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 P243

물론 이 집도 그때 불탔어. 돌벽만 남은 걸 다시 올린 거야. - P244

엎지른 먹처럼 번져와 내 그림자를 삼키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45

대축척지도 - P247

세상이 달라진다마씀. - P248

지도 위의 점이 언뜻 흔들렸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을 것이다. 시선을 떼는 즉시 움직이는, 죽은 척하고 있던 곤충처럼. - P249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 - P250

인선의 눈동자에서 불꽃과 그을음이 함께 타고 있다. - P251

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 P252

우리는 없어도 돼.
우리를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 - P253

5
낙하 - P254

어둠에 잠긴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물속의 적막같다. 창을 열면 검은 물살이 쏟아져 덮칠 것 같다. - P254

상자를 지도 앞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기 전에 인선은 소매를 한 단씩 더 접는다. 소매가 닿아선 안 될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 P255

‘1960. 7. 28‘과 E일보 - P256

경북 지구 피학살자 합동 위령제. - P257

이해할 수 없다. 오십팔 년 전 E일보 기사를 누가 오리고 밑줄을 그었을까. - P258

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변색된 편지다. - P259

불타버린 한지내로 돌아갈 수 없어서, - P261

개가열람실 창문의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던 육 년 전 겨울햇빛이 그때 내 눈앞에 떠오른다. - P262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 P263

오빠 머리가 무사 그러멘? 머리가 이상해. - P264

열두 시간 가까이 밤배에 실려 목포항에 도착했는데, 다시 밤이 될 때까지 하선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 P266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 P267

편지를 읽을 때마다 실밥을 잘랐다가 다시 꿰맸을까. - P268

삼 년 만에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엄마도 이모도 가슴을 졸였대. - P269

그곳에도 외삼촌은 없었어. 이감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어. - P270

포기하자고, 오빠는 죽었다고, 진주로 이감됐다는 날짜를 기일로 하자고. - P271

이름 아래 비고란에 숫자 ‘1950. 7.9‘와 ‘진주 이송‘ 스탬프가나란히 찍혀 있는 것을 나는 본다. - P272

그해 여름 대구에서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대구형무소에 수용됐어. - P273

여기 찍힌 스탬프 날짜가 7월 9일이니까, 외삼촌은 골짜기가아니라 광산에서 총살됐을 거야. - P274

한다. 인도 날짜와 총살 장소 사이의 관계를, 방금 인선이 한 것처럼 추정했을까.
- P275

어떻게 구하신 거야, 이런 기사들을?
경북에서 발행된 신문이 제주도에 배급됐을 리 없잖아. - P276

발신인 자리에 대구 주소와 함께 찍힌 청보랏빛 직사각형 스탬프에 촛불을 비춰 나는 묵독한다.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 P277

유가족들의 피맺힌 원을 받들어 십 년 세월 그리던 임을 만나고이 쉬게 해드릴 날이 곧 옵니다. - P278

사형 언도 - P279

그러다 여름부터 유해를 찾기 시작한 거야. - P280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 P281

6
바다 아래 - P282

십자 선이 희끗하게 닳은 그 신문 조각에 나도 모르게 손을 얹은 것은, 거기 전화번호를 적은 사람의 지문을 만지고 싶은 충동때문이었다. - P282

경산의 시민단체가 코발트 광산 앞에서 최초의 진혼제를 올렸다는 기사다. - P283

드문드문 연필로 밑줄이 그어진 기자의 참관기 위로 나는 촛불을 기울인다. - P284

정식으로 유해를 수습하기 시작한 건 그후 육 년이 지나서야. - P285

그걸 펼치고 싶지 않다. 어떤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다. - P285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 P286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이곳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이곳에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한강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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