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ㅣ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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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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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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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마이크 데이비스 외 지음 / 책갈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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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우리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라이더들 수수료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너머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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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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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a manet, verba volat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 '독서의 역사'와 '서술의 역사'의 역사


"... 책을 숭배하는 정신이야말로 문명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의 하나이다... 인민통치 집단이든 전체주의 통치 집단이든 국민 모두가 어리석은 존재로 남을 것을, 그리고 국민들이 자신들의 퇴행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알맹이와 가치가 없는 것들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상황에서 독서가들은 오로지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 [독서의 역사], <마지막 페이지>,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읽기(reading)'가 먼저인가, '쓰기(writing)'가 먼저인가.
읽을 것을 쓴 게 이미 있으니 '쓰기'가 앞섰던가, 이미 읽은 걸 서사로 풀어서 쓴 것이니 '읽기'가 앞섰던가.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같은 무의미한 질문이겠으나 '읽기'와 '쓰기'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우리 시대의 몽테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책들을 읽고 그 의미들을 회의하고 사색한 내공으로 [독서의 역사](1996)를 썼다. 그가 돌아보는 '독서', 즉 '읽기(reading)'의 역사는 '정치사'나 '비평사' 등의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독서 행위(읽기)' 또는 독서의 역사'는 그 자체의 역사라기 보다는 '독서가'들의 역사이며, 그 역사는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독서가들 각자의 역사"(같은책, <마지막 페이지>)다. 따라서 생물의 진화나 자연과학의 진화 등 '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연성'으로 점철된다. 모든 과학의 시작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그 진화과정은 '필연'의 논리가 있는데 비해, '독서가'들의 역사는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말한 '미술이 아닌 미술가들의 역사'처럼 '과학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우연적 역사'가 사회경제 체제의 '필연적 역사'를 토대로 전개됨을 상기한다면 수긍할 만 하다.

기원전 10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그림문자나 그 얼마 후 페니키아에서 알파벳 문자 또는 숫자 등의 기록이 등장한 동기는 '문명의 유지'와 '전승'이었을 것인데, 그 이후로도 오랜 시기 동안 '문자 문명'은 소수 지배계급의 특권에 불과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 피지배자들은 19세기까지도 '읽기'가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수의 '읽기'는 그 다양한 해석과 창의력, 상상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쿠바의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독사(讀師)'는 글을 모르거나 읽을 시간이 없던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여 읽을 책을 선정하고 노동 중에 라디오처럼 글을 들려주었는데, 같은 세기 대서양 건너 영국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금지법'처럼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역시, 지배자에게 민중의 '독서'는 '체제전복'적이고 두려운 것이다.그래서 대부분의 '독서회'가 '탄압'받는 것인가.


"... 문장 하나만 읽을 줄 알게 되면 누구든지 금방 모든 문장을 알 수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독서가는 그 문장을 반추하고 그 문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인류가 창조한 다른 어떤 물건들과 달리 '책'은 독재에 맹독으로 작용해 왔다. 절대권력은 모든 독서를 공식적인 독서로 제한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양한 의견이 담긴 도서관 대신 독재자의 말만으로 충분해야 했다."
- [독서의 역사], <금지된 책읽기>, 알베르토 망구엘.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립하고 후속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도시에 최초의 대형 도서관을 지을 때 수많은 두루마리들은 지배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류 지식의 다양성를 담보했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두루마리나 서판 등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문자'를 통한 지식의 중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은 각각 '성경'과 '코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유일신'의 의지를 민중에게 전달했기에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을 때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왕이 된 예수'였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 손에 칼과 다른 손에 '책'을 들었으며, '유일신'의 '사자' 또는 대리인들은 '책'과 '문자'를 중심으로 '이단'을 갈라냈다. 다수를 지배하는 중세의 교리는 '문자'라기 보다는 상징적 '아이콘'으로 가득한 '그림'이었지만, 항상 다수의 역사를 스스로 써온 인류는 이 '그림'을 '문자'로 전환시키고 이 '상징'들 또한 다수와 공유하며 언제 어디서든 '체제전복'을 기도한다.
다수 민중들의 '읽기'와 '독서'는 늘 그 자체로 '체제전복'적이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의 위대한 장점... 제작 속도, 텍스트의 동일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는 이점...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고,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하는 것처럼. 망구엘이 고백한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사물'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스무살 때는 '멋있게 보이려고' 들고 다닐 때가 더 많았다.
어쨌든, 다수 대중'의 독서는 그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을 쏟아 놓기에 정치권력의 독점적 권위는 자연스레 균열이 난다. '민주주의'의 문명적 토대가 싹을 틔운다.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Scripta manet, 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서가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같은책, <상징적인 독서가>)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같은책, <책읽기와 미래예언>)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서가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한다. 
아마도 발전의 사례가 대부분일 것인 반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독재정권의 '금서목록', 파시즘이나 나치즘 등과 같은 전체주의자들의 반복된 '분서' 선동은 퇴행의 대표적 사례다.


