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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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권력'에 대하여
- [무신과 문신](2000),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최씨 정권의 치명적 결함은 문신과 유교를 육성했지만 자신의 체제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의 지도력은 점차 구조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확립했고 무신의 이상을 무시했다. 그들의 유교적 신념-정통성은 국왕에게 있다는 생각을 포함해-은 지속적인 최씨 지배에 관련된 반감이 거스를 수 없이 급속해지는 현상에 반영되었다. 몽골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최씨 정권과 무신 정권은 고려의 문치적 전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무신과 문신], <9장. 최씨 정권의 난제>, 에드워드 슐츠, 2000.


고려 개국 후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한 '문신(文臣)'이 왕조의 지배관료였다. 우리가 '장군'으로 알고 있는 윤관이나 강감찬은 모두 '문신'이었다. 여진이나 거란과 전투를 치른 건 '무신(武臣)'인 군인들이었으나 이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문신'이었다. 
고려 지배층 또한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었으나 '문치시대'를 연 고려에서 '무신'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고려의 과거시험도 문신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명경/제술과)'와 승려를 뽑는 '승과', 기술직 '잡과'는 있었으나 '무과'는 출세의 길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을 줄곧 뿌리고 있었다. 그나마 무과에서조차 차별받던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도 [삼국사기]를 쓴 '문신' 김부식이었다. 12세기에 고려의 '문신'은 완전히 승리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chultz) 교수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중,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보고 본인의 전공인 한국 중세사에서 '무신정권'을 연구하기로 한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918~1392)는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시기로 학문적 대상 외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못 받았으나 조선말까지 1천 년간 '문치시대'의 짧지 않은 전통을 지녔다. 1170년부터 1세기 동안 존속한 '무신정권'은 일종의 '변칙'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의미는 없이 살인과 학살로 이어진 야만의 시대로 인식되던 중 1980년대 김당택 교수 등의 연구로 본격화되었고 미국의 한국사학자인 슐츠는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고려 의종은 집권 초반에 문반을 견제하기 위해 '견룡군'이라는 왕실 친위대를 각별히 대했으나 환관내시가 득세하면서 견룡군 또한 홀대를 받는다. 1170년 '무신의 난'은 그 동안 누적된 문무 차별에 대한 반란이었으나 이를 이끈 정중부는 오래된 무신집안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한참이 지난 후 조선왕조 전주 이씨의 오랜 방계조상이 된 이의방이나 출신이 낮은 이고는 같은 견룡군의 상장군이었던 정중부를 앞세워야 뿌리깊은 문치주의 속에서 반대파 문신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 직후 무차별적 문신숙청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신권력에 붙어 무신들을 박해한 문신들은 제거되었으나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이하 재추)으로 대표되는 문신관료기구를 제끼고 권력의 최고 합의기구가 된 중방에는 다수 문신도 참여했다. 이후 경주의 노비 출신이었던 이의민은 철저하게 사리사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무신집안 출신 최충헌 장군에게 암살되지만 무신의 난은 권력운용에는 미흡했어도 문신과 무신이 동등하게 정권에 참여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무신집안 출신이었고 음서를 통해 문신으로 첫 관료생활을 시작한 장군 최충헌이 60년간 '최씨 정권'을 세웠을 때는 엄밀히 따지면 '무신정권'은 아니었다.

