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재발견 - 후루룩 맛보는 라면 연대기
김정현.한종수 지음 / 따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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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수, '라면'
-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동경몽화록]에는 '장사하는 사람 집에서는 식사 때마다 음식점에서 요리를 시켜 먹어서 집에서 반찬을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방요리점, 남방요리점, 사천요리점처럼 지방색이 강한 음식점, 또는 기름에 튀긴 빵이나 북방민족의 요리 등 전문적 메뉴만 취급하는 음식점이 번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카이펑(개봉/동경)에는 정점이라고 부르는 큰 음식점이 72곳이나 있었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가게인 각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즉 카이펑의 거리는 바쁜 이들을 위한 '외식의 천국'이었다.
이 외식의 핵심이 바로 '면'이었다.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몰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음식이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미리 삶아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어도 되는데다 다양한 재료와의 조화가 가능했다.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카이펑 시민에게도 후루룩 넘어가는 '국수'가 최적의 메뉴였다."
- [라면의 재발견], <1. 라면의 탄생>, 김정현/한종수.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원래 쌀은 여름이 길지 않은 한반도보다 더 아랫쪽 기후에 어울린다는데 우리는 고대로부터 주식이 늘 부족했단다. 약 1만년 ~ 6천년 전 인류가 '농업혁명'을 이루었을 때, 인류도 큰 변화를 겪었지만 '밀'의 번식확장에 '사기당한 것'이라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말하는데, 인류의 주식 양대산맥은 '쌀'과 '밀'이다. 쌀은 알곡 그대로 먹을 수 있는데 그게 밥이다. 반면 밀은 그대로 먹을 수 없어 빻아서 먹어야 한다. 따라서 '제분(製粉)' 기술은 인류 문명에서 '불'의 발견 못지않게 음식사의 혁명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앙아시아 지대가 '밀'의 고장이란다. 이를 중심으로 밀을 빻아 서쪽은 구워 먹었고 동쪽은 삶아 먹었다. 전자가 '빵'이고 후자는 '국수'다. '국수'는 가늘고 긴 면발이 연상되지만, 원래는 밀가루 반죽을 '면(麵/麪)'이라 했으며, 이를 가공한 음식재료 일체는 '병(餠)'이라 했다. 이동을 한 사람들은 이 '면'을 구워서 '빵떡'을 먹었고, 정착을 한 사람들은 삶아서 '국수'를 먹었다. 현재는 '면'이라 하면 '국수'를 이른다.


광고홍보학 김정현 교수와 역사저술가 한종수 선생은 [라면의 재발견]을 이 '국수'의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중국 후한시대 기록에서 '삭병' 즉 '새끼줄 모양 밀떡'이 동양 국수의 첫 기록으로 추정되며, 남북조 시대 '수인병' 즉 '물에 띄워 삶은 밀떡'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탈리아 '파스타'는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데 이 모두가 '국수'다. 이후 '제면(製麵)' 기술의 발전을 통해 10세기 이후 중국 북송시대부터 '국수'는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남송시대에 북송의 영화를 그린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에서 '동경'은 카이펑이며 이 때 이후로 중국인들은 국수를 먹기 위해 나무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동양의 젓가락은 '국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당시 북송 수도 카이펑(개봉/동경)은 이미 인구 150만명의 '메트로시티'였다. 유럽 최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이 50만, 런던이 10만에 불과할 때 이미 카이펑은 물자와 유통의 국제적 중심지였다. 5대10국 시대 후주의 세종 시영이 터를 닦았고 그 어린아들 공제로부터 '진교병변'을 통해 선양받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이 발전시킨 도시 카이펑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통해 후세에 그 번영의 면모를 보여준다는데 홍교라는 다리 위 즐비한 노점들에서 판 주종목이 바로 '국수'였으며 바쁜 도시에서 빨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댜오쯔' 국물이 옛 도쿄의 '라멘' 국물과 꼭 닮은 맛이다. 도쿄 라멘은 가다랑어포로 국물을 우렸기에 가벼운 신맛이 있었다. 게다가 일본 간장은 중국 본래의 간장보다 신맛이 강하다. 그런데 이 신맛과 똑같은 신맛이 댜오쯔에도 있다. 돼지 내장에서 나는 신맛이다... 라멘에는 왜 챠슈라는 이름의 삶은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걸까? 삶은 돼지고기는 만주족의 간판음식이 아닌가? 어쩌면 라멘은 만주 둥베이(동북)에서 온 맛이 아닐까? 만주족이 만들어 먹던 요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 [혁명의 맛], <1.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가쓰미 요이치.


중국음식을 통해 중국의 혁명역사를 돌아보는 일본의 미술감정가 가쓰미 요이치는 우동에 버금가는 일본의 대표국수 '라멘'의 '원조'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며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묻는다. 문명은 교차하고 교환하므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음식의 '원조'를 파헤치기는 무망하다. 현지에 뿌리내린 음식의 근원을 찾았다 해도 그 형태는 다를 것인데, 1905년 인천의 화교반점 '공화춘'의 '짜장면'은 중국 화북의 '작장몐(炸醬麵)'과 다르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고학생들을 먹이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나가사키 잔퐁'은 중국의 '잡(탕)면'도 우리의 '짬뽕'과도 다르다. 
일본의 '라멘' 또한 중국 베이징 뒷골목의 돼지 내장 육수를 끼얹은 수제비 '댜오즈'와 비슷한 신맛이 난다지만 둘 사이 연관성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라면은 동아시아의 면 문화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합쳐져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스턴트화하려는 대상이 왜 역사가 더 오래된 우동이 아니라 라멘이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출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가 처음 개발한 '치킨라면'은 대만에서 많이 먹는 '계사면(기스면)'과 유사한 점이 있다."
- [라면의 재발견], <1>.


