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나. 몸이 닿는 순간 상대의 죽음에 전염될 것처럼. - P198
눈송이들이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어서, 사라지고 있는 박명속에서도 결정들의 형상이 보였다. - P199
아마는 잠들었을 거야. 깨우지 말자. - P200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 P202
각질과 표피를 건너 예리한 화기가 진피로 스며들기 직전까지. - P203
헝겊들이 서로 스치는 것 같은, 젖은 흙덩이가 손가락 사이로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나왔다. - P204
모아 붙이고 있던 손가락들을 인선이 펼치자, 피처럼 밝은 빛이 관절들을 적시며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 P205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 P206
그 소원이 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 P206
무엇을 보려고 하는 걸까. 그림자만 남아도 보고 싶은 게 있나. - P207
아마가 돌아왔나. 천에 덮인 새장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가 어디 있나. - P208
삽시간에 희어지며 새로 돋친 돌기들처럼 기둥에 맺혔다. - P209
어느 사이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을, 소리보다 먼저 촛불의 움직임으로 나는 알았다. - P210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 P211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 P212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뼈대로 삼기로 했어. - P213
좁은 올레를 끼고 있는 모든 집터들이 아늑해 보였어. - P214
바람소리가 거세어질수록 촛불의 움직임이 격렬해진다. - P215
그해에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어. - P216
산 위 무장대 삼백 명과 내통할 수 있다고 군경에게 의심받을나이의 남자는 받아들뿐이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만 걱정했어. - P216
건천을 건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대.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 - P217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 P218
바람의 속력이 뺨과 콧날에 느껴진다. - P219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P220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름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시게 금을 그어놔그네, 사름들신디 그 안에 다 서 이시랜 하데. - P223
짧은 고수머리가 철회색으로 세고 풍채가 단단한 노인이 흑백사진 속 마루에 걸터앉아 그물을 깁고 있다. - P224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같은 집 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은 그에게서 생기가 느껴지는 곳은 카메라를 향해 열린 두 눈뿐이다. - P226
이제 이영 찾아오지 말랜, 고를 말 이미 다 해신디 무사 자꾸 오멘? - P227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 P229
괜찮다곡, 어서 물어봥 가시렌 재촉을 해서. 경 하난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 P230
내가 더 고라줄 힘이 없었져.… 무사 십 년이나 지낭 나헌티 와그네 이러는곡 묻고 싶어나신디 그 말은 입에서 안 떨어졌주. - P231
꼭 그 사름 발소리가 다시 들릴 거 같아신디, 그걸 내가 기들리는 것인지 겁내는 것인지 알 수가 어섰주게. - P232
아버지 손이 물그릇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떨렸던 건 그 순간의 감정 때문이 아니야. - P234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 P235
‘아버지의 역사에 부치는 영상 시‘ - P236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 P237
이번에는 내가 눈을 감는다. 이제 인선도 잃는가, 생각한 순간 조용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P238
돌아온 토요일 새벽 기차역에서 인선은 정말 친구처럼 무람없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 P239
그때 돌아보지만 않으면 자유인데…… 그대로 산을 넘어만가면. - P240
그때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저건 그러니까.... 돌로 된 허물 같은 거죠.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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