"... BC 3천년대 말 즈음 인간 사이의 의사전달의 본질을 영원히 바꿔놓을 기술이 개발되었다. 바로 글을 쓰는 기술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 손을 뗄 때에만 그 텍스트는 텍스트로서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이 시점에서 텍스트는 한 사람의 독서가가 읽어줄 때까지 조용한 존재로 남는다... 이렇듯 모든 기록은 독서가의 아량에 크게 의존한다... 바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읽기'는 '쓰기'를 신격화해 주는 것이었다."
- [독서의 역사], <최초의 시작은 진흙조각에서>, 알베르토 망구엘.


19~20세기 독일 비평가 쿠르티우스는 "세상과 자연이 책이라는 생각은 카톨릭 교회의 수사학에서 비롯되어 신비주의 철학자들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같은책, <책읽기의 은유>)고 했는데,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문자'의 매개체인 '책'이라는 실물 뿐만 아니라 '문자' 이전부터의 '세상'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으로부터 추출된다는 것이지만 기원전 3천년경이 되면 인류는 '쓰기(writing)'를 통해 한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문자'를 통한 '지식'의 독점의 기원은 바로 '쓰기'였으며, 이러한 저술에 대한 다양한 독해를 가능케 한 '서사의 힘'이었다.


"나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사회제도와 자연환경이 뒤엉켜 빚어낸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당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다. 역사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발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역사서술 환경과 내용과 관점과 방법의 변화는 힘있는 서사로 구현할 때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들을 만나본 소감이다."
- [역사의 역사], <에필로그 - 서사의 힘>, 유시민, <돌베개>, 2018.


망구엘은 '독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를 쓰지 않았다. 본인의 독서 이력으로부터 유추되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독서가'들의 개별적인 역사를 서술하는데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가'들의 역사가 워낙 다양하므로 그 역시 본인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들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로서의 저술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은 최근의 저서 [역사의 역사](2018)에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시조' 헤로도투스로부터 [사기]의 사마천, 14세기 이슬람 '문명사학자' 이븐 할둔, 유물사관의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우리의 박은식과 신채호, 백남운 선생,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카와 최근 '빅히스토리' 역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 등의 '역사서술(writing history)'의 역사를 일별한다. 즉, '역사'란 19세기 독일의 반동적 군주제 역사가인 레오폴트 랑케의 건조한 문헌적 역사가 추구한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 불가능하며, 각 '역사가' 개인들의 시대적 한계와 나름의 '철학'적 관점, 정치적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므로 '역사서술의 역사'인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 또는 '사학사(史學史)'를 주제로 하되 본인의 '쓰기'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기에 '역사 르포르타주(르포)'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의 역사적 관계는 인류 지식과 문명의 역사 자체로서 일목요연한 정리가 불가한 방대한 영역일 것이다.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가 아닌 '독서가'의 역사를, 유시민이 '서술'의 역사가 아닌 '역사서술'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이유다. 

'역사'를 소수의 지배자가 독점하던 시대는 다수 피지배 민중들이 문자를 공유하고 독서를 통해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함으로써 오래전에 물러갔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과 '문자'를 다양화하고 보편화하려는 '민주주의'적 시도가 주춤하는 시점에서, 하나의 정치세력 진영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현상에서 '역사서술'의 독점과 전체주의적 폭력은 여전히 기생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선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지라도, 소수 '역사가'들의 '쓰기'에 의해 취사선택된 텍스트들은 다수 '독서가'들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읽기'에 의해 통제되고 재창조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text)'들은 이미 창작되고 나면 '작가'의 손을 떠나는 독립적 '생물체'가 되며, '정치'가 그러하듯 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는 수많은 '독서가'들의 손에 의해 더욱 풍부해진다.
이것이 우리 '사피엔스' 문명의 역사 속 '민주주의'의 역사이며, 그것이 '역사서술'과 그 '독서의 역사'에서 유일한 '철학'적 방향이다.

이렇게 또한 "글은 영원히 남는(Scripta manet)" 것이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낭독회),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증명이었으며("하늘의 도는 무엇인가!"),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적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 [역사의 역사], <제6장 -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유시민.


