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옆면처럼 서로를 오래 읽은 흔적처럼 - P27
오래 썼나 보다 볼펜의 수명이 다했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마, 마, 말이 잘⋯ 더듬더듬 말이 끊어지고 기침을 하듯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 종이에 나오지 않는 글씨를 쓴다, 금붕어가 뻐끔뻐끔 뱉어 내는 말, 너는 읽을 수 있니? - P28
엄마한테 말을 하는 대신 비눗방울을 불었어
둥글게 부드럽게 라벤더 비누 향을 품고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 방울방울
그러다가 탁, 탁 터졌어 바닥에 닿아서 터지고 창문에 부딪쳐서 터지고 바람이 불어 터지고 내 손에 붙었다 터지고 가만히 떠 있다가도 터졌어 아무도 안 건드려도 터졌어
나, 어차피 터져 버릴 거라면 물 풍선도 김밥 옆구리도 울음도 엄마 속도 아닌 비눗방울일 때 펑펑 터지는 게 좋아 - P29
지폐가 구겨진 얼굴을 들이밀면 지폐 교환기가 혀를 내밀듯 메롱, 메롱 자꾸만 메롱
구겨진 마음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귀가 살짝 접혀 있어도 안 돼
바른 자세로 바른 얼굴로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 학생들처럼
지폐도 바른 애들만 받아 주는 걸까? - P30
가슴에 두 번, 배에 한 번, 등에 한 번 - P31
심장이 과열되어 피가 도는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네 배는 고장 나서 곧 가라앉을 것 같아 등에 그림자가 붙어 있어서 몸이 무거운 거야
청진기로 너의 속을 듣는다
깊은 여름밤 여치 울음을 듣는 기분으로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장마철 빗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쿵쾅쿵쾅 윗집 발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잔소리를 듣는 기분으로 드럼 비트를 듣는 기분으로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한 어린아이가 훌쩍, 훌쩍 눈물을 참는 소리가 났다 - P31
곰 인형 배를 눌렀어 사랑해!라고 해
나는 엄지로 배를 눌러 계속 눌러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지치지 않고 사랑해 변함없는 목소리로 사랑해
달리기 꼴찌 한 날도 사랑해 우산 없이 비 맞고 돌아온 날도 사랑해 바퀴벌레 보고 놀라서 울던 날도 사랑해 친구랑 다툰 날도 사랑해
너무 눌렀나 곰 인형이 배탈이 났나 배터리가 다 되었나 아무리 배를 눌러도 이제 곰 인형은 말이 없었어 그 많던 사랑이 입을 다물었어, 사랑해, 사랑해 - P32
나는 한 번도 곰 인형한테 말해 준 적 없는 사랑해 - P33
할머니 손은 라벤더 할아버지 손도 라벤더 엄마 손도 라벤더 아빠 손도 라벤더 동생 손도 라벤더 내 손도 라벤더
손잡을 일별로 없어도 두 손에 라벤더꽃을 키우는 사람들 우리는 같은 향기가 나
일어나서 쓰다듬고 밖에 나갔다 와서 쓰다듬고 밥 먹기 전에 쓰다듬고 잠들기 전에 쓰다듬고 일기를 쓰다 다듬어서 일기 읽는 눈이 조약돌처럼 매끈매끈해지게 언제나 모두가 쓰다듬어 주는 비누는 점점 사랑받는 기분을 알아가고 있을까? - P34
내 아이가 로봇이라면 낳을 때 안 아플거야 사랑하냐고 물으면 사랑한다고 대답할 거야 배고프다고 하면 충전할 거야 100퍼센트가 될 때까지 시험은 칠 필요도 없어 보나 마나 100점이겠지 학교엔 안 가도 돼 애들이랑 다툴 일도 없고 다툴 일이 생긴대도 튼튼한 철로 된 몸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밤에도 마음껏 돌아다녀도 될 거야 밤마다 시력 100의 눈으로 별 구경하러 다니고 잠을 안자니까 꿈은 안 줘도 돼 꿈이 뭐냐고 아무도 묻지 않을 거야 커서 뭐가 될 거냐고 아무도 묻지 않을 거야 걘 안클 거니까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35
로봇에게 ‘그림자 씻기‘를 입력했다
그러자 로봇은 그림자를 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우개질X 청소기 X 물 한 바가지 X 비누칠X손빨래 X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그림자는 지울 수 없습니다." 로봇이 대답했다 정말?
밤이 되어 그림자가 사라졌다 내 그림자도, 로봇의 그림자도 모두 사라졌다 이것 좀 봐! 그림자가 사라졌잖아, 그런데 지울 수 없다고? 이렇게 안 보이는데?
로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드디어 내가 로봇을 이겼다 이불을 덮고 자려는데 - P36
로봇이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 P37
0% 로봇이 동작을 멈췄다 충전기를 꽂자 로봇의 눈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충전 중 로봇은 사람이 되는 꿈을 꿨다 풍선을 들고 놀이공원에 가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축구공을 차고 엄마한테 혼나고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숨을 쉬었는데 삐- 삐빅- 삐빅- 미세먼지 수치 120 삐빅- 초미세 먼지 수치 130 으악! 이런 데서 숨을 쉬라니, 그것도 사는 내내 끊임없이 끔찍하다. 눈을 번쩍 뜬 순간 로봇의 눈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100% 충전 완료 내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어서 다행이다 - P38
꽃사과 케이크 놀이공원 시험 100점 좋은 말을 입력하면 좋은 말만 하고 좋은 생각을 한다고했다 로봇의 심장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것도 입력해 볼까: 희망 행복 사랑 꿈 즐거움 그러자 삐빅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습니다
로봇의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로봇의 머리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물이 금세 끓어서 컵라면 뚜껑을 열고 물을 부었다 이제사 분만 기다리면 된다
알았지? 이런 게 행복이야 - P39
고등학교 다니는 누나의 수학책은 꼭 로봇의 몸속 같다
책 속에는 검은 전선, 붉은 전선, 푸른 전선처럼 연필로 그은 밑줄, 빨간 펜, 형광펜 선이 어지럽게 얽혀 있어 돼지 꼬리처럼 돌돌 말린 전선도 있고 반짝반짝 붉은 별 몇 개가 숫자 위에서 빛나고 있어
외계인이 쓰는 말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하나도 안 돼 나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밖에 모르는데 여긴 ₩도 있고 y도 있고 아무튼 뭐가 많아 복작복작복잡해
누나는 이걸 다 이해하는 걸까? 사람이 아니라 로봇처럼 눈에 불을 켜고 - P40
공부 중인 누나는 지금
충전 중인 걸까? 배터리가 떨어지는 중인 걸까?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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