이제, '라면' 이야기다.
'라멘'이든 '라면'이든, 그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을 만드는 방식 중 수타면처럼 밀가루 반죽을 때려서 면을 뽑는 방식인 '납면(拉麵/라이몐)'이 그 출처일 수 있다는데, 참고로 칼국수처럼 반죽을 접어서 칼로 써는 것을 '수공면', 반죽덩어리를 어깨에 지고 칼로 쳐서 날리는 방식은 '도삭면'이라 한단다.

패전 후 일본의 경제침체와 식량난 속에서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가 원래부터 '패스트푸드'였던 국수를 더욱 즉석식품화한 '라면'으로 탄생시킨 게 1958년이었다. 우동은 원래 일본의 전통 국수라 변형이 어려웠을 테고, 가난한 도시노동자들이 노점에서 사먹던 '주카소바(중화국수)' 또는 정체불명 '라멘'을 개량한다. 면이 손상되지 않게 꼬불꼬불하게 뭉치고 면발에 구멍을 뚫어 튀겨서 급건조시키면 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튀김면이 불면서 바로 즉석국수가 되는 방식인데 공업화의 영향으로 대량생산을 통해 상대적인 저가로 끼니를 해결하는 아이템이었다. 처음에는 맑은 닭국물 육수양념을 면에 같이 묻혀서 지금 컵라면처럼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익히는 방식이었단다. 역시 여러 기업들이 라면 상품화 경쟁에 뛰어들었고 은행원 출신 기업가 오쿠이 기요스미는 1962년에 '스프 별첨' 라면을 처음 개발했다. 우리 삼양식품 창립자 전중윤에게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한 사람이 바로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다.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성의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전중윤은 원래 동방생명보험회사를 창립하고 제일생명 경영도 한 금융인이었단다. 어느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람들이 줄서서 먹는 것을 보고는 6.25 내전 후의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결심했고 보험연수차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했다. 일본 최초 '치킨라면' 발명 5년 후인 1963년 우리의 10원짜리 '삼양라면'의 탄생이다. 

우리 최초 '삼양라면'은 스프는 별첨이었으나 용기에 담아 끓는 물을 부어 익히는 조리방식에 맑은 닭국물 육수였다는데 1974년생인 나는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삼양라면'을 라면의 '원조'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먹은 라면 맛은 처음부터 다 소고기 육수였고 모두 비슷했으니 어린 시절에는 '삼양라면'만 사 먹었다. 그러다가 막바로 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롯데공업으로부터 독립한 농심에서 나중에 발매한 '안성탕면'으로 갈아탄 이유는 안성탕면이 '생라면'으로는 제일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집에 모이면 무조건 라면을 같이 끓여 먹었고 냄비에 코박고 서로 젓가락 싸움하며 먹던 라면이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친구랑 둘이서 라면 다섯개도 거뜬히 밥말아서 국물 한방울 안 남기고 먹던 시절이었다.


[라면의 재발견]은 국수와 라면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만은 아니다. 라면의 '재발견'인 이유는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일본의 기술전수로 '자존심'은 상해도 먹고살아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던 우리의 애잔한 역사와 그럼에도 '매운 맛'을 세계에 보여주려고 극강의 매운 라면을 만들고 먹어대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리라. 먹을 것이 없어 식사 대체재로 물가통제를 받던 라면을 이제는 젊은이들의 유희음식으로 진화시킨 한국은 매년 한 사람이 75봉지를 먹어대는 단연 세계 최고 '라면 강국'이다.

한때 잠깐 '라면집'을 차리고도 싶었던 나는, 일 년에 200개는 먹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나보다 라면 잘 끓이는 사람은 많고 먹을 라면은 더 많다는 사실을 어느날 알게 되었고, 좋아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새삼 깨닫게 해준 것도 내겐 '라면'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의 국수, '라면'은,
내게도 참 고맙고도 정겹다.


***

1.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혁명의 맛](2000),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
4. [내 안의 역사], 전우용, <푸른역사>, 2019.
5.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 라면 인문학], 하창수, <달아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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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Friday The 13th (13일의 금요일)(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Paramount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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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동 크리스털 호수'의 추억 : 1990~1991

고등학교 입학한 1990년부터 학교 운동장 구석 철봉대 밑에서 친구들이 모였다. 각자 다른 중학교 친구들을 한 둘 데리고 나왔는데, 그 중에는 국민(초등)학교 동창들도 있었고 중학교 때는 말도 못 걸어본 친구도 있었으며 한 살 많은 재수생 형들도 있었다. 한창 성장기였을 고등학생이 되어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싶었고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일대에서 서로서로 교차되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시키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오랜 친구, 생판 처음보는 건너 동네 휘경동 친구, 전라도에서 올라온 재수생 '형'들 포함 약 열댓 명이 방과 후 모여 놀았고, 1학년을 마친 겨울에 북한산을 오르며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름하여, 경희고 '철봉파'다.

