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은 너무 불편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얼룩지고 지저분한 몰골로 거울 앞에 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주제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고, 제가 속해 있는 쪽(?)이 고통의 문제를 진실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불가항력의 문제를 불성실하게(혹은 너무 피상적으로) 대하고 있서서입니다. 영화 [밀양]은 아주 불편하게 했지만 오히려 감사와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쪽이 아닌 다른 쪽에서 이쪽에서 해야 할 물음을 진솔하게 해주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이도 사색을 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성찰도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이 영화가 불편했지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습니다. 믿음, 용서, 고통, 체험, 전도, 인생, 사랑, 이렇게 일곱 가지 부분입니다. 각각의 주제는 신앙에 소중한 요소들입니다. 사실, 이 주제들은 얼마나 많이 오염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고결한 빛깔과 향기를 내지 못하고 변색되고 냄새가 납니다. 지난 해 영화 [밀양]을 깊이 읽은(?) 내게 그 영화를 다룬 이 책은 너무 반가운 내용입니다.

1. 하나님 像을 수정하자

기존의 하나님 모습은 ‘일방적으로 강한 하나님, 드러난 하나님,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 무슨 일이든 단번에 해치우는 하나님, 강력하고 신속한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독선적이며 일방적이고 무례하며 오만하다고 비판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 모습과 달리 저자는 ‘숨어 계시고, 낮은 데로 임하며, 조용히 머물러 있고, 감싸시는, 대면하고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후반부에서도 저자는 불타는 햇볕으로가 아니라 비밀 햇볕으로, 태풍으로가 아니라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다(P123). 그와 같이 ‘그 사람의 신관이 그 사람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자가 틀리고 후자가 맞다는 이원론적인 구분은 아닐 것입니다. 전자는 부성적 모습이고 후자는 모성적 모습입니다. 문제는 한쪽 모습 만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왠지 이 나라 교회들이 부성적 하나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싫습니다. 개인적인 내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교회들의 부성적 신관은 참 아버지의 느낌이 나지 않고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강하고 빠른 속도에서는 좀처럼 감각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좋습니다.

 

2. 용서 자판기 

영화 [밀양]에서 가장 마뜩잖은 장면, 가장 화가 나는 장면은 신애가 교도소에 있는 박도섭을 찾아 가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러 간 것이고 박도섭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말합니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의 기독교가 용서를 얼마나 값싸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용서에 대한 그와 같은  취급 방식을 ‘용서 자판기’ 라고 했습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내용물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회개’ 라는 동전을 넣으면 덜컥 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건 아닙니다. 김영봉은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용서에 필요한 3R을 확인해 줍니다. 뭐냐면, 회개  Repentance와, 보상 Restitution, 개혁 Reformation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자신들의 컨텐츠를 잘 포장해 놓았습니다. 복음과 신앙의 삶을 그럴 듯 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강조하면서 기성품처럼 쌓아 놓았다가 전해주듯이 합니다. 값싸게, 값 없이 손쉽게 전해줍니다.

사실 용서에는 얼마나 비싼 값이 치러졌습니까? 예수의 고난과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값을 수 없는 죄값이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그분의 고난과 희생의 값마저도 덤핑처리하듯이 대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고난과 고통 앞에서

고난과 고통 앞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어합니다. 나 부터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디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보니 고통과 고난은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끌어 안든지 맞서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양]에서 신애는 연속적으로 닥쳐 온 고통 앞에서 계속 도피하고자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왔고, 아들이 죽자 신앙을 가졌고, 끝내는 자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냥 보면, 용기 있는 것 같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약한 자신을 위장해 보려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오기일 수도 있고 나름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신애와 같은 우리들을 향해 던지는 저자의 말 가운데 두 가지를 기억해 봅니다.

하나는 고난을 끌어 안으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의 심장에 들어가 그 심장을 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p76 이 말은 얼마나 힘이 있는가요?

또 다른 것은 이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참 인생을 살자고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신애가 자기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입니다. 그녀를 향하던 카메라는 그 다음 그녀가 앉은 자리 옆 지저분한 곳에 내리고 있는 비밀 햇볕을 비추면서 끝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 끝까지가 연극 무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신애는 도피적이고 거짓된 무대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봅니다.

