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 위대한 복음전도자, 스탠리 존스의 영적 자서전 하나님의 사람 5
스탠리 존스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형식이 있다. 나는 주로 잔잔한 독백이 들어 있는 영화로 <쇼생크 탈출>과 같은 류이다. 독백은 화면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온도나 내면의 깊이를 담아낸다. 그런 영화를 보면, 마치 내가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경험을 한 듯 해서 좋다.

 

이 책 <순례자의 노래>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읽는 동안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스탠리 존스가 바로 내 앞에서 직접 자기 인생을 죄다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영화는 기껏해야 100여 분이면 되지만, <순례자의 노래>를 읽으면서 저자와 89년을 함께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만큼 깊이 읽은 것 같다.


책 분량이 796 쪽에 달했다. 그렇게 무리해서까지 한 개인의 인생을 눈이 빠지게 살필 여유가 없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무척 흥미 진진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도가 컸다. 매우 깊이 있으며 진솔한 서술이다. 스탠리 존스는 일평생을 인도에서 순례자로 살면서 순례자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의 주요 음표는 아슈람과 원탁, 중재사역과 배려이다. 그 네 가지 음표를 가지고 자유와 훈련을, 신적 긍정을, 실패와 건강을 노래했다.

 

1. 순례자의 나라, 이상이 아닌 현실에


스탠리 존스의 노래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복음이고 그리스도 예수이며 하나님의 나라였다. 조를 옮기고 박자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불러도 내용은 동일했다. 스탠리 존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스탠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를 이상주의자로 여겼지만 스탠리는 복음을 가지고 현실주의자로 살았다. 그래서, 스탠리는 ‘저 예수’를 말하지 않고 ‘이 예수’를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과거에서도 배우고 미래에도 대비해야 하겠지만 오늘을 바르고 제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저 예수’가 아닌 ‘이 예수’가 되어야 한다.

 

2. 순례자의 노래

 
노래 #1. 변주곡 <자유와 훈련>


목적에 맞게 구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훈련이다. 훈련의 최종 상태는 ‘자기포기’. 그 훈련이 없이는 자유도 없다. 자신을 그렇게 훈련시켜 가면서 스탠리는 말씀에 입을 맞추었고 기도를 생명선으로 여겼다. 저자의 삶은 변주곡처럼 자유로웠다. 회심 후 청년 때에 불모의 땅 인도로 들어 갔고 교단이 감독 자리에 앉혔으나 다음 날에 주저 없이 사직했고 나이가 많아 공식 은퇴는 하였지만 순례자로서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평생 변주곡처럼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의 변주곡은 항상 그리스도께의 굴복과 순종이었다. 자기 멋대로의 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변주였던 것이다. 순례자의 노래는 ‘a way’ 위에서가 아니다. 그는 그 노래를 ‘The Way’ 위에서 불렀다.

 

노래 #2. 아리아 <신적 긍정>


세상은 웬만해선 ‘그래’, 혹은 ‘예’ 라고 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아니’, ‘안돼’ 라고 한다. ‘넌 안돼!’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화가 나고 낙심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신적 긍정을 말했다. 스탠리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1:20)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 그것이 바로 신적 긍정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의 긍정이 아니다. 스탠리는 신적 긍정을 위해선 그 이전에 ‘아니’를 거쳐야 하고 삶에 긍정하기 전에 예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적 긍정을 깨달은 스탠리는 인도의 천민들과 바라문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었다.


세상은 냉소적이다. 특히,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이들이 중심에 있는 이들과 강하고 부한 이들에게도 냉소적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이 쉽게 부정을 말하고 경험했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부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 당신의 긍정을 가르쳐 주신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신적 긍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눈이 먼 바울에게 안수해 준 아나이아도 신적 긍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코 바울을 찾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순례자 스탠리 존스는 그런 땅에서 <신적 긍정, Divine Yes>이라는 아리아를 불렀다.

 

노래 #3. <실패> 불협화음? 아니, 성공적인 연주


완벽한 연주 뒤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실패와 연습이 있다. 저자는 그 실패와 연습을 자신의 노래 목록에 넣어 놓았다. 스탠리는 일본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무던 애를 썼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막으려고 중재했다. 중국에서도 장제스 총통과 마셜 펑 위샹 장군, 그리고, 장제스와 장쉐린 장군을 중재하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에 분리와 분열, 전쟁을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신적 긍정’의 사람이어서 그럴까? 실패했어도 지속적으로 화해와 중재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는 성공과 실패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다만 인도하심에 따라 옳은 일을 하고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수중에 맡겨야 한다는 교훈을 경험했다(p661).


스탠리는 말한다. 예수 안에서 실패와 망하는 것과 슬퍼하는 것은 오히려 성공과 흥함과 기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왜냐하면,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고,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실패작이자 가장 위대한 성공작이기 때문이다”.

 

노래 #4. 왈츠풍 노래 <건강>
 

개인적으로 필자에게는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건강한 자신’ 이라는 가치가 있다. 몸, 마음, 영혼 어느 것 하나라도 건강하지 못하다면 좋은 도움이 못되기 때문이다. 스탠리 존스는 자신을 건강하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든아홉의 나이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에게 예수와 건강은 동의어였다. 그의 건강 비결은 세 가지다. ‘은혜’, ‘곡류’, ‘상식’. 곡류에서 얻는 영양분을 섭취하고 상식에 맞는 생활 리듬을 유지했다. 그런 건강 관리를 위한 가치는 ‘은혜’였다. ‘몸은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고전6:13), 그리고, ‘몸을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롬12:1)에 따라 자기 몸을 드림으로 관리했다. 스탠리에게 최고의 강장제는 성령이고, 비타민은 사랑이며, 확실한 몸 치료법은 창의적인 활동이었다. 건강에 대해 왈츠풍으로 노래하였지만 그 속엔 여전이 고온의 열정이 이글거리는 듯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즐기며 하는 사람이다. 의무감이나 성공, 성취와 인정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 즐기는 사람은 웃을 줄 안다. 스탠리 존스는 웃으며 노래했다. 사실 실제로 선교사의 生은 낯섦과 불안과 불쾌함의 연속이다. 문화와 종교와 사고방식과 역사와 피부색이 다른 곳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일을 웃으며 노래했다. 그에게는 기쁨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충분히 웃을 이유가 되었다. 그의 유쾌함은 숙취가 없는 유쾌함이었다(P685). 그는 고차원적인 웃음을 주고 싶어 했다. 가장 고차원적인 웃음은 자신을 보고 웃을 줄 아는 웃음이다. 그래서, 스탠리는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순례자라면 돌아갈 고향이 있을텐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순례지 인도가 그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1973년 스탠리 존스는 여든 아홉의 나이에 그곳에서 순례자의 노래를 멈추었다.
 

<p.s. 번역 또한 매우 잘 된 듯 하다. 거의 8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매끄럽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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