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 그림과 함께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엮음, 황건 옮김 / 까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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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탈을 쓴 '제국'의 '쇠망사'
-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일개 도시가 하나의 제국으로 팽창하게 된 경이는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로마가 쇠망한 것도 이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 그 붕괴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데 놀라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통치권력은 (수도 이전으로) 이전되었다기 보다는 (동서로) 분할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5장>, 에드워드 기번, 1787.


'제국'의 몰락 또는 그 쇠망을 이야기할 때 보통 마지막 황제가 혐의를 쓴다. 그러나 북송은 사치군주 휘종 전에 신법 개혁을 하고자 했던 신종 때부터 쇠망의 기운이 있었고, 명나라는 숭정제가 목매달기 전에 만력제의 오랜 통치기간에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한나라의 가장 강력했던 무제 시기에 제국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로마는 보통 서양 역사에서 '제국'의 대명사다. 한편으로 '공화국' 체제, 즉 '공화정'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로마 시대 '공화국'과 '제국'의 구분은 근현대사의 그것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두 개념 모두 근대 이후에 확립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고대시대 모든 로마 황제(Emperor)들의 명분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 1737~1794)은 유럽대륙을 여행하던 중 이탈리아 로마의 카피톨리움 폐허를 보고 장대한 로마제국 역사의 집필을 구상했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지어진 전체 6권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탁월하고 재치있는 문장으로 영문학사에서도 높이 평가된단다. 인도 네루 수상이 감옥에서 열심히 탐독했고 영국 처칠 수상의 재치와 유머의 원천이기도 했다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누가 봐도 진지하기만 한 역사에 관한 전혀 진지하지 않은 잡답이자 길고 긴 수다에 가깝다. 예를 들어 무능한 군주 막센티우스를 두고 "오랫동안 군주가 자리를 비워 섭섭해했던 로마인들도 그의 재위 7년 동안은 군주의 로마 거주를 개탄(7장)"했으며,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승리로 동방의 기독교 아리우스파를 몰아냈으나 이후 끊임없는 종교분쟁으로 정치적 고난을 겪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모험은 한 장의 우스꽝스러운 일대기로 서술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황제는 그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격렬한 정치권력의 행사에도 저항할 수 있는 기독교 교리의 힘을 경험한 최초의 기독교 황제였다(10장)"는 식의 풍자 일색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는 서술이 이어지는 장은 <13장>의 '유목민의 풍습' 등인데 편집본에서 이 장은 기번의 원문에서는 <26~29장>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권력자의 탐욕이나 민중들의 '냄비정신' 등 인간군상은 기번에게 전지적 후대 역사가의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5현제(五賢帝)'부터 5세기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1천년 이상의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역사를 만연체로 서술했다는 6권은 너무도 길기에 언론인 데로 손더스가 1952년에 발췌하고 요약한 판본으로도 일반인들은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충분히 읽어볼 수 있다. 손더스의 요약본은 원문을 그대로 발췌했으므로 기번의 문장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는데, 장황한 사설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각주를 달았으며 부득이한 요약만 편집자 본인이 썼단다. 또한 기번 자신도 서술을 멈추고자 했던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충실하게 발췌한 후 나머지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멸망의 과정 1천년은 '원서 후반부 발췌(16장)'로 정리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주요내용은 원서 전반부 98년 '5현제'의 시작인 트리야누스부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공화국'이 몰락하고 '제국'이 모습을 갖추자 마자 '쇠망'의 씨앗을 배태하고 쇠퇴해가면서 결국 일부(서로마)가 멸망한 약 4백년의 역사다.




"공화국은 야만스러울 정도로 '능력' 위주의 사회였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에게 역사는 노예가 될 신세에서 벗어나는, 영구적 경쟁의 동력을 기초로 하는 자유에로 나아가는 진화과정이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위선이 공화국의 정체를 규정했다. 그것은 공화국 헌법의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였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2003.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사실상 로마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이후부터의 이야기다. 칼리굴라, 네로 등의 병적인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 옥타비아누스와 다섯명의 현명한 황제(5현제) 사이의 기간으로서 굳이 '역사가' 입장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마공화국의 몰락에 관해서 영국 역사가 톰 홀랜드(Tom Holland)는 2003년에 기원전 6세기 로마공화국의 시작부터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카이사르(Caesar)가 루비콘 강을 건넌 사건을 전후하여 서술한다. 원제목 [루비콘(Rubicon)]은 국역으로 [공화국의 몰락]이 되었다. 그만큼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공화국의 몰락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Veni, vidi, vici!)"의 실력을 갖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렸을 적 '주사위' 놀이를 좋아한 만큼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명언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고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지지와 명성을 얻으려면 이 정도 '도박(주사위)'이나 유행어 쯤에는 능수능란해야 한다는 점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한다.





로마는 늑대 젓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기원전 753년에 건국 후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점차로 복속시키면서 군주국이 되었으나, 기원전 509년 타르퀸이라는 독재자가 시빌(Sibyl)이라는 노파의 예언을 무시한 후 쫓겨나고 시민투표에 의한 '민주정'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이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면 원로원이 보관해온 '시빌 예언서'를 들춰보며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화국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주 고대의 '시빌 예언서'는 독재에 항거한 민중폭동의 은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화국'에서 원로원으로부터 선출된 임기 1년의 집정관은 2명이 서로 견제했고 호민관은 귀족이 아닌 시민이 뽑은 대표로서 서민정책을 펴는 귀족이었단다.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중심지 삼아 아벤티누스 지역의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를 차지했다는데 위례(서울)를 기반 삼아 형제 비류를 죽이고는 미추홀(인천)을 먹은 백제 시조 온조 이야기와 닮았다. 로마는 승자 로물루스 지역 카피톨리누스가 귀족들의 대저택, 패자 레무스의 지역 아벤티누스 서민들의 '쪽방촌' 또는 '닭장촌'으로 나뉘기도 했는데 이 서민아파트 값 또한 엄청나게 비쌌으며 로마 전성기 인구가 고대 당시에 이미 100만명이 넘었다는 기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의 서울, 현대사회 대도시의 모습과 꼭 닮았다. 트로이 전쟁 후 피난온 아에네이아스(Aeneas) 후손인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의 근본있는 귀족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마도 이 집안 출신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빚내서 돈과 금품을 막 뿌려대고 남유럽 지역인 갈리아 원정 등의 군사적 성과를 통해 명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카이사르는 1차 삼두정치 과정에서 당연히 당대 실력자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는데 경쟁자들을 치기 위해 카이사르가 던진 '주사위'가 바로 '루비콘 도강'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토 등을 제압한 카이사르는 이전 세대 술라가 역임한 '독재관' 10년 임기 시작 초반에 "부르투스, 너마저?(Et tu Brute?)" 한마디 남기고 살해되었다는데, 그만큼 '공화국'을 애정했던 카이사르의 동료 부르투스가 로마 광장에서 만세를 부를 때 이를 보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단다.