고난을 끌어 안으라고, 이제는 도피와 거짓의 무대 위에서 내려와 살라고 하는 저자의 강조는 저의 마음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4. 세밀한 영적 돌봄

"안 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쪼금 마음이 편하고, 그렇데예"

교회를 두고 하는 종찬의 대사입니다. 이 말은 마치 교회에게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저자는 교회가 겉돌고 있다고 하고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구원의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성찰이 담긴 의문을 갖습니다. 이 현실에 별 볼일 없는 기능을 하고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수 많은 신애와 같은 이들에게 교회는 구원의 통로를 발견하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연극의 무대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자는 세밀한 영적 돌봄을 역설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영적 돌봄 없이는, 신애 같은 사람들이 생기는 일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p174

맞는 말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공장이 아니라 농장이어야 합니다. 자꾸만 공장化 되어가는 현실이 버겁습니다. 효율과 대량생산과 많은 인원, 획일성과 신속성, 기계적이며 정확한 처리를 강조하는 공장 환경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신속하게 생산량을 늘려야 하기에 세심하게 돌볼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서투른 공장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농장은 공장과 다릅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는 가지, 잎, 꽃, 열매 하나하나에 세밀한 손길을 다합니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직접 돌보아 줍니다. 그래서, 농부는 익은 열매를 손에 얹었을 때 가장 기쁘다고 합니다. 그 농장에는 바람과 햇빛, 비와 해오름과 해내림 속에서 생명들이 돌봄을 받습니다. 그런 생명의 농장에 하나님은 항상 비밀 햇볕으로 계시고 미풍으로 다가와 주십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런 영화 [밀양]을 통해 제대로 성찰해 낸 이 책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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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1.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풀어낼 수 없겠지요. 고통의 문제가 그와 같습니다. 풀어 낼 수도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고통은 두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고통이란 자극은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도. 

문제를 풀기는 커녕 이해 능력 조차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간단합니다. 그 문제를 들고 문제를 있게 한 이에게 찾아가면 됩니다. 고통을 있게 한 이에게 가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될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을 찾아간 학생처럼 공손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물어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의를 드려야 할까요? 혹시,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통을 그 앞에 던지면서 짜증을 내고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이스는 이 고통의 문제를 곧 바로 그 문제를 있도록 한 분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서론을 지나자마자 ‘하나님의 전능함’과 ‘하나님의 선함’을 다룹니다. 사실,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너무 괴롭기 때문이고 풀어낼 능력, 견뎌낼 능력이 없어서입니다. 그런 우리는 이런 항의 섞인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째서 불행을 경험케 하는 것일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인간에게 고통이 있게 했을까?"(p41)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 어설픈 논리이기에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자유를 의인화시키지 말자고 합니다. 사실, 그런 모습은 책임을 회피하는 꼴이 되겠지요. 고통의 시작은 위에서 주었기 때문이거나 방치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근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책에선 고통을 겪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다루어집니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악함’과 ‘인간의 타락’입니다. 당연, 기독교적인 접근입니다.

인간의 악함은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타락’을 단순히 정해진 칸과 말 움직이는 법을 지키지 않은 체스게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루이스는 단순히 규칙위반으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부분, 즉, ‘불순종’을 언급합니다. 불순종에 대해 어거스틴이 ‘피조물이 제 자리를 벗어나 자립하여 제 힘으로 존재하려 한 결과’ 라고 했습니다. 이와 연결하여서 루이스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자아로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을 자기의 중심으로 택하느냐 자아를 중심으로 택하느냐 하는 무서운 양자택일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p124



‘무서운 양자택일의 길’이라고 하는 부분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이 타락이며 여기서 우리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루이스는 이 타락의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자아를 되돌려 드리자고 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본질적으로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타락하여 자기중심으로 살기에 고통은 (루이스의 표현대로) ‘가면을 벗은 악, 명백히 눈에 뜨이는 악, 무시할 수 없는 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순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p155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 루이스는 무시할 수 없는 악으로서의 고통을 아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다른 모습으로 고통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고통의 본질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피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던져버리지 않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제시한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합니다.

루이스는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환상이 깨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과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모두 우리 소유이고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는 환상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을 비상용 낙하산처럼 대하지 말자고 합니다. 비상시 119를 부르듯이 찾지 말고 처음부터 조종석을 내어드리라고 말입니다.

