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아론 바스타니 지음, 김민수.윤종은 옮김 / 황소걸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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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공산주의가 눈앞에 있다!
-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 '공산주의'는 인류가 마르크스가 '필요의 영역'이라고 부른 것에서 탈피해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 
'공산주의'는 화려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산주의'가 아니다."
-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1-3. FALC란 무엇인가>, 아론 바스타니, 2019.


1848년 유럽혁명의 시기에 '과학적 사회주의자'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을 때, 혁명의 '현실정치'적 결과는 또 다시 '왕정 타도'와 '공화국 건설'이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이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달랐던 건 다수 '노동계급'의 힘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바야흐로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된 채 가진 건 노동력 뿐인 도시 '자유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다수 양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선언'한 신세계는 이 다수 노동계급의 힘으로 소외된 노동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계급' 자체가 철폐된 세상이었다. '계급투쟁의 인류역사'를 끝장내는 것이 다수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였다.

그로부터 170여 년이 흐른 2019년, 미국 정치평론가 아론 바스타니(Aron Bastani)는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풍요'와 '자동화'를 기반으로 탈자본주의적 새로운 '정치'를 통해 쟁취할 세계를 다시금 '선언'한다.


이른바,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이다.


"'5가지 위기(기후변화, 자원부족, 과잉인구, 고령화, 자동화에 따른 기술적 실업)'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버틸 능력을 약화한다. '5가지 위기'는 끊임없는 확장, 무한한 자원, 이윤을 위한 생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 등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을 없앨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같은책, <1-2.>.


저자는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있던 1989년, 미국에서 '자본주의 체제승리'로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무명 정치학자의 공상이론은 저자에 의하면 현재에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유령처럼 배회한다. 즉,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더 게 쉽다"는 지배이념과 시장맹신 사상이 근거하는 이데올로기다. 2018년 후쿠야마는 자신의 '역사의 종말'이 헛소리였음을 시인했다지만 체제유지를 위한 시대의 관념은 굳건하다. 인류의 마지막 체제는 자본주의 밖에 없다는 관념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1차 대변혁'인 '농업혁명'과 '2차 대변혁'으로서의 '산업혁명'에 이어 '3차 대혁명'인 '정보혁명' 또는 '정보의 대해방'(같은책,<1-2>)에서 정점을 찍는다. 과학기술 발전과 디지털화로 인해 정보, 노동, 에너지, 자원, 건강과 음식 등 '희소성'을 경제적 특징으로 하던 재화들이 무한발전 및 무한공급되고, 이것들의 가격이 공짜('0')로 수렴되는 '무어의 법칙'이 작용하면 이를 다수가 전유하도록 분배하는 '력셔리 포퓰리즘 정치'를 통해 'FALC'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공산주의'라는 단어의 뜻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 사라지고, 풍요가 희소성을 대신하고, 노동과 여가가 하나로 합쳐지는 사회다... FALC는 '3차 대변혁(정보해방)'의 경향을 뒷받침하기 보다 그 자체로 '3차 대변혁'의 경향이 도달한 결론이다...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희소성'을 겪는 상태에서 어느 것이 유용성을 넘어서는지 보여준다. 필요한 것을 뛰어넘은 과잉이 이 개념의 본질이다. 따라서 정보, 노동, 에너지, 자원의 값이 영구적으로 내려가고 일과 낡은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용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구분하는 모든 경계를 허문다."
- 같은책, <1-3>.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가져간다"는 마르크스주의 이상향 또한 '희소성'의 경제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에 의하면 이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풍요'와 '자동화'다. 태양열은 전인류가 1년 동안 사용할 에너지를 단 9분만에 지구로 전달하고 있으며 기후위기를 벗어날 '탈탄소' 자원은 얼마 안 있어 우주로 나가 채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상과학이 아니라 실제 혁신적인 자본가들과 그 정권들이 이미 고액을 투자하여 시작한 일들이다. 물론 '자유 시장'을 믿는 그들은 '무한공급'의 가능성을 여전히 '희소성'으로 위장해서 소수의 '이윤창출'이라는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다수가 할 일은 '3차 대변혁'의 특징인 '공짜로 수렴하는 자원과 기술'의 경향을 믿고 이 '공유자원(the commons)'들을 재전유하는 것이다. 이 '공유자원'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어셈블리](2017)에서 다수대중이 재전유해야 하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s)'과 같고, 노동하는 다수에 의해 확대되어야 하는 소유의 '사회화'다. 이제 공공재를 만드는 사람이 그 공공재를 소유하는 시대가 진정 오게 된다. 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제대로 된 '중앙은행'의 최종 임무는 금융자본시장의 '점진적 사회화(같은책,<3-11>)'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의 전제는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소유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다수'의 '소유', 즉 '사회화'를 위해서는 '력셔리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포퓰리즘'이란 경제를 움직이는 주류의 사고방식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정치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경도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대란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 아래 '포퓰리즘'을 공격한다... '력셔리 포퓰리즘'은 '붉은색'과 '녹색' 정치를 한데 결합한다... 번영과 민주주의, '공유자원(the commons)'은 단순히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서로 완성하는 관계다.
... '3차 대변혁'이라는 조건이 마련되기 전에 '공산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1차 대변혁' 전에 잉여생산물을 얻거나, '2차 대변혁' 전에 전기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같은책, <3-9>.


