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3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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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티칸에 잠복된 '폭탄'
- [미켈란젤로의 복수]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1993.


1.

"송형은 왜 종교 관련 책을 읽는 거요?"

동네에서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이진 선배가 물었을 때, 나는 바로 "이단" 때문이라 대답했다.

종교가 없는 내가 기독교 관련 책을 가끔 읽는 이유는, 수천년 동안 견고했던 지식의 성벽에 균열을 내는 온갖 의심과 기득권에 반하는 다른 지식에 관한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이다. 중세의 밀교와 종교개혁, 근대의 과학과 유물론 등 가톨릭 기득권이 규정한 '이단'들은 바로 그 균열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세상 만물의 운동과 진화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온갖 '이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 연장선 상에서 최근 우연히 발견한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 저널리스트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다.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독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다가 기자가 되었고 1973년에 [파라오의 저주]라는 소설로 작가가 되었다. 이후 저널리스트다운 현장조사와 문학 및 미술사 전공자다운 연구를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기득권 주류 역사 속 이면의 이야기들을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도에 번역된 반덴베르크는 21세기 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2003)가 인기를 끌기 전 20세기에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로마 바티칸 교황청으로 상징되는 정통 가톨릭의 권위에 균열을 내는 반덴베르크의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을 읽어보았다.


2.

"예언자들 중 가장 지식이 풍부한 '예레미아',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예언자, 이 '예레미아'가 문자들의 열쇠일 것이 분명했다... 
'아불라피아(ABULAFIA)' 하고 옐리넥은 읽었다. 그렇다. '아불라피아'는 교회가 저주를 내리고 있는 카발라 추종자의 이름이었다. 카발라는 12세기 중반쯤에 서부지방에서 생겨나서 그곳으로부터 에스파냐로, 나중에 이탈리아로 전파되었고, 교회에 무서운 손상을 입혔던 유대 밀교였다."
- [미켈란젤로의 복수], <저주받은 이름>,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제단화를 그렸을 때, 일찍이 열네살부터 붓 대신 끌을 잡기로 결심했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조각가인 본인에게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게 한 사실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신약성서를 그리라는 교황의 요청과 달리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창세기부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추방, 노아의 대홍수 같은 구약성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렸고 둘레를 그리스식 남녀 예언자들로 장식했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세속적인 '복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덴베르크는 '미켈란젤로의 복수'라는 모티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2세기 유대 밀교 카발라와 신비주의를 덧입혀 가톨릭 교리 전체에 도전하는 거대한 프로그램을 역추적하여 구성해 낸다. 16세기 초에 작업한 시스티나 천장화가 복원 완료된 것이 1989년인데 그 과정에서 '지식'의 예언자 '예레미아'로부터 시작하여 알파벳 여덟 글자가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A-I-F-A-L-U-B-A'로 알려진 이 기호 배열의 해석을 위해 교황청에서는 교리 담당 옐리넥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바티칸의 비밀서고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서에 반하는 사실들이 드러난다.

연구 결과 동방의 예언자 '예레미아'는 본래 글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썼기에 문자의 배열은 뒤집어져야 했고, 그에 따라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 숨겨져 있다가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아이파루바(AIFALUBA)'는 사실 '아불라피아(ABULAFIA)'였으며, '아불라피아'는 13세기에 교황 니콜라우스 3세에 의해 화형당한 유대 카발라 신자였다는 것이다.

1978년도에 32일간 재위하고는 급사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비밀유품에서 발견한 미켈란젤로의 문서들 속에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아불라피아'의 기록을 발견한 교리(이념) 담당 옐리넥 추기경은 그 내용의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한편, 바티칸의 정치적 실세인 국무 추기경과 경제적 실세인 재정담당 추기경은 '아불라피아'와 미켈란젤로가 알고 있던 비밀을 덮고 가톨릭 권력의 유지를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를 암살하기까지 한 바 있다. 믿거나 말거나 32일 교황인 요한 바오로 1세는 이 엄청난 '비밀'을 다루기 위해 종교회의를 소집한다는 발표 하루 전 선종했다는 것이다.
옐리넥 추기경이 안고 가려던 '폭탄'은 이미 바티칸이 2천년 동안 안고 있던 '진실'이었다.

