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왕의 운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김은주 지음 / 시대의창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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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다른 '처녀자리'?
-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김은주, <시대의창>, 2021.


"별자리를 만든 것은 서기전 수천 년경 바빌로니아 지역에 살던 셈족계 칼데아인(Chaldean)이다... 목동들은 태양과 행성이 지나는 길, 황도(黃道)를 따라 밤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들을 죽죽 이어서 그림을 그렸다.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 사수, 염소, 물병, 물고기 등 열두 별자리다... 수메르인(Sumerian)들이 처음 정한 황도 열두 별자리의 상징과 의미도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어스트랄러지(astrology)란 그리스어로 'Astron(별/별자리)'과 'logos(이성/논리)'가 결합된 말이다... 영한사전에서는 어스트랄러지를 '점성술' 혹은 '점성학'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점(占)'은 왜 그런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고, '술(術)'은 오래 반복해 익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스트랄러지는 주기적인, 예측 가능한 별의 운행과 수천 년 누적된 정보를 통계학적으로 분류하여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점성술', '점성학'이라는 용어 대신 그냥 '별자리'라고 한다."
-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프롤로그>, 김은주, 2021.


보통 신화와 종교, 점술 등은 과학의 대립물로 여겨진다. 결국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허구성이 드러나고 마는 미신 같은.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과학'의 승리가 아닌, '시간'의 승리다. 신화는 인류 최초의 '철학'이자 '과학'이었다. 세상만물 운동의 원리를 찾는 작업으로서 구성된 세계관인 '철학'은 당대 최고의 '과학'적 지식에 기반했을 것이다. 이 세계관이 사회운영 원리로 굳어지면 새로운 '과학'에 의해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허위성이 드러난다.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투쟁은 결국, '낡은 과학'과 '새로운 과학' 사이의 '철학'적이자 '과학'적인 투쟁이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에서 모든 '과학' 투쟁은 '시간'의 투쟁이다. 

성리학에서는 [역경(주역)]을 '점을 치는 책'이라면서도 그 운영원리에 관한 성인들의 괘사와 효사 등의 '역전'을 통해 세계 운동의 '법칙'을 보고자 했다. 고대에는 거북이 등딱지나 시초줄기로 점을 친 경험들의 집단기록이 '빅 데이터'였고 이 집단기억으로 미래도 예측했다. 달과 별, 행성의 운동을 관측하며 '음양오행'의 원리를 그려보고 더 나아가 더 많은 별자리가 태양의 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공간적 의미를 인간사에 투영했다. '과학'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는 '별자리'도 '과학'이었을 테다. 확고한 믿음이 되지 않는 한, 오래도록 집적된 집단기억을 통해 앞길의 가능성을 더 폭넓게 비출 수 있다면, '필연'의 과학보다 더욱 참고할만한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과학철학'이 될 수도 있겠다.


방송작가 김은주는 '별자리'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소개하면서 조선 역사 전반을 둘러본다. 제목은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어난 월일로 '태양별자리'가 정해지고, 태어난 시각으로 '달별자리'가 정해지며, 태어난 시각에 동쪽 지평선에서 함께 뜨던 별인 '동쪽 별자리'로 한 개인의 캐릭터가 추정된다. '태양별자리'는 개인의 '기본적인 에너지와 의지, 취향 등 의식적인 측면을 말해주는 중요한 별자리'를, '달별자리'는 그 사람의 '내면과 무의식,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습관'을, '동쪽 별자리'는 개인의 '페르소나(persona)', 외적 인격, 외모 등을 말해준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태양별자리(의식)'이든, '달별자리(무의식)'이든, '동쪽 별자리(외모/가면)'이든 어느 것이 우세할 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우연스럽게 조합되어 나타날 수도, 아니면 어떤 '필연'에 의해 하나의 특성이 주요하게 드러날 수도 있겠다.

'네이탈 차트'라고 하는 '별자리'의 규칙을 다 이해하고 보면 더 좋겠지만, 모르더라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들의 별자리를 바탕으로 설명되는 역사를 읽다보면 해당 별자리의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분류된다. 근대 이전 최고의 '과학'이었던 점성술(천문)은 가장 주요한 생산활동이었던 농업 발전에 기여하는 '자연과학'이자, 사람들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회과학'이기도 했겠다. 사람들이 만들어간 역사속 개인들의 행적과 그들의 '별자리' 분석을 통해 대강의 군상들을 분석하고 분류한 집단기록은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거나 경계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빅 데이터'였을 것이다. 그렇게 [주역(역경)]도, 사주팔자나 음양오행의 '명리학'도, '별자리(점성술)'도 맹신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과학'이었다.


