떤 곳 보다도 사람들에게 내면의 소리를 찾도록 해야 하는 곳이다. 그곳의 운영 시스템은 너무 평범하고 잠재능력을 억압하고 있다. 일하는 이들은 기능적으로 움직일 뿐이며 공동의존 성향으로 젖어 있다. 내가 그렇게 젖어 있을 때, 저자의 다음 질문은 나를 크게 동요시켰다. 이것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버렸다.

시류를 따르지 않고, 문화의 부정적 도발을 견뎌 내며, 이기심을 억누르고, 비전과 결단력을 개발하고 유지할 내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_ p53

그 힘이 어디서 올까? 당연히 내면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다. 스티븐 코비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 단 두 문장으로 도전하고 있다. 첫째, 내면의 소리를 찾아라. 둘째, 다른 사람들도 찾도록 고무하라. 그는 이 두 기둥을 세우고 나서 <8번째 습관>의 탄탄한 건축을 해 가고 있다.

3장 첫 머리에 "시의 적절한 아이디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고 하는 빅토르 위고의 글이 인용되었다. 나에게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8번째 습관>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닌 나의 상황에 매우 시의 적절한 통찰을 준다. 그래서, 매우 강력하다.

이제 다시 한 번 읽어 가며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겠다. 나는 공동의존 상태에서 기능적 인간의 삶으로 마감되고 싶지 않다. 상호의존 가운데 전인적 인간으로서 이 땅과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이 점점 더 넓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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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영성신학 유진 피터슨의 영성 1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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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란 말이 넘쳐나고 있다. 웬만한 책의 제목에서 이 말을 쉽게 사용하고 있다. 그 동안 나에게 '영성'의 의미는 아주 모호하고 아득했다. 히말라야와 같은 산처럼 높고, 태평양처럼 깊고 넓어서 엄두도 못내는 개념이었다. 영성이라고 할 때, 흔히 수도사들이 연상되어 어느 수도원에 들어가 오랜 기간 수련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도 생각했었다. 다른 한편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면 영성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복잡했고 헷갈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는 좋은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확했고 헷갈리지 않았다. 이 책은 600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쉽겠지만 내용 전개가 치밀하면서 흥미롭다.

삶은 삶이 목적(end)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더욱 풍성히 살기 위해 산다. (p19)

정확한 지적이다. 삶은 무언가를 얻어내거나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풍성하게 살면 그만이다. 삶 그 자체가 전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르고 풍성하며 만족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유진 피터슨은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며 관계 속에서 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관계 맺음이지 역할 수행이 될 수 없다. 내가 타인을 알게 되고 타인이 나를 알게 되려면 정의나 설명, 개념적 분류나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서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저자는 '오직 관계 맺음과 받아들이고 사랑함, 그리고 주고받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에서 삼위일체를 구조와 맥락으로 하여 '수많은 곳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 은유'로 삼고 전개한다. 먼저 놀이터 치우기 작업으로 영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정리해 준다. 그 다음엔 크게 창조, 역사,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여 성경의 방대한 영역을 안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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