3. 이 책 <고통의 문제>를 오래 동안 들고 다녔습니다. 문제를 풀어 보려고요. 풀어 볼 수 없다면, 조금의 이해라도 해  보려구요.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고통의 경험도 없고 지식도 바닥인지라 더욱 캄캄해졌습니다. 한 가지 배운 것은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고통에 대하여는 회피도 책임전가도 거부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고통에 대하여 거부도 회피하지도 책임전가도 하지 앟는 루이스의 접근은 정말 인간다운 자세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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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능력 - 토머스 머튼의
토머스 머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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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능력, 원제 INNER EXPERIENCE]은 바닷속 해구처럼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책이다. 이 제목을 보니 나무의 뿌리 이미지가 떠오른다. 묵상은 쭉 뻗어 올라간 나무줄기와 무수한 가지보다 땅속 어두운 곳에 깊이 내려간 뿌리에 해당한다. 아무리 커다란 나무이더라도 그 줄기와 가지의 모습은 노력만 한다면 모두 헤아려 볼 수 있으나 땅 아래로 내리 뻗은 뿌리는 누가 헤아려 본다 말인가? 머튼의 묵상은 내적 경험, INNER EXPERIENCE이기 때문이다.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묵상이란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은 그 삶이 풍성하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밀리듯이' 묵상의 뿌리가 깊은 삶은 요동치 않는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묵상을 살아 있는 계시로 보는 ‘발견’이다. 2부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대화’라고 했으며, 3부는 영원한 안식을 얻는 삶으로 ‘동행’을 다루었다.

1.
머튼에 의하면 인간은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다. 상황에 마구 휘둘리고 있고 용기와 믿음을 상실했으며, 자신의 내적 자아로부터 추방당했다(p26~27). 묵상은 이와 같은 현실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도구이다. 그 되찾음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다. 머튼은 기독교적 묵상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접촉으로. 둘,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것. 셋,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 넷, 뜻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접촉과 이루어감과 발견, 그리고, 순종을 통해 묵상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렇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단어로 ‘주입된 묵상’이 다뤄졌다. 주입된 묵상은 간접적 묵상과 대비된다. 묵상의 깊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무지 도달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협력과 능동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 여기에 하나님 쪽에서 밝혀주는(주입된, 넣어주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주입된 묵상의 의미들을 설명하는 초입에서 머튼은 이런 말을 한다.

더 낮고 초보적인 신비적 직관은 물질계에서 나온 상징에 의존하며 거기서 배웁니다. 더 높고 온전한 묵상은 감각 이미지와 논증적 이해를 넘어서 무지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p84

감각과 논증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그분이 주입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11가지 의미들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초반부는 무척이나 혼돈스러웠다. 아무것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너무 깊어 숨이 막혀버릴 듯 했다.

2.
묵상과 기도는 그분과의 만남이자 대화의 장소이다. 머튼은 습관과 인습으로 돌아가지 말고 깨어나서 자기 안의 비실체에 초연해지라고 한다. 대화라고 했지만 머튼의 말대로 그것은 ‘씨름’과 같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항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놓아서는 안 되는 씨름이다. 그래서, 머튼은 감각의 어두운 밤, 영의 어두운 밤. 감각의 밤이 되어야 비로서 주입된 묵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면 죽을 것만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먼저 경험해 본 머튼은 묵상은 몸과 마음의 해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묵상한다고 현실에서 물러나거나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묵상을 통해 피상적 존재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넘어섭니다.” p152


3,
3부의 제목에 ‘동행’을 ‘영원한 안식을 얻는 삶’과 함께 다룬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함께 함’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머튼은 ‘묵상을 갈망하십시오’ 라고 한다. 묵상은 결코 정적일 수 없다. 그분을 묵상하는 일이고 그분이 계속 움직이고 있기에 묵상하는 나도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묵상을 갈망함은 하나님을 갈망함이며 하나님을 갈망함은 그분과의 동행을 갈망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묵상은 한 번에 뛰어 오르지 못하고 차근차근 밟아가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다.