'FALC'의 정치 모토는 '자유'와 '화려함', 그리고 '탈희소성'의 추구다. 14세기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카톨릭을 대중화했던 영국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보다 후대인 <95개조 반박문>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에 불을 당길 수 있었던 건 15세기 근대 인쇄기술의 '혁명'적 변화가 비로소 바탕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19세기 '공산당 선언'이 20세기 '공산권 몰락'의 구질구질한 이미지로 남은 이유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생산력이 그만큼 발전하지 못해서다. 
아론 바스타니에 의하면 이제 '풍요'와 '력셔리'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다시금 '공산주의 선언'이 가능하다.
화려하지 않은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소비에트가 구리게 끝난 이유도 '희소성'과 '결핍'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이론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로 발전한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의 '예측'은 여전히 '과학'이었으나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도, 노동자 보통선거도 못보고 19세기에 지구를 떠났다.


"이제 기술의 중요성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기술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사회적 관계, '정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 
우리는 'FALC'를 지도 삼아 '희소성'과 '노동기반사회'라는 미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FALC'는 지금 당장 필요한 행동을 제시한다... 'FALC'는 구체적이고 단순명료한 '정치'적 방안을 요구한다. 바로 신자유주의와 단절', 노동자 소유경제로 이행,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국가재정 지원, 교환과 이윤을 위한 상품이 아닌 기본권으로서 'UBS(Universal Basic Service : 보편기본복지)'다...
...
쟁취해야 할 세계가 눈앞에 있다!"
- 같은책, <3-12. FALC : 새로운 시작>.


결론은 소수의 이익에 복무하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지배이념인 '신자유주의'와 결별하고 GDP 수치 성장과 '통화주의'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에 목을 매는 '자본주의국가'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국제투기에 대항하는 '국제주의'적 '자본(금융)거래세'(같은책,<3-11>)와 부유한 선진국이 '제3세계' 저발전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책임지고 지원하는 '지구세'(같은책,<3-10>) 등은 토마 피케티식 '현대화된 사회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중판 같기도 하지만, '21세기 공산주의 선언'을 내건 아론 바스타니의 'FALC(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 그 '너머'를 확실하게 명시한다. 모두가 등돌려 버린 '구질한' 공산주의를 '화려하게' 포장하면서까지 말이다. 

'희소성'과 '노동기반사회'의 기존 자본주의적 '미로'에서 벗어나는 우리 모두의 기본권 보장은 '보편기본복지(UBS : Universal Basic Service)'로 정책화된다.
이는 '보편기본소득(UBI : Universal Basic Income)'보다 "바람직한 대안"(같은책,<3-11>)인데 "노동 없는 임금"인 '기본소득'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재정이 투입돼야 한다는 사실 외에 모든 것이 불확실"(3-11)한 반면, '보편기본복지'는 주거나 의료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중심으로 하면서 '화려한' 공산주의의 출발점이 된다. 
"에너지와 노동, 자원이 정보와 마찬가지로 공짜에 가까워지고 무한공급이 확대되는 한, 역사는 'UBS(보편기본복지)' 편이다(같은책,(3-10>)."
이는 다음 우리 대선의 주요쟁점이 될 '보편복지'와 '기본소득'의 대립에서 '복지축소'를 전제로 하여 '국가임금'식 괴물로 변형될 우파적 '기본소득' 책동을 분쇄하고 '보편복지'를 사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 몇 푼과 기본권을 교환할 수는 없다.


'붉은색(평등)'과 '녹색(환경)'이 결합된 정치(생태사회주의)를 통해 자동화와 디지털화로 생산된 '공공재(the commons)'를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와 '럭셔리'가 '공산주의'였다니, 저자의 낙관적이고 꿈같은 이야기가 새삼 고맙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재생에너지와 '탈탄소화', 우주개발, 생명(유전)공학, 세포농업 등 현대과학의 신기술 발전에 관한 <2부>의 노동, 에너지, 자원, 건강, 음식 등의 간략한 소개들은 오히려 덤이다.


***

1.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2.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마르크스/엥겔스, 1848.
3.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4.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5. [21세기 자본](2013), 토마 피케티,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6.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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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집 양장 세트 - 전9권 (2판) - 일러스트 500여 컷 수록 셜록 홈즈 시리즈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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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고전적 모티브'
- 셜록 홈즈 [붉은 머리 연맹] / 영화 [도굴]



"빨강 머리 연맹 -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바논의 고 이제키아 홉킨스 씨의 유언에 의해 결성된 이 연맹에 빈자리가 새로 하나 생겼다. 회원은 극히 형식적인 일만 하며 그 보수로 주 4파운드의 급여가 지급된다. 심신이 건강한 21세 이상의 붉은 머리를 가진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월요일 11시에 플리트 가의 포프스 코트 7번지에 있는 연맹 사무실로 본인이 직접 와서 던컨 로스에게 신청할 것."
- [빨강 머리 연맹], '홈즈단편 베스트 걸작선 17',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코로나 집콕 크리스마스 기념 하루 지난 집에서 영화 [도굴]을 봤다. 어린 시절 꿈이 '고고학자'였던 나는 아는 것도 없이 '고대 유물!'하면 무조건 본다.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이런 영화 무조건 대박일텐데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소수 중의 소수다. 


코미디 영화 [도굴]에는 예상보다 실제 유물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태조 이성계의 '보검'도 다른 계획을 숨기기 위해 친 뻥이다. 그냥 '유물' 관련 영화의 분위기만 풍긴다. 영화 중간에 도굴꾼들이 고구려 벽화를 털기 위해 중국 길림으로 가는데 그들이 훔치는 게 아무래도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 벽화로 보임에도 왜 국내성 부근으로 갔는지는 모르겠고 물론 그런 '고증'이 영화흥행에 도움이 될런지는 영화를 모르는 나로서는 더더욱 모를 일이다. 