[공화국의 몰락]은 카이사르 같은 독재관들이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리던 로마인들이 명예와 능력을 통해 성공하고 부를 독차지한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을 숭배하고 스스로 문명과 풍요, 사치와 향락의 노예가 기꺼이 되고자 하면서 스스로 '공화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운명은 '공화국'의 근간에 대한 개혁을 행하려는 시도는 모두 '전제주의'로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급진적인 변화 프로그램은 제 아무리 이상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죽음으로 입증함으로써 그라쿠스 형제는 궁극적으로 자기들 목숨을 바친 바로 그 개혁을 좌절시켰다. 그들 이후의 호민관들은 목표를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게 되었다. 사회혁명은 영구히 유보되게 된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기원전 130년대 토지를 민중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하려다가 차례로 살해당한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었다. 로마는 군사적 성과를 통해 출세한 자들의 '능력주의'가 숭배된 사회로 출신이 노예든 평민이든 '제국'의 팽창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자는 부와 명예를 얻어 귀족이 되고 원로원 의원도, 집정관이나 호민관도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능력주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 엄청난 금품과 뇌물을 뿌리고 경쟁적으로 대외팽창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역사적 경제토대가 노예체제냐 자본주의체제냐 차이만 있을 뿐, 지금은 허위에 불과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미국이나 지금의 우리 사회와 같다. 
벼락성공을 위해 서로 밟고 밟히는 이 문명적 정글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으니 '공화국'이 바로 그것이다. 공화국 한창 때인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의 명분도, 이들의 개혁을 저지한 귀족들의 반개혁 명분도 모두, '공화국 사수'였다. 그 어떤 실력자도 '황제'나 '독재관' 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전제적 '독재군주'가 될 수 없었다. '독재관' 술라도, '황제(Kaiser)'의 어원이 된 카이사르(Caesar)도, '존엄자' 옥타비아누스도 스스로를 '전제군주'로 부르지 않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보다는 관용적 정치력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받으며 '원수정(元首政)'이라는 로마 제정(帝政)의 정치적 틀을 만들었다. 이후 동로마가 멸망하는 15세기까지 '로마공화국'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허울 뿐인 원로원과 끝까지 명목상 함께 했으나 이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로마제국' 황제들의 신하들에 불과했다. 
톰 홀랜드의 [공화국의 몰락]은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 끝맺는데 그의 죽음은 바로 '공화국'의 정치적 몰락이었다. 
로마 시대 진정한 반란이자 혁명은 노예경제체제를 흔드는데는 실패했지만, 기원전 73~71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뿐이었다. 


"역사가는 이런(형이상학적/종교적) 고매한 고찰이 옳으냐 그르냐를 주제넘게 논하지 않고, 다만 경험에 의해서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격변(365년경)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격정에 따른 재앙을 더욱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진이나 해일, 태풍이나 화산폭발로 인한 재난은 일반적인 전쟁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발렌스 황제의 치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몰락 과정에는 개인의 행복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침해받았으며, 당대의 기술도 노동의 성과들도 모두 스키타이와 게르마니아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난폭하게 손상되었다. 훈족(흉노족)의 침입으로 서로마의 여러 지방으로 쫓겨간 고트족은 40년도 못되는 기간에 도나우 지역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군사적 승리로 자기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수많은 부족들의 이동과 침입의 길을 열게 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3장>, 에드워드 기번.


스스로를 시종 '역사가'로 칭하고 혹은 '철학자'로도 암시하는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경험에 의해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의해 장황하지만 재치있게 풀어낸다. '5현제' 이후 제국의 팽창과 함께 기원후 3세기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면서 '전제군주정(專制君主政)'을 확립했다.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반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속주를 둔 '로마제국'은 허울 뿐인 '공화정'이나 배우(actor)처럼 연극적 웅변이나 해대는 기만적인 '원수정'으로 지배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국 제국을 분할한다. 밀라노 중심의 서로마와 니코메디아 중심의 동로마는 2명의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고, 나머지 갈리아와 아프리카는 2명의 '부황제(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방식이다. 
기번이 본 '쇠망'의 키워드인 '분할'은 사실 그 어떤 '세계제국'으로도 운영할 수 없는 로마의 '팽창주의'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의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 '로마는 분할로 쇠망한 것이 아니라 팽창으로 망한 것'이라고.



기원후 4세기에는 전세계 기후변화가 있었던 듯 하다. 북쪽의 게르만, 고트족이 먹을 것을 찾아 급격히 이동했고 아시아에서도 흉노,선비, 갈, 저, 강족의 이른바 '다섯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려고 엎치락뒤치락하는 '5호16국'의 시대와 겹친다. 다신교 로마사회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의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330년)한 후 발렌티아누스와 그의 사촌동생 발렌스 시기 로마제국은 아시아의 페르시아적(또는 중국) 영향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제국'으로 변모해 갔고 주요한 속주의 군사력과 나아가 정치권력까지 이 밀려드는 서고트족 군왕 알라리크에게 맡김으로써 '제국'의 '쇠망'을 가속화한다. 화려한 '태평성대' 전성기에 이미 '쇠망'과 '몰락'의 씨앗은 충분히 자라고 있었다. T.S.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한 것처럼 만발의 시기에 이미 죽어갈 운명을 배태하여 슬픈 역사의 '변증법(辨證法)'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과 톰 홀랜드의 역사관이다.


"'자유를 너무 많이 누리다 보면 끝내는 노예 신세가 된다'는 것이 키케로의 비통한 판단이었다. 그의 세대, 자유 공화국의 마지막 세대가 그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예제의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가 밝혀내야 할 사실이었다."
- [공화국의 몰락], <11장. 공화국의 죽음>, 톰 홀랜드.


로마시민은 '공화국의 자유'를 5백년 간 누리면서 '능력주의'와 부를 숭배했고 이를 실현한 벼락출세자들을 찬양했다. 로마의 쪽방 서민아파트 값을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권력의 주변에서 서성대며 떡고물을 받아먹고 무리한 팽창을 통해 스스로도 감당못할 '제국'을 건설했으나 결국 로마제국의 긴 역사는 그 자체로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가 되었다. 
노예경제체제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원인은 노예노동력 확보를 통한 생산력 발전과 부의 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쇠망사'는 그 자체로 노예제 사회의 역사단계적 모순을 반영한다.
그렇게 모든 역사적 문명체제는 그 전성기와 함께 이미 다음 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물론, 현재 자본주의체제 또한 이 역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로마공화국의 사상가이자 웅변가로 그 연극적 요소로써 당연히 정치가이기도 했던 키케로가 [공화국]에서 말했다는 '노예'는 체제적 노예가 아닌 사상적 노예였다. 로마공화국 시민의 '자유'가 확장하면서 본인들 스스로도 감당못할 체제를 만들고 이에 굴종하는 '노예'적 삶은 당대 로마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진정한 '평등주의'를 지향한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은 물론 그라쿠스 형제의 호민관개혁 조차도 이 '자유시민'들에 의해 '공화국'의 이름으로 좌절되고 말았으며, 결국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변화시켰다. 로마제국의 팽창과 이로 인했을 기후변화의 시대를 맞아 아시아에서 밀려온 유목민족과 북쪽의 야만인들의 새로운 세대가 만든 역사적 변화와 혁명의 토대에는 노예경제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저변의 흐름이 있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았다.

***

1.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2.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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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몰락
톰 홀랜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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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탈을 쓴 '제국'의 '쇠망사'
-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일개 도시가 하나의 제국으로 팽창하게 된 경이는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로마가 쇠망한 것도 이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 그 붕괴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데 놀라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통치권력은 (수도 이전으로) 이전되었다기 보다는 (동서로) 분할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5장>, 에드워드 기번, 1787.