"지구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주는 '태양별자리'가 그 사람이 자신을 세상에 표현하는 방식과 개성이라면, '달별자리'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 그 사람의 내면,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습관 등을 말해준다... 고려 최고의 무인이자 덕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태조는 새나라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되었다. 고려 무인으로서 이성계가 '태양별자리'인 전갈자리의 삶을 살았다면, 조선왕으로서 태조는 '달별자리'인 물병자리의 삶을 보여준다."
- 같은책, <1장.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물병자리 태조>.


이런 식으로 태조(물병), 태종(염소), 세종(황소), 단종(사자), 성종(처녀), 선조(사수), 광해군(쌍둥이), 효종(게), 현종(물고기), 숙종(천칭), 영조(전갈), 순종(양) 등 12 별자리의 특성들과 맞춰보고 있다. 비슷한 특징의 다른 왕(예, 세조와 정조는 전갈자리 등)이나 왕자, 위인들의 별자리를 대비하고 있다. 현대과학의 눈으로 보면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집단기록'인 '빅 데이터'로서 고대과학의 눈으로 보면 흥미롭다. 개인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태양별자리'가 우선될지, '달별자리'가 강할지 들쑥날쑥한 분석이나마 그만큼 사람이란 존재가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뜻이겠다. 나는 '양-황-쌍-게-사-처-천-전-사-염-물-물' 12 별자리를 앞글자 따기로 외웠는데, 양부터 물고기까지 사람의 0세부터 노인까지 특성도 되고, 끈기있는 황소, 사자, 처녀자리 등에 비해 다소 졸렬해 보이는 양, 게, 전갈, 사수, 염소자리, 양면적인 쌍둥이, 천칭, 물병, 물고기자리 등의 나름 분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인간사야 워낙 중층복합적이니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은 일면적인 한계를 드러낼 터이다. 다만, 사수자리의 선조와 인조에 대한 평가, 전갈자리의 세조, 영조, 정조의 권력욕, 천칭자리 숙종의 당파 저울질 등은 인상깊기도 하다. 성실한 처녀자리 성종은 아마도 전성기에 이른 '성리학' 국가 조선의 탄탄한 관료체계가 만든 이미지였을 수도 있다는 것도 기억에 남는데,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을 만들고는 중종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킨 건 당시 전성기 조선의 '성리학자' 관료들이었다. 


"처녀자리는 일복이 많은데 별자리 나이도 한창 일할 때인 40대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 수성(Mercury)의 지배를 받아 일을 재빠르고 빈틈없이 처리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우고,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룰 정도로 성실하다... 연애도 책으로 배울 정도로 책과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배운 것을 가르치는 데도 능력이 있다. 다만 상대에 대한 기대가 높아 칭찬보다 지적질이 많고,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로 도덕적 잣대에 민감하다."
- 같은책, <5장. 낮과 밤이 다른 모범생 처녀자리 성종>.


조선을 만든 혁명가 삼봉 정도전이 사적으로 태조 이성계에 지어서 바쳤다는 [조선경국전]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명을 이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한 조선 9대 왕 성종은 조선의 '전성기'가 만든 군주의 혐의가 짙다. 경연을 제일 많이 열었고 세종의 집현전을 확대개편한 홍문관을 세웠으며 불교와 도교를 척결하고는 '성리학'의 국가이데올로기를 공고화시킨 성종은 밤에는 매일매일 술과 여자에 빠졌단다. 아마도 태종과 세종, 세조가 강화시킨 왕권과 성리학자 관료체제의 타협으로 잠시 안정된 시기를 열었을 시기에 매일 술먹고 노는 '밤의 왕'이 되려는 달별자리가 '사자자리'인 자을산군(성종)을 다수 관료체계가 성실한 '낮의 왕' 태양별자리 '처녀자리' 성종으로 만든 건 아니었을까 한다. 


처서와 추분 사이 9월 12일생인 나는 태양별자리가 '처녀자리'다. 나는 그리스 신화 중 헤르메스를 제일 좋아하고 수성이 뜨는 초저녁 노을을 좋아하며 가을을 좋아한다. 물론 '처녀자리'의 영향으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새벽 여섯시에 태어난 나는 네이탈 차트로 검증은 못했으나 대충 보면 달별자리가 '전갈자리' 같은데, 술 좋아하고 고집세며 다소 뒤끝 작렬할 때는 그 영향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낮'과 '밤'이다른 삶을 지향하는 것도 '처녀자리'의 특징인가 또한 모르겠다.


***

1.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김은주, <시대의창>, 2021.
2.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1972), 조지프 캠벨, 권영주 옮김, <더퀘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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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 Winter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외 지음, 헤럴드 블룸 엮음, 정정호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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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잔혹한 교훈, '동화(童話)'
- 한스 안데르센, [눈의 여왕], 1845.