어쨌든, 조선 9대 왕 성종의 무덤인 서울 강남 선릉이 임진왜란 때 도굴되면서 왜군에 의해 왕의 시신이 불태워졌으며 선조가 '조선의 엑스칼리버'인 태조 이성계의 보검을 대신 관에 넣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미스터리와 주변 단란주점을 사서 도굴용 지하땅굴을 파는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순간 어린 시절로 갑자기 돌아갔다. 셜록 홈즈가 나오는 단편소설을 읽던 시절로. 그 시절은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때는 1890년, 홈즈의 베이커가 하숙집에 '붉은 머리' 남자 윌슨이 찾아왔다. 보통의 의뢰인들은 살인, 협박, 도난 등의 사연을 들고 오는데 윌슨의 사연은 의뢰라기 보다는 단순상담꺼리 같다. 보잘 것 없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새로 온 젊은 점원도 임금을 반만 받는 사람을 고용했는데 어느날 '붉은 머리 연맹'의 회원 공석이 생겨 하루 4시간 대영 백과사전 단순 필사만 해도 고액을 받던 윌슨은 어느날 '연맹' 해체소식에 무슨 일인가 한다는 이야기. 단순상담 같지만 홈즈는 냄새를 맡는다. 항상 그렇듯 현장 답사를 다녀온 홈즈는 결국 친구 왓슨과 런던 경시청 경관들을 대동하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월슨의 전당포 뒷편 대형은행에 맡겨진 프랑스 나폴레옹 금화 3만 달러를 훔치려는 도둑이 빨간 머리 윌슨을 전당포로부터 꼬여서 자리를 비우게 하려는 수작으로 '붉은 머리 연맹'을 급조해냈고 도둑의 우두머리는 반값임금만 받는 새로온 전당포 점원이었다는 게 줄거리다. 도둑은 윌슨이 '붉은 머리 연맹' 사무실에 가 있는 동안 빈 전당포 지하에서 은행지점까지 지하땅굴을 파고 있었으며 홈즈는 첫 현장답사에서 유명한 도둑 존 크레이라는 그 점원의 얼굴을 확인한 게 아니라 땅굴을 파느라 더러워진 바지무릎을 슬쩍 본다. '연맹'이 해산했으니 그 주말에 바로 작업이 들어갈 거라는 정확한 예측은 물론이고.


영화 [도굴]에서 선릉을 파기 위해 유령 주점을 확보하는 식의 이야기는 비슷한 도둑질 영화의 단골메뉴일 텐데, 아마도 이런 미스터리극의 '고전적 모티브'가 바로 듣보잡 [붉은 머리 연맹]일 게다. 감독이나 작가는 분명 어린 시절 코넌 도일 경의 [붉은 머리 연맹]을 읽었으리라.


'붉은 머리 연맹'은 '빨간 머리 연맹'이나 '붉은 머리 클럽'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나는 어릴적 초등시절 읽은 대로 이 정체불명의 유령단체를 '붉은 머리 연맹'으로 기억한다. 윌슨씨의 머리는 도둑이 처음 보고 '연맹' 이름을 급조할 정도로 빨간 편에 가깝지만 왠지 '붉은' 게 더 미스터리한 것 같기도 하고 '연맹' 대신 '클럽'은 한참 나중에 나왔지만 남성전용미용실 같아서 내게는 변함없이 '붉은 머리 연맹(The Red-Headed League)'으로 남아 있다.


영화 [도굴]은 코미디 복수극으로 도굴 문화재를 모으는 악당에게 오래전 원한을 갚으면서 동시에 본의 아니게 도굴된 문화재를 국가에 되돌려주며 끝나는데, 한술 더 떠서 일제가 가져간 우리 문화재를 되털러 일본으로 간다는 호방한 '애국'의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착한 일 하는 도굴꾼들의 결말을 보니 역시 영화를 만든 사람의 '모티브'는 의도했든 아니든 또 다시 [붉은 머리 연맹]이다.


19세기 말 사그라지던 조국 대영제국이 유럽의 오래된 라이벌 프랑스로부터 빌려온 나폴레옹 금화를 지켜내고 역시 본의 아니게 조국의 '자존심'도 지켜낸 홈즈에게 친구 왓슨이 "전 인류의 은인"이라 치켜세웠을 때 그런 거 원래 안 좋아하는 냉소적인 셜록 홈즈는 다음과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굳이 프랑스 작가를 인용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 무엇인가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플로베르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닐세. 그의 일(그가 한 일)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네.'"
- 같은책.


***

1. [빨강 머리 연맹],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2. 영화 [도굴], 박정배 감독, <사이런픽처스>, 2020.
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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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붉은 머리 연맹 - 셜록 홈스 걸작선 02 셜록 홈스 걸작선 2
아서 코난 도일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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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고전적 모티브'
- 셜록 홈즈 [붉은 머리 연맹] / 영화 [도굴]



"빨강 머리 연맹 -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바논의 고 이제키아 홉킨스 씨의 유언에 의해 결성된 이 연맹에 빈자리가 새로 하나 생겼다. 회원은 극히 형식적인 일만 하며 그 보수로 주 4파운드의 급여가 지급된다. 심신이 건강한 21세 이상의 붉은 머리를 가진 남성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월요일 11시에 플리트 가의 포프스 코트 7번지에 있는 연맹 사무실로 본인이 직접 와서 던컨 로스에게 신청할 것."
- [빨강 머리 연맹], '홈즈단편 베스트 걸작선 17',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코로나 집콕 크리스마스 기념 하루 지난 집에서 영화 [도굴]을 봤다. 어린 시절 꿈이 '고고학자'였던 나는 아는 것도 없이 '고대 유물!'하면 무조건 본다. 나같은 사람만 있으면 이런 영화 무조건 대박일텐데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소수 중의 소수다. 