'제국'의 몰락 또는 그 쇠망을 이야기할 때 보통 마지막 황제가 혐의를 쓴다. 그러나 북송은 사치군주 휘종 전에 신법 개혁을 하고자 했던 신종 때부터 쇠망의 기운이 있었고, 명나라는 숭정제가 목매달기 전에 만력제의 오랜 통치기간에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한나라의 가장 강력했던 무제 시기에 제국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로마는 보통 서양 역사에서 '제국'의 대명사다. 한편으로 '공화국' 체제, 즉 '공화정'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로마 시대 '공화국'과 '제국'의 구분은 근현대사의 그것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두 개념 모두 근대 이후에 확립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고대시대 모든 로마 황제(Emperor)들의 명분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영국의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 1737~1794)은 유럽대륙을 여행하던 중 이탈리아 로마의 카피톨리움 폐허를 보고 장대한 로마제국 역사의 집필을 구상했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지어진 전체 6권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탁월하고 재치있는 문장으로 영문학사에서도 높이 평가된단다. 인도 네루 수상이 감옥에서 열심히 탐독했고 영국 처칠 수상의 재치와 유머의 원천이기도 했다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누가 봐도 진지하기만 한 역사에 관한 전혀 진지하지 않은 잡답이자 길고 긴 수다에 가깝다. 예를 들어 무능한 군주 막센티우스를 두고 "오랫동안 군주가 자리를 비워 섭섭해했던 로마인들도 그의 재위 7년 동안은 군주의 로마 거주를 개탄(7장)"했으며,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승리로 동방의 기독교 아리우스파를 몰아냈으나 이후 끊임없는 종교분쟁으로 정치적 고난을 겪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의 모험은 한 장의 우스꽝스러운 일대기로 서술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황제는 그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격렬한 정치권력의 행사에도 저항할 수 있는 기독교 교리의 힘을 경험한 최초의 기독교 황제였다(10장)"는 식의 풍자 일색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웃기는 서술이 이어지는 장은 <13장>의 '유목민의 풍습' 등인데 편집본에서 이 장은 기번의 원문에서는 <26~29장>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권력자의 탐욕이나 민중들의 '냄비정신' 등 인간군상은 기번에게 전지적 후대 역사가의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5현제(五賢帝)'부터 5세기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1천년 이상의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역사를 만연체로 서술했다는 6권은 너무도 길기에 언론인 데로 손더스가 1952년에 발췌하고 요약한 판본으로도 일반인들은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충분히 읽어볼 수 있다. 손더스의 요약본은 원문을 그대로 발췌했으므로 기번의 문장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는데, 장황한 사설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각주를 달았으며 부득이한 요약만 편집자 본인이 썼단다. 또한 기번 자신도 서술을 멈추고자 했던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충실하게 발췌한 후 나머지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멸망의 과정 1천년은 '원서 후반부 발췌(16장)'로 정리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주요내용은 원서 전반부 98년 '5현제'의 시작인 트리야누스부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공화국'이 몰락하고 '제국'이 모습을 갖추자 마자 '쇠망'의 씨앗을 배태하고 쇠퇴해가면서 결국 일부(서로마)가 멸망한 약 4백년의 역사다.




"공화국은 야만스러울 정도로 '능력' 위주의 사회였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에게 역사는 노예가 될 신세에서 벗어나는, 영구적 경쟁의 동력을 기초로 하는 자유에로 나아가는 진화과정이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위선이 공화국의 정체를 규정했다. 그것은 공화국 헌법의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였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2003.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사실상 로마 '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끝낸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이후부터의 이야기다. 칼리굴라, 네로 등의 병적인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 옥타비아누스와 다섯명의 현명한 황제(5현제) 사이의 기간으로서 굳이 '역사가' 입장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마공화국의 몰락에 관해서 영국 역사가 톰 홀랜드(Tom Holland)는 2003년에 기원전 6세기 로마공화국의 시작부터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카이사르(Caesar)가 루비콘 강을 건넌 사건을 전후하여 서술한다. 원제목 [루비콘(Rubicon)]은 국역으로 [공화국의 몰락]이 되었다. 그만큼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공화국의 몰락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Veni, vidi, vici!)"의 실력을 갖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렸을 적 '주사위' 놀이를 좋아한 만큼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명언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고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지지와 명성을 얻으려면 이 정도 '도박(주사위)'이나 유행어 쯤에는 능수능란해야 한다는 점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한다.





로마는 늑대 젓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기원전 753년에 건국 후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점차로 복속시키면서 군주국이 되었으나, 기원전 509년 타르퀸이라는 독재자가 시빌(Sibyl)이라는 노파의 예언을 무시한 후 쫓겨나고 시민투표에 의한 '민주정'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이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면 원로원이 보관해온 '시빌 예언서'를 들춰보며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화국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주 고대의 '시빌 예언서'는 독재에 항거한 민중폭동의 은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화국'에서 원로원으로부터 선출된 임기 1년의 집정관은 2명이 서로 견제했고 호민관은 귀족이 아닌 시민이 뽑은 대표로서 서민정책을 펴는 귀족이었단다.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중심지 삼아 아벤티누스 지역의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고 로마를 차지했다는데 위례(서울)를 기반 삼아 형제 비류를 죽이고는 미추홀(인천)을 먹은 백제 시조 온조 이야기와 닮았다. 로마는 승자 로물루스 지역 카피톨리누스가 귀족들의 대저택, 패자 레무스의 지역 아벤티누스 서민들의 '쪽방촌' 또는 '닭장촌'으로 나뉘기도 했는데 이 서민아파트 값 또한 엄청나게 비쌌으며 로마 전성기 인구가 고대 당시에 이미 100만명이 넘었다는 기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의 서울, 현대사회 대도시의 모습과 꼭 닮았다. 트로이 전쟁 후 피난온 아에네이아스(Aeneas) 후손인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의 근본있는 귀족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마도 이 집안 출신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빚내서 돈과 금품을 막 뿌려대고 남유럽 지역인 갈리아 원정 등의 군사적 성과를 통해 명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카이사르는 1차 삼두정치 과정에서 당연히 당대 실력자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는데 경쟁자들을 치기 위해 카이사르가 던진 '주사위'가 바로 '루비콘 도강'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토 등을 제압한 카이사르는 이전 세대 술라가 역임한 '독재관' 10년 임기 시작 초반에 "부르투스, 너마저?(Et tu Brute?)" 한마디 남기고 살해되었다는데, 그만큼 '공화국'을 애정했던 카이사르의 동료 부르투스가 로마 광장에서 만세를 부를 때 이를 보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단다.

[공화국의 몰락]은 카이사르 같은 독재관들이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리던 로마인들이 명예와 능력을 통해 성공하고 부를 독차지한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을 숭배하고 스스로 문명과 풍요, 사치와 향락의 노예가 기꺼이 되고자 하면서 스스로 '공화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운명은 '공화국'의 근간에 대한 개혁을 행하려는 시도는 모두 '전제주의'로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급진적인 변화 프로그램은 제 아무리 이상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죽음으로 입증함으로써 그라쿠스 형제는 궁극적으로 자기들 목숨을 바친 바로 그 개혁을 좌절시켰다. 그들 이후의 호민관들은 목표를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게 되었다. 사회혁명은 영구히 유보되게 된다."
- [공화국의 몰락], <1장. 모순적인 공화국>, 톰 홀랜드.


