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지 눈은, 하고 병실 창밖을 향해 중얼거렸을 때 인선이떠올린 것도 그런 것들이었을까. - P94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 - P95
이상한 일이다. 한 시간여 동안 해안도로를 달리며 지나쳐온 어떤 나무들에도 저렇게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 P96
그날 밤에 대해 당신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람이 묻습니다. - P97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 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그때 인선의 어머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 P99
단백질을 드셔야 하는데, 다른 건 소화를 못 시키시니까 콩죽을 드려. - P100
이렇게 많이 드셔?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101
내가 무연고 환자로 입원해 있었을 때, 엄마가 이 집에서 나를 보셨대. - P103
열흘이나 딸 행방을 모르던 때니까, 일시적인 섬망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지. - P104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 P105
그런 바람이 이렇게 멎을 수도 있나. - P106
기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폭우로 퍼부었을 밀도의 눈이다. - P107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 P109
새들이 정말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인선은 목소리를 낮췄다. - P110
내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얼굴과 몸이 눈 속에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낀다. - P112
흰 벽지 위에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거인 같은 그녀의 머리와 어깨, 커다란 검은 새의 형상을 낮은 필압으로 그리는 동안, 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인선은 가만히 있어주었다. - P113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일주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가 숙소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 P115
그 병실의 것이 아닌 듯한 소란이 다급한 목소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 P117
깍듯한 서울말로 바뀐 기사의 어조에서 좀전과 다른 거리감이 느껴진다. - P118
정류장 이름은 모르지만 거기 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 P119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 P120
지금, 따뜻한 곳에 몸을 눕힐 수 있다면. - P121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바깥으로 빠져나간다. - P122
섬을 삼킬 듯 흰 포말을 몰고 달려들던 잿빛 바다를 생각한다. - P123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 P125
본능적으로 머리를 두 팔로 감싸쥐었다. 휴대폰은 그때 놓친 것 같다. - P126
그 버스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 P128
다행인 것은 숲 사이로 걷는 동안 바람이 잠잠해진 거였다. - P129
뒤를 돌아보자, 내 깊은 발자국들이 눈 위로 찍힌 외갈래 길이 정적에 잠겨 있었다. - P130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 눈 속에서 살아남으신 건지. - P131
그때 젖은 신발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나갔는데,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더래요.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회벽에 일렁이는 빛이 확대되어, 화면은 더이상 아무것도 포착하지 않는 발광하는 평면이 되었다. - P137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P138
벌써 동이 튼 건가. 아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P139
가느다란 맥박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차츰 또렷해진다. - P140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그 나무들 앞에 나는 잠시 주저하며 서 있다. - P145
지난해 가을에도 나를 놀라게 했던, 버들처럼 가지가 늘어지는 작은 수종의 종려나무다. - P146
까마귀를 따라 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니.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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