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정적인 일의 서두가 대개 그러하듯 그 일의 시작 역시 아주 사소했다. - P51
질문을 던진 사람은 ‘라이트 레프트‘라는 동호회의 회장이었다. - P52
나는 김가을인가 하면 이세계고 장융인가하면 까마귀다. - P53
라이트 레프트는 정당한 왼손잡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저희는 왼손잡이들입니다. - P55
지난주에 남천에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도 라이트레프트의 정기 모임에서였다. - P57
아닌 게 아니라 끓인 장을 부어 만든 그 게장을 먹으러 언제 한번 남천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 P59
그 순간 나는그래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었는데도, 무언가 떳떳하지 않은 일을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 P60
부정하면 할수록 내가 지난주에 남천에 갔다는 사실이 기정사실로 굳어져갔고, 나는 그게 억울해서 더욱 완강하게 손을 내저었다. - P61
그의 말투 속에는 내 말에 대한 여전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가 않았다. - P62
택시가 화라락거리며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자 머릿속으로 찬물 한 바가지가 부어진 것 같은 냉기가 덮쳤다. - P63
2 탈퇴를 한건 아니지만 탈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P64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곧 들이닥칠 재난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가 그런 식으로 거칠게 표현됐는가, 짐작할 뿐이다. - P65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경우는 그 이유가 세 가지 중 하나다. 누군가 결혼을 하거나 죽었거나 아니면 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 P65
"너, 왜 사람을 보고 아는 체를 안 하냐?" 외삼촌은 대뜸 첫마디를 그렇게 꺼냈다. - P66
지난주에 볼일이 있어서 남천시에 갔었다. 그리고 중앙로에서 너를 봤다. - P68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 P69
"직업이 뭐냐고. 네 인생을 어디다 걸고 사느냐 말이다." - P71
"그만하세요. 외삼촌은 남천에서 나를 봤다고 말하지만, 나는 남천이라는 데를 꿈속에서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끝내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데는 그다지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 P72
그 글은 내가 회원으로 가입해있는 열 개의 커뮤니티 가운데 ‘도시락都市樂‘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됐으므로 나는 그곳에 그 글을 올렸다. 도시락에서 내 이름은 이세계다. - P74
3 ‘당신 집을 방문하려는 귀찮은 친척 어른, 이를테면 외삼촌을 지혜롭게 따돌리는 방법‘ - P75
이번에 남천에서 나를 본, 봤다고 한 사람은 미경이었다. - P77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어쨌든 섹스를 한다는 거 혹은 섹스를 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는 거, 그거 유치하고 원시적인 고정관념이야. - P79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P81
하지만 한 명도 아니고 세 사람이 똑같이 잘못 본 것이라면, 잘못 본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우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 P83
나를 꼭 닮은 누군가가 남천이나 그 근처 어디에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가슴이 뛰고 머리끝으로 열이 올랐다. - P83
도시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고 착각하게 만든, 나를 빼닮은 그 작자를 찾아내야 했다. - P84
그러나 그 망설임은 나를 둘러싼, 혹시 있는지도 모르는 비밀에 대한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했다. - P85
그래, 길을 가다가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혹시 네 아비가 내지른 자식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할 거다.…….. - P87
4 남천은 낯설었다. 유형지에 발을 내딛은 것 같다는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 P87
마치 파충류의 피부를 만진 것과도 같은 섬뜩한 한기, 그게 남천의 첫인상이었다. - P88
무슨 일인가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어서 그곳으로부터 내쫓겼다는 느낌이 앞섰다. - P89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절하게 그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 것일까. - P92
몽타주 사진이 이렇게 실제 얼굴하고 똑같은 건 이 생활 십 년 만에 처음이네. - P94
그렇게 붙잡혔다. 나는 해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한 채. - P94
그들이 내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으므로. - P96
"당신들이 찾고 있는 자가 아마 그자일 겁니다. 당신들만큼이나 나도 그자를 찾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자가 아니에요. 나는 나예요.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딘가 다른 곳에 내가 있을 수는 없지 않아요?" - P98
얼굴을 보호하려는 듯 모자를 눌러쓰고 코까지 덮는 사각형의 크고 흰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 P100
라이트 레프트의 회장이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까닭이 없었다. - P101
외삼촌도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 P101
미경이의 증언 역시 우호적이지 않았다. - P101
혹시 내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02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제거하면 아예 내가 없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 P102
그러나 어떤 경우든 나에 대한 나의 인식이 빠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P103
나는 당신들의 부재 증명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존재하게 된다. - P103
이 글은 당신들 속의 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문과도 같은 것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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