기원전 130년대 토지를 민중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하려다가 차례로 살해당한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었다. 로마는 군사적 성과를 통해 출세한 자들의 '능력주의'가 숭배된 사회로 출신이 노예든 평민이든 '제국'의 팽창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자는 부와 명예를 얻어 귀족이 되고 원로원 의원도, 집정관이나 호민관도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능력주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 엄청난 금품과 뇌물을 뿌리고 경쟁적으로 대외팽창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역사적 경제토대가 노예체제냐 자본주의체제냐 차이만 있을 뿐, 지금은 허위에 불과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미국이나 지금의 우리 사회와 같다. 
벼락성공을 위해 서로 밟고 밟히는 이 문명적 정글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으니 '공화국'이 바로 그것이다. 공화국 한창 때인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의 명분도, 이들의 개혁을 저지한 귀족들의 반개혁 명분도 모두, '공화국 사수'였다. 그 어떤 실력자도 '황제'나 '독재관' 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전제적 '독재군주'가 될 수 없었다. '독재관' 술라도, '황제(Kaiser)'의 어원이 된 카이사르(Caesar)도, '존엄자' 옥타비아누스도 스스로를 '전제군주'로 부르지 않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보다는 관용적 정치력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부여받으며 '원수정(元首政)'이라는 로마 제정(帝政)의 정치적 틀을 만들었다. 이후 동로마가 멸망하는 15세기까지 '로마공화국'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허울 뿐인 원로원과 끝까지 명목상 함께 했으나 이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로마제국' 황제들의 신하들에 불과했다. 
톰 홀랜드의 [공화국의 몰락]은 기원후 24년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 끝맺는데 그의 죽음은 바로 '공화국'의 정치적 몰락이었다. 
로마 시대 진정한 반란이자 혁명은 노예경제체제를 흔드는데는 실패했지만, 기원전 73~71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뿐이었다. 


"역사가는 이런(형이상학적/종교적) 고매한 고찰이 옳으냐 그르냐를 주제넘게 논하지 않고, 다만 경험에 의해서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격변(365년경)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격정에 따른 재앙을 더욱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진이나 해일, 태풍이나 화산폭발로 인한 재난은 일반적인 전쟁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발렌스 황제의 치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의 몰락 과정에는 개인의 행복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침해받았으며, 당대의 기술도 노동의 성과들도 모두 스키타이와 게르마니아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난폭하게 손상되었다. 훈족(흉노족)의 침입으로 서로마의 여러 지방으로 쫓겨간 고트족은 40년도 못되는 기간에 도나우 지역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군사적 승리로 자기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수많은 부족들의 이동과 침입의 길을 열게 되었다."
- [로마제국 쇠망사], <13장>, 에드워드 기번.


스스로를 시종 '역사가'로 칭하고 혹은 '철학자'로도 암시하는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경험에 의해 입증할 수 있는 관찰'에 의해 장황하지만 재치있게 풀어낸다. '5현제' 이후 제국의 팽창과 함께 기원후 3세기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면서 '전제군주정(專制君主政)'을 확립했다.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반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속주를 둔 '로마제국'은 허울 뿐인 '공화정'이나 배우(actor)처럼 연극적 웅변이나 해대는 기만적인 '원수정'으로 지배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국 제국을 분할한다. 밀라노 중심의 서로마와 니코메디아 중심의 동로마는 2명의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고, 나머지 갈리아와 아프리카는 2명의 '부황제(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방식이다. 
기번이 본 '쇠망'의 키워드인 '분할'은 사실 그 어떤 '세계제국'으로도 운영할 수 없는 로마의 '팽창주의'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의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 '로마는 분할로 쇠망한 것이 아니라 팽창으로 망한 것'이라고.



기원후 4세기에는 전세계 기후변화가 있었던 듯 하다. 북쪽의 게르만, 고트족이 먹을 것을 찾아 급격히 이동했고 아시아에서도 흉노,선비, 갈, 저, 강족의 이른바 '다섯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려고 엎치락뒤치락하는 '5호16국'의 시대와 겹친다. 다신교 로마사회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의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330년)한 후 발렌티아누스와 그의 사촌동생 발렌스 시기 로마제국은 아시아의 페르시아적(또는 중국) 영향으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제국'으로 변모해 갔고 주요한 속주의 군사력과 나아가 정치권력까지 이 밀려드는 서고트족 군왕 알라리크에게 맡김으로써 '제국'의 '쇠망'을 가속화한다. 화려한 '태평성대' 전성기에 이미 '쇠망'과 '몰락'의 씨앗은 충분히 자라고 있었다. T.S.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한 것처럼 만발의 시기에 이미 죽어갈 운명을 배태하여 슬픈 역사의 '변증법(辨證法)'이 바로 에드워드 기번과 톰 홀랜드의 역사관이다.


"'자유를 너무 많이 누리다 보면 끝내는 노예 신세가 된다'는 것이 키케로의 비통한 판단이었다. 그의 세대, 자유 공화국의 마지막 세대가 그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예제의 귀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가 밝혀내야 할 사실이었다."
- [공화국의 몰락], <11장. 공화국의 죽음>, 톰 홀랜드.


로마시민은 '공화국의 자유'를 5백년 간 누리면서 '능력주의'와 부를 숭배했고 이를 실현한 벼락출세자들을 찬양했다. 로마의 쪽방 서민아파트 값을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권력의 주변에서 서성대며 떡고물을 받아먹고 무리한 팽창을 통해 스스로도 감당못할 '제국'을 건설했으나 결국 로마제국의 긴 역사는 그 자체로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가 되었다. 
노예경제체제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원인은 노예노동력 확보를 통한 생산력 발전과 부의 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쇠망사'는 그 자체로 노예제 사회의 역사단계적 모순을 반영한다.
그렇게 모든 역사적 문명체제는 그 전성기와 함께 이미 다음 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한다.
물론, 현재 자본주의체제 또한 이 역사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로마공화국의 사상가이자 웅변가로 그 연극적 요소로써 당연히 정치가이기도 했던 키케로가 [공화국]에서 말했다는 '노예'는 체제적 노예가 아닌 사상적 노예였다. 로마공화국 시민의 '자유'가 확장하면서 본인들 스스로도 감당못할 체제를 만들고 이에 굴종하는 '노예'적 삶은 당대 로마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진정한 '평등주의'를 지향한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은 물론 그라쿠스 형제의 호민관개혁 조차도 이 '자유시민'들에 의해 '공화국'의 이름으로 좌절되고 말았으며, 결국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맞아 변화시켰다. 로마제국의 팽창과 이로 인했을 기후변화의 시대를 맞아 아시아에서 밀려온 유목민족과 북쪽의 야만인들의 새로운 세대가 만든 역사적 변화와 혁명의 토대에는 노예경제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저변의 흐름이 있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았다.