"... 문서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여기 씌어 있는 것이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니콜라우스 3세 교황이 감추고자 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미켈란젤로가 카발라 추종자들에게서 들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나치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가 신앙문제 종교회의를 열 계획을 세우게 만든 바로 그 진실이었다."
- [미켈란젤로의 복수], <다 이루었도다>,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유품에서 나온 미켈란젤로의 유품에서는 카발라 교도 '아불라피아'의 기록이 발견된다. 아불라피아는 이 기사를 통해 역시 카발라 교도 시몬 벤 예루킴이 예수의 시체를 옮겨 자신의 무덤에 매장하였는데 카발라교에서 예수의 시체를 훔친 이유가 예수의 신격화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또한 이 '진실'은 나치의 손에도 들어갔고 결국 바티칸이 나치 전범들의 남미 이주를 지원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단다.

원제가 [시스티나의 음모]인 반덴베르크의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는 또 다른 소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로 이어진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저서인)... [그림에 대하여]... 신적인 그림에 대한 암시... '그 모양은 독수리와 장미에 둘러싸인 곳, 가슴에는 비밀을 품고, 넉넉한 연단(녹을 방지하는 도료) 아래서 종려나무를 쓰러뜨릴 힘을 가진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미술사가들은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묘사가 뜻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다가 마지막에 이 그림이 사라졌다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사라졌다고 생각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실은 [장미원의 성모]였던 것이죠."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단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3.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의 원제는 [제5복음서]다. 

내용은 전작 [미켈란젤로의 복수(시스티나의 음모)]와 이어지지 않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미켈란젤로의 복수]는 옐리넥 추기경의 진실 추적이 액자식 구성처럼 예언자 '예레미아'를 자처하는 반신불구의 수도승의 이야기로서 전해지며, 화자인 '예레미아' 수사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아 진실 은폐를 위해 바티칸에 의해 감금된 옐리넥 추기경으로 암시된다. 
한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제5복음서)]은 전혀 이어지지 않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그 소재와 주제는 동일하다.

미국의 독일 출신 비교문학자 마르크 포시우스 교수가 프랑스 파리의 박물관에 진열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장미원의 성모]에 황산을 뿌린 이유는 성모의 목에 처음 그려진 여덟 보석의 목걸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1999년에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숨겨진 문자를 알리기 위해 염산을 뿌린 페터 뎀프의 [보쉬의 비밀]처럼 20세기에는 명화들에 대한 의심에 찬 테러들이 횡행했던 것 같다. 

아무튼, 미술사 전공자답게 반덴베르크는 전작의 미켈란젤로에 이어 이번에는 미켈란젤로의 르네상스 라이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속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을 다룬다.

아마도 첫번째 [암굴의 성모]로 추정되는 그림 [장미원의 성모] 속 성모 마리아의 목에 원래 그려진 목걸이는 루비와 자수정 등 8가지 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보석들의 첫 글자 배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지칭한다. 그 이름은 '바라바(Barabbas)'다. 성경에서는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고발한 유대 랍비들에게 '나사렛 예수'와 폭도 '예수 바라바'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 물었고 유대인들은 '복음서'에서 '강도' 또는 '폭도'로 부른 '바라바'를 살리고 '나사렛 예수'를 죽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유대 이름 '예수'는 흔했지만 여기서 예수와 바라바 모두 '예수'였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에서도 이 '바라바'라는 역사속 유령같은 인물을 쫓아 바티칸의 대응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을 종횡무진하는 모험담까지 전개되지만, 오랜 '진실'을 담은 주제는 하나다.