코미디 영화 [도굴]에는 예상보다 실제 유물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태조 이성계의 '보검'도 다른 계획을 숨기기 위해 친 뻥이다. 그냥 '유물' 관련 영화의 분위기만 풍긴다. 영화 중간에 도굴꾼들이 고구려 벽화를 털기 위해 중국 길림으로 가는데 그들이 훔치는 게 아무래도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 벽화로 보임에도 왜 국내성 부근으로 갔는지는 모르겠고 물론 그런 '고증'이 영화흥행에 도움이 될런지는 영화를 모르는 나로서는 더더욱 모를 일이다. 


어쨌든, 조선 9대 왕 성종의 무덤인 서울 강남 선릉이 임진왜란 때 도굴되면서 왜군에 의해 왕의 시신이 불태워졌으며 선조가 '조선의 엑스칼리버'인 태조 이성계의 보검을 대신 관에 넣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미스터리와 주변 단란주점을 사서 도굴용 지하땅굴을 파는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순간 어린 시절로 갑자기 돌아갔다. 셜록 홈즈가 나오는 단편소설을 읽던 시절로. 그 시절은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때는 1890년, 홈즈의 베이커가 하숙집에 '붉은 머리' 남자 윌슨이 찾아왔다. 보통의 의뢰인들은 살인, 협박, 도난 등의 사연을 들고 오는데 윌슨의 사연은 의뢰라기 보다는 단순상담꺼리 같다. 보잘 것 없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새로 온 젊은 점원도 임금을 반만 받는 사람을 고용했는데 어느날 '붉은 머리 연맹'의 회원 공석이 생겨 하루 4시간 대영 백과사전 단순 필사만 해도 고액을 받던 윌슨은 어느날 '연맹' 해체소식에 무슨 일인가 한다는 이야기. 단순상담 같지만 홈즈는 냄새를 맡는다. 항상 그렇듯 현장 답사를 다녀온 홈즈는 결국 친구 왓슨과 런던 경시청 경관들을 대동하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월슨의 전당포 뒷편 대형은행에 맡겨진 프랑스 나폴레옹 금화 3만 달러를 훔치려는 도둑이 빨간 머리 윌슨을 전당포로부터 꼬여서 자리를 비우게 하려는 수작으로 '붉은 머리 연맹'을 급조해냈고 도둑의 우두머리는 반값임금만 받는 새로온 전당포 점원이었다는 게 줄거리다. 도둑은 윌슨이 '붉은 머리 연맹' 사무실에 가 있는 동안 빈 전당포 지하에서 은행지점까지 지하땅굴을 파고 있었으며 홈즈는 첫 현장답사에서 유명한 도둑 존 크레이라는 그 점원의 얼굴을 확인한 게 아니라 땅굴을 파느라 더러워진 바지무릎을 슬쩍 본다. '연맹'이 해산했으니 그 주말에 바로 작업이 들어갈 거라는 정확한 예측은 물론이고.


영화 [도굴]에서 선릉을 파기 위해 유령 주점을 확보하는 식의 이야기는 비슷한 도둑질 영화의 단골메뉴일 텐데, 아마도 이런 미스터리극의 '고전적 모티브'가 바로 듣보잡 [붉은 머리 연맹]일 게다. 감독이나 작가는 분명 어린 시절 코넌 도일 경의 [붉은 머리 연맹]을 읽었으리라.


'붉은 머리 연맹'은 '빨간 머리 연맹'이나 '붉은 머리 클럽'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나는 어릴적 초등시절 읽은 대로 이 정체불명의 유령단체를 '붉은 머리 연맹'으로 기억한다. 윌슨씨의 머리는 도둑이 처음 보고 '연맹' 이름을 급조할 정도로 빨간 편에 가깝지만 왠지 '붉은' 게 더 미스터리한 것 같기도 하고 '연맹' 대신 '클럽'은 한참 나중에 나왔지만 남성전용미용실 같아서 내게는 변함없이 '붉은 머리 연맹(The Red-Headed League)'으로 남아 있다.


영화 [도굴]은 코미디 복수극으로 도굴 문화재를 모으는 악당에게 오래전 원한을 갚으면서 동시에 본의 아니게 도굴된 문화재를 국가에 되돌려주며 끝나는데, 한술 더 떠서 일제가 가져간 우리 문화재를 되털러 일본으로 간다는 호방한 '애국'의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착한 일 하는 도굴꾼들의 결말을 보니 역시 영화를 만든 사람의 '모티브'는 의도했든 아니든 또 다시 [붉은 머리 연맹]이다.


19세기 말 사그라지던 조국 대영제국이 유럽의 오래된 라이벌 프랑스로부터 빌려온 나폴레옹 금화를 지켜내고 역시 본의 아니게 조국의 '자존심'도 지켜낸 홈즈에게 친구 왓슨이 "전 인류의 은인"이라 치켜세웠을 때 그런 거 원래 안 좋아하는 냉소적인 셜록 홈즈는 다음과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굳이 프랑스 작가를 인용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 무엇인가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플로베르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닐세. 그의 일(그가 한 일)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네.'"
- 같은책.