***

1.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2. [공화국의 몰락](2003),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웅진닷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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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유럽사 - 아테네, 로마부터 파리, 프라이부르크까지 18개 도시로 떠나는 역사기행 도시로 보는 시리즈
백승종 지음 / 사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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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 '문명'의 역사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교과서에 실린 공식적 종교개혁 이전에 보헤미아 사람 '얀 후스(Jan Hus)'가 있었으니, 그는 16세기에 일어난 모든 변화의 선구자였다. 후스가 활동한 시기는 15세기다... '후스파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에는 한세기 뒤의 '루터파'가 친숙함을 느꼈을 '온건파'도 있었고, 급진적인 '타보르파'도 있었다. 후자('타보르파')는 모든 재화를 공유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려 한 '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후스 시대와 루터 시대의 중요한 차이 하나는 인쇄기의 발전과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였다."
- [유럽민중사], <2. 다른 종교개혁>, 윌리엄 펠츠, 2016.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흔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 대표된다. '면죄부'를 통해 세속적 부를 축적하던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의 파괴력은 성경의 인쇄와 대중화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개혁을 넘어선 '사회개혁'은 부정했고 오히려 탄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은 정치경제체제의 문제였지 결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종교개혁'만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에게 14세기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16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고 문자의 보급에 기여했으며 다수 민중들이 두루마리가 아닌 '책(코덱스)', 주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자유의 도시' 체코 프라하 광장에 동상으로 서 있는 신학자 얀 후스(Jan Hus)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한세기 앞선 15세기에 이미 타락한 '종교'를 너머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 결과 후스는 파문과 화형을 당하고 그의 정신을 이은 '후스파 운동'은 성경의 대중화라는 문명을 만나지 못한 채 기존 체제로부터 처절하게 말살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세기 전 후스나 동시대 토머스 뮌처(Thomas Muntzer) 등에 비하면 '개혁성'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넘어서 '사회변혁'을 외쳤던 '혁명가'들을 기득권과 결탁하여 짓밟은 '보수반동성'으로 연명했다. 
현 체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구반동 세력과 거대양당 과두지배 동맹을 맺고 사회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소수 다양한 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는 지금 우리의 '민주당'과 같다.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아테네와 로마, 스톡홀름과 콘스탄티노플, 프라하, 런던과 파리, 빈과 베를린 등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답사한 기록을 토대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유럽사'를 조망한다. [도시로 보는 유럽사](2020)를 통해 그 도시들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유럽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로부터 고대 도시국가의 발현을 보고 로마에서 도시 공화제를 벗어난 제국의 향기를 느끼며 바이킹의 후예들이 건설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힘을 발견한다. 보헤미안적 자유의 도시 프라하에서는 거대 제국들과 기득권에 맞선 '저항과 혁신'의 역사를 본다. 위에서 만난 얀 후스 뿐 아니라 천문학의 대가 튀코 브라헤(Tyge Brahe)와 그의 제자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얀 후스의 저항정신의 산실로서 16~17세기 당시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던 프라하였기에 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기독교도였던 그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고이 간직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이탈리아에 전해주었다. 이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에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 [도시로 보는 유럽사], <콘스탄티노플>, 백승종, 2020.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비잔틴 제국이 1천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한 '실크로드'를 잇는 '중간지대' 도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철옹성'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초대형 대포를 앞세워 점령했고 기독교적 명칭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식 '이스탄불'로 명명되었으며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동서양을 매개하던 학자와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슬람 술탄의 지배를 벗어나 오래전 몰락한 서로마 지역으로 몰려와 '르네상스'를 선도했다는 이야기와 오스만 투르크가 향신료 중개료를 인상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해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솔리니가 발호하던 시절,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사상가가 있었다. 옥중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 '진지전(war of position)'... 마치 진지를 구축하여 전투를 벌이듯, 지식인들이 운동의 거점을 만들어서 대중의 세계관을 차츰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득권층의 '헤게모니'를 대중이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던 것인데, 수긍할 만하지 않은가."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로마>, 백승종, 2020.


고대 로마 제국의 발원지, 근대 '르네상스'의 지역이자, 현대 '파시즘'의 발상지 로마를 그곳 출신 천재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역사의 실험실'이라 불렀단다.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그에 끝까지 저항한 그람시, 로마 시조 로물루스-레무스의 '형제살육'의 역사와 '공화정'의 탈을 쓴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유럽연합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역동적인 유럽사를 관통한다. 케사르와 마키아벨리의 후예인 로마인들은 '제국'과 '군주제'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가 '공화정'을 만들고 유지해 온 '자유 도시민'임을 잊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제국'이라는 체제를 만든 길가메시 키루스적이고 페르시안적 이슬람 지배로부터 '르네상스인들'이 탈주한 이유가 이 '자유 도시민'의 습성 때문 아니었을까.


"'30년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圳)을 보고 1,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베이징(北京)을 보고 3,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시안(西安)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굴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개혁개방 성과를 대변하는 선전 뿐 아니라 찬란한 역사를 구가했던 심장부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베이징과 시안 그리고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등 중국의 역대 도읍지는 중국 역사의 심장부다.
...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읍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공간으로 중국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도읍지에는 '중심'으로서 구심력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여는 글>, 이유진, 2018.


중국전문 연구자 이유진은 시안(서안), 뤄양(낙양), 카이펑(개봉), 항저우(항주), 난징(남경), 베이징(북경)의 '여섯 도읍지 이야기'로 중국사를 조망한 책,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2018)에서 '문명'의 중심지였던 각 왕조의 수도를 돌아보는 것을 '공간'을 통해 시간적 역사를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채택한다.

시안(서안)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아시아측 관문이었고 인류문명의 주요 발상지인 중앙아시아와 고대로부터 활발히 교류하던 통로였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를 포함하여 시안은 서주와 전한, 남북조시대 서위와 북주를 이어 수,당을 거치며 고대의 화려한 교류문화를 꽃피웠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中)'이라 칭한 '중국(中國)'은 기원전 3천년경 주나라 2대 성왕의 명에 따라 주공이 뤄양(낙양)에 도읍을 정하며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는 거리가 같다([사기], <주본기>)"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뤄양이 있는 허난성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삼국시대 조위, 남북조 북위, 5대10국 후량과 후당 등 시안에서 일단 망조가 든 제국이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개국할 때 선택한 중국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고대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던 5대10국의 난립시대에 카이펑(개봉)이 새 도읍지로 떠오르는데, 후진, 후한, 후주 등을 거쳐 터를 닦은 카이펑은 북송 시대에 세계적 무역도시로 발전한다. 콘스탄티노플 인구가 50만이던 10~11세기에 북송 카이펑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단다. 당시 우리 고려의 개경도 약 40만의 인구였다는데 동아시아 일대의 번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카이펑은 지난 문명 위에 다른 문명이 계속 쌓인 결과 북송의 유적은 현재 카이펑 지하 10미터 아래 묻혀 있단다.
항저우(항주)는 거란과 여진, 몽골에 의해 아래로 쫓겨난 한족(漢族)의 남송이 오래전 춘추전국시대 남방 '오랑캐' 도시를 악비로 대표되는 중원 재탈환의 기지로 삼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군 세력들을 석권하고 '오왕'이 된 난징(남경)은 넓은 중원 통치를 위한 '남쪽 수도'로서 삼국시대 오, 5호16국시대 동진과 남북조시대 남조의 중심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불리며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베이징(북경)은 '남경'에 대비되는 '북쪽 수도'로서 몽골의 원나라로부터 명나라 영락제 이후와 청나라를 거치며 중국 근현대 왕조의 명멸을 지켜본 도시로서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도읍지'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문명'의 역사관의 다른 이름이다. 
소규모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 정착을 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고 경계를 둘러친 '도시'. 
서양의 '도시(burg)'는 하나의 도시국가로서 '성안의 자유민(부르주아)'의 기원이 된 공간이었고, 아테네와 초기 로마와 같이 고대노예제 사회였음에도 '자유시민' 사상을 퍼뜨려 왔다. 한편, 동양의 '도시'는 '천자'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점령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는 도읍지였고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민중들은 오랜 기간 강도나 폭력배와 같은 '천자'의 노예들이었다. 물론 이 '천자'들은 왕조체제의 내부 모순이 불거지면서 반복된 혁명에 의해 타도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아닌 다른 '천자'로 대체되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기반은 사회 체제 변혁을 요구하던 대규모 민중반란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민중반란군의 최종 목표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들이 파괴해야 했던 것은 낡은 체제라는 '문명'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문명'이란 '기술'의 전수로 본다. 제국이 멸망하고 다른 권력자가 들어서 사상과 종교나 철학이 바뀌고 체제가 바뀔지언정 여전히 '낫'이라는 기구는 들에서 곡식을 베고 있다는 얘기다. 
'문명'이 집중된 '도시'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문명'을 파괴하지만 다수 인류가 면면이 이어온 '문명'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시'의 역사는, 그 자체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