묵상하는 길은 길을 만들며 가는 산행과 같다. 무수한 덤불들을 헤치며 가야 하고 험한 길로 가기도 하며, 길을 한참이나 헤메이기도 한다. 그 길 찾음에는 수 없는 장애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여전히 메여 있는 죄의식을 발견하기도 하고 근본도 모르고 준비되지 않은 채 나서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 보다 자기 모습을 주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유와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의를 한참이나 드러내기도 한다.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찾아 가야 하는 산행에서 서두르게 되면 결국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그 때는 차근차근 헤아리면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돌아갈 수 도 있겠지만 장애물들과 내 안의 문제들을 정리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내적 자아 속에서 헤메이다가 그만 갇혀 버리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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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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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피에르 신부, 마음산책

단순함 - 지금까지 얻은 경험과 앎을 토대로 볼 때, 구도求道의 과정(혹은 믿음의 길)은 너무 복잡해 보인다. 진리 자체가 복잡해서일까? 그건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하여 그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이 그곳에 가는 길을 그토록 복잡하게 얽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구도의 길은 의외로 단순한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에 담겨진 피에르 신부의 내면과 외면은 복잡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단순했다.

기쁨 -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쁘게 할 일이다. 구도의 길을 가는 것도 기쁘게 걸어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진지하게(?) 산다. 단순하게, 그리고, 기쁘게 구도의 길을 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한 기쁨”은 일평생 단순하게 기쁘게 구도의 길을 걸어 간 노 신부의 힘 있는 고백이다.


1. 상처입은 독수리들

저자는 ‘엠마우스’ 라는 공동체를 세워 부랑자들과 빈민들을 위해 살았다.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해 철저한 긍정과 무한 가능성을 기대하는 사람이다. 이 책의 1부 제목은 ‘상처입은 독수리들’이다. 이렇게 본 이유는 그가 인간을 광대한 지평과 무한한 공간을 갈구하는 존재인 동시에, 비상(飛翔)하지 못하는 구속받은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광대한 지평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온갖 장애물에 부딛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그렇다(p29, 38). 그래서, 그는 희망을 소망과 구별하며 무엇보다 영생을 확신한다. 피에르가 갖는 희망은 기다림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다(p57). 하지만, 희망이 어디 그렇게 쉽게 붙들릴까? 세상은 온통 부조리 투성이인데? 믿을만 한 것은 신비의 커튼 뒤로 숨어 있는데? 그 속에서 사는 우리는 세상이 부조리로만 도색된 듯이 보인다. 그런데, 피에르는 여기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각인해 놓은 사랑을 보라고 한다. 이 사랑을 볼 수 있다면 희망도 붙들 수 있다. 그것은 희망이란 것이 감춰진 그 신비한 사랑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피에르는 사람을 향한 긍정과 이러한 희망을 평생을 품고 살아 갔다. 난 이와 같은 영적 지구력(?)이 너무나 부럽기만 하다. 지나칠 수 없는 물음이 있다. 무엇이 그를 그때까지 그렇게 강하게 견디게 한 것일까? 보통은 하여(何如) 의 마음이기 쉬운데 그를 평생 단심(丹心)으로 살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 2부에서는 그 동인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인은 다름 아닌 타인이 아닌 듯 싶다.


2. 공감과 만족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샤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너는 홀로 족하기를 원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홀로 족하거라!'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_ p227



피에르는 이와 같은 표현을 중반부에서,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거듭 다루었다. ‘타인과 공감하는 자, 홀로 만족하는 자’ 거의 피에르의 좌우명인 듯 하다. ‘공감’이란 말은 한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다. 둘 이상의 관계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그와 달리, ‘만족’이란 말은 얼마든지 한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다. 예수의 生이 그랬다. 그는 결코 홀로 만족하지 않고 인류 모두와 공감하였다. 어떤 종교든, 누구의 신앙이든 영성의 깊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홀로인지 아니면 타인과 함께인지에 의해.

피에르는 그래서 사람을 신자와 비신자 라는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p93). 아~! 이 말은 얼마나 육중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1부에서 ‘희망’을 말했다면, 2부에선 ‘믿음’을 말한다. 타인과의 공감을 위해선 믿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은 너무 불확실하게 보이는 개념이다. 현실이 불확실하기에 그런다. 이런 믿음을 두고 피에르는 믿음을 ‘확실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품는 확신’이라고 했다. 희망이 사랑과 연결된다고 했듯이 피에르는 믿음도 사랑의 영역에 있다고 한다(p77).

