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봉투 속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를 넣었다
안녕도 없고 잘 지내도 없는 편지 한장
받는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넓어질까?
그 생각 속에서 밤새 눈이 쌓인 듯 새하얀 너의 생각 속에 조심조심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 P16
일곱 개나 되는 점 힘든 점 부족한 점 그냥 ● 이놈의 점 점점 무거운 점을 짊어지고 다니는 무당벌레
하나도 안 버리고 낑낑 온 힘을 다해 걸어가
미끌미끌한 철봉 끝까지 빗방울이 무거워 떨고 있는 호박잎 끝까지 얼굴이 까맣게 탄 해바라기 끝까지 새끼손가락 끝까지
어디를 걷든 끝까지 가고 나서야 날개를 활짝 펴고 이 바람 저 바람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바람, 바람을 노래하듯이 갈아타며 훨훨 날아오르는 너
넌 정말 멋진 점투성이야 - P17
흔하지 않은 피가 있다 이 사람의 피를 저 사람에게 줄 수 있다 저 사람의 피가 이 사람에게 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피 검사를 안 해도 알 수 있다 - P18
연필 끝이 둥글둥글 순해지면서 먹구름처럼 흐리멍덩해지고 살이 찌고 둔해지는 글씨들
요즘 내가 쓰는 글이 힘이 없다며 좀 갈고닦으라며 이젠 너인 줄도 못 알아보겠다며
너는 연필깎이에 내 연필을 집어넣고 빙빙 돌렸다
나는 사람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게 싫다
연필이 얼마나 날카로워질지 모르면서 연필에 닿은 종이가 얼마나 아파할지 모르면서 내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줄도 모르면서 너는 나를 자꾸만 깎고 깎았다 - P19
그 애가 바늘귀에 실 끄트머리를 넣었어 조심조심 귓속말은 왜 이렇게 간지러울까
그날부터 바늘은 긴 꼬리 하나를 갖게 되었어 떼고 싶어도 뗄 수 없었어 아무리 달려도 뒤에 흔적이 남았어
눈사람 발자국처럼 눈으로만 몰래 친 밑줄처럼 돌고래가 물 밖으로 나올 때의 포말처럼
바늘은 쉬지 않고 달렸어 내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내 둘레를 재고 내 치수를 재는 그 아이의 말은 - P20
한 벌의 옷이 되었어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그걸 입고 다녀도 다들 모르는 척할까 누가 진실을 말해 줄까
누가 나한테 귓속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귀가 자주 간지러웠어 - P21
씹혔다 그 아이한테 자꾸 씹혔다 내 말이 껌인가? 자꾸 쉽게 생각했지만 자꾸 씹히기만 해도 꿈이든 길이든 좋았다
풍선껌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꿈은 개구리 울음주머니처럼 불룩불룩 터질 때마다 딸기 냄새가 나는 숨소리 하루하루가 달콤했는데
그 아이가 내게 한 마디 말을 한 그날
단물이 다 빠져 버렸다 맛도 없고 재미도 없다 이제 너랑 절교라고 말을 함부로 뱉어 버렸다 바닥에 툭 버려진 껌처럼 아스팔트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 P22
쓸데없는데 쓸 게 너무 많아서 온통 그 아이 그림자로 물든 일기장은 매연이 가득한 길바닥이었다 며칠 동안 거기 퍼져 앉아 있었다 내가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 P23
예서지원이 늘붙어다니던둘이처음으로다퉜다
지원이 예서 둘 사이를 띄어 쓰기
잠시 쉬며 화를 가라앉히라고 예서, 지원이 사이에, 쉼표, 하나, 놓았다
마음이 가라앉아 미안해진 지원이···예서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데··· 말줄임표만··· 늘어났다 이 말줄임표··· 다··· 언제··· 잇지···?
그래 일단 불러 보자
예서야! 지원아! - P24
둘이 서로를 부르는 순간 으앙, 서로를 안았다 느낌표를 무너뜨리고 예지서원이가 되어서는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포옹을 했다 - P25
이제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종이컵 전화기 1이 종이컵 전화기 2 쪽으로 말했어
종이컵 전화기 2가 열 걸음 떨어지자 전화기 사이 힘없이 헝클어지고 꼬여 있던 실이 수평선처럼 팽팽해졌어
여보세요? 나는 너의 ?에 대고 전화를 걸었어 그때 미안했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하네 다시 친하게 지내면 안 될까 우리? 내?에 대고 네가 말했어 미안하긴 나도 미안해 우리 다시 친구 하자
물 대신 말을 담으려고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종이컵 둘이 다시 만났어 눈사람 모양으로 붙어 있었어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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