1.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4. [로마제국 쇠망사](18세기), 에드워드 기번, 황건옮김, <까치>,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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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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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 '문명'의 역사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교과서에 실린 공식적 종교개혁 이전에 보헤미아 사람 '얀 후스(Jan Hus)'가 있었으니, 그는 16세기에 일어난 모든 변화의 선구자였다. 후스가 활동한 시기는 15세기다... '후스파 운동'이라 불리는 이 흐름에는 한세기 뒤의 '루터파'가 친숙함을 느꼈을 '온건파'도 있었고, 급진적인 '타보르파'도 있었다. 후자('타보르파')는 모든 재화를 공유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려 한 '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후스 시대와 루터 시대의 중요한 차이 하나는 인쇄기의 발전과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였다."
- [유럽민중사], <2. 다른 종교개혁>, 윌리엄 펠츠, 2016.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흔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 대표된다. '면죄부'를 통해 세속적 부를 축적하던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의 파괴력은 성경의 인쇄와 대중화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개혁을 넘어선 '사회개혁'은 부정했고 오히려 탄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은 정치경제체제의 문제였지 결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종교개혁'만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우리에게 14세기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16세기에 이르러 대중화되고 문자의 보급에 기여했으며 다수 민중들이 두루마리가 아닌 '책(코덱스)', 주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자유의 도시' 체코 프라하 광장에 동상으로 서 있는 신학자 얀 후스(Jan Hus)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한세기 앞선 15세기에 이미 타락한 '종교'를 너머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 결과 후스는 파문과 화형을 당하고 그의 정신을 이은 '후스파 운동'은 성경의 대중화라는 문명을 만나지 못한 채 기존 체제로부터 처절하게 말살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세기 전 후스나 동시대 토머스 뮌처(Thomas Muntzer) 등에 비하면 '개혁성'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넘어서 '사회변혁'을 외쳤던 '혁명가'들을 기득권과 결탁하여 짓밟은 '보수반동성'으로 연명했다. 
현 체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구반동 세력과 거대양당 과두지배 동맹을 맺고 사회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소수 다양한 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는 지금 우리의 '민주당'과 같다.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아테네와 로마, 스톡홀름과 콘스탄티노플, 프라하, 런던과 파리, 빈과 베를린 등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답사한 기록을 토대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유럽사'를 조망한다. [도시로 보는 유럽사](2020)를 통해 그 도시들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유럽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로부터 고대 도시국가의 발현을 보고 로마에서 도시 공화제를 벗어난 제국의 향기를 느끼며 바이킹의 후예들이 건설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힘을 발견한다. 보헤미안적 자유의 도시 프라하에서는 거대 제국들과 기득권에 맞선 '저항과 혁신'의 역사를 본다. 위에서 만난 얀 후스 뿐 아니라 천문학의 대가 튀코 브라헤(Tyge Brahe)와 그의 제자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얀 후스의 저항정신의 산실로서 16~17세기 당시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던 프라하였기에 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기독교도였던 그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 년 동안 고이 간직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이탈리아에 전해주었다. 이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에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 [도시로 보는 유럽사], <콘스탄티노플>, 백승종, 2020.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비잔틴 제국이 1천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한 '실크로드'를 잇는 '중간지대' 도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철옹성'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초대형 대포를 앞세워 점령했고 기독교적 명칭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식 '이스탄불'로 명명되었으며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동서양을 매개하던 학자와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슬람 술탄의 지배를 벗어나 오래전 몰락한 서로마 지역으로 몰려와 '르네상스'를 선도했다는 이야기와 오스만 투르크가 향신료 중개료를 인상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모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해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 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솔리니가 발호하던 시절,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사상가가 있었다. 옥중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 '진지전(war of position)'... 마치 진지를 구축하여 전투를 벌이듯, 지식인들이 운동의 거점을 만들어서 대중의 세계관을 차츰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득권층의 '헤게모니'를 대중이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던 것인데, 수긍할 만하지 않은가."
- [도시로 보는 유럽사], <로마>, 백승종, 2020.


고대 로마 제국의 발원지, 근대 '르네상스'의 지역이자, 현대 '파시즘'의 발상지 로마를 그곳 출신 천재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역사의 실험실'이라 불렀단다.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그에 끝까지 저항한 그람시, 로마 시조 로물루스-레무스의 '형제살육'의 역사와 '공화정'의 탈을 쓴 '로마 제국'의 역사는 유럽연합의 시대인 현재까지도 역동적인 유럽사를 관통한다. 케사르와 마키아벨리의 후예인 로마인들은 '제국'과 '군주제'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스스로가 '공화정'을 만들고 유지해 온 '자유 도시민'임을 잊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제국'이라는 체제를 만든 길가메시 키루스적이고 페르시안적 이슬람 지배로부터 '르네상스인들'이 탈주한 이유가 이 '자유 도시민'의 습성 때문 아니었을까.


"'30년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圳)을 보고 1,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베이징(北京)을 보고 3,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시안(西安)을 보라'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굴기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개혁개방 성과를 대변하는 선전 뿐 아니라 찬란한 역사를 구가했던 심장부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베이징과 시안 그리고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등 중국의 역대 도읍지는 중국 역사의 심장부다.
...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읍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공간으로 중국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도읍지에는 '중심'으로서 구심력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여는 글>, 이유진, 2018.


중국전문 연구자 이유진은 시안(서안), 뤄양(낙양), 카이펑(개봉), 항저우(항주), 난징(남경), 베이징(북경)의 '여섯 도읍지 이야기'로 중국사를 조망한 책,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2018)에서 '문명'의 중심지였던 각 왕조의 수도를 돌아보는 것을 '공간'을 통해 시간적 역사를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채택한다.