"난외주석들에는 이 구절들이 나타난 여러 복음서의 장절들이 표시되어 있다고 보아야겠죠. 그러니까 '바라바(Barabbas)'는 이 '다섯번째 복음서'의 저자를 뜻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사실만으로는 이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폭발력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바라바'라는 이름은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를 감추고 있는게 분명해요. 그것은 일종의 '코드' 같아요. 오직 아는 사람들끼리만 이 말을 아는 거죠. 마치 놀라운 의미를 가진 비밀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것 말예요."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제5복음서>,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3.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는 마가(마르코)-마태(매튜)-루가(루크)-요한(존)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쓴 예수의 생애인데, 마리아의 수태고지 및 예수의 수난과 처형,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 기사들이다. 이들은 가톨릭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격화하는 사명을 담은 이야기들로서 예수 사후 수십년 지나서 씌어진 기록들이다.
그런데 단테는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이어지던 천재들의 신비로운 비밀결사 '기사단'은 '바라바'라는 예수와 동시대 인물의 기록을 담은 양피지 문서를 토대로 또 하나의 복음서인 '제5복음서'를 계승하면서 전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제5복음서'는 '4대 복음서'의 원본이다. 당대의 천재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이 단테 사후 15년이나 지나서 첫 필사본이 나온 것이라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 그림에 숨겨진 목걸이 등은 '제5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바라바'의 존재와 그가 전하고자 했던 예수 이야기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속 인물들의 모험을 통해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은, '제5복음서'의 저자인 '예수 바라바'는 '나사렛 예수'와 그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인데, '바라바'가 '성혈'이자 '성배' 그 자체가 되는 이 '진실'은 가톨릭 권력의 상징인 바티칸이 2천년 간 은폐해야 했던 가장 무서운 잠복된 '폭탄'이기도 하다.

[제5복음서]를 통해 반덴베르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름아닌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며,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

1.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3. [보쉬의 비밀(Das Geheimnis des Hieronymus Bosch)](1999), Peter Dempf, 정지인 옮김, <생각의 나무>, 2006.
4. [성혈과 성배](1982), 헨리 링컨/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이정임/정미나 옮김, <자음과모음>, 2005.
5. [그리스도교의 기원](1908), 칼 카우츠키 지음, 이승무 옮김, <동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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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4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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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티칸에 잠복된 '폭탄'
- [미켈란젤로의 복수]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1993.


1.

"송형은 왜 종교 관련 책을 읽는 거요?"

동네에서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이진 선배가 물었을 때, 나는 바로 "이단" 때문이라 대답했다.

종교가 없는 내가 기독교 관련 책을 가끔 읽는 이유는, 수천년 동안 견고했던 지식의 성벽에 균열을 내는 온갖 의심과 기득권에 반하는 다른 지식에 관한 이야기에 끌렸기 때문이다. 중세의 밀교와 종교개혁, 근대의 과학과 유물론 등 가톨릭 기득권이 규정한 '이단'들은 바로 그 균열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세상 만물의 운동과 진화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온갖 '이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 연장선 상에서 최근 우연히 발견한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 저널리스트 필리프 반덴베르크(Philipp Vandenberg : 1941~)다.

필리프 반덴베르크는 독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다가 기자가 되었고 1973년에 [파라오의 저주]라는 소설로 작가가 되었다. 이후 저널리스트다운 현장조사와 문학 및 미술사 전공자다운 연구를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기득권 주류 역사 속 이면의 이야기들을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도에 번역된 반덴베르크는 21세기 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2003)가 인기를 끌기 전 20세기에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로마 바티칸 교황청으로 상징되는 정통 가톨릭의 권위에 균열을 내는 반덴베르크의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을 읽어보았다.


2.