우리들은,
'노는 애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교를 빠지지 않고 잘 다녔다. 그리고 조숙한 몇 명을 빼고는 부모님 말씀을 잘들어 술과 담배는 3학년 여름방학 또는 '백일주'까지 참았던 착한 학생들이 다수였다. 학교 끝나고 철봉대 밑에 모여 체력단련을 하다가 '스타워즈' 오락실에 마지못해 잠시 들렀더라도 오락은 조금만 하고 야자를 위해 다시 학교로 뛰어가던 어찌보면 '모범생' 무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다수의 이런 '금욕주의'적이고도 '청교도'적인 성향에 반발한 조숙한 몇 명은 따로 더 친하게 모여 당구장 등으로 내뺐는데, 그래도 이 선진적 조직원들로 인해 스무살을 앞둔 나머지 '청교도'들은 술과 담배 및 당구 등을 빠르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들에게 토요일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국 같은 시간이었는데, 평일의 모범적 삶을 벗고 고스톱과 포르노비디오 등을 아주 가끔 섭렵할 수 있었다. 대부분 넉넉치 못했던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맞벌이가 많았고 토요일 방과후는 친구들 빈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고스톱을 배우거나 비디오 시청을 했다. 하루는 고스톱 치다가 친구 형이 일찍 들어와서 노름판을 뒤집고 친구의 싸대기를 몇 번 돌려대기도 했다. 포르노비디오는 소문만큼 그리 많이 실물로 유통되지는 않았는데 비디오 플레이어 있는 빈집 친구 집에서 대부분은 천원 짜리 몇 장 모아 라면 사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성인비디오를 빌려보기도 했다.

사실 금욕적인 우리들은 부끄러워서 '성인물'을 잘 빌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단골 단체관람물은 '공포영화'였다. 당시는 영화 쟝르 따윈 관심없었으나 보통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로 일컬어지는 영화들은 모종의 '규칙'이 있었다. 섹스를 한 청소년들은 연쇄살인마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는 불문율. 우린 희대의 악마들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공포영화' 비디오를 빌린 이유는 '젖소부인 바람났네'나 '김밥부인 옆구리 터졌네' 등의 불후의 역작들을 차마 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난 추억한다.

1990~1992년 고등학교 시절의 토요일 오후 하면 가장 기억나는 건, 둘러앉아 끓여먹던 '삼양라면'과 '13일의 금요일'이다.

그리하여 나도 한 번,
"제이슨 얘기를 하겠다." ([13일의 금요일 2](1981) 대사 중)

영화 [13일의 금요일]은 미국 공포영화, '슬래셔 무비'의 대표작으로 1980년 감독 숀 커닝햄이 만들었다. '슬래셔 무비'는 그냥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패고 찌르고 베고 잘라서 사람을 죽이는 공포영화다. '13일의 금요일'이 제목이라 무슨 종교적이고 비의적이며 신비로운 메시지가 있을 거라 보면 실망한다. 예수가 십자가 못 박힌 날이 '13일의 금요일'이네, '13'이라는 숫자가 '악마'를 상징하네 어쩌네 하는 말들은 다 미신이고 종교와 1도 관계 없다. 그냥 불길한 기운 느껴지면 제이슨이 와서 칼이나 도끼로 팬다는 뜻이다. 이유는 알 필요 없다.

이유가 없다 했지만, 그래도 영화인데 스토리는 있어야겠다. [13일의 금요일]에 나오는 희생자들은 대부분 당시 우리들과 같은 청소년이었다. 우린 아직 애기였는데 미국애들은 이미 어른이었고 이성이랑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있었으니, 눈으로 대리만족을 한 후 우린 걔들을 처단해 주는 제이슨 편이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어린 시절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왕따'를 당했던 불우한 어린이었으며, 소풍가서 크리스털 호수에 빠졌으나 선생님들을 포함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익사하고 만다. 이후 불쌍한 제이슨의 친구 아닌 동창들은 아직 제이슨은 죽지 않고 밤에 돌아다닌다는 괴담을 퍼뜨렸고 제이슨의 엄마 파멜라는 이 괴담을 이용해서 제이슨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한다는 내용이 [13일의 금요일] 1편이다. 2편으로 이어지는 이후 이야기는 예상하다시피 실제로 죽지 않은 제이슨이 뭘 먹고 컸는지 영양과다의 체력으로 나타나 조숙한 남녀 불량청소년들에게 참교육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형식은 매우 끔찍하고 처참하므로 혈기왕성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을 우리가 보기에도 당최 바람직하다 할 수는 없었다.

젊은 남녀의 섹스 장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즈음에 우리는 제이슨의 등장에 더 치를 떨었는데, 어떤 상해를 입어도 계속 일어나는 그 불사신의 맷집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제이슨은 격투 게임의 캐릭터로 나와도 손색이 없었으나 '90년대 당시 우리가 동전을 쏟아붓던 오락실 아케이드 격투게임에서는 너무 최강이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역시나 우리의 자식뻘 후배들의 게임 캐릭터로 등장했다는데, 인터넷이 활성화된 나중에야 알았지만 [13일의 금요일]은 미국에서는 영화는 물론 만화와 드라마, 게임 등으로 진화한 '상품'이었단다.

'슬래셔 무비' 또 하나의 공식은 다소 가련해 보이는 여주인공이 결국 지긋지긋한 제이슨을 무찌르고 살아남으면서 영화가 끝난다는 거다. 정신적으로만 교감하던 청순남녀 중 든든한 남자친구는 제이슨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다 떨어진 제이슨은 여주인공에게 항상 얼떨결에 응징당하는 마지막 엔딩의 무한반복인데, 제이슨은 팔이 잘리고 눈이 찔려도, 불에 타고 물에 빠져도 다음편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관객들의 믿고싶지 않은 예감을 항상 남긴다.

제이슨의 트레이드 마크는 아마도 2편인가 3편부터우연히 득템한 아이스하키 마스크일 게다. 아이스하키 전공 체육선생님께서 전파한 우리학교 체벌도구의 대명사 아이스하키채 덕분에 우리들은 그 스포츠 종목을 싫어했기에 제이슨의 마스크가 더 지겨웠던것 같기도 하다. 그외 어디서 주웠는지 모르는 큰 망나니칼과 주위에서 아무렇게나 주운 왕도끼 등은 제이슨의 빈손을 허전하지 않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 섭렵하게 된 [13일의금요일] 이후로 [나이트메어] 등등의 경쟁작들도 일부 보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그렇듯 우리들의 '집단관람'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지긋지긋하던 제이슨의 무한반복 환생쇼도 7편 정도를 끝으로 우리의 청소년기와 함께 사라져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6편인가 7편에서 제이슨이 본인이 환생해 나왔던 크리스털 호수 밑바닥에 쇠사슬로 묶여 봉인되었을 때 '그동안 고생 많았을테니 이제 진정 안정을 취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건 것 같다.