시안(서안)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아시아측 관문이었고 인류문명의 주요 발상지인 중앙아시아와 고대로부터 활발히 교류하던 통로였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를 포함하여 시안은 서주와 전한, 남북조시대 서위와 북주를 이어 수,당을 거치며 고대의 화려한 교류문화를 꽃피웠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中)'이라 칭한 '중국(中國)'은 기원전 3천년경 주나라 2대 성왕의 명에 따라 주공이 뤄양(낙양)에 도읍을 정하며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는 거리가 같다([사기], <주본기>)"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뤄양이 있는 허난성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삼국시대 조위, 남북조 북위, 5대10국 후량과 후당 등 시안에서 일단 망조가 든 제국이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개국할 때 선택한 중국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고대에서 근세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던 5대10국의 난립시대에 카이펑(개봉)이 새 도읍지로 떠오르는데, 후진, 후한, 후주 등을 거쳐 터를 닦은 카이펑은 북송 시대에 세계적 무역도시로 발전한다. 콘스탄티노플 인구가 50만이던 10~11세기에 북송 카이펑의 인구는 150만 명이었단다. 당시 우리 고려의 개경도 약 40만의 인구였다는데 동아시아 일대의 번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카이펑은 지난 문명 위에 다른 문명이 계속 쌓인 결과 북송의 유적은 현재 카이펑 지하 10미터 아래 묻혀 있단다.
항저우(항주)는 거란과 여진, 몽골에 의해 아래로 쫓겨난 한족(漢族)의 남송이 오래전 춘추전국시대 남방 '오랑캐' 도시를 악비로 대표되는 중원 재탈환의 기지로 삼았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군 세력들을 석권하고 '오왕'이 된 난징(남경)은 넓은 중원 통치를 위한 '남쪽 수도'로서 삼국시대 오, 5호16국시대 동진과 남북조시대 남조의 중심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불리며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베이징(북경)은 '남경'에 대비되는 '북쪽 수도'로서 몽골의 원나라로부터 명나라 영락제 이후와 청나라를 거치며 중국 근현대 왕조의 명멸을 지켜본 도시로서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도읍지'다.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은 '문명'의 역사관의 다른 이름이다. 
소규모로 흩어져 살던 인류가 정착을 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고 경계를 둘러친 '도시'. 
서양의 '도시(burg)'는 하나의 도시국가로서 '성안의 자유민(부르주아)'의 기원이 된 공간이었고, 아테네와 초기 로마와 같이 고대노예제 사회였음에도 '자유시민' 사상을 퍼뜨려 왔다. 한편, 동양의 '도시'는 '천자'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점령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는 도읍지였고 우리를 비롯한 동양의 민중들은 오랜 기간 강도나 폭력배와 같은 '천자'의 노예들이었다. 물론 이 '천자'들은 왕조체제의 내부 모순이 불거지면서 반복된 혁명에 의해 타도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아닌 다른 '천자'로 대체되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기반은 사회 체제 변혁을 요구하던 대규모 민중반란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민중반란군의 최종 목표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들이 파괴해야 했던 것은 낡은 체제라는 '문명'이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문명'이란 '기술'의 전수로 본다. 제국이 멸망하고 다른 권력자가 들어서 사상과 종교나 철학이 바뀌고 체제가 바뀔지언정 여전히 '낫'이라는 기구는 들에서 곡식을 베고 있다는 얘기다. 
'문명'이 집중된 '도시'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문명'을 파괴하지만 다수 인류가 면면이 이어온 '문명'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시'의 역사는, 그 자체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

1.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4. [로마제국 쇠망사](18세기), 에드워드 기번, 황건옮김, <까치>,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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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과 좌파 - 유럽에서 벌어진 논쟁 기본소득 총서 5
필리프 판 파레이스 외 지음, 안효상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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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인가, '보편복지'인가
- [기본소득과 좌파], 필리프 판 파레이스 외, 안효상 옮김, <박종철출판사>, 2020.



"'기본소득 대 복지국가'라는 허구적 대당 속에서는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1) 노동, 특히 고용 노동의 중심성 혹은 우선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어떤 복지국가를 지향하든 '완전고용'을 목표이자 기반으로 보고 있다는 점, 2) 기본소득은 예산이 너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그 효과는 떨어진다는 점, 3) 기본소득을 실시할 경우 다른 사회보장제도를 몰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 [기본소득과 좌파], <역자후기 - 한국에서 벌어진 기본소득 논쟁(?)>, 안효상, 2020.


다음 대선에서 내 나름대로의 최대 쟁점 또는 이슈를 꼽는다면, 나는 '기본소득'이 될 것이라 본다. 지난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경선후보였던 이재명은 '기본소득'을 앞세웠고 현재까지 코로나 재난수당이나 성남시 청년수당 등을 '기본소득'과 무조건 연결시키고 있다. 정치인 '이재명' 하면 '기본소득'이 자동으로 연상되도록 완전히 이미지화시켰다. 그에게는 이미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2020년 총선에서 허경영 무리들이 내건 '국가배당금'과 동전의 양면이다.


'기본소득' 관련 논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노동당대회에서 데니스 & 메이블 밀너 부부가 제안한 '국가보너스'로부터 시작한다. 전후 빈곤해결책으로 개인의 '삶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현금수당을 '국가보너스'로 명명한 이 안건은 당대회에서 부결되었고 이후 '사회배당(social dividend)'이라는 이름으로 변호된다. 재원은 공기업이나 국유화 기업의 이윤으로 노동과 별개인 소비자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 '기본소득'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데모그랜트(demogrant)'라는 정책제안으로 다시 나타나는데, '민주주의(democracy)'와 '급여(grant)'의 합성어로서 매년 모든 미국시민들에게 각 1천 달러를 지급하는 '민주급여'가 그것이다. 미국 민주당 좌파의 이 제안은 결국 공약화되지는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유럽의 급진좌파와 녹색당 등 대안세력들이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각국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논쟁을 다시금 촉발하였는데, 2008년 세계 경제위기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배경으로 더욱 논쟁이 필요한 대목에 이르렀다. '4차 산업혁명' 또한 그 주요한 배경이 된다.
'기본소득' 논쟁에서는 1) '노동'과 2) '국가재정', 3) '보편복지'가 주된 키워드다.


"기존 사회부조 계획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당은 현금으로 지급되며, 사회보장 기여금의 사전 납부라는 조건부가 아니며, 해당 나라의 시민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세 가지 추가적인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다. '개별적'이다. 기본소득은 수급자의 가구 상황에 독립적이다. '보편적'이다. 기본소득 수급 자격은 다른 원천에서 나오는 소득의 수준에 의존하지 않는다. '의무 면제(duty-free)'다. 기본소득은 일하고 있거나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 [기본소득과 좌파], <기본소득과 사회민주주의>, 필리프 판 파레이스, 2016.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이자 전 사회당원 안효상은 한국의 대표적 '기본소득론자'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주요 대안으로써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하는 그는 2014년부터 2017년 사이 유럽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논쟁'을 소개하면서 그 자신의 '기본소득론'을 '역자후기' 형식으로 싣고 있다. 번역은 직역수준인 듯 하며 읽을 때 잘 이해되지 않는 편인데 말 그대로 유럽 논쟁글들은 '소개' 수준이며 책의 주요내용은 '역자후기'에서 그가 하고 싶은 '기본소득론'이다. 원문의 엮은이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론자인 유럽의 대학교수로서 유럽에서 시작된 '기본소득'의 기본개념 등을 설명하면서 논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보 로트슈타인 교수, 빈센테 나바로 교수 등의 '사회적 유럽' 논자들은 '보편복지'와 '공공정책론'으로 기본소득에 반론을 펼친다.