"오르간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성가대의 어린 아이들 목소리가 어찌나 황홀할 만치 달콤하면서도 구슬프게 어울리던지! 밝은 태양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와 카렌이 앉아 있는 자리를 따스하게 비춰주었다. 온몸으로 햇빛을 받은 카렌의 영혼이 햇살을 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날아올랐다. 그곳에는 책망의 눈초리도, '빨간 구두'에 대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 [빨간 구두](1837), 한스 안데르센, 정정호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7.


대부분의 결론이 비슷하다.
'빨간 구두'를 신고 방정맞게 춤만 추던 소녀(1837년)도, 현실의 왕자를 사랑하여 동족을 배신한 인어공주(1837년)도, 성냥이 안 팔려 추위에 떨던 소녀(1845년)도, 심지어 본인이 '미운 오리새끼'인 줄 알고 살았던 슬픈 백조(1843년)조차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결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150여 편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짓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 1805~1875)의 이야기들 말이다.

내 어릴 적에 열심히 읽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주로 TV를 통해 어른들이 틀어주던 방송국 만화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고, 아마도 어릴적 <세계동화전집>에는 한 권짜리 안데르센 단편선으로 '인어공주', '성냥팔이소녀', '미운오리새끼' 등이 함께 담긴 책을 짧게 훑었을까. 주로 슬프지만 교훈적인 아름다운 이야기, '동화(童話)'의 전형이자 고전이었다.

그렇던 '동화'가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스무살이 넘어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라 일축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겠지만, 어린 시절 기억이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한편 살아온 현실이 다분히 부조리하다 생각하던 나는 어른들이 훈계한답시고 지어낸 '동화'라는 게 다 '사기'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잔혹한 '현실'을 은폐한 채 착하게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는 '교훈'은 거짓말이었다.

한참 지나 나도 부모가 되었고, 어린 자녀들에게 '고전동화'를 많이 읽어주고 나도 같이 새롭게 읽었다. 이십대에 내가 생각하던 '동화'는 오래전 방송국 만화영화처럼 이 체제를 '지배'하는 '어른'들이 아름답게 각색한 거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19세기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성냥을 파는 소녀는 가난해서 구걸까지 해야했던 그의 어머니 이야기였고, 인어공주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음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한 현실의 우리들이었으며, [눈의 여왕]은 구두 수선공 아버지가 일찍 죽고나자 안데르센의 인생 자체가 추운 겨울과 같았던 순간을 표현한 것이었단다. 초창기 작품인 [빨간 구두]에서 안데르센은 '빨간 구두'의 마법을 끊지 못하는 주인공 소녀 카렌의 두 발목까지 자르고 만다. 그만큼 현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잔혹하기 그지 없다. 결말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승천하면 뭐할 것인가.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들의 현실은 '잔혹동화'의 원형이다.


"겔다의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가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카이의 가슴에 박혀 있던 거울 조각이 스르르 녹았어요... 정신을 차린 카이는 겔다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자 카이의 눈에 있던 거울 조각도 녹아버렸어요... 
'겔다의 착한 마음씨에는 눈의 마법도 듣지 않는구나. 잘 가라, 카이, 겔다.'
눈의 여왕은 오로라 저 편으로 쓸쓸하게 사라졌습니다."
- [눈의 여왕](1845), 안데르센, <교원애니메이션세계명작동화>, 2006.


안데르센의 작품활동 10년차였던 1845년 작 [눈의 여왕]은 작가의 고향인 북구의 혹독한 겨울에 어울리기도 하고 주인공인 겔다와 카이가 아닌 '눈의 여왕'이 승천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소 남다른 결말이다. 
악마의 거울이 승천하다가 산산히 깨지면서 현세의 인간들의 가슴과 눈에 거울 조각을 뿌리고 인간들이 그 영향으로 현실을 잔혹하게 만드는데, 장미를 함께 키우던 순수한 소년 카이는 그 거울 파편이 가슴과 눈에 박힌 채 저 북쪽의 '눈의 여왕'에게 끌려가나 역시 순수함 그 자체인 겔다의 희생과 사랑으로 카이를 구함은 물론 '눈의 여왕'을 승천까지 시킨다는 이야기다. 최근까지 우리집 셋째를 비롯한 전세계 영유아들을 열광케 한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바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다. 현대의 겔다인 안나는 사랑의 눈물로 혹독한 겨울을 끝장내고, '눈의 여왕' 엘사는 승천하는 대신 현세의 '왕국'을 하느님의 왕국으로 통치한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역시 잔혹한 현실은 은폐하거나 각색한다. 우연치도 않게 [겨울왕국]이 첫 개봉했던 2014년은 독재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박근혜 정권 시기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던 우리나라의 '겨울왕국'이었다. '겨울'은 언젠가 끝난다지만 그 시기의 한겨울은 잔혹했고 혹독하게 추웠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안데르센 동화는 그의 초기작에 드는 [빨간 구두]였다. 욕망에 너무 매달리거나 중독되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동화'지만 결코 아름답거나 순수하게 각색하지 않고 갈 때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이다가 불쌍한 소녀의 발모가지를 잘라버리는 그 '잔혹함'의 극치는 오히려 피튀기는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눈의 여왕] 또한 북구의 극한 추위를 배경으로 '동화'로서의 아름답고 순수한 결말 뿐만 아니라 혹독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나에게 '동화(童話)'는,
현실에 기반한 아름답지만 잔혹한 '교훈'이다.