나중에 제이슨은 자본주의의 부름에 의해 다시 명부를 열고 지상으로 나와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와도 한 판붙기도 하고, 온라인게임에도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지만,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미 크리스털 호수를 떠난 후였다.

***

"30년지기 '철봉파' 친구들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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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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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역사의 전쟁'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그러나 정작 나라 이름인 '프랑스(France)'는 '문화'적인 단어보다는 상당히 호전적인 단어에서 비롯됐다. '프랑스'의 어원이 되는 '프랑크(Frank)'란 단어는 원래 '도끼'란 뜻의 '프란시스카(francisca)'에서 나왔는데, 이는 중세시대 전쟁터에서 살상용으로 던지던 '전투용 도끼'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도끼'를 주로 사용하던 종족을 '프랑크족'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오늘날 '프랑스'의 기반이 된 '프랑크' 왕국을 세운 민족이다."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1장>, 이현우.


서기 5세기 서로마 말기에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으로 북쪽에서 '게르만'들이 따뜻하고 풍족한 남쪽으로 내려와 '용병'이 되어 점차 '제국'을 잠식했다. 이는 소규모 이동집단을 이루던 북방 민족들이 나름의 '사회발전단계'에 따라 정착과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는 과정에서 더 중요한 건 인구가 급증하면서 발생한 것일 수 있고, 동쪽의 아시아 '제국'들에게 밀린 북방 '흉노' 등의 유목민족들에게 연쇄적으로 밀려 내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 '고트'족이든 '게르만'이든 아무튼 이 '프랑크'족이 로마에서 '용병'이 된 이유는 25년 '만기제대'하면 그 가족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부터 시조 로물루스 무리배들의 전쟁과 약탈을 통해 건국한 '군부정권' 로마의 전술은 전차는 물론 보병대형을 갖춘 조직형 전투였는데, 전차는 '직진' 밖에 모르는 약점이 있었고 보병 '진법'은 결국 원거리 공격전술에 무너지게 되었던지 북방에서 온 '프랑크'족의 '도끼'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로마는 물론 이슬람권 '제국'들의 전투규칙은 '야만인'들이 던지는 '도끼', 즉 '프랑크(frank)'로 인해 연이은 패배를 당했단다. 물론, 이 '프랑크'들도 아시아 북방에서 작은 말을 몰고 360도 활을 쏘던 유목민들의 기동력에 밀려 쫓겨 내려왔던 것이지만 말이다. '도끼'를 무수히 집어던져 보병대형을 무너뜨린 후 뛰어들어 칼과 도끼로 난자하는 이 방식은 아마도 더 원거리의 화포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강력한 '전술'이었겠지만, '문화'를 도입한 중세 유럽이 되면 '랜스(lance)'를 사용하는 '기사'의 비효율적 전술로 전환된다. 중세 유럽의 '기사'는 아시아 북방의 '철기병'과 달리 무거운 갑옷과 딸린 장비로 인한 기동력 '제로'였고 11세기 십자군 전쟁에서는 사라센의 기동력에 또 다시 무너진다. 물론, 이 모든 구닥다리 전술은 화약과 총의 도입으로 다 싹쓸이 당하겠지만 말이다. 
미술이 아닌 사학 전공자로 유럽 미술관을 다니면서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를 쓴 이현우 기자는 '프랑크'족의 이 '도끼'가 우리말로 '돌직구'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Frankly speaking"은 "솔직히 말해서"로 남아 있다. 재미있는 대목이다.


"'랜스(lance)'는 원래 기병들이 들고 다니는 창을 일컫는 말이었다. 흔히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기사들의 마상 창 경기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들고 나오는 기다란 창이 바로 '랜스'다... '프리랜서(free-lancer)'란 이 '랜스'에 소속되지 않은, 자기 혼자 왕이나 귀족과 일대일로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을 일컫는 말이었다."
- 이현우, 같은책, <4장>.


'도끼(frank)'나 던지던 유럽인들이 기독교 이데올로기로 '문명화'된 중세는 '기사'의 시대였다. '랜스'라는 창과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튼튼한 중무장 말도 몇 마리에 시종도 몇 명 따랐으며 전투에서는 보병부대도 거느렸다. 지금으로 치면 '장교'나 지휘관일 텐데, '랜스'는 '소규모 부대'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어원이 이 '랜스'들을 모은 '용병 집단'이었다. 이 '기업(company)'들은 국왕이나 교황, 봉건영주들과 '자유 계약'을 맺고 '용병'인 '랜스'들을 보냈는데, 아마도 '기업'들이 서로 짜고 대충 전투 시늉만 내면서 고용자들로부터 '계약금'만 받고 '먹튀'도 했단다. 거대 기업들의 본질은 '경쟁'인 한편으로 '담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독점체제에서 최대로 강화된 이 '시장'에서 '경쟁'과 '담합'은 쌍둥이 형제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 시장'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세의 '컴퍼니'에서 독립하여 혼자 '계약'을 하던 '랜스'가 바로 '프리랜서(free-lancer)'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 '사기꾼' 같은 '프리랜서'들을 경계하라고 '군주'에게 제안했다는데, 마키아벨리식 '군주'의 군사력은 '국민군' 또는 '민병대' 형식이었지 '귀족'적 '기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프리랜서'들은 유럽의 첫 종교전쟁이었던 17세기 초 '30년 전쟁'에서까지 활약했다.  물론, 고용주들은 여전히 '사기'를 당했단다.