정중부와 경대승, 최충헌 등은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했고, 이의방과 이고, 이의민 등은 무신의 우세와 무력을 통한 지배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귀족정치의 배경에서 한미한 가문은 문신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의종을 결국 시해한 이의민은 오로지 무예 실력으로 출세한 자였고 국가의 '공공성' 자체를 모른 채 국가를 사익 추구의 도구로만 여겼다. 대기업 사장님 출신 대통령 이명박과 같다. 야차와 같은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거사 직후 바로 고려왕에게 보고하며 고려의 합법성과 정통성에 의지하고 심지어 무신 최충헌 장군은 고려를 개혁할 '봉사10조'까지 제출한다.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를 상기시킴은 물론 신라 문신 최치원과 고려 문신 최승로를 따랐다. 물론, 고려의 토지개혁과 불교개혁 등의 심오한 내용을 망라했던 최충헌의 '봉사10조' 또한 사문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최충헌 정권은 문신을 우대했고 유학과 문학을 장려했으며 과거시험을 통한 문신관료 배출을 확대했다. 
고려 최고의 천재라는 [동국이상국집]과 [동명왕편]의 이규보도 최씨 정권이 키운 문신이었으며, '단군'을 시조로 기록한 일연 국사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보수적 인물인 최충헌은 문반 지배층을 행정에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유교 이념을 후원해 왕정을 계속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확인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합의제 기구에 계속 의존하고 사회적 해방을 제한해 사회질서를 동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최충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공적/사적 기구를 모두 활용하는 혁신적인 '이중 조직'을 발전시켰다. 최씨 정권이 고려를 통치한 기간에 전통에서 벗어난 사례는 여럿 있었다. 무신 집정에게 충성하는 사병은 곧 관군을 대체해 권력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세력이 되었다. 최충헌과 그의 가족은 이런 새 질서를 지배했다. 최씨 집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은 문객(門客)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비슷한 충성관계가 그 밖의 군사와 지도자 사이에서도 발전했다."
- [무신과 문신], <머리말>, 에드워드 슐츠.


최충헌이 세운 60년 '최씨 정권'의 몰락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잠재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중국과의 대외정세를 배경으로 '왕권'의 '공적기구'를 인정하면서 '최씨'의 '사적기구'를 병립시킨 '이중적 행정(슐츠, 같은책)'과 그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괴리가 근본 문제였다.

'무신정변'의 혼란을 진압한 최충헌은 문/무반의 균형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 국정운영을 한 것으로 슐츠 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최충헌 본인은 허수아비 왕들을 갈아치우면서 '교정도감'과 '도방', '정방', '야별초' 등의 사적 기구를 통해 권력을 이어갔고 그의 아들 최우 또한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집정을 했다. 최항과 최의 등 최우의 후계자들에 이르러 최씨 정권은 본격적으로 무너지는데, 공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하고 사적으로는 진주와 전라지역의 곡창지대, 강화도 등의 대토지 소유 확대한 '이중성', 이의민 같은 천민노비 출신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만적의 난 등 노비반란을 잔인하게 탄압한 반면 본인에게 충성하는 천민은 승진시키는 '이중성', 불교종파 교종을 억압하면서 선종을 지원했지만 불교의 부정부패를 키운 '이중성' 등이 더욱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최씨가 무너진 후 무신정변 마지막 집정 김준은 노비 출신이었다. 
결국, 최씨 정권이 앞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적 권력'으로 억압되고 무력화된 '공적 권력', 즉 고려왕조는 몽골에 복속되면서 다시는 '공적 권력'이 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한편,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25년 간 몽골에게 저항했는데, 이 역시 '항몽투쟁'이라기 보다는 '사적 권력'을 지키려는 '생존투쟁'에 가깝다.'공적 권력'인 고려왕조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사적 권력' 최씨 집안은 멸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삼별초 항쟁 또한 그시작은 '사적 권력'에 대한 충성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몽골의 '제국'적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정미7적', '을사5적' 따위 등 우리 근대사의 친일 지배계급 보다 낫다고 볼 수는 있겠다.

'안정된'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최우가 왕이 되기를 포기한 이유를 슐츠는 중국과의 대외정세로 본다. 한반도의 왕조교체는 당시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있을 때는 불가능했다는 것인데, 고려 개국 시 중국은 5대10국이었고, 조선은 원-명 교체기였기에 가능했다. 아마도 금나라가 강대하지 않았다면 고려와 조선 사이에 '최씨 왕국'이 잠시 존재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불교 선종 외에 지배이념이 약했다. 고려의 개국이념이 후삼국 혼란기에 불교를 기반한 풍수지리설이었다면 조선의 개국이념은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적 '민본사상'이었다.
최충헌의 선종은 정치이념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유학사상은 결국 최고집정자 1인이 사라지면 함께 흩어지면서 결국 고려왕조의 '공적 권력'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문신의 지배사상이었다.