***

1. [눈의 여왕(The Snow Queen)],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45.
2. [빨간 구두(The Red Shoes)](1837), 안데르센, 정정호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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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 개정판 청소년 모던 클래식 3
조정훈 편역, 알렉상드르 뒤마 원작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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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의 '사실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 [삼총사](1844), 알렉상드르 뒤마, 조정훈 편역, <구름서재>, 2020.


내가 초등(국민)학생 때 우리 식구가 살던 집은 큰 길가에 있는 건물 1층 가게터를 개조한 곳이었는데 아버지가 자재들을 깔고 장판을 덮어 울퉁불퉁 만든 임시 '거실'의 한 켠에는 노란색 표지의 100권 짜리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이 있었다. '거실' 군데군데가 움푹 들어가던 그 상가터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81년도에 서울로 올라와 사글세방과 여관방 등을 전전하던 우리 식구가 처음으로 오랫동안 정착한 집이었으나 우리 형제들이 제일 싫어했던 집이었다. 어쨌든 '정착'이었으니 동화책과 위인전 한 질이 처음 들어와 있었다. [보물섬], [빨간머리 앤], [삼총사], [작은 아씨들], [소공자], [소공녀], [타잔], [플란다스의 개], [코난], [괴도 루팡] 등이 떠오르는데, 프랑스의 '괴도 루팡'이 비웃던 영국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없었음이 아쉬웠고, 세계 위인들 보다는 [김유신], [계백],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윤관], [이순신] 등의 갑옷을 입은 눈이 찢어진 무서운 초상화를 표지로 했던 우리 역사 '장군들' 위주로 읽었던 기억이 함초롬하다. 고려 시대 강감찬과 윤관은 무반이 아닌 문반이었으므로 '장수'는 아니었으나 어린 시절 나의 위인은 무조건 '장군'들이었다. 이후 중학생 시절까지 탱크와 전투기, 군함 등속에 환호하며 '전쟁'과 '전투'를 동경한 것이 유년 시절 남자 아이들의 본래 특성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20여 년 이상 존속되던 '군사독재정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차 대전 일본의 전쟁무기는 차마 대놓고 좋다 하지 못했지만 저 멀리 유럽 전장의 나치 전쟁무기들을 더 좋아했던 것을 보면 '군사독재정권'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정복의 야욕을 부리는 윤박사나 닥터 헬을 혼내주던 로보트 태권브이나 마징가를 아무리 보면 뭐하나. 현실의 지배자들이 '독재자'면 아이들의 일상도 '파시즘'이 된다. 가정과 학교를 지배하던 가부장적 분위기는 사회 전체를 '군대'식으로 조직하려던 '독재자'들의 문화 자체였을 테니 말이다. 

초등학교 당시 가장 좋아했던 소설(동화)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같은 모험소설이었고, 서울 청량국민학교 특활반으로 '독서반'에 들어간 건 특별활동 준비물이었던 책을 예의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학기 내내 나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만 들고 다녔는데, 딱히 그 소설이 좋았다기 보다는 사실은 책상에 앉아서 소설 한 권을 다 읽어내지를 못해서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을 그 나이에 동화와 위인전 '전집' 앞에서 책등을 바라보고 앉아있곤 하던 나는 놀랍게도 책 한 권을 제대로 독파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매주 한 시간이던 '독서반' 특활시간마다 나는 왜 가져오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매번 [삼총사]를 꺼냈고 달타냥이 말을 타고 파리로 상경하던 장면을 무한 반복하여 읽곤 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올라가서 매번 마음을 다잡고는 [수학의 정석] <1편 - 집합>을 수백번 읽던 형태의 원형이었겠다. 읽은 횟수로 치면 '집합 박사'가 되었겠지만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 학기 내내 읽었으니 지금도 초라한 말을 탄 채 칼 한 자루와 편지 한 통 달랑 들고 있는 돈키호테 비슷한 주인공 달타냥의 그 삽화가 뇌리에 또렷하다. 그 당시 누구도 내게 책을 이어서 읽으라는 얘기를 안해 주었나 본데, 장편소설을 독파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 후 중학생이 되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읽게 된 후였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Tous pour un, Un pour tous!"


