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수상 이후 5년, 한강 문학이 도달한 곳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_작가의 말에서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부
- P7

1
결정結晶 - P9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 P9

다시 그 도시에 대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가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고서 더 누워 있었다. - P10

그 도시의 학살 - P11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 P11

못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 P12

오랜 시간 나는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가족을 돌봐왔다. - P13

잠시도 잠들 수 없었던, 그러나 빠져나올 수도 없었던 침대에서 마침내 내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 미지의 수신인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 P14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 P15

아니, 새로 써야 한다고, 유성 사인펜으로 겉봉에 유서, 라고 적어둔, 수신인을 끝내 정하지 못했던 그 글을, 처음부터 다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 P16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 P17

착검한 총을 두 손으로 모아쥔 그가 힘껏 내 가슴을 내리 찔렀을 때의 전율만 남아 있다. - P18

이곳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이곳에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수면의 질이 차츰 더 나빠지고 호흡이 짧아지던 ㅡ 왜 숨을 그렇게 쉬는 거야, 라고 아이가 어느 날 나에게 불평했다 — 2013년 늦봄이었다. - P19

누군가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적에 싸인 그들의 뒷모습 - P20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일행들과 버려진 도로를 걷고 있었다. - P21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죽인 사람들을? - P22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 P23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 P23

그 과정을 짧은 기록영화로 만들자고, 한때 사진과 다큐멘터리영화 작업을 했던 친구에게 나는 제안했다.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 P24

처음부터 다시 써,
그건 언제나 옳은 주문呪文이다. - P25

십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멈추지 않고 내려온 것 같은 눈이. - P26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에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P27

2
- P28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 P28

차츰 밤이 길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간다. - P29

이렇게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한 용건이다. - P30

처음 듣는 병원의 이름 - P31

국내에서 제일 좋은 봉합수술 전문병원 - P32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 P33

삼면화 - P34

그녀가 정말로 영화를 그만두고 목수가 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 P35

로비 끝에 있는 현금인출기를 향해 걸으며 내 신분증의 쓸모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 P36

마치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다친 사람처럼 성대를 울리지 않으며 인선이 속삭였다. - P37

목을 쓰지 않고 귓속말하듯 속삭이는 건, 말하는 진동만으로도 통증을 느껴서인 것 같았다. - P38

거의 기적 같은 건, 가깝게 지내던 아랫동네 할머니가 마침 제주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아들이 모시러 온 거야. - P39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 P40

새로 선혈이 흐르며 더 성이 나 부풀어오른, 그전에도 부어 있었던 그녀의 손가락들을 나는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 P41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 P42

내가 인선의 가족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 순간 생각해버렸다. - P43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 P44

하지만 인선이 이상하다고 한 말은 다른 의미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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