***

1.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2.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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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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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a manet, verba volat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 '독서의 역사'와 '서술의 역사'의 역사


"... 책을 숭배하는 정신이야말로 문명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의 하나이다... 인민통치 집단이든 전체주의 통치 집단이든 국민 모두가 어리석은 존재로 남을 것을, 그리고 국민들이 자신들의 퇴행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알맹이와 가치가 없는 것들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상황에서 독서가들은 오로지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 [독서의 역사], <마지막 페이지>,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읽기(reading)'가 먼저인가, '쓰기(writing)'가 먼저인가.
읽을 것을 쓴 게 이미 있으니 '쓰기'가 앞섰던가, 이미 읽은 걸 서사로 풀어서 쓴 것이니 '읽기'가 앞섰던가.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같은 무의미한 질문이겠으나 '읽기'와 '쓰기'의 '역사'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우리 시대의 몽테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책들을 읽고 그 의미들을 회의하고 사색한 내공으로 [독서의 역사](1996)를 썼다. 그가 돌아보는 '독서', 즉 '읽기(reading)'의 역사는 '정치사'나 '비평사' 등의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독서 행위(읽기)' 또는 독서의 역사'는 그 자체의 역사라기 보다는 '독서가'들의 역사이며, 그 역사는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독서가들 각자의 역사"(같은책, <마지막 페이지>)다. 따라서 생물의 진화나 자연과학의 진화 등 '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연성'으로 점철된다. 모든 과학의 시작은 '우연'이었을지 모르나 그 진화과정은 '필연'의 논리가 있는데 비해, '독서가'들의 역사는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말한 '미술이 아닌 미술가들의 역사'처럼 '과학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우연적 역사'가 사회경제 체제의 '필연적 역사'를 토대로 전개됨을 상기한다면 수긍할 만 하다.

기원전 10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그림문자나 그 얼마 후 페니키아에서 알파벳 문자 또는 숫자 등의 기록이 등장한 동기는 '문명의 유지'와 '전승'이었을 것인데, 그 이후로도 오랜 시기 동안 '문자 문명'은 소수 지배계급의 특권에 불과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 피지배자들은 19세기까지도 '읽기'가 허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수의 '읽기'는 그 다양한 해석과 창의력, 상상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쿠바의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독사(讀師)'는 글을 모르거나 읽을 시간이 없던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여 읽을 책을 선정하고 노동 중에 라디오처럼 글을 들려주었는데, 같은 세기 대서양 건너 영국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금지법'처럼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역시, 지배자에게 민중의 '독서'는 '체제전복'적이고 두려운 것이다.그래서 대부분의 '독서회'가 '탄압'받는 것인가.


"... 문장 하나만 읽을 줄 알게 되면 누구든지 금방 모든 문장을 알 수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독서가는 그 문장을 반추하고 그 문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인류가 창조한 다른 어떤 물건들과 달리 '책'은 독재에 맹독으로 작용해 왔다. 절대권력은 모든 독서를 공식적인 독서로 제한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양한 의견이 담긴 도서관 대신 독재자의 말만으로 충분해야 했다."
- [독서의 역사], <금지된 책읽기>, 알베르토 망구엘.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립하고 후속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도시에 최초의 대형 도서관을 지을 때 수많은 두루마리들은 지배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류 지식의 다양성를 담보했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두루마리나 서판 등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문자'를 통한 지식의 중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은 각각 '성경'과 '코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유일신'의 의지를 민중에게 전달했기에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을 때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왕이 된 예수'였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 손에 칼과 다른 손에 '책'을 들었으며, '유일신'의 '사자' 또는 대리인들은 '책'과 '문자'를 중심으로 '이단'을 갈라냈다. 다수를 지배하는 중세의 교리는 '문자'라기 보다는 상징적 '아이콘'으로 가득한 '그림'이었지만, 항상 다수의 역사를 스스로 써온 인류는 이 '그림'을 '문자'로 전환시키고 이 '상징'들 또한 다수와 공유하며 언제 어디서든 '체제전복'을 기도한다.
다수 민중들의 '읽기'와 '독서'는 늘 그 자체로 '체제전복'적이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의 위대한 장점... 제작 속도, 텍스트의 동일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는 이점...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고,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하는 것처럼. 망구엘이 고백한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사물'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스무살 때는 '멋있게 보이려고' 들고 다닐 때가 더 많았다.
어쨌든, 다수 대중'의 독서는 그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을 쏟아 놓기에 정치권력의 독점적 권위는 자연스레 균열이 난다. '민주주의'의 문명적 토대가 싹을 틔운다.