피에르에게는 세 가지 확신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은 사랑이다, 두번째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번째는 사람에겐 자유가 있기에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대부분은 자유를 시간을 낭비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며 자포자기하는데 낭비한다. 피에르는 자유가 사랑하기위해 허락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3. 만남들

피에르의 만남은 그 영역이 제한되지 않았다. 자기 땅에만 머물지 않고 바다를 건너 인류와 만났다. 그렇다고 그는 사람만 만나지 않았다. 기도와 묵상과 예배를 통해 하느님과 일상에서 만났다. 만남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죄와 고통과 죽음과 용서하지 못함이다. 이런 요소들을 충분히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이 된다. 하지만 피에르에게는 걸림이 되지 않았다. 고통은 기꺼이 받아들이자고 한다. 세상이 의아해 할 정도의 용서도 행한다. 죽음조차도 ‘오랫동안 늦춰진 친구와의 만남과 같다’고 까지 말한다(p225).

믿음, 사랑, 희망, 자유, 이와 같은 개념들을 우리는 얼마나 복잡하게 말하며, 비관적으로 비현실적으로 적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피에르와 같은 이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은 그는 그 개념들을 품으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기쁘게 살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현실적으로 살아냈다.

삶에 대해 몽상하지 말자. 삶을 만들어가자. 공허한 말에 만족하지 말고 사랑하자. 그리하여 시간의 어둠에서 빠져나갈 때, 모든 사랑의 원천에 다가서는 우리의 마음은 타는 듯 뜨거우리라.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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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노래 - 위대한 복음전도자, 스탠리 존스의 영적 자서전 하나님의 사람 5
스탠리 존스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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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형식이 있다. 나는 주로 잔잔한 독백이 들어 있는 영화로 <쇼생크 탈출>과 같은 류이다. 독백은 화면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온도나 내면의 깊이를 담아낸다. 그런 영화를 보면, 마치 내가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경험을 한 듯 해서 좋다.

 

이 책 <순례자의 노래>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읽는 동안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스탠리 존스가 바로 내 앞에서 직접 자기 인생을 죄다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영화는 기껏해야 100여 분이면 되지만, <순례자의 노래>를 읽으면서 저자와 89년을 함께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만큼 깊이 읽은 것 같다.


책 분량이 796 쪽에 달했다. 그렇게 무리해서까지 한 개인의 인생을 눈이 빠지게 살필 여유가 없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무척 흥미 진진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도가 컸다. 매우 깊이 있으며 진솔한 서술이다. 스탠리 존스는 일평생을 인도에서 순례자로 살면서 순례자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의 주요 음표는 아슈람과 원탁, 중재사역과 배려이다. 그 네 가지 음표를 가지고 자유와 훈련을, 신적 긍정을, 실패와 건강을 노래했다.

 

1. 순례자의 나라, 이상이 아닌 현실에


스탠리 존스의 노래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복음이고 그리스도 예수이며 하나님의 나라였다. 조를 옮기고 박자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불러도 내용은 동일했다. 스탠리 존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스탠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이상주의자로 여겼지만 스탠리는 복음을 가지고 현실주의자로 살았다. 그래서, 스탠리는 ‘저 예수’를 말하지 않고 ‘이 예수’를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과거에서도 배우고 미래에도 대비해야 하겠지만 오늘을 바르고 제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저 예수’가 아닌 ‘이 예수’가 되어야 한다.

 

2. 순례자의 노래

 
노래 #1. 변주곡 <자유와 훈련>


목적에 맞게 구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훈련이다. 훈련의 최종 상태는 ‘자기포기’. 그 훈련이 없이는 자유도 없다. 자신을 그렇게 훈련시켜 가면서 스탠리는 말씀에 입을 맞추었고 기도를 생명선으로 여겼다. 저자의 삶은 변주곡처럼 자유로웠다. 회심 후 청년 때에 불모의 땅 인도로 들어 갔고 교단이 감독 자리에 앉혔으나 다음 날에 주저 없이 사직했고 나이가 많아 공식 은퇴는 하였지만 순례자로서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평생 변주곡처럼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의 변주곡은 항상 그리스도께의 굴복과 순종이었다. 자기 멋대로의 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변주였던 것이다. 순례자의 노래는 ‘a way’ 위에서가 아니다. 그는 그 노래를 ‘The Way’ 위에서 불렀다.