저자 이현우는 미술관에서 '전쟁의 역사'를 발견하고 그림들 속에 담긴 전쟁 관련 내용들의 역사를 엮어간다. 여성의 전유물인 코르셋과 스타킹은 군복을 입기 위해 고안된 남성의 착용물이었고 '허쉬 초콜릿'은 고대 '육포'와 같은 'D-레이션'이 시초이며 전쟁의 역사를 바꾼 '총'이 처음에는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칼'과 '창'에게 무참히 깨진 이야기 등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역사' 이야기다. [방구석 미술관]처럼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한 방식도 있겠지만, '전쟁'이나 '음식'처럼 인류에게 친숙한 테마를 통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동북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에 고추는 어떤 여정을 거쳤을까? 중국 책을 읽다보면 남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 해역에서 북상하여 타이완 건너편 취안저우에 위풍당당하게 다다르는 항해도를 이따금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추가 갓 전파되었을 시기에 이렇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을 경유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여하튼 중국, 한국, 일본이 고추가 마지막으로 전파된 지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혁명의 맛], <9. 고추와 쓰촨 요리의 탄생>, 가쓰미 요이치.


인류의 '문명'은 '불'의 사용에서 시작한다. 서양의 프로메테우스나 동양의 신농씨가 '불'을 전수했고 우리 '부여(불이)'족과 중근동 조로아스터 등이 '불'을 숭배했던 유사 이래 많은 것이 발전했지만 그 중 최고는 '음식'의 발전이다. '생식'을 한 후 나머지 시간 동안 '소화'를 시키느라 아무 것도 못했을 원시 인류는 '화식'을 통해 '소화'를 금방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 '노동'을 하여 문명을 건설했다는 미국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분석은 설득력 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요리 본능] 또한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 '요리의 역사'도 '전쟁' 못지 않게 무시못할 역사의 주제다. 이 모든 것은 '과학'의 역사와 맞닿는다. 

일본의 미술감정가이자 요리평론가인 가쓰미 요이치는 중국 요리를 주제로 역사를 돌아보는데, 이 중 마오쩌뚱이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 것처럼 한-중-일 아시아 삼국이 원래 매운 것을 먹어왔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역사'다. 중남아메리카에서 나온 고추씨가 어떤 경로로 아시아에 유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음식' 고추가 임진왜란 '전쟁'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을 수도 있고 유럽에서 인도까지 전파된 고추가 인접 지역 사천성(쓰촨)으로 도입되어 '사천 요리'가 매운 것일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 고추를 '전파'한 일본은 여전히 '매운' 맛을 모르니 앞으로 '역사의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아무튼, '음식'의 발전과 이동경로를 따라 '역사'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데, '매운 혁명'을 했다는 중국의 '삼국지' 영웅들은 '매운' 맛을 몰랐으며, '작은 고추'를 뽐내며 신라면을 흡입하는 조선인들의 17세기 선배 실학자 [지봉유설] 이수광은 우리가 하루도 없이 못 사는 '고추'를 '독초'라 썼단다. 


"무용지물 전함이었던 '야마토'의 최후는 비참했다. 1945년 오키나와로 미군이 몰려오자 '야마토' 전함은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고정 포대 역할을 하며 장렬히 전사하라는 것이다. 패전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면목이 없으니 자살을 강요받은 셈이다. 적재된 연료도 오키나와까지 편도로 갈 만큼만 채워졌다고 한다... 전함 '야마토'는 일본을 비롯한 이른바 군국주의 전쟁광들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광들은 늘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했고 강요당했다. 전함 '야마토'처럼 말이다."
- 이현우, 같은책, <2장>.


중학교 어린 시절에는 군부독재 '파시즘' 체제에 살아서 그런지, 2차 대전에서 독일의 '킹타이거' 전차와 일본의 '야마토' 전함, 항공모함 '아카기' 따위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우리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기댈 곳 없던 '왜'가 '일본'이라는 국명을 채택하고 '독립'한 시기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그들의 '근본'일텐데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는 2차 대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 GDP의 1%나 쏟아부은 전함이다. 그러나 너무 커서 기름만 많이 먹고 느리며 일본 최초 '3연장 주포'는 포신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워 표적도 못 맞출 뿐더러 발사된 포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무도 몰랐단다. 결국 최고위층 연회장이자 호텔로 쓰이던 중 태평양 전쟁 최후 해전에서 총알받이를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도끼'를 던지며 '제국'을 후리던 '프랑크', 최고의 기사 '랜스'들을 조직하여 절대권력자들과 계약하던 '컴퍼니', 세계 최대의 '전함호텔 야마토' 등 '전쟁의 역사'. 지금부터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독초'였던 고추 없이는 지금은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음식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역사'를 고정된 형태의 흥미거리로만 만난다면, 각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전쟁터다. 역사의 흥미로운 테마로서의 '전쟁'과 '음식' 등의 전장에서 '역사'를 이끌어 온 다수의 입장에 서서 그 경향성을 설정한 '역사의 전쟁'은 "원래 우리 역사는 이런 것"이라며 그 역사를 사유화하려는 소수 지배자들과의 싸움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

***

1.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이현우, <어바웃어북>, 2018.
2.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블랙피쉬>, 2018.
3. [요리 본능(Catching Fire)](2009), 리처드 랭엄,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1.
4. [혁명의 맛](2009),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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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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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미술가들'과 '다수대중'의 '집단해석'
- [그림 속 천문학], 김선지/김현구, <아날로그>, 2020.