"예언자들 중 가장 지식이 풍부한 '예레미아',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는 예언자, 이 '예레미아'가 문자들의 열쇠일 것이 분명했다... 
'아불라피아(ABULAFIA)' 하고 옐리넥은 읽었다. 그렇다. '아불라피아'는 교회가 저주를 내리고 있는 카발라 추종자의 이름이었다. 카발라는 12세기 중반쯤에 서부지방에서 생겨나서 그곳으로부터 에스파냐로, 나중에 이탈리아로 전파되었고, 교회에 무서운 손상을 입혔던 유대 밀교였다."
- [미켈란젤로의 복수], <저주받은 이름>,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제단화를 그렸을 때, 일찍이 열네살부터 붓 대신 끌을 잡기로 결심했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조각가인 본인에게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게 한 사실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신약성서를 그리라는 교황의 요청과 달리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창세기부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추방, 노아의 대홍수 같은 구약성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렸고 둘레를 그리스식 남녀 예언자들로 장식했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세속적인 '복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덴베르크는 '미켈란젤로의 복수'라는 모티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2세기 유대 밀교 카발라와 신비주의를 덧입혀 가톨릭 교리 전체에 도전하는 거대한 프로그램을 역추적하여 구성해 낸다. 16세기 초에 작업한 시스티나 천장화가 복원 완료된 것이 1989년인데 그 과정에서 '지식'의 예언자 '예레미아'로부터 시작하여 알파벳 여덟 글자가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A-I-F-A-L-U-B-A'로 알려진 이 기호 배열의 해석을 위해 교황청에서는 교리 담당 옐리넥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바티칸의 비밀서고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서에 반하는 사실들이 드러난다.

연구 결과 동방의 예언자 '예레미아'는 본래 글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썼기에 문자의 배열은 뒤집어져야 했고, 그에 따라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 숨겨져 있다가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아이파루바(AIFALUBA)'는 사실 '아불라피아(ABULAFIA)'였으며, '아불라피아'는 13세기에 교황 니콜라우스 3세에 의해 화형당한 유대 카발라 신자였다는 것이다.

1978년도에 32일간 재위하고는 급사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비밀유품에서 발견한 미켈란젤로의 문서들 속에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아불라피아'의 기록을 발견한 교리(이념) 담당 옐리넥 추기경은 그 내용의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한편, 바티칸의 정치적 실세인 국무 추기경과 경제적 실세인 재정담당 추기경은 '아불라피아'와 미켈란젤로가 알고 있던 비밀을 덮고 가톨릭 권력의 유지를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를 암살하기까지 한 바 있다. 믿거나 말거나 32일 교황인 요한 바오로 1세는 이 엄청난 '비밀'을 다루기 위해 종교회의를 소집한다는 발표 하루 전 선종했다는 것이다.
옐리넥 추기경이 안고 가려던 '폭탄'은 이미 바티칸이 2천년 동안 안고 있던 '진실'이었다.

"... 문서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여기 씌어 있는 것이 사실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니콜라우스 3세 교황이 감추고자 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미켈란젤로가 카발라 추종자들에게서 들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나치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진실이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가 신앙문제 종교회의를 열 계획을 세우게 만든 바로 그 진실이었다."
- [미켈란젤로의 복수], <다 이루었도다>, 필리프 반덴베르크, 1988.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유품에서 나온 미켈란젤로의 유품에서는 카발라 교도 '아불라피아'의 기록이 발견된다. 아불라피아는 이 기사를 통해 역시 카발라 교도 시몬 벤 예루킴이 예수의 시체를 옮겨 자신의 무덤에 매장하였는데 카발라교에서 예수의 시체를 훔친 이유가 예수의 신격화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또한 이 '진실'은 나치의 손에도 들어갔고 결국 바티칸이 나치 전범들의 남미 이주를 지원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단다.

원제가 [시스티나의 음모]인 반덴베르크의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복수](1988)는 또 다른 소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로 이어진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저서인)... [그림에 대하여]... 신적인 그림에 대한 암시... '그 모양은 독수리와 장미에 둘러싸인 곳, 가슴에는 비밀을 품고, 넉넉한 연단(녹을 방지하는 도료) 아래서 종려나무를 쓰러뜨릴 힘을 가진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미술사가들은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묘사가 뜻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다가 마지막에 이 그림이 사라졌다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사라졌다고 생각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실은 [장미원의 성모]였던 것이죠."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단테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3.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1993)의 원제는 [제5복음서]다. 

내용은 전작 [미켈란젤로의 복수(시스티나의 음모)]와 이어지지 않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미켈란젤로의 복수]는 옐리넥 추기경의 진실 추적이 액자식 구성처럼 예언자 '예레미아'를 자처하는 반신불구의 수도승의 이야기로서 전해지며, 화자인 '예레미아' 수사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아 진실 은폐를 위해 바티칸에 의해 감금된 옐리넥 추기경으로 암시된다. 
한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제5복음서)]은 전혀 이어지지 않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그 소재와 주제는 동일하다.