***

1. [빨강 머리 연맹], 아서 코난 도일,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6.
2. 영화 [도굴], 박정배 감독, <사이런픽처스>, 2020.
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덕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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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지음 / 도서출판 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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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정체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해방 후) 북한은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학술지 [력사제문제]를 출간했는데,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은 1949년에 [력사제문제]에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논문을 썼다. 홍기문은 이 논문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를 명쾌하게 정리했는데, 첫째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일본부'설이고, 셋째는 백제가 일본의 부용국, 즉 속국이라는 주장 등이 일제 식민사학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해설 : 남북한 가야사 연구의 현격한 차이', 이덕일, 2020.


1945년 해방 후 1948년 남북 단독정권 수립 시까지 3년간은 우리 현대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활발했던 '해방공간'으로 불린다. 이 시기 역사학은 세 가지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한 '민족주의 역사학', 또 하나는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에 기초한 '사회경제사학', 나머지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뒤를 이은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이었다. 미군정의 비호 아래 수립된 남한 단독정권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짓밟혔고,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차라리 북으로 넘어갔으며, 남한에는 오로지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다.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 홍기문 선생은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남북을 통틀어 '식민사학'의 '요체'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낙랑=평양'설은 이후 1960년대 초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 논문에 의해 박살났고, 가야사는 1963년 김석형 선생에 의해 '임나가야'는 일본에 세워졌던 가야소국이라고 밝혀지며 올바르게 정리되었다. 이후 북한 '력사학계'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주체적 역사관'으로 단순하게 정립된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제자들이 다수인 남한 역사학계는 '낙랑군 평양설'과 '임나 가야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설이란다.

'가야사'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식민사학'이 따르고 있는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가야', '가라'라는 국호는 한자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유 조선말에서 나왔다. '가야'의 국호가 '갓'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 '쯔누가아라시또'... '쯔누가'라는 말은 '뿔이 난 갓', '뿔이 난 고깔'이라는 뜻이다... '아라시또'를 '아라사람', 즉 '가야사람'으로 리해하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자연스럽다. 결론적으로 '뿔 달린 갓을 쓴 가라사람'이다."
-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1장 : 가야(금관)령맹체의 형성과 흥망성쇠', 조희승, 2011.


재일교포로 북한에서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 조희승은 1960년대 초 역사학자 김석형 선생의 학설을 계승하여 서기 1 ~ 6세기 한반도 남동부 '가야'의 역사를 정리한다. 남한의 역사학계는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에서도 그들의 근본과 같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조차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답습하고 있었다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학은 끊임없이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 '가야'에 관한 유일한 종합적인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다. 서기 42년 '거북아,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는 <구지가(龜旨歌)>를 부른 후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金首露) 왕이 건국한 '금관가야' 이야기의 출처다. 흔히 '가야'는 초기 연맹체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여 우리 '삼국시대'의 변두리 역사에 머물러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단계설에 따라 청동기 시대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며 봉건제 국가체제로 전환된다고 보는데 청동기 시대인 진국(辰國:삼한을 통치했던 청동기 노예제 국가)은 철기가 발전하면서 마한은 이후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진화한다고 본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한전>은 변한이 철이 많이 나는 지역이며 고깔 모양의 '갓'을 쓰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 나라 이름이 '가야'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기록 [삼국지]에서도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풍성하며 철기 문화가 발전'하여 번영된 문명을 지녔다던 '가야'는 주변의 고구려-백제-신라와 동등하게 '사국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음에도 '신라 중심주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사장되었다. 그 결과 가야에 관한 문헌학적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하늘(텡그리)'을 숭배하던 아시아 동북지역 부족 중 요동과 만주 일대 '고조선'의 후예들인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신라의 건국설화는 모두 동일하게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난다. 이는 '하늘'의 상징인 '새'와 관련이 있으며 시신을 새의 먹이로 바치는 '조장(鳥葬)'의 장례 예식과도 관련이 있다. '알'에서 태어난 시조를 지닌 나라는 모두 한 민족 또는 동일 문화인 것인데 가야 연맹체의 첫번째 맹주국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은유는 그 통치집단이 북쪽(하늘)의 고조선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김수로 금관가야의 무덤양식이 '나무곽무덤'이라는 점이다. 가야와 초기 신라의 한반도 남동부 무덤양식은 '수혈식돌널무덤'이었다.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 소국(아라,고령,성산,대,소가야 등)들은 돌널무덤이었던 반면 금관가야만 나무곽무덤이었고 고구려와 같이 구리가마를 집에 걸어놓는 북방식 선진문화 또한 발견된다. '고조선인' 김수로 '통치배'의 금관가야는 이 선진문화에 힘입어 서기 3~4세기 지금의 대구와 상주까지 아우르는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했고 금관가야 연맹체는 신라와 동등한 국력을 과시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였고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는 이른바 '사국시대'가 전개되는데, 이 전선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왜', 즉 '일본'이다. 백제-가야 연합세력은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까지 장악했던 '해양성'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온 한반도인들을 '뿔이 달린 외국인(가야사람)', 즉 '쯔누가아라시또'라 불렀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는 어디까지나 북규슈의 이또지마 반도 일대에 있던 가야계통 '왜'소국의 군사력이었다... 가야의 철이 '왜'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광개토대왕)릉비의 '왜'가 기내지방 야마또 정권이 아니였다는 데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 조희승, 같은책, '3장 : 경제와 문화'