오래전 '왕조시대'에서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하는 유일하고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근대에 들어서야 '공화제'가 정치개념으로 정립되고 왕을 단두대에 세우지만, 우리 역사만 해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왕이 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현대의 군주'로 대중적 (진보)정치정당을 호명했지만 지금의 '군주'는 단연 대다수 '민중'이다. 이 다수가 지도하는 '공화국'이야말로 '공공성'을 실현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이다. 공익이 아닌 사익에 기반한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공공성'이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배경에도 최충헌 시대처럼 '이중 권력'이 있었으나, 세상을 바꾼 것은 노쇠하거나 쇠약해진 소수의 '국가'가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한 다수 대중의 소비에트였다. 
무신정변기 '이중 권력' 중 '최씨 정권'은 '공공성'과 거리가 매우 먼 '사익추구집단'에 불과했으며, 이의민과의 차이는 개인이 다 해 먹느냐 집안이 다 해 먹으냐는 규모의 차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공성'을 둘러싼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간 '이중 권력'의 투쟁이 되어야 사회가 변한다.


***

-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 :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2000), Edward J. Schultz,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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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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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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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중국사 - 한 상 가득 펼쳐진 오천 년 미식의 역사
장징 지음, 장은주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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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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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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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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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양장) 한국 민주주의 토대연구 총서 2
김동춘 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외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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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을 위한 민주적 '공화주의'
-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https://brunch.co.kr/@beatrice1007/186

[한국 민주주의100년, 가치와 문화](2020)
&#39;공공성&#39;을 위한 민주적 &#39;공화주의&#39; | &#39;공공성&#39;을 위한 민주적 &#39;공화주의&#39;-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lt;한울아카데미&gt;, 2020. &quot;서구에서도 &#39;민주주의&#39;는 언제나 혁명이나 직접행동의 결과로 도입되었지, 지배세력이 양보하여 순순히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다. 특히 왕을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한 것이나 보통선거권을 확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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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도 '민주주의'는 언제나 혁명이나 직접행동의 결과로 도입되었지, 지배세력이 양보하여 순순히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다. 특히 왕을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한 것이나 보통선거권을 확보한 것도 모두 봉건귀족 세력과의 유혈투쟁, 전쟁과 내전, 봉기와 집단저항의 결과였고, 그러한 투쟁에 나선 주체는 일반 대중, 노동자들이었다... 지식인들의 사상과 이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어떤 의미 부여 작업을 통해 그런 가치나 구호에 공명해서 그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 봉기와 투쟁을 감행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 김동춘, 같은책, <서문>.


누구나 앞에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대다.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손 안의 SNS를 통해 정보독점이 갈수록 약화되고 다수 민중의 정보활용과 연대의식이 무한 확장되고 있는 지금은, 30여 년 전 '민주화' 같은 용어가 무색할 정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나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거대자본과 정치권력의 편에 선 자들에게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극소수이므로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체제는 당연한 것이고,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한 586 민주화 형님들은 본인들이 소싯적에 이미 겪은 '민주주의'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거대 기득권 양당구조로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시민들은 민주당 원외인사들이 생산하는 자극적인 뉴스들을 무기로 또 다른 파시즘을 양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시대인 지금, 모든 현상은 '민주주의'로 포장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1919년 3.1 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2019년 발간한 연구총서 [한국 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1919~2019]에 이어 2020년에 발간한 책이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한울아카데미>)다. 
우리 헌법의 기초가 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불을 당긴 3.1 운동부터 1960년 4.19 혁명, 1970년 전태일 열사,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2002년부터 현재까지의 촛불시위 등의 거대한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를 기반으로, 1부에서는 '자유', '평등', '민주공화주의', '토지공개념' 등의 '가치'를, 2부에서는 '저항', '정당정치', '미투(젠더)', '학생운동' 등의 '문화'를 다룬다. 
그 이전 역사도 가끔 거론되나 조선이라는 마지막 '왕조'의 몰락 후 주로 한국 현대사 100년의 역사 속 '민주주의'의 '가치'와 '문화'가 주제다.