17세기 프랑스 시골지방 가스코뉴의 귀족 아들인 달타냥이 파리로 상경하여 루이13세의 친위대 비슷한 '총사대'를 기웃거리던 중 그 유명한 '삼총사'와 친해지고 시덥잖은 모험을 하다가 '총사대' 간부가 된다는 이야기인 [삼총사]는 19세기 다작으로 이름을 얻은 극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 1802~1870)의 소설이다. 왕정의 극작가였던 뒤마는 신문 연재소설로 유명해졌는데 '역사소설'을 썼다지만 그닥 깊이는 없다. 아마도 '통속' 연애소설과 같은 '통속' 역사소설이었으리라. 고증이나 역사관 따위는 없다. 요즘의 '퓨전' 창작사극 비슷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린 왕 루이13세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 모험소설의 '악당' 격인데 그 무슨 역사적 배경설명도 맥락도 없다. 
아마도 주인공이기에 왠지 정의로울 것 같은 달타냥이나 아토스, 포르투스, 아라미스 '삼총사'는 실제 알고 보면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쌈박질을 일삼다가 사고치고 나서 루이13세에 대한 '충정'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는 '양아치'들 비슷하다. 아마도 당시 프랑스 궁정은 '총사대'에 군인으로서 급여를 주지 않았을 것이며 '총사'들은 민중들을 상대로 '삥'을 뜯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삼총사' 중 아토스는 '몰락 귀족'이나마 재산이 있었을 것이고, 포르투스는 그냥 '깡패'였을 것이며, 그나마 아라미스는 '성직자'처럼 금욕적인 모습으로 보이나 세부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 달타냥으로 치면, 앞뒤 안 보고 성질 건드리면 칼을 뽑고는 결투를 신청하거나 악녀 밀레디든 유부녀 보나시외든 가리지 않고 예쁘기만 하면 무조건 들이대는 '망나니'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결투에서 대부분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전쟁터에서도 총알이 피해가는 것을 보면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근현대 무협영화 '공식'의 기원일 수도 있겠다. 달타냥의 하인 플랑셰의 급여와 월세는 어떻게 충당했을지는 모르지만 돈 없으면 칼을 뽑고 얼토당토 않은 모험 중에 왕궁이나 귀족들로부터 우연히 받은 돈뭉치로 연명했을 것이리라. 그럼에도 달타냥과 '삼총사'의 모험은 어린 남자 아이들에게 '사나이 로망'을 불러일으켜 주었는데, 다 큰 후에 그들의 모험이 시덥잖아 보이게 되었어도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Tous pour un, Un pour tous)!"라는 구호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울림을 준다.


"작품은 어떤 작업의 산물이자 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모든 기술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술사나 흥행사의 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이다. 이 노동자의 힘은 '무(無)'로부터 완전히 선택된 형식을 생겨나게 하는 전혀 기적같은 것이 아니다... 텍스트 '생산자'로서의 '작가'는 특히 그가 가지고 일하는 재료들을 만들지 못한다."
- 피에르 마슈레,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1부. 몇 가지 기본적 개념들>, 1966.


뒤마는 이런 시덥지 않은 '통속' 소설을 쓰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으나 방탕한 생활로 늘 궁핍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공장'처럼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고 한다. 동시대 발자크나 20세기 피츠제럴드 같은 삶인데, 그들의 작품은 '깊이'는 없지만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결코 의도하지는 않으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한 인물들의 묘사로 당대 지배계급의 '이념'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는 것인데, 발자크와 피츠제럴드가 부르주아적 물질만능의 '사실주의'를 본의 아니게 묘사하고 폭로했듯, 뒤마 또한 '궁정암투'를 그린 '역사소설' [삼총사]를 통해 '절대왕정' 및 '왕국'을 둘러싼 '민족전쟁'과 '왕정'에 대한 맹목적 충성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는 '사실주의'적 동화가 아닐까 한다.


