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가을이 가기 전에 시작해야겠네. - P46

온대와 아열대 수종의 나무들이 섞여 자라는 섬에 눈이 온들 얼마나 올까. - P47

딸깍, 소리를 내며 알루미늄 상자가 다시 열렸다. - P48

묶어놓은 신경줄이 자칫하면 다시 풀어져버린대. - P49

비행기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섬인데, 그렇게 멀어지도록두는 것 이상의 무엇을 상상할 수 없었나. - P50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 P51

검은 나무들을 심는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 P52

겨울부터 나무들을 모았어, 경하야. - P53

침묵을 깨며 인선이 말했다.
어쨌든 난 계속하고 있을 거야. - P54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 P55

  처음부터 내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던 듯, 마치 창밖 어딘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처럼 그녀가 이어 속삭였다. - P56

사 년 전 내가 꾼 꿈속의 검은 나무들을, 그 꿈의 근원이었던 그 책을. - P57

도망칠 데가 없다고 느끼며 더듬더듬 - P58

3
폭설 - P59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 P59

이해할 수 없는 대기의 작용으로 바람이 갑자기 정지하는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커다란 눈송이들이 얼마나 느리게 하강하는지, 달리는 버스에서가 아니라면 정육각형의 결정들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P60

중산간 지역 - P61

먼저 도착한 일주버스를 타고 P읍에 도착한 뒤 지선버스로 갈아타고 인선의 마을까지 들어가는 것. - P62

커다란 진홍색 꽃송이들을 무더기로 피워낸 아열대의 나무들이 세차게 몸을 흔들고 있다. - P63

새라니, 라고 되물으려다 말고 나는 지난해 가을 인선의 집에서만났던 작은 앵무새들을 기억했다. - P64

아미가 몇 달 전에 죽어서, 지금은 아마만 있어. - P65

네가 가주면 좋겠어, 경하야. 그 집에서 아마를 돌봐줘. 내가 퇴원할 때까지만. - P66

그렇게 갑자기 환경이 바뀌는 걸 견딜 수 없을 거야, 아마는. - P67

정말로 부탁할 사람이 나뿐인 걸까?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새를 돌볼 수 있는 사람, 더이상 일도 가족도, 계속할 일상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이? - P67

어디까지 감수꽈? - P68

거의 절망적인 피로가 남자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온다.
버스 앞에 분명히 붙어 있잖습니까? 공항 간다고. - P69

남자는 시종 깍듯한 말씨를 쓰고 있지만, 운전기사가 절반쯤 섞어 쓰는 반말 때문인지 어딘가 울분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 P70

어디까지 구름이고, 안개이고 눈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일렁이는 회백색 덩어리가. - P71

농구 규칙도 모르면서 보는 거야,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집이 외떨어져 있어서 일이 없을 땐 적적해하시거든. - P72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 P73

짐작과 다르게 인선은 카메라를 가지러 되돌아오지 않았다. - P74

네가 늘 할머니 같은 엄마라고 해서, 정말 나하고 외할머니 사이 같은 줄 알았는데. - P75

그런데 그해엔 왜 그렇게 엄마가 미웠는지 몰라. - P76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과 똑같이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 P77

조카 언니
엄마의 하나뿐인 언니의 손녀딸 - P78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다짐했어. 언니가 말한 모든 걸반대로 하겠다고,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고, 물론 섬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을 거라고. - P79

내가 죽지 않은 건 지하수 배수를 위해 쌓아놓은 부직포 더미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어. - P80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 P81

치매 초기라고 들었던 인선의 어머니가 예상 밖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노인이어서 나는 놀랐다. - P82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인적 없는 하얀 거리가 커다란 그림책처럼 펼쳐졌다. - P83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 P84

머리에 더 눈이 쌓여 이젠 마치 흰 털실로 뜬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 인선이 입을 벌려 말할 때마다 반투명한 불꽃 같은 입김이 흘러나와 어둠 속에 번졌다. - P85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 P86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 P87

사실은 미친 짓이야 - P88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 P89

4
- P90

너무 고요하다. - P91

수만 송이의 함박눈이 내 목소리를 빨아들여 지우는 것 같다. - P92

바람이 멎은 것같이 이 눈도 갑자기 멈춰주지 않을까.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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