'민주주의'가 유래한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사용한 '자유'의 희랍어 '엘레우테리아(eleutheria)'는 '노예가 아닌 상태'나 '속박되지 않음'을 뜻한다는데 우리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의미로 '자유'라는 용어가 등장한다지만,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말하는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였고 피지배계급에게는 노동에 구속되거나 굶어죽을 '자유'만이 허락되었다. 일제강점기 진정한 '자유'는 식민지 상태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이었고, 현대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자유'는 무한증식을 위한 '자본의 자유'에 불과하다.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그 용어 자체가 역설이다. 즉, '자유'라는 용어는 보편화되고 '평등'해져야 한다. 이렇게 각 개인의 '자유'가 모든 사람들 '자유'의 기초가 되는 진정한 '자유'의 조건은 '평등'이다. 근대적 의미의 '평등' 이전인 조선 시대 '민본주의'는 '균(均)'이라 표현했다. 우리 역사 최초의 대학 '성균관(成均館)'은 '균(均)을 이루는 교육기관'이었으며,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경자유전' 원칙과 '과전법'의 토지개혁의 이념이 바로 '균(均)'이었다. 정약용도 '나라를 고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단다. 우리 제헌헌법에서도 단호하고 원칙적인 '평등'보다 현실적이고 정책적 개념인 '균등'을 선호했는데,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강령인 조소앙의 '삼균주의' 영향일 수도 있고 '반공'의 이념적 영향도 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농민봉기와 동학농민전쟁 및 동학의 기치는 단호한 '평등'이었음을 잊지 말 것이며, 현재는 과정과 절차를 우선하는 '공정성'과 결과로서의 '평등'의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기득권이나 적폐세력은 없다. 일제에 의해 패망하기까지 조선왕조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였다. 외세의 군대로 내국민들을 죽이고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은 결과 외세에 의해 국권 자체를 상실했다. 제국주의 열강들 경쟁에서 이긴 일제가 아니었더라도 다수 조선민중의 힘으로 무너졌을 조선이었겠지만, 왕조가 실제로 무너진 1907~1910년 이전 우리 역사 최초의 시민단체였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헌의6조' 같은 '민주주의'는 '입헌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공화국'은 왕조도 몰락하고 식민지 근대화가 폭력적으로 이식되던 1919년 3.1 운동 이후에야 상상 가능한 정치체제였다.




"임시정부가 내건 '민주공화국'이라는 비전과 구호는... '민주공화국과 관련하여 최초로 개념의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민주'라는 수식어를 결합한 용어 '민주공화'를 '임시헌장'에 삽입한 기초자들의 독창성, 그리고 그것이 이후의 역사에서 한 단어로 확고하게 굳어진 용어의 확정력은 '공화'의 개념사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주의'가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사상을 수용하여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정치철학 이념인 것은 확실하다."
- 정상호, 같은책, <3장. 헌법 제1조의 기원과 변화로 본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


3.1 운동과 같은 동시대적 20세기 초 전세계 대중운동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은 19세기 중반부터 다수의 노동계급에 의한 산업별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세력화로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이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노동자 정권도 등장했던 역동의 시기라 다수대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시대정신이었다. 한반도는 해방 후 불행하게 남북 분단정권의 등장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제헌헌법은 '반공'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이 헌법이 담은 '민주공화정' 또한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제창자 유진오의 해석에 따르면 삼권분립, 의회, 정당, 선거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친다.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창조적 기업가정신'으로 극복하자는 조지프 슘페터 같은 학자의 '최소주의'적 '민주주의'와 같은 제헌헌법의 반공주의적 '민주공화국'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기 국고보조금 나눠먹기로 살아남은 제도권 거대정당들의 장기독재 획책을 저지한 다수대중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 더욱 대중화되었고 21세기 '촛불투쟁'으로 등장한 대중민주주의 투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길에 접어든다.

