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기쁨 믿음의 글들 19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 루이스가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회심에 대한 부분은 11장에서 시작하여 13장에 이르러 깊어 지고 14장 <체크 메이트>에나 와서야 제대로 다루고 있다. 루이스의 회심 이야기는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철저하다. 어떤 심오한 깨달음을 가졌다기 보다 이성에 의해 단단하게 무장한 한 사람이 보다 이성적인 절대자에 의해 깨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회심에 대한 루이스의 서술은 중심을 다루지 못한 듯 하다. 마치, 자신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듯 했다. –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루이스는 그물을 꽤 넓게 펼쳤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시야를 넓히게 된 과정을 서술했고, 탁월한 교사 노크 선생님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군 생활에 대해 잠깐 다루다가 교수 생활을 하던 중 회심의 사건을 겪게 된다.


1_무언가를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행복

 

   
  자유로이 하고픈 바를 만끽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_p25  
   


C. S. 루이스는 자유롭게 하고픈 바를 만끽하는 행복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C. S. 루이스가 문학적 분야에 몰입하게 된 동기는 그에게 지독히도 손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그는 엄지 손가락의 관절 하나가 구부러지지 않아 세밀한 동작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를 공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것이 이야기 쓰기였다. 그렇게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서 오는 한계를 피하다 보니 문학적 동기를 얻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놀이방 탁자 위에 세워진 멋진 장난감 마분지 성보다는 이야기 속의 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법’이라고 고백했다(p24). 그에게 글쓰기는 여러 가지 가운데서의 선택이 아닌 힘들게 찾아 낸 길이지만 그것이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자유롭게 드나 들고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선택을 하든 어쩔 수 없는 길이든 상관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자유와 행복을 위한 공간과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찾아 내야 한다.

 

2_ 지적 오만과 역설적 모순 상태


루이스는 올디와 샤르트르, 와이번이라고 불리는 세 학교 생활을 하면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었다. 올디는 고독한 절대권력 속에서 사는 학교장의 별명으로 지독한 체벌이 있던 곳이었다. 루이스는 그곳에서 한 친구가 기하 증명을 하지 못해 올디에게 심한 체벌을 받는 모습을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한다. 열세 살이 되면서는 예비학교 샤르트르에 입학했다. 이곳 생활은 시야를 넓히게 해 주었지만 루이스는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는 스스로 규칙 - ‘기도할 때, 생생한 상상과 감동이 없이는 단 한 구절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규칙’_p92 - 을 정했다. 모친을 일찍 여의고 감성적 대화가 부족해서인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지는 모르겠다. 지나치게 폭압적인 올디에서의 생활 때문이었을까? 루이스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를 통해 외부의 것을 함부로 받아 들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그의 지적 경향으로서 깊은 염세주의도 한 몫을 했다. 여기에, 청소년기 시절 와이번 학교 생활은 그의 염세주의적 경향을 더 부추기게 되었다.

   
  왜 피조물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도 않았는제 존재햐야 하는 버거운 짐을 져야 하는가?_p107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탁월함을 보인 루이스는 북유럽 신화의 고전 <사슬에 묶인 로키>을 읽으면서 위와 같은 지적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 루이스는 염세주의자로,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분개했다. 동시에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인 오만을 보였고 그와 함께 스스로 어떻게 판단할 수 없는 모순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만해 보이기는 했지만, 루이스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올디의 폭압적 환경은 동일하게 세상의 폭압적 환경을 대변한다. 와이번의  생활은 사회적 모순 구조를 그대로 빼다 박은 것으로 철저하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진 루이스의 방어 태도는 이해할 만 하다. 그는 거대한 권위적 구조 속에서, 그리고, 경쟁적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적 영역을 그토록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탐색한 것이 아닐까?

 

3_  도전, 체크


나름대로 자기 삶에서 철저하게 방어 진지를 쳐 놓고 이만하면 됐지 하던 가운데 루이스는 결정적 도전(체크)을 맞게 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순간은 ‘지식은 한껏 늘되 즐거움은 그만큼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고 ‘열심히 신전을 지었는데 마침내 신이 머물지 않고 날아가 버렸음을’ 화들짝 깨닫게 되었다. 꽃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다. _p240 루이스는 두 가지 치명적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


첫째, 그는 관심과 욕망이 어떤 것에 온전히 쏠릴 때 찾아오는 전율을 원하고 있었다. 전율은 부산물이다. 그저 이미지들의 소용돌이와 감각, 한 순간의 몽롱함뿐이다. 전율에 대해 루이스는 ‘믿음을 자기도취적인 사치로 만들고 사랑을 자위행위로 만든다’_p244고 했다.
둘째, 전율이란 잘못된 목표를 설정해 놓은 다음 그 상태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는 본질에 대한 잘못된 전제로 인해 늘 천박해져 버렸다. 냄새를 잘못 맡은 사냥개처럼 마침내 루이스는 그 쾌락이 궁극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내 상상의 삶은 이상과 같았다.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자리에 지적인 삶이 있었다. 내 정신을 이루고 있었던 이 두 반구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쪽에는 시와 신화의 다도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얄팍한 ‘합리주의’가 있었다._p247  
   


무엇보다 루이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권위에 대한 증오감과 개인주의, 그리고 무법성이었다. 그는 간섭받기 싫었고 그래서, 자기 영혼의 내밀한 곳에 아무도 상관할 수 없는 영역을 원하고 있었다.