가야연맹체는 3~4세기에 가장 전성기였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 백제를 복속시키기 위해 남하하던 4세기 말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가야-왜 연합의 대전쟁 이후 패배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었고 5~6세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국은 '고령대가야'가 되었다. 고령대가야 시기는 이미 고구려 선진문명과 직접 접했으므로 한반도 남부까지 개마무사 등 철기와 무기류, 전쟁장비 등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이 당시 '왜'를 언급하고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간첩질을 하던 19세기 말 '사또'라는 일제 장교가 광개토대왕릉비를 탁본해 가는데, '임나일본부'가 [일본서기]라는 무덤에서 좀비처럼 일어나는 계기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패퇴한 '왜'는 가야가 부산, 김해 등을 통해 바다 건너 일본 북규슈 땅에 건설한 소국(식민지)의 군사력이었으나, 동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일본 군국주의는 역으로 일본이 '철'을 얻기 위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하였고 이곳에 '임나(가야)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왜'는 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거다. 이것이 3세기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일본서기]의 허황된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명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670년)에나 등장했고 '일본'을 연 이 야마또(대화) 정권은 당시 일본땅 조차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일본서기]는 8세기에 '일본' 천왕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화적으로 지어낸 시간 순서의 앞뒤도 안 맞는 그들만의 '정사'에 불과하다. 
'일본'도 없던 시절에 그들이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임나일본부가 남부조선에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와 주장은...) 그 시기(5세기)에 벌써 서부 일본이 기내 야마또 정권에 의하여 통일되여 있었다는 판단에 기초한 그릇된 설이다. 5세기의 력사적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7세기 이후의 시점에서 임나에 갔다고 하는 기사를 곧 '조선의 임나(가야)로 갔다'고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던 '가야(임나)'였던가. 그것은 '다사'가 본거지로 삼은 곳, 즉 기비의 '가야'였다...
그러므로 야마또 정권이 기비 지방의 '임나'에 인연이 있는 '다사'를 '임나국사', 즉 '미마나노구니노 미꼬또모찌'로 파견하였다고 보는 것이 어느모로 보아도 합리적이며 또 옳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임나일본부'의 정체'.


'임나'는 '가야'를 이르는 [일본서기]의 지명이다. 고대 한국어는 일본어처럼 받침이 없었다는데 '가야'를 뜻하는 다른 말인 '미마나'가 나중에 '임나'가 된 듯 하다. 부산과 김해를 중심으로 한 3세기 금관가야의 '해상력'은 바다를 건너 미지의 북규슈 섬 지역까지 진출하여 가야 '소국'들을 건설했고 5세기 한반도 대전쟁에서는 가야인들이 일본에 세웠던 소국들의 군대까지 총동원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으며 6세기 고령대가야까지 해체된 후에는 가야 유민들이 일부는 백제로, 또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야마(기비) 지방에까지 '소국'들인 '임나(가야)'를 대거 건설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와 동일한 그 지역의 '조선식 산성'이 증거가 되는데 일본의 '가야' 소국들은 산성을 축성할 정도의 '국력'과 동원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7세기 '왜'가 아닌 '일본'이 되려는 야마또 정권은 일본 통일전쟁에서 '가야계' 인사인 기비노가미쯔미찌 다사라는 자를 '임나국사(가야총독)'로 임명하여 일본 기비(오까야마)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세우는데 그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야마또 정권의 '행정출장소'가 바로 7세기 '임나일본부'의 정체인 것이다. 
당시 일본 지역은 '구다라(백제)', '시라기(신라)', '미마나(임나/가라/아라/가야)' 등 한반도 중남부 '해양성'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 각축장이었다. 그렇다고 '유사사학'처럼 우리 고대 국가들의 '제국성'이라든가 '고대 일본은 우리의 식민지였다'는 식의 보복성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고대 문명의 확장은 대륙에서 전해졌을 것이고 아직 미지의 일본 섬 지방은 당연히 문명의 전파가 늦어졌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먼저 '문명화'된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이 '미지의 섬'으로 진출하여 선진문명을 '이식'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당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식민성'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아닌 인류 보편역사의 관점에 보아야 한다.

요약하면, 7세기 전까지 '왜'에는 '일본'은 없었고, '임나일본부'는 7세기 이후 야마또(대화) 정권이 기비 지방에서 발전하던 신라('시라기') 소국들을 견제하고 해당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가야(임나/미마나)'계 사람들을 '총독' 비슷하게 임명하여 간접지배하던 '출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임나일본부'의 정체다.

그리하여 남한 '식민사학'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되뇌이는 '가야사'를 바로잡는 일은, '임나일본부'를 해체하고 그 정체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야의 역사가 형체없이 된 것은 나라의 멸망이라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낸 후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의 과오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자기가 경주 김씨의 자손이라는 데로부터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력사를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신라에 의해 통합된 가야를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마땅히 [사국사기]로 되여야 할 책이 [삼국사기]로 되고 말았다... '통일신라'라는 개념... 고구려 땅에 일떠선 발해의 력사를 서술하지 않고 후기신라만을 취급함으로써 '발해사'도 '가야사'처럼 말살되는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틈을 노려 가야 력사를 혹심하게 외곡(왜곡)해 나선 것이 약삭빠른 일본인들이였다. 그들은 빈구석으로 된 가야사의 자리에 일본 력사를 밀어넣었다. 그리하여 가야의 력사는 참혹히 란도질을 당하게 되였다."
- 조희승, 같은책, '4장 3절'.