 

노래 #2. 아리아 <신적 긍정>


세상은 웬만해선 ‘그래’, 혹은 ‘예’ 라고 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아니’, ‘안돼’ 라고 한다. ‘넌 안돼!’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화가 나고 낙심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신적 긍정을 말했다. 스탠리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1:20)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 그것이 바로 신적 긍정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의 긍정이 아니다. 스탠리는 신적 긍정을 위해선 그 이전에 ‘아니’를 거쳐야 하고 삶에 긍정하기 전에 예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적 긍정을 깨달은 스탠리는 인도의 천민들과 바라문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었다.


세상은 냉소적이다. 특히,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이들이 중심에 있는 이들과 강하고 부한 이들에게도 냉소적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이 쉽게 부정을 말하고 경험했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부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 당신의 긍정을 가르쳐 주신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신적 긍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눈이 먼 바울에게 안수해 준 아나이아도 신적 긍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코 바울을 찾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순례자 스탠리 존스는 그런 땅에서 <신적 긍정, Divine Yes>이라는 아리아를 불렀다.

 

노래 #3. <실패> 불협화음? 아니, 성공적인 연주


완벽한 연주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실패와 연습이 있다. 저자는 그 실패와 연습을 자신의 노래 목록에 넣어 놓았다. 스탠리는 일본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무던 애를 썼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막으려고 중재했다. 중국에서도 장제스 총통과 마셜 펑 위샹 장군, 그리고, 장제스와 장쉐린 장군을 중재하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에 분리와 분열, 전쟁을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신적 긍정’의 사람이어서 그럴까? 실패했어도 지속적으로 화해와 중재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는 성공과 실패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다만 인도하심에 따라 옳은 일을 하고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수중에 맡겨야 한다는 교훈을 경험했다(p661).


스탠리는 말한다. 예수 안에서 실패와 망하는 것과 슬퍼하는 것은 오히려 성공과 흥함과 기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왜냐하면,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고,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실패작이자 가장 위대한 성공작이기 때문이다”.

 

노래 #4. 왈츠풍 노래 <건강>
 

개인적으로 필자에게는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건강한 자신’ 이라는 가치가 있다. 몸, 마음, 영혼 어느 것 하나라도 건강하지 못하다면 좋은 도움이 못되기 때문이다. 스탠리 존스는 자신을 건강하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든아홉의 나이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에게 예수와 건강은 동의어였다. 그의 건강 비결은 세 가지다. ‘은혜’, ‘곡류’, ‘상식’. 곡류에서 얻는 영양분을 섭취하고 상식에 맞는 생활 리듬을 유지했다. 그런 건강 관리를 위한 가치는 ‘은혜’였다. ‘몸은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고전6:13), 그리고, ‘몸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롬12:1)에 따라 자기 몸을 드림으로 관리했다. 스탠리에게 최고의 강장제는 성령이고, 비타민은 사랑이며, 확실한 몸 치료법은 창의적인 활동이었다. 건강에 대해 왈츠풍으로 노래하였지만 그 속엔 여전이 고온의 열정이 이글거리는 듯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즐기며 하는 사람이다. 의무감이나 성공, 성취와 인정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 즐기는 사람은 웃을 줄 안다. 스탠리 존스는 웃으며 노래했다. 사실 실제로 선교사의 生은 낯섦과 불안과 불쾌함의 연속이다. 문화와 종교와 사고방식과 역사와 피부색이 다른 곳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일을 웃으며 노래했다. 그에게는 기쁨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충분히 웃을 이유가 되었다. 그의 유쾌함은 숙취가 없는 유쾌함이었다(P685). 그는 고차원적인 웃음을 주고 싶어 했다. 가장 고차원적인 웃음은 자신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웃음이다. 그래서, 스탠리는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순례자라면 돌아갈 고향이 있을텐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순례지 인도가 그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1973년 스탠리 존스는 여든 아홉의 나이에 그곳에서 순례자의 노래를 멈추었다.
 

<p.s. 번역 또한 매우 잘 된 듯 하다. 거의 8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매끄럽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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