"... 모든 별들이 저마다 빛을 가지고 있듯이 그가 남긴 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의미가 된다는 점에서 고흐는 자신만의 빛을 낸 하나의 '별'이 아닐까?... 고흐는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또 하나의 유산을 남기고 떠난 '별'이다."
- [그림 속 천문학], <2-7>, 김선지/김현구, 2020.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서양미술사], <서론>,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별'은 아주 오랜 고대부터 인류인 '자기'가 발딛고 있는 땅과 대비되는 저 하늘 위의 '타자'로서 '연구'의 대상이었고 한편으로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천문학'은 이미 '점성술'로 '타자'인 '자연'을 연구하는 고대 인류 최초의 '과학'이자 한편으로 '신화'였다. 근대 예술의 '부흥' 운동으로서 15세기 '르네상스'는 고대의 '이상적'인 미(美)를 복원하려는 인간의 깨우침이었고 그러므로 카톨릭을 벗어나 고대 신화가 주요 테마가 되었는데, '천문학'과 '미술사'의 만남은 필연이다.

미술사학자 김선지와 천문학자 김현구는 '르네상스' 이후 '미술사'와 '천문학'을 아우르며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이라는 부제로 [그림 속 천문학]을 엮는다. 저자들은 실제로 부부인데, '미술사'와 '천문학'의 결합은 멋지게 어울린다. '미술'도 '별'도 좋아하는 내게는 참 기다리던 만남이기도 하다.

1부는, 태양(아폴로/Apollo)-수성(헤르메스/Mercury)-금성(아프로디테/Venus)-달(아르테미스/Diana)-화성(아레스/Mars)-목성(제우스/Jupiter)-토성(크로노스/Saturnus)-천왕성(우라노스/Uranus)-해왕성(포세이돈/Neptune)-명왕성(하데스/Pluto) 등 태양계의 별들에 관한 천문학적 설명과 이 별들이 상징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은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태양계의 항성과 행성, 위성들의 작명은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했는데 제우스의 별인 목성의 위성들은 그의 여성들인 이오, 유로파 등으로 이름 지어졌다. 1부만 읽어도 그리스 신화와 태양계는 한 바퀴 구경이 된다.

2부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 '미술가'들과 '별'에 관한 <열전(列傳)>이다. UFO 이야기도 있고, '별'을 특히 동경했던 불우한 천재 빈센트 반 고흐도 있다.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미술'의 역사는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규정하는데, 이 혁신적 '미술가'들은 하나하나가 빛나는 '별'들이었다.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본 미술가는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 1267~1337)다.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章)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천년 동안 이와 같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 [서양미술사], <10. 교회의 승리 - 13세기>, 곰브리치.


기존 중세미술은 평면에 주요 '성상(이콘:Icon)'을 부각시키는 것이 특징인데 조토는 이 평면의 2차원으로부터 입체의 3차원을 처음 도입한 화가다. 그는 이후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인데 입체와 원근법 등의 기초는 그의 '발명'이 아닌 '재발견'이다. 고대 인류가 이미 바라본 관점이었을 것이며 조토는 이를 미술에 도입한 '혁신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토는 기존에 신적이고 환상적인 존재였던 '별'을 현실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미술가'이기도 하다. 예수탄생의 순간 동방박사 경배 시 떠오른 '성상'으로서 '성스러운' 별이 아닌 핼리혜성을 최초로 그린 그를 기려 1980년대 핼리혜성 탐사선 중 하나의 이름은 '조토'가 되었다.


"... 진정한 '미술가'라면 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위대한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평생동안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 이 새로운 원칙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동판화에서 뒤러는 미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기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은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새로운 목적에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 [서양미술사],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 16세기초 : 독일과 네덜란드>, 곰브리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대표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은 대규모 아카데미 조직을 양산했고, 북유럽의 화가들은 남유럽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르네상스 정신을 전유럽으로 확산시킨다. 독일지역 '자유도시'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 1471~1528)는 당시로 보면 '국제주의자(cosmopolitan)'였고, 최초의 '상업적' 미술가였으며, 북유럽 고딕과 남유럽 르네상스를 융합시킨 또 하나의 '혁신'적 '미술가'다. 20세기 독일 출신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그의 '도상학(도상해독:iconography)'과 '도상해석학(도상연구:iconology)'을 통해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1]과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를 분석한다. 미술사학자 신준형은 사실 '도상학'과 '도상해석학'의 경계는 모호하고 구분도 어렵지만, 그림 속 상징의 '해석(전형:Type)'을 넘어서 당대의 문헌사적 분석을 통해 '문화적 징후'까지 읽어냄으로써 '자연의 질서(cosmos)'에 비견되는 '문화의 질서(tabula)'를 구축하려는 파노프스키의 '철학'적 시도는 미술사가들이 "넘어야 할 큰 산"이라고 평가한다. 파노프스키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생애와 예술](1943)에서 뒤러의 [멜랑콜리아1]을 화가 자신의 '정신적 자서전'으로 본다. 후견인에 의지하지 않고 대량제작이 가능한 판화와 화가 고유의 '모노그램'을 통해 미술을 대중화하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독립'된 '미술가'였던 뒤러는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던 그는 수학에도 능했고 세계의 이치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반열에서 자신을 거의 날개달린 신이나 천사의 지위로 위치짓는다. 좌측 상단의 작품 제목 위로는 여지없이 기독교적 공포의 상징인 혜성이 자비의 상징인 무지개 사이로 떨어지고 있다.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에 따르면 뒤러의 [멜랑콜리아1]은 '신'의 반열에 오른 "고뇌하는 예술가의 자화상"이다.
물론, 파노프스키식 '해석'의 '권력'은 다수 대중의 자유롭고 다양한 '해석'에 의해 필연적으로 깨지겠지만 그의 뒤러 '해석'이 그래도 일리는 있어 보이기는 하다.