***

1.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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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사기 1 - 두 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삼국사'를 넘어서는 '오국사'의 지정학
-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고구려가 지녔던 '대륙성'과 백제와 왜국이 지녔던 '해양성'의 복원은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이 지향할 미래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라의 통일이란 장벽에 부딪친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 것 없는 통일이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신라의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 왜의 '해양성'을 사장시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 [오국사기] 1권, '책머리에', 이덕일, <김영사>, 2002.


학창시절 한 번쯤 우리 삼국 중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어떠했을까 공상해 보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의 나는 고구려의 강역이 요동과 만주 일대였으므로 고구려가 통일국이 되었다면 우리의 영토도 더 넓어졌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욱 강대국이 되었을 것 같다고 우긴 적 있었으나 스무살 이후 역사의 '가정'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다시 시간을 되돌린데도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으므로 서기 6~7세기로 되돌아간들 백제나 고구려나 썩은 내부 왕조체제로 인해 멸망하고, 가장 낙후된 정권이었으되 외교에 목숨걸었던 신라가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게다. 삼국 중 어느 정권이 존속했던들 역시 몇 백년 후 부패한 귀족체제로 인해 농민반란에 직면했을 것이고 말이다.

12세기 고려 시대 중기 '묘청의 난'을 진압한 당대 최고 지식인관료 김부식은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요동만주의 발해를 배제한 신라 중심 사관과 사대주의 사상에 기반했으되 현존하는 가장 '사실'에 기반한 제일 오래된 우리 자체 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역사투쟁의 주적이었고 어찌보면 이병도 무리의 근대 식민사학의 근원 같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므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고려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일한 '정사'가 되기 위해 참고했던 이전 왕조들의 기록들을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싶게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정사'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 현존하는 당대 중국왕조들의 역사서와 일치한다면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비록 일부 주류사학자들로부터 '유사사학' 같다는 비난은 있으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민족사학의 뒤를 잇고 있는 재야사학자다. 서기 6~7세기 우리 역사를 '삼국'의 틀이 아닌 '오국'의 관점에서 2002년에 평가하고 해설한 [오국사기]는 그 제목에서부터 주류 [삼국사기]를 넘어선다.
[오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당-왜' 5국의 역사기록을 '사실'에 기반하여 소설형식으로 풀어냈다. 이십여 년 전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닮은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온조왕이 한성에 도읍한 것은 서기전 18년이었다. 그리고 사비성 함락이 의자왕 20년(660)이니 백제는 개국 678년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한때 북쪽으로는 요하 서쪽을 차지해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할 정도로 흥성했던 왕국, 일본을 속국으로 삼았던 왕국,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백제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의자왕과 대성 8족으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격렬한 내분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국사기] 3권, '제18장 사비성의 비극'.


[삼국사기]는 극복대상이지만, 역사적 사실 대부분에 있어서는 주요 참고문헌이다. 역사해석에 왜곡은 있을지라도 우리의 '정사'이기에 '기사'로서의 '사실성'까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세기말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수립과 왜의 일본국 건설의 내용, 나-제 동맹의 해체와 복수를 꿈꾸는 신라의 국운을 건 외교, 고구려 내분 등이 드라마처럼 교차한다.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백제말기 부패한 귀족들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에 나-당 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었다. 백제 민중들은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의 성과를 들었기에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백제의 귀족들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차라리 의자왕의 항복이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다고까지 판단했단다. 전형적인 매국의 논리다. 치열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다가 당나라로 귀순하여 서방에서 공적을 세운 망국의 장수 흑치상지 이야기도 있고 백제왕 복위투쟁을 이어간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의 고도 부여 은산별신제의 주신으로도 모셔진다.  
'해양성' 강한 지정학적 '시파워(sea-power)' 국가 백제는 왜의 불교국가 건립을 도왔다는데 왜의 친백제 정권은 왕자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지원군까지 파병하지만 결국 또 다시 부흥군의 내분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부'는 와해되고 그 민중정신만 망국의 오랜 지역을 지키게 된다.


"보장왕은 이적에게 끌려 장안성으로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려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백성들도 장안으로 끌려가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때의 행정구역과 인구수를 '5부, 176성, 69만여 호'라고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3.5가구 중 한 명씩을 끌고 간 것이니 저항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간 셈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당의 의도였다...
보장왕을 위시해 아들과 대신들은 이 헌전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태종에게 사과해야 했다. 옛날 태종의 친정을 물리친 것이 큰 죄라는 사죄였다. 남건, 남산은 물론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남생도 땅 속에 묻힌 태종의 시신에 절해야 했다.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 [오국사기] 3권, '제22장 제국의 종언'.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을 가운데로 두고 볼 때 동북의 고구려 뿐 아니라 예전 북방의 흉노나 당시 서북의 돌궐 또한 '하늘(텡그리)'의 자식('천자')으로서 '가한(칸/한/선우)'이 있었으나 후대에 기록을 전하지 못했거나 중국 통일왕조에 의해 사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는 주체적 국제외교를 통해 자국의 존재감과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수나라 또한 정권 말기 농민반란으로 무너진 후 당나라가 국가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당 태종 이세민은 서방의 돌궐을 제압한 자신감으로 동방의 고구려를 정복하여 진정한 '천자'가 되고자 하나 결국 실패한다. 당 태종 사후 신라의 김춘추가 아들을 동반하여 경주에서 중국 장안까지 가서 나-당 연합을 제안했을 때, 당 왕조의 참전은 이세민의 '설욕전'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고구려, 당의 강국과 동맹을 맺고자 한 건 백제에게 죽임을 당한 딸과 사위의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어쨌든 김춘추의 복수심과 고국인 가야를 배신하면서까지 신라에서 승진하려던 김유신 가문의 결연한 파트너십은 결국 한반도 통일이라는 대업의 기초가 되었다.