"스크립타 마네트, 베르바 볼라트
(Scripta manet, 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서가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같은책, <상징적인 독서가>)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같은책, <책읽기와 미래예언>)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서가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한다. 
아마도 발전의 사례가 대부분일 것인 반면,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독재정권의 '금서목록', 파시즘이나 나치즘 등과 같은 전체주의자들의 반복된 '분서' 선동은 퇴행의 대표적 사례다.


"... BC 3천년대 말 즈음 인간 사이의 의사전달의 본질을 영원히 바꿔놓을 기술이 개발되었다. 바로 글을 쓰는 기술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 손을 뗄 때에만 그 텍스트는 텍스트로서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이 시점에서 텍스트는 한 사람의 독서가가 읽어줄 때까지 조용한 존재로 남는다... 이렇듯 모든 기록은 독서가의 아량에 크게 의존한다... 바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읽기'는 '쓰기'를 신격화해 주는 것이었다."
- [독서의 역사], <최초의 시작은 진흙조각에서>, 알베르토 망구엘.


19~20세기 독일 비평가 쿠르티우스는 "세상과 자연이 책이라는 생각은 카톨릭 교회의 수사학에서 비롯되어 신비주의 철학자들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같은책, <책읽기의 은유>)고 했는데,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문자'의 매개체인 '책'이라는 실물 뿐만 아니라 '문자' 이전부터의 '세상'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으로부터 추출된다는 것이지만 기원전 3천년경이 되면 인류는 '쓰기(writing)'를 통해 한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문자'를 통한 '지식'의 독점의 기원은 바로 '쓰기'였으며, 이러한 저술에 대한 다양한 독해를 가능케 한 '서사의 힘'이었다.


"나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사회제도와 자연환경이 뒤엉켜 빚어낸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당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다. 역사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발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역사서술 환경과 내용과 관점과 방법의 변화는 힘있는 서사로 구현할 때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들을 만나본 소감이다."
- [역사의 역사], <에필로그 - 서사의 힘>, 유시민, <돌베개>, 2018.


망구엘은 '독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를 쓰지 않았다. 본인의 독서 이력으로부터 유추되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독서가'들의 개별적인 역사를 서술하는데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가'들의 역사가 워낙 다양하므로 그 역시 본인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들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로서의 저술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은 최근의 저서 [역사의 역사](2018)에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시조' 헤로도투스로부터 [사기]의 사마천, 14세기 이슬람 '문명사학자' 이븐 할둔, 유물사관의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우리의 박은식과 신채호, 백남운 선생,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카와 최근 '빅히스토리' 역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 등의 '역사서술(writing history)'의 역사를 일별한다. 즉, '역사'란 19세기 독일의 반동적 군주제 역사가인 레오폴트 랑케의 건조한 문헌적 역사가 추구한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 불가능하며, 각 '역사가' 개인들의 시대적 한계와 나름의 '철학'적 관점, 정치적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므로 '역사서술의 역사'인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 또는 '사학사(史學史)'를 주제로 하되 본인의 '쓰기'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기에 '역사 르포르타주(르포)'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의 역사적 관계는 인류 지식과 문명의 역사 자체로서 일목요연한 정리가 불가한 방대한 영역일 것이다.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가 아닌 '독서가'의 역사를, 유시민이 '서술'의 역사가 아닌 '역사서술'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이유다. 

'역사'를 소수의 지배자가 독점하던 시대는 다수 피지배 민중들이 문자를 공유하고 독서를 통해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함으로써 오래전에 물러갔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과 '문자'를 다양화하고 보편화하려는 '민주주의'적 시도가 주춤하는 시점에서, 하나의 정치세력 진영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현상에서 '역사서술'의 독점과 전체주의적 폭력은 여전히 기생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선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지라도, 소수 '역사가'들의 '쓰기'에 의해 취사선택된 텍스트들은 다수 '독서가'들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읽기'에 의해 통제되고 재창조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text)'들은 이미 창작되고 나면 '작가'의 손을 떠나는 독립적 '생물체'가 되며, '정치'가 그러하듯 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는 수많은 '독서가'들의 손에 의해 더욱 풍부해진다.
이것이 우리 '사피엔스' 문명의 역사 속 '민주주의'의 역사이며, 그것이 '역사서술'과 그 '독서의 역사'에서 유일한 '철학'적 방향이다.

이렇게 또한 "글은 영원히 남는(Scripta manet)" 것이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낭독회),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증명이었으며("하늘의 도는 무엇인가!"),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적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 [역사의 역사], <제6장 -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유시민.


***

1.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2.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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