고대 로마 시대 '전제군주'의 명목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군주정'과 대립된 정치체제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공화정'은 서양의 'republic', 즉 '공공성'의 어떤 표현이었고, 근대 이후 동양에 유입되면서 중국 주나라에서 폭군을 쫓아낸 재상정치체제로서 '공화'로 번역된 것인데, 권위있는 해석의 우리 문헌은 없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와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어울린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철학을 남북한 헌법 1조에 공히 선언하고 있다. 

- 남한 헌법 제1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북한 헌법 제1조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물론, 두 체제 모두 헌법 1조만큼 실질적 '민주주의' 공화국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남한인 대한민국은 다수 대중의 참여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실질적'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이 최근 30여 년간의 실증적 역사다.

이탈리아의 헌법은 '노동에 기초를 두는 민주공화국'을, 대혁명의 국가 프랑스 헌법은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을 국체로 선언하지만 우리 '임시헌장'의 '민주공화국'보다 시기상 늦다. 그 용어 자체로 '사회성'과 '공공성'을 담보하는 '공화주의'는 지금 시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더욱 실질적으로 확대되고 공고화되어 대한민국은 더욱 민주적이고 사회적이며 공공성을 우선하는 '공화국'이 되어간다.




"조소앙의 (지공주의) 토지개혁론에서 중요한 것은 국유화 그 자체보다는 '평균지권'의 실현이었다. 국유화 후 토지분배는 (삼균주의) 조소앙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조선 시대 과전법도, 조소앙의 토지개혁론도 토지를 농민에게 한 번 나눠주고 끝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골고루 나눠준 토지가 다시 소수의 수중에 흘러 들어가 불평등하게 소유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국전의 원칙이었다."
- 전강수, 같은책, <4장. 한국의 토지소유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변천해 왔을까?>.


책의 1부는 '민주공화국'의 주요 가치로서 '소유권'의 '공공성' 주제를 다루는데, 역사적으로 '공공소유'의 대상이었던 '토지', 즉 '토지공개념'의 주제를 다룬다. 고려시대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은 '국전'의 형태였다. 소유권은 국가였고 조세 수취권을 부여하거나 토지생산물을 농민이 소유하도록 하는 제도로 '평등지권'을 실현하는 정책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나 조선 후기 신분제의 망조는 대토지소유로 드러났고 조선이나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토지개혁'으로부터 출발했다. 토지공개념은 단순한 '국유화'가 아니라 토지의 사적 소유와 투기의 이념인 '지주(地主)주의'를 토지의 공공소유 이념으로서의 '지공(地公)주의'로 대체하면서 '평등지권'을 지향하며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지공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독재정부는 국민들의 소유욕을 부추기는 '지주주의'를 강화하여 이 나라를 '부동산공화국'으로 만들어왔는데,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수 민중의 '사회공공성' 열망으로 노태우 정권은 토지공개념 정책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으나 '세계화'와 'IMF' 체제 이후 '지공주의'가 약화되어 왔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보유세 강화의 장기적 계획 정책화를 시도했으나 '지주주의' 기득권 세력에게 패배했으며 이후 보수정권은 부동산과 토지를 아예 투기대상으로 굳혔다. 문재인 정부도 '지공주의'를 정책화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여전히 "권력이 시장에게 넘어갔다"는 이유를 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주의적 소유권은 '지공주의' 소유권처럼 '평등(평균)지권'이 본질이다. 실질적으로 노동하고 만들며 전유하는 다수가 그 생산물을 소유하고 처분한다는 '공공소유'가 그 내용이 된다.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공화주의'의 본질은 '공공성(公共性)'이다.


***

-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김동춘 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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