미국의 독일 출신 비교문학자 마르크 포시우스 교수가 프랑스 파리의 박물관에 진열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장미원의 성모]에 황산을 뿌린 이유는 성모의 목에 처음 그려진 여덟 보석의 목걸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1999년에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숨겨진 문자를 알리기 위해 염산을 뿌린 페터 뎀프의 [보쉬의 비밀]처럼 20세기에는 명화들에 대한 의심에 찬 테러들이 횡행했던 것 같다. 

아무튼, 미술사 전공자답게 반덴베르크는 전작의 미켈란젤로에 이어 이번에는 미켈란젤로의 르네상스 라이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속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을 다룬다.

아마도 첫번째 [암굴의 성모]로 추정되는 그림 [장미원의 성모] 속 성모 마리아의 목에 원래 그려진 목걸이는 루비와 자수정 등 8가지 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보석들의 첫 글자 배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지칭한다. 그 이름은 '바라바(Barabbas)'다. 성경에서는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고발한 유대 랍비들에게 '나사렛 예수'와 폭도 '예수 바라바'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 물었고 유대인들은 '복음서'에서 '강도' 또는 '폭도'로 부른 '바라바'를 살리고 '나사렛 예수'를 죽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유대 이름 '예수'는 흔했지만 여기서 예수와 바라바 모두 '예수'였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에서도 이 '바라바'라는 역사속 유령같은 인물을 쫓아 바티칸의 대응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을 종횡무진하는 모험담까지 전개되지만, 오랜 '진실'을 담은 주제는 하나다.

"난외주석들에는 이 구절들이 나타난 여러 복음서의 장절들이 표시되어 있다고 보아야겠죠. 그러니까 '바라바(Barabbas)'는 이 '다섯번째 복음서'의 저자를 뜻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사실만으로는 이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폭발력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바라바'라는 이름은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를 감추고 있는게 분명해요. 그것은 일종의 '코드' 같아요. 오직 아는 사람들끼리만 이 말을 아는 거죠. 마치 놀라운 의미를 가진 비밀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것 말예요."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제5복음서>, 필리프 반덴베르크, 1993.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는 마가(마르코)-마태(매튜)-루가(루크)-요한(존)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쓴 예수의 생애인데, 마리아의 수태고지 및 예수의 수난과 처형,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 기사들이다. 이들은 가톨릭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격화하는 사명을 담은 이야기들로서 예수 사후 수십년 지나서 씌어진 기록들이다.
그런데 단테는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이어지던 천재들의 신비로운 비밀결사 '기사단'은 '바라바'라는 예수와 동시대 인물의 기록을 담은 양피지 문서를 토대로 또 하나의 복음서인 '제5복음서'를 계승하면서 전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제5복음서'는 '4대 복음서'의 원본이다. 당대의 천재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이 단테 사후 15년이나 지나서 첫 필사본이 나온 것이라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 그림에 숨겨진 목걸이 등은 '제5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바라바'의 존재와 그가 전하고자 했던 예수 이야기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속 인물들의 모험을 통해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은, '제5복음서'의 저자인 '예수 바라바'는 '나사렛 예수'와 그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인데, '바라바'가 '성혈'이자 '성배' 그 자체가 되는 이 '진실'은 가톨릭 권력의 상징인 바티칸이 2천년 간 은폐해야 했던 가장 무서운 잠복된 '폭탄'이기도 하다.

[제5복음서]를 통해 반덴베르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름아닌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며,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

1.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1988),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 - 제5복음서의 숨겨진 비밀](1993), Philipp Vandenberg,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3. [보쉬의 비밀(Das Geheimnis des Hieronymus Bosch)](1999), Peter Dempf, 정지인 옮김, <생각의 나무>, 2006.
4. [성혈과 성배](1982), 헨리 링컨/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이정임/정미나 옮김, <자음과모음>, 2005.
5. [그리스도교의 기원](1908), 칼 카우츠키 지음, 이승무 옮김, <동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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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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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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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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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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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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