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본 독재자 - P76

기분이 안 좋아서
지구본을 마구 돌렸다
손바닥으로 탁! 탁! 빛의 속도로 돌렸다

머리 아파 그만 좀 돌려!
정신이 나갈 것 같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지구본 위에 사는 한 사람이 소리쳤다
한국말을 하는 걸 보니 한국 사람인가 보다

어쩌라고! 내 마음이야!
세상이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지구본을 더 세게 돌렸다
바닷물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땅에 금이 가도록
돌렸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도록 - P76

겨울 왕국 국민들 - P77

저 얼음물 담긴 물병을 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 같지?
사실 저건 탈출이야

추워서 못 살겠다고
하나둘 밖으로 기어 나오는
물방울 국민들이야 - P77

나무 의지 - P78

의자에서 삐죽 나온 나사가 빠지면
의지가 됩니다

와르르 무너져서
토막 난 나무가 되고 싶은
의지가 됩니다
더는 내 몸무게를 참지 않겠다는
의지가 됩니다
모닥불처럼 활활 머리를 풀고 싶다는
의지가 됩니다
살고 싶다는 의지가 됩니다 - P78

살아 보겠다는 말 - P79

마스크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안경알이 하얘져 앞이 안 보여

살겠다고 쓴 마스크
보겠다고 쓴 안경

둘이 다툰다, 한마디로 말하면
살아 보겠다고
늦게까지 일하는 엄마 아빠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살아 보겠다고
앞이 하얘질 때까지
몸부림치는 나비
살아 보겠다고
몸을 칭칭 거미줄로 감는
거미

앞이 하얘서 앞이 캄캄할 수도 있구나 - P79

벽돌 깨기 게임 1 - P80

나는 벽돌을 깹니다
떨어지는 공을 막대기로 받아서
위에 쌓인 벽돌을 깨는 게임입니다

빨간색 벽돌, 오렌지색 벽돌, 하늘색 벽돌, 파란색 벽돌이
공에 맞습니다, 회색 벽돌은
조금 더 단단해서 여러 번 두드려야 깰 수 있습니다

공 혼자서
저 많은 벽돌을

하나하나 깹니다, 공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할 일이 있을 때도
할 일이 없을 때도
나는 벽돌을 깹니다, 왜 깨는지도 모르고 - P80

깨 버리는 아침잠처럼

벽돌을 깰 때마다
조금씩 비어 가는 세상

벽돌을 다 깨도
언제나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언제나 좀 더 많은 벽돌, 벽돌, 벽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P81

벽돌 깨기 게임 2 - P82

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      벽돌
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      벽돌벽돌
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벽돌      벽돌벽돌벽돌
벽돌              벽돌벽돌벽돌벽돌       벽돌벽돌벽돌

                                                       운 - P82

------>막대기------> - P82

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바닥
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파닥 - P82

※모든 벽돌을 다 깨 주세요 - P82

※공은 뒤집히면 운이 됩니다. 골대로 들어가는 공은 다운입니다 - P82

※공 또는 운이 바닥에 닿으면 게임 끝 - P82

- P83

못된 아이가 벽에 박혔다
뾰족한 부분 때문이다
나 여기 있어! 못된 아이가 외쳤지만 쾅쾅
못질 소리에 묻혀 버린
못된 아이
못될 수도 있지 못할 수도 있지
못날 수도 있지 못생길 수도 있지
못에 박힌 말이
이렇게 많은데
한 마디도 안 들리게 쾅쾅

벽에 박힌 못에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린 뒤로
사람들은
못된 아이는 못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만 보았다 - P83

공벌레의 일기 - P84

  나는 공이라고 했는데 다들 농담인 줄 안다. 공벌레처럼몸을 동그랗게 말고 나는 곳이다. 나는 공이다 밤새 주문을 외우자
엄마와 아빠가 공이 된 나를 서로에게 패스한다. 나는공이라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툭툭 공을 건드려 본다. 이거 진짜 공 맞아? 구슬을 치듯 톡 손가락 끝으로 공을 친다. 공은 데굴데굴 굴러간다. 나는 공이다. 나는 공이다

  공이야? 콩이야? 선생님은 잠시 망설인다. 비비탄 총알인가? 하고 말한다. 선생님! 이런 색깔 비비탄 총알이 어디있어요? 말하고 싶지만 나는 공이다. 나는 공이다

  공은 뒤집으면 운이 되지만 공은 위아래가 없다. 운이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는 공이 더 좋다. 나는 공이다, 나는공이다. 나는
  일어나서 슬슬 씻어야지 - P84

  엄마가 공을 깨운다. 동그랗게 말고 있던 몸을 펴자 팔,
다리, 잠결에 퉁퉁 부은 얼굴까지 다 드러난다. 내가 된다. - P85

후드 티 - P86

후드티를 입고 후드를 쓰면
내 얼굴은 따뜻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앞주머니에 두 손을 새끼 캥거루처럼 넣고
고개를 숙이면
이게 바로 후드티가 가르쳐 준 후드 티의 자세

어른들은 좀 어두워 보인다는데
아니, 난 생각보다 밝음
모닥불을 둘러싼 원시인들처럼
떡이 된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해도
괜찮음 후드 티만 입으면
후드티 친구들끼리 모여 모락모락
흰 입김을 내뿜으며
뭐라도 피우는 듯 얘기를 나누지
오해하지 마요 이야기꽃을 피우는 거니까 - P86

요샌 매일 후드티를 입어
넷이 사는 집보단
혼자 사는 동굴이 더 좋으니까 - P87

초록색 - P88

녹색 신호 - P88

감자 머리에 파란 싹이 돋은 부분이 있다

거기에는 독이 있다
엄마가 칼로 그 부분을 도려내었다

아기 엉덩이에서 파란 반점을 본 적이 있다
만두피에 비치는 연둣빛처럼
시퍼런 게 아파 보였다
혹시 독은 아닐까? 몸에 안 좋은 건 아닐까?
물어보자
아기들에게 원래 있는 거라고 했다
놔두면 사라진다고 했다
몽고점이라고 했다

어릴 때만 있는 거
놔두면 사라지는 거

최소한 어릴 때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 P88

녹색 신호였을까?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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