'소설 생산 공장'이라 불린 뒤마의 작업실은 '창작'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한창 공장제 대량생산이 시작되던 19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한 반영일 수도 있다. 20세기 프랑스 구조주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마슈레는 문학작품은 새롭게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재료'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생산' 과정이며, 문학비평은 이렇게 '생산'된 작품들이 지닌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또 하나의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발자크에 대한 엥겔스의 '사실주의'적 문학비평이 그랬고, 쥘 베른에 대한 레닌의 '과학소설' 문학비평이 그랬는데, 이들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실주의' 문학비평의 근저에는 '계급투쟁'의 현실이 깔려 있었다. 발자크와 피츠제럴드는 결코 '계급투쟁'의 현실을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우스꽝스런 인물 묘사는 그런 현실에 대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 '계급투쟁'의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폭로하고 만다. 뒤마의 '통속' 역사소설 [삼총사] 또한,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에 대한 무사들의 '충정'과 미인을 향한 남자들의 '기사도'를 통해 당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부조리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뒤마 또한 발자크나 피츠제럴드처럼 결코 의도하지 않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사실주의'적으로 '생산'한 결과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데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만큼 진도가 잘 나가는 장르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은 내게 끈기있게 독서를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다작'을 통해 '통속소설'을 '생산'하는 작가는 많지만,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보면 시덥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장편'을 만들어내는 힘을 느낀다. [회랑정 살인사건](1991) 같은 본격 추리소설은 그렇다 치고, [위험한 비너스](2016)나 [녹나무의 파수꾼](2020) 등의 소설은 소소한 드라마를 보듯 작은 소재로 장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물론 누구든 쓰려면 쓸 수는 있겠지만, 다수의 독자가 그 글을 읽어주는 것은 또 별개일 게다. '읽기'는 이미 '생산'된 작품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어떤 때는 새롭게 '재생산'하는 행위일 수도 있으니 모든 글은 읽히기 위해 '생산'된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 자체가 대가의 '상품'이 되어 그런 시시콜콜한 소설 '생산'이 가능하리라 싶지만, 많이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의미로 '재생산'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년 등단 후 꾸준히 글을 쓴 것이지 뒤마의 '소설공장'처럼 찍어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살인사건'이나 엽기적 행각이 아닌 소소한 이야기로 드라마 같은 소설을 '생산'하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현대사회의 어떤 면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폭로할지, 그의 작품을 읽고 '파괴'하고 '해체'하며 '재생산'하는 독자와 비평가의 몫이겠지만, 뒤마의 [삼총사]라는 동화를 통해 당대 지배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읽듯 다수의 독자와 비평가들은 나름의 '재생산'을 할 것이며, 그 '과학'적 토대는 바로 '계급투쟁'의 지금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근작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서서히 자리잡는 레이토 이야기의 출발이 이 시대 '청년 실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

1. [삼총사](1844), 알렉상드르 뒤마, 조정훈 편역, <구름서재>, 2020.
2. [녹나무의 파수꾼](2020), 히가시노 게이고,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2020. 외
3.[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1966), 피에르 마슈레,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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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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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내 '꿈'의 대가는 대량의 '즐거움'
-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팩토리나인>, 2020.


"시간의 신은 그림자와 기억이 담긴 병을 셋째(잠든 시간)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들의 그림자가 대신 깨어 있도록 해주어라.'
...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도 생각하고 느끼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림자가 밤새 대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둘째(과거)처럼 연약한 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첫째(미래)처럼 경솔한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
'이름이라도 붙여주십시오. 기적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허상입니까?'
...
''꿈'이라고 부르거라. 그들은 이제 너로 하여금 매일 밤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마침내 시간의 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 [달러구트 꿈 백화점], <프롤로그 - 세번째 제자의 유서깊은 가게> 중 '시간의 신과 세 제자 이야기', 이미예, 2020.


이야기는 '페니'라는 청년 구직자의 면접 전날부터 시작한다. '꿈'의 나라 주요 '상품'인 '꿈'을 파는 '달러구트 백화점' 면접준비를 하던 그녀에게 친구 '아쌈'이 건네준 <시간의 신과 세 제자 이야기>를 읽은 페니는 다음날 백화점 사장인 '달러구트'의 면접을 통과하고 취업에 성공한다. '꿈'이라는 '상품'에 관한 모범답안보다 '꿈'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잠을 충분히 잔 사람에게 더 팔려고 하지 않는 '달러구트'의 영업방침에 부합한 답변으로 면접에 통과한 것이다. 작가 이미예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꿈 백화점' 달러구트 사장과 판매원으로 취직한 페니, '꿈' 제작자들과 잠든 후 '꿈'을 찾아오는 손님들, 그리고 '꿈'의 나라와 별개로 존재하는 잠들지 않은 사람들의 현실을 중층적으로 보여준다. 판매 매니저 '마이어스'가 꿈' 제작자가 될 자격을 잃고 학교에서도 짤린 이유가 잠들지도 않고 '꿈'의 나라를 오가는 '루시드 드러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면, 현세와 '꿈'의 나라는 교류해서는 안되는 세상인가 보다. 잠들지 않은 존재를 만나는 자는 '꿈'을 만들 수 없다.