기본소득은 '무조건성'과 '보편성', '개별성' 등이 특징이다. 즉, '조건없이 모든 개인에게 일정금액을 지급한다.' 단기적인 목적은 '빈곤'과 '불평등'의 완화이고, 장기적인 목표는 '체제 전환'이다. 재원은 공유재(commons)로부터의 초과이윤이든, '부유세'나 '누진세', '자본(금융)거래세'나 '기후세' 등의 누진적 세금이든 세부전략으로 다듬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 세부 방안에 대해서는 토론을 통해 수정될 수 있지만, 체제 전환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론'을 수정하거나 정정할 마음이 없다. 이는 '보편복지'를 사수하기 위한 '좌파'들도 마찬가지인데, 양자의 기본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논쟁은 있으되 토론은 불가능해 보인다. 루이 알튀세르가 말했듯, "철학적 토론(꼬뮈니까시옹)은 없다." 각자의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무조건기본소득 아이디어의 기본적 오류는 '무조건성'에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계속해서 세금을 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호혜성' 원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공동선'에 생산적으로 기여한다. 복지국가의 주요 몸체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호혜성' 위에 세워졌다. 이 원리와 헤어지면 이러한 복지국가를 세운 광범위한 토대의 '사회연대'의 유형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 십중팔구다."
- [기본소득과 좌파], <무조건기본소득: 복지국가에 해로운 아이디어>, 보 로트슈타인, 2017.


안효상이 제목에서 언급한 기본소득 반대론자로서 '좌파'라는 용어는 거의 풍자에 가깝다. 급진좌파였던 본인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을 전통 사회민주주의 입장 또는 구좌파의 전통 혁명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세력을 싸잡아 비난하기 위한 레토릭인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대립은 허구인데, 사민주의 '좌파'는 1) 완전고용 달성을 전제로 한 '노동윤리'에 기반하고, 2) 재원 걱정을 하는 '국가재정균형론'에 머물러 있으며, 3) '기본소득'이 '복지'를 축소시킨다는 주장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진짜 '좌파'의 '기본소득론'에 의하면 1)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화로 인해 산업사회 '강제 임금노동'이 줄어들고 기본소득으로 인해 노동에 대한 구속이 완화되면 그것이 '노동해방'이고, 2) '재원'에 관한 전략은 얼마든지 생산적 토론을 통해 수정 및 조정이 가능하며 나아가 내가 보기에는 '현대화폐이론(MMT : Modern Money Theory)'처럼 '균형재정론'을 벗어날 수도 있겠으며, 3) '예산제약'에 관한 염려를 너머 진정한 체제 전환을 목표로 하는 '기본소득론'은 '보편복지' 축소로 갈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에서부터 현재 [어셈블리]까지 '공통적인 것(공유재/commons)'을 '다중(대중)'이 공유하는 사회화 과정에서 '기본소득'을 '사회적 임금' 등의 형태로서 긍정적인 제안으로 본다.
한편 [21세기 자본]의 토마 피케티는 최근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누진적 자본세' 등의 재원을 고민하지 않는 현실 우파 '사회토착주의자'들의 '기본소득론'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라고 평가한다.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FALC :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를 21세기에 선언하는 아론 바스타니는 '보편적기본소득(UBI : Universal Basic Income)'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재정이 들어간다는 사실 외 모든 게 불확실'하므로 주거와 의료 등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보편적기본복지(UBS : Universal Basic Service)'가 체제 전환의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전망한다.
한편으로 '국가재정 거덜난다'는 '균형재정론'적 우려에 관해서는 누진적 자본(금융)거래세 등 피케티식 사후적 조치와 달리 자국통화로 화폐가 유통되는 한 국가는 지속적으로 지출할 수 있고 국가재정의 적자는 국민소득의 흑자가 되는 '탱고춤'이라는 랜덜 레이 식 '현대화폐이론(MMT)'도 참고할 만 하다. 단, '화폐'에 관한 전통적 '상품화폐론'과 MMT의 '명목화폐론'의 기본 전제 또한 '기본소득론'과 '복지국가론'에서 '노동'에 대한 본질적 관점의 차이 못지 않게 '철학적 토론'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MMT는 '완전고용'과 '소득 주도형' 이론이라는 점에서 '노동'에 친화적이라 '기본소득'의 국가재정 논쟁에서 고려할수 있는 하나의 전략적 이론이 될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별적' 이타주의가 아닌 '사회연대성'에 기반한 '호혜성'을 더욱 유지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 감소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정치적'인 것이며, 다시 말하지만 이는 각국의 자본-노동 관계의 상태를 토대로 삼는다. 노동이 약한 나라에서는 불평등이 크다... 우리는 자본에서 얻는 소득이 노동에서 얻는 소득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사실, 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부의 집중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것(소득을 낳은 재산)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각 개인이 동일한 액수를 받는) 보편기본소득을 토대로 불평등을 교정하는 것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 [기본소득과 좌파], <보편기본소득이 빈곤이나 불평등을 줄이는 최선의 공적 개입이 아닌 이유>, 빈센테 나바로, 2016.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혁신'과 일자리 감소는 자연사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로만 볼 수 없다. 이는 '정치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권리보장 차원으로 보호된다. 우리는 18~19세기 증기기관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지속적으로 지키고 확장해온 '보편복지'의 '정치적' 경험을 가진 21세기 인류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화로 인한 무차별적 '노동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이 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정체성을 지키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빈곤은 줄일 수 있을 지언정 자산(자본/금융)소득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현재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도 없다.


'체제 전환'을 기획하는 '좌파'들 사이의 합치되지 않을 '철학적 토론'도 필요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점은 이미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보편복지'와 '기본소득'의 밥상에 극우파들이 숟가락을 얹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란 '상대'가 있는 투쟁이다. 당장 수구정당도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 것이고 다음 대선이나 총선 등 선거에서 정책화할 것이다. 수구정당은 한정된 국가재정을 이유로 '기본소득' 또는 '국민수당' 따위와 보편복지 제도를 함부로 맞바꾸려 할 것이며, '국가배당금'으로 최악의 우파 포퓰리즘을 시현했던 극우정당은 아예 더 나아가 모든 복지를 무력화하고 국가가 하나의 거대독점자본가처럼 국민들에게 임금수당을 지급하며 다수 민중들을 국가의 노예로 공공연하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다수인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국민임금수당'에 불과할 '나쁜 가짜 기본소득'을 가려내고 우리가 땀흘려 이룩한 우리의 기본권으로서의 '보편복지'를 굳게 지켜내는 것이다.

'보편복지' 제도에서 아우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각종 '수당'과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다르다. '좌파적 기본소득'은 나중에 '정치적'으로도 우리의 노동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때까지 잘 다듬고 있으면 어떤가.

지금은 설익은 '기본소득'보다는 우리 다수의 '노동'과 '기본권'에 기반한 '보편복지'를 지켜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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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소득과 좌파 - 유럽에서 벌어진 논쟁], 필리프 판 파레이스 엮음, 안효상 옮김, <박종철출판사>, 2020.
2.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3.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4.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5.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MMT)](2015), 랜덜 레이, 홍기빈 옮김, <책담>, 2017.
6. <좌파 기본소득, 우파 기본소득을 모두 반박한다>, 이상이, 2020.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0060811214851134?fbclid=IwAR2Z6tI73Eqz3X4HM90cDe9BD3IuCzOWdZy1ZUR8NPGmdpJin5H67_Wxdgg#0D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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