"...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 로마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르 파울 루벤스... 그 이전의 플랑드르 화가들은 대부분 작은 그림만을 그렸다. 그런데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마술사와 같은 그의 솜씨는 모든 것을 생기발랄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숨쉬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이전의 티치아노보다도 한층 더 루벤스는 붓질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적인' 수단에 의서 생겨난 것... 고전적인 아름다운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 [서양미술사],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곰브리치. 


뒤러가 공방을 통해 '대중화'된 상업 판화를 팔아 '독립 예술가'로 성공한 북유럽의 다른 지역 플랑드르는 한참 후 19세기 '사실주의' 화풍의 지역으로 다시 부각되지만, 17세기 '바로크' 대표화가 페터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의 고장이기도 하다. 루벤스는 대단히 사교적이고 거대한 조직력을 갖춘 화가로 당대 고위층의 요청에 따라 규모가 큰 그림도 많이 그렸다는데, 도제들이 그린 밑그림에 그의 '붓질'이 터치되면 그림은 활력과 생기를 얻었단다. 그는 이전 세대인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등의 르네상스 아카데미즘처럼 양식화될 수 없는 17세기 '바로크' 화가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바로크'는 그 양식의 특징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바로크'라는 용어 자체가 '터무니 없다' 또는 '기괴하다'는 의미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신(新)양식이었고, 이후 '인상주의'처럼 기득권층이 신진층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나 '미술'을 양식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곰브리치가 보기에는 이처럼 자유분방한 '미술가'들이 '혁신'을 통해 '미술사'를 이끌어 왔다. 곰브리치에게 최고의 예술사조는 특정화되지 않는 '모더니즘'이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의 저서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행하는 특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1. 선적인 것(소묘) - 색채적인 것(회화)
2. 평면성 - 깊이감
3. 폐쇄적 형태 - 개방적 형태
4. 다원적 통일성(개별적 완성미) - 단일적 통일성(전체적 완성미)
5. 절대적 명료성(명료성) - 상대적 명료성(불명료성)

물론 위 다섯 특징은 비단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차이점만은 아니다. 이들은 전체 미술사 흐름의 일반적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바로크'적 '혁신'에서 두드러지며, 루벤스의 '색채'와 '회화', 그리고 '개방성'에서 두드러진다.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 종교개혁 전쟁에서 루벤스는 기득권층인 "카톨릭 진영의 독자적인 지위([서양미술사], 곰브리치)"를 점하면서 국제적 '외교가' 역할도 했단다. 그는 고위층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그림을 바치면서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되었고 그 특유의 풍만한 여성 '누드화'로 고위층의 관음증을 해소해주기도 했으리라. 당시 뱃살과 육덕진 몸매는 잘 먹고 사는 귀족의 특징이었으므로 모두가 선망하는 체형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마당발' 루벤스는 당시 과학계의 신진세력이었을 갈릴레이 등과도 교류했고 나름대로 '천문학'에 기반한 풍경화와 '별자리' 그림도 그렸다. 
물론, '예술'은 '과학'이 아니므로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해당 풍경에 화가가 가진 '과학'적 지식을 투영하므로 동시에 보기 힘든 별자리를 함께 그려넣기도 한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예술'은 '사실(實)'보다 '아름다움(美)'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곰브리치는 '미술'이라는 추상을 담지하는 구체적인 '미술가'만이 '혁신'으로 '미술사'를 이끌어간다고 했다. 이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미술사학자들의 '권력'은 물론 넘어야 할 '큰 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수 대중에게는 그 '권력'에 균열을 내는 다양한 집단 '해석력'이 있다. 
무엇이 옳은지는 '역사'가 말해줄 터, '미술사'를 이끄는 기본동력은 '미술가'들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에서 이들의 '혁신'을 추동하는 다수대중의 집단적 '유희'가 아닐는지.

'미술사'는 '별'을 그리다가 '별'이 된 '미술가'들과 '다수대중'의 '집단해석'이 어우러진 놀이터다.

***

1. [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김선지/김현구, <아날로그>, 2020.
2. [파노프스키와 뒤러], 신준형, <사회평론>, 2013.
3. [서양미술사](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13.
4. [시각예술의 의미](1955), 에르빈 파노프스키, 임산 옮김, <한길사>, 2013.
5.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 하인리히 뵐플린, 박지형 옮김, <시공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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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nderful Wizard of Oz (Paperback) Collins Classics 40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 HarperPress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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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마음 속으로의 여행
- [오즈의 마법사], 라이먼 프랭크 바움, 1900.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집이 회오리바람에 두세 번 돌더니 하늘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도로시는 열기구를 타고 올라가는 줄 알았다.
북풍과 남풍이 도로시의 집에서 만나며 그 집을 '사이클론'의 중심으로 삼았던지, 그 중심은 고요했으며 집의 사방 주변 강풍의 강한 압력으로 갈수록 높이 높이 상승하다가 회오리바람의 정점에서 붕 떠서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시는 무서움은 이겨냈으나 외로웠고 바람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먹을 지경이었다. 처음에 도로시는 집이 추락하면 온몸도 산산조각 나리라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한참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걱정을 멈추고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침착하게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윽고 도로시는 흔들리는 거실을 기어 침대로 들어 누웠고 강아지 토토도 그녀 옆에 살며시 누웠다.
요동치는 집과 무섭게 부는 바람에도 도로시는 곧 눈을 감고 잠들었다."
- [The Wonderful Wizard of Oz](1900), '1. The Cyclone', Lyman F. Baum, <Collins Classics>, 2013.에서 필자 번역.