***

오늘도 정신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보험금 심사하고 청구인과 합의하고 지급해서 치워버리는 일인데, 극도로 재미가 없는 일이지만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무조건 하루에 다섯건 이상은 처리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종류 불문, 이유 불문, 다섯건. 손해사정이고 뭐고 필요없다. 보험사고라는 '문제'가 발생했고 이 회사에서 20년 넘게 월급을 받은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다섯건을 해결하고 퇴근하면서 다 잊는다. 왕복 세시간의 출퇴근을 차보다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이유는 책을 읽기 위해서다. 그래야 매주 한 편 이상 서평을 쓰는 '주간(週刊) 문사철(文史哲:문학-역사-철학)'이 가능하다. 아직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앞마당을 쓸고, 칸트가 죽기 전날까지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산책했다는 풍문을 오래 전 역시 책에서 읽고는 나 또한 나름 실천하는 중이다. 원래 이십대 때 '꿈'은 '소설' 쓰기였지만, 내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삼십대 이후로 그 동안 읽은 책이나마 혼자 기억하고자 '서평'을 써 왔다. 독자는 나 하나 뿐인 글이다. 그러다가 사십대 중반을 지나면서 인생이란 게 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새삼 체득하고는 그나마 남긴 내 흔적인 '서평'을 이제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며 매주 한 편 이상씩 쓰고자 한다. 

***

'꿈'의 나라에서 '달러구트'가 파는 '꿈'은 그 세상의 주요 '상품'이다. 오래전 '시간의 신'의 세 제자 중 첫째는 '미래'를, 둘째는 '과거'를 물려받았으나 셋째는 '현재'도 아닌 '잠들거나 잠든 시간'을 물려받는데, '미래'의 진취성과 '과거'의 유약함을 섞어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그들의 그림자로 하여금 그 혼합된 삶을 살게 함으로써 그들 존재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라진 '시간의 신'이 붙여준 셋째 제자의 '시간'이 바로 '꿈'이었으며, '달러구트'는 그 셋째 제자의 후손이다. 그는 이 '꿈'이라는 상품의 값을 '후불'로 받는다. 그리고 '꿈'이 필요하지 않은 손님에게는 팔지 않고 그냥 가서 푹 자라고 '수면캔디'를 준다. 또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예약제 꿈을 의뢰받아 정한 시간에 살아남은 고인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배달까지 한다. '꿈' 제작자도 여럿 나오지만 어차피 그들의 이름은 '달러구트'처럼 큰 의미 없는 고유명사이거나 설령 뜻이 있다 해도 굳이 몰라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꿈'의 나라의 주된 '상품'인 '꿈'이 아무래도 '글'로만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

우리는 인생의 1/3을 잠으로 보낸다. 이 잠든 시간을 애정한다는 작가 이미예는 클라우드 펀딩으로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연재했고 후원자들로부터 많은 성원을 받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라는 장편소설을 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는 기발하다. 어느새 반백년 가까이 살게 된 나는 뭐, 이제 그런 이야기를 쓸 수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다. '서평' 대신 책을 '읽어주는' 유투브 영상도 차고 넘치는데 그 레드오션에 한데 섞일 깜냥도 안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마당을 쓸거나 산책을 하듯 꾸준히 책을 읽고 '서평'을 빙자한 '독후감'을 쓸 뿐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내게는 한바탕 '놀이'다. 하루에 다섯건을 처리하러 갔다가 오는 길은 책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매주 금요일은 주말에 무슨 글을 쓸까 하는 생각으로 업무를 즐겁게 마무리할 때도 가끔 있다. '업무 시간이 즐겁다'니 놀라울 일이지만, 꾸준히 '글'을 쓰겠다 생각한 이후로 믿기지 않게도 사실이다.


'꿈'이라는 저 세상 '상품' 중 내가 무엇을 구입했는지는 잠이 깬 지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후불'로 내가 입금한 그 '꿈'의 값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 1층 프런트의 '드림 페이 시스템즈(Dream-Pay Systems) 전광판에 다음과 같이 표시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띵동.
OO꿈의 대가로 '즐거움'이 대량 입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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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이미예, <팩토리나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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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D. H. 콜의 산업민주주의 시민 교양 신서 8
G. D. H. 콜 지음, 장석준 옮김 / 좁쌀한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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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협업자(partner)'로 인정하라!"
- [산업민주주의](1957), G.D.H.Cole, 장석준 옮김, <좁쌀한알>, 2021.