정권 말기 부패한 귀족들을 진압하고 왕까지 갈아치운 '도교'적 대막리지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의 내분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겠으나, 민생은 살피지 못했을 무리한 상무정신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을 뿐 국제정세에는 무능력 자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분명, '영웅'적 기질을 선보이나 결국 민생을 돌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륙성'을 지향했던 '랜드파워(land-power)' 고구려는 결국 '하트랜드(heart-land)' 쟁탈전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강대국들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던 것이다.

무능한 고구려 '상무 정신'의 끝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망할 놈의 자식들을 포함한  망국의 위정자들이 당 태종의 무덤까지 끌려가 '사죄'함으로써 죽은 이세민의 복수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잊혀진 고구려의 강토는 요동만주에서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역사까지 지우면서 한반도 역사를 신라의 역사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삼국사기]의 가장 큰 과오가 또한 여기에 있다.


"427년에 통구(집안/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 개로왕은 이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수도였던 위례성, 지금의 서울을 함락당하고 만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한 백제 개로왕은 왕통을 잇기 위해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문주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라는 두 인물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가 웅진까지 함락시킬지 모를 극한 상황에서 문주왕과 목협만치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문주왕은 공주(웅진)를 사수하되 목협만치를 일본에 보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문주왕에 의해서 일본에 파견된 목협만치는 일본에 미리 와 있던 백제계 세력을 규합해 정권 장악에 나서게 된다."
- [오국사기] 2권, '제10장 태극전의 비극'.


왜는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인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다. 백제 부흥투쟁 파병도 실패하고 일본 본토에 백제식 산성을 증축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농성에 들어가는데, 당시 왜국은 백제 이민자들의 정권인 '소아'가가 불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토착종교 세력인 '물부'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식민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에는 3세기 가야문화가 이식되었고 이후 '해양국가' 백제로부터 이식된 불교식 '아스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진정한 독립단계에 이르러 '태양이 뜨는 근본'이라는 의미의 '일본'국이 된다. 그들의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는 '왜'가 아닌 '일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들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이 고려라는 말을 내뱉자 좌중은 갑자기 긴장했다. 사실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는 한 아직 천하가 태종의 발 아래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신하들은 고구려만큼은 잊고 싶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거란과 말갈 등을 속국으로 두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다른 민족들처럼 중국의 천하관에 소속된 조공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국 남, 북조와 각기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서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수 양제가 여러 차례 쳐들어간 것도 그가 단순히 폭군이어서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는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 고구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오국사기] 2권, '11장 생애의 마지막 과업'.


[오국사기]는 한반도와 요동의 당대 역사 외에도 수-당 교체기의 중국 역사라든가, 일본 천왕가의 권력투쟁 역사 또한 '외전' 형식이 아닌 주내용으로 전개시킨다. 수 문제와 양제, 당 고조 이연이나 수나라 말기 혁명가 양현감과 이밀, 당 태종 이세민 등도 [오국사기]의 엄연한 주인공으로 그들 중심의 사건 전개도 생생하다. 역사학자의 실증적 역사평설이므로 [수서], [신/구당서] 등 중국측 '정사'에 기초한 사실적 내용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 이세민의 '생애 마지막 과업'인 고구려 정벌은 그가 죽어 땅에 묻힌 후에야 신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신라의 문무왕은 재위 21년(681) 7월 초하룻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보낸 임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왕(무열왕/김춘추)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다 부왕 사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싸워 국체를 보존한 임금이었다...
그는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세계관을 터득한 임금이었다...
... 문무왕은 중국 삼국시대 오왕 손권의 북산 무덤과 위왕 조조의 서릉을 예로 들며 화려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의 시신은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출렁이는 동해에 흩뿌려졌다."
- [오국사기] 3권, '제23장 나당대전'.


이제 , '오국사'의 마지막 주인공 신라의 '남은 이야기'다.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차고 넘친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각각 <본기>와 <열전>의 하이라이트 같기도 한데, 신라는 [삼국사기]의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당연합군의 승리 후 신라의 당나라로부터 독립투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이 지금 한반도 남한에서의 '한-미 연합작전'처럼 당시의 강대국 당나라는 약소국 신라와의 연합작전에서 늘상 주도권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라가 역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반외세 해방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덧붙여 저자 이덕일 박사는 김춘추의 아들이자 대당 투쟁을 승리로 이끈 마지막 '주인공' 문무왕의 유언으로 6세기 말부터 7세기 말까지 약 80여 년간의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복수심에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 김춘추와 성공욕에 불타는 김유신을 보며 냉철한 군주로 성장한 신라 제30대 문무왕 김법민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위로하고자 각 주현의 과세를 줄이고 군역을 줄였으며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제도를 간소화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그 중 가장 번거로웠을 국왕 본인의 장례 간소화를 위해 불교식 화장을 하고 동해바다에 묻혔다. 

우리가 익히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들어 온 '대왕암'이 그의 무덤이다.


***

1.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김영사>, 2002.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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