4_존귀한 어부


옥스포드에서 첫 2년을  보내고 있던 중 루이스는 지적으로 새로운 외양 New Look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 외양은 한꺼풀씩 벗겨지고 만다. 더 이상 염세주의도 자기연민도 없었으며, 초자연적 요소나 낭만적인 환상도 꿈꾸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최대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던 차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자극을 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로 인해 루이스는 존귀한 어부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 목회를 그저 생계 수단으로 삼을 뿐, 신앙을 잃어버린 아일랜드계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불멸성이라는 주제를 역겨워했다. 둘, 미쳐 가고 있는 사람의 거의 열나흘 밤낮을 함께 보낼 기회를 가졌다. 셋, 새로운 심리학에 쉽게 영향을 받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마지막으로, 베르그송을 접하게 되면서 신의 한 가지 속성인 ‘필연적인 존재’라는 속성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필연적인 존재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우주를 그 주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베르그송 때문에 그는 절대자를 믿게 되었다.


절대자는 루이스보다 더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외적인 자극은 약간만 주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다가오면서 틈을 보일 때 마다 그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어 필연적인 존재를 찾아내게 하니 말이다.

5_ 체크 메이트!


체크 메이트. 체스 경기에서 상대의 말이 더 이상 꼼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가 되면 경기는 끝이 난다. 루이스의 회심에서 체크 메이트를 부르는 몇 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실재론을 내려놓았다. 그 동안 새롭게 갖추고자 했던 외양이 훼손되어 버렸다. 두 번째 수, “무엇이 내 갈망의 대상이냐?”에서  “누가 내 갈망의 대상이냐?”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 대상은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갈망의 대상이다. 세 번째 수, 실재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갖는 기쁨은 어디까지나 절대자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이 부분에 대한 루이스의 설명은 정말 상당히도 관념적이다). 루이스는 그때까지 원심적인 사고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구심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네 번째 수, 루이스는 ‘절대자’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신비화의 색을 덧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겼었다.

C. S. 루이스는 그렇게, 그렇게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지만 마지막에 두개의 문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반대편을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쪽을 택하기로 선택했다. 그의 표현대로 ‘문을 열기로, 갑옷을 벗기로, 고삐를 풀기로’_p321 선택했다. 존 스토트 역시, 그의 회심기에서 그리스도를 ‘천국의 사냥개’로 표현했었는데, 루이스도 자신을 지독하게 쫓아오는 대상을 ‘사냥개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 사냥개들의 무리에 자신이 마음을 두는 모든 이들(플라톤, 단테, 맥도널드, 허버트, 바필드, 톨킨, 다이슨, 기쁨 자체까지_p322)이 포함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몰리던 루이스는 지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붙들려 버렸다.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 본다.

   
  마침내 내 모든 행위와 갈망과 생각이 그 보편적인 영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지극히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나 자신을 점검해 보았다. 그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정욕의 우리, 야망의 도가니, 두려움의 온상, 애지중지 가꾼 증오의 하렘이 거기 있었다. 내 이름은 ‘군대’였다._p324  
   


   
  …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에 있던 ‘절대 영’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진짜 문제에는 아직 도달하지도 못했다. 진짜 무서운 사실은 ‘하나님’ 내지는 내가 말한 바 ‘영’ 같은 존재를 진지하게 믿는 즉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는 데 있었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움직여 서로 들어맞어 벌떡 일어섰듯이, 지적인 장난거리에 불과했던 철학 이론이 울룩불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수의를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산 존재가 되어 버렸다._p325  
   


   
  …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이런 조건의 회심자까지 받아주신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그래도 제발로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끌려가는 와중에도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화를 내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기회를 찾는 탕자에게도 하늘의 높은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그 누가 찬양하지 않으랴? ‘끌고 오라’는 것은 악한 사람들이 너무 남용한 탓에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말이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잴 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준엄함은 인간의 온화함보다 따뜻하다. 그의 강요는 우리를 해방시킨다._p328
 
   


루이스는 지옥의 단 한 가지 법칙인 “나는 내 것이다.” 주장을 인용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자신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하던 시절이 지옥의 시간이었음을 루이스는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나는 하나님 당신 것입니다.”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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