2019년 담배를 끊은 새해 첫날부터 올해도 일출시간에 맞춰 마을 뒷동산에 오른 건, 굳이 떠오르는 해를 보고자 한 건 아니었다. 
날이 흐려 못 볼 수도 있음에도 눈 비비고 일어나 인적없는 오르는 길도 올려보고 올라온 길도 돌아보며 작년의 마지막 달도 손을 들어 보내준다. 변함없이 누워계실 초안산의 내시와 궁녀들의 버려진 묘들을 지나 정상에서 동북쪽을 보고 있노라면 동쪽에서는 새해 첫 해가 이미 세상을 밝히고 난 후다. 그제서야 동쪽을 향한 채 해가 중천을 향해 시동을 걸 때 쯤 주위를 둘러보면 문전성시를 이루던 동네 일출객들은 모두 떠나간 지 오래다. 
목적을 이루면 미련없이 자리를 뜨는 무서운 인간세상이다.


'해'를 동경하던 '소년' 시절, 좋아했던 동화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 세 권이었다.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는 내겐 그저 앨리스의 '짝퉁' 정도였고,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었을 '지혜', '마음', '용기'의 덕목을 일깨워주는 내용은 뭐 [피노키오]식 교훈을 넘지 않았다.

사실, 어른이 되어 '동화'를 생각했을리 없는 게, '현실'은 '동화'와 거의 정반대였고, 아니 오히려 그 '현실'을 유지하려는 어른들이 부러 아이들에게 정반대의 '동화'를 다시 캐내고 각색하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나도 부모가 되었고 내 아들딸에게 '동화'를 읽어주게 되었다. 창작동화보다는 내가 어릴 때 감명을 받았던 '고전동화'를 위주로 읽어주며 아빠인 나도 그것들을 새롭게 다시 읽게 된다. 사실 [보물섬]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말고는 어른이 되도록 '성인판'으로 읽어보지 못했다는 걸 새삼 알기도 했다.

라이먼 프랭크 바움(Lyman F. Baum : 1856~1919)은 미국 극작가인데 샤를 페로나 그림 형제, 안데르센 등 배경이 다소 '레트로'한 그보다 조금 앞선 유럽의 고전동화 작가들에 비하면 다소 미래적 '판타지' 작가에 가깝다. 주인공 도로시(Dorothy)는 1865년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를 모델로 한 것이 맞다고 한다. 미국 캔자스 들판에서 부모 없이 아저씨, 아주머니와 사는 그녀는 어느날 불어닥친 '사이클론'에 날아가는 집에서 잠이 든다. 과연, '이상한 나라'로 갈 수 있는 '앨리스'급 반열 맞다.

머리가 빈 허수아비(The Scarecrow), 심장이 없는 양철나무꾼(The Tin Woodman), 용기 없는 사자(The Lion)와 함께 '노란 벽돌길(The Yellow-brick road)'을 따라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를 찾아가 각자의 소원을 청하지만, 결국 다른 누가 아닌 본인이 이미 다 가지고 있더라는 '동화'적 결말이다. 그들이 지나온 길에서 겪은 경험에서 이미 다 드러났지만 그들 자신만 몰랐던 것들. 반면 도로시는 이미 본인이 신고 있던 마녀의 '은구두(The Silver Shoes)' 자체에 소원 성취의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도로시가 캔자스로 돌아왔을 때는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가 '꿈'이었을지 모른다는 암시는 없지만, 집으로 돌아오게 해준 '은구두'는 이미 '현실'과 '꿈' 사이의 '중간지대'인 '사막/황무지(the desert)'에 영원히 버려진다. 모험을 겪고 좀더 어른이 되었을 도로시는 다시 '이상한 나라'인 '오즈(Oz)'로 갈 수 없다. 앨리스 또한 언제든 잠들 수 있겠지만, 지루한 '역사책'을 읽어주던 언니처럼 성장할 것이므로 다시 잠에 빠진들 '이상한 나라'로 가는 토끼굴로 예전처럼 빠질 수는 없을 게다.

작가들은 비록 흥행을 위해 소녀 주인공들을 계속 다시 '이상한 나라'와 '오즈'로 돌려보내지만, '속편'들은 결코 '첫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


"각자에게 개별인사를 마친 도로시는 이제 강아지 토토를 꼭 안고서 모두에게 마지막 '안녕' 인사를 건넨 후 신고있던 은구두의 뒷굽을 세 번 부딪치며 말했다.
'캔자스로 돌아가게 해 줘!'
순간 도로시의 몸이 떠올라 너무도 빨리 지나는 바람에 그녀가 보고 느낄 수 있던 건 귓가를 스치는 바람 뿐이었다. 은구두의 세 발짝만큼 시간에 날아 오느라 그녀는 예전에 살았던 캔자스의 풀밭에 급하게 내동댕이쳐졌다...
...
도로시는 일어나면서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았는데, '은구두(The Silver Shoes)'는 날아오는 동안 벗겨져 중간지대 사막에 영원히 버려진 것이었다."
- 같은책, '23. Glinda Grants Dorothy's Wish'에서 필자 번역.


새해 첫날 마을뒷산에 오른 건, 굳이 뜨는 해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있을 '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엘튼 존의 노래 'Good bye Yellow Brick Road'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은 떠나고 싶은 '도시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도로시'와 같이 걸었던 '어린 시절'의 상징이었을 수도 있다.

모두 떠난 마을뒷산 공터에 남아 생각한다.
한때 '노란 벽돌길'응 걸었던 캔자스 소녀 도로시는 자기 안에 있을 '은구두'를 다시 찾았을까, 아니면 아예 잊었을까.


어른이든 아이든,
다소 '직지심경(直指心經)' 부처님 말씀 같지만,
모든 길은 결국,
'내 마음 속으로의 여행'이다.


***

1. [The Wonderful Wizard of Oz](1900), Lyman Frank Baum, <Collins Classics>, 2013.
2. [오즈의 마법사], <교원 애니매이션 세계명작동화>,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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