"진정 배척돼야 할 것은 상호대등한 교류를 파괴할 정도로 큰 부의 격차, 권리와 의무의 상호 의존관계를 방해할 정도로 광범해진 지위의 차이다. '평등'의 가장 중요한 근저에 있는 것은 만인에게 개방된 교육 기회이고, 시민권의 정치적 측면 뿐만 아니라 일상의 노동 및 서비스 활동에서도 성인들의 삶에 제공되는 '협업자(partnership)'라는 만족스러운 지위다... 오늘날 정치 영역에서 우리 모두는 투표할 권리를 지닌 시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료 인간에 대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생산을 담당하는 (산업의) 영역에서는 왜 우리 모두가 정치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민이어서는 안되는가?"
- G.D.H.Cole, [산업민주주의], <11장. 결론>, 1957.


냉전이 격화되기 전인 1950년대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고민과 실천을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을 추종하며 국제적 연쇄혁명을 도모하는 세력, 의회 다수를 점하면서 서서히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세력. 전자는 '혁명적 좌파', 후자는 '유로 코뮤니즘'. 보통 후자는 '사회민주주의'로 불리지만 러시아공산당도 원래는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좌파의 공통이념이었다. 북유럽 복지국가로 흘러간 '사회민주주의'의 '민주주의'는 아마도 정치적 '민주주의'로서 투표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은 그만큼 강력한 산별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보통선거권을 획득한 정치적 '시민' 노동자들에 의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교육과 의료, 주거권 등의 기본권리에 있어 '보편복지'를 인류사회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들 '좌파' 대중정당들이 제도권에 안착하면서 좌-우 거대 정당의 '양당정치' 양상이 반복되었고, 이제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접목하려는 세력은 거의 '고유명사'화 되어버린 '사회민주주의'라 하지 않고 '민주적 사회주의'라 부른다. 지금은 '대의민주주의'의 '대리주의'적 사고를 벗어난 다수 대중의 '직접민주주의', 다수의 '직접행동'만이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정통 좌파'의 노동/자본 계급투쟁 전선을 확대하고 다양화, 중층화한 '신좌파' 운동은 계급투쟁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와 양성평등, 인종차별 철폐 등의 소수자운동 및 소비자운동 등의 다양한 구호로 기존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신좌파' 학생운동의 지도이념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있었다면 한편으로 영국의 '길드사회주의'도 있었다고 한다.

G.D.H.콜(George Douglas Howard Cole : 1889~1959)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로서 '길드사회주의' 이론가이다. '길드(guild)'는 중세사회 기능인들의 조합으로 장인들의 공동체로서 동일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뭉쳐 서로의 삶을 챙겨주는 모임인데 필요할 경우 자체 무장력으로 도시간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었던 일종의 '산업적 결사체'였기도 하다. 이들은 자본주의 공장제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자본주의 계급철폐를 위한 정치투쟁은 별도로 하고 노동계급의 일상적 산업현장의 일상을 '공동체'적으로 함께 조직하고 운영하는 모티브로 작용하여 발전한 사상이 '길드사회주의'이다. 이는 이후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 : 1881~1977) 등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기본이념이 되기도 하는데,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모여서 사회민주당을 무기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를 일종의 거대한 '공동체'로 운영한다는 전략이다. 이것이 스웨덴 복지자본주의를 넘어서려던 비그포르스의 '나라 살림의 계획'(노동운동 전후강령, 1944년)이며 그 이념적 토대는 영국의 '길드사회주의'였다. '길드사회주의'는 스웨덴에서 1920년대 '잠정적 유토피아', 1940년대 '나라 살림의 계획'과 1970년대 '임노동자기금' 등의 '좌파' 정책으로 나타났다.

콜의 만년이었던 1957년에 발간된 [산업민주주의](장석준 옮김)의 원제는 [The Case for Industrial Partnership]인데, 옮긴이에 의하면 '산업 동반자론' 또는 '산업 협업자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콜의 주장은 노동자가 "열등한 종류의 자본가나 자본주의 이윤참여자(같은책,5장)"가 되는 '동업자' 비슷한 '동반자(co-partner)'가 아닌, "해고당하기에 충분한 잘못을 스스로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해고당할 위험이 없는 기업 내 지위(같은책,3장)"인 '협업자(partn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선거권과 투표권을 통해 정치적 '시민권'을 얻은 다수 노동계급은 당연히 본인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업(경제)'의 영역에서도 민주적 '시민권'을 획득해야 한다. 콜의 '길드사회주의'는 이것을 '산업민주주의'로 줄곧 주창하고 있다.
'동반자(co-partner)'가 노동자를 자본가와 함께 기업을 이끄는 '동업자'와 같다면, 콜이 자본가에게 줄기차게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협업자(partner)'는  자본가의 일방적 기업운영을 통제할 수 있는 대등한 '지위(partnership)'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콜은 '이윤공유제'나 '노동이사제' 같은 제도는 반대한다(같은책,5장). 즉,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동업자'처럼 동참하여 나누는 '이윤공유' 형식이 아니라, 노동자가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소비와 생활이 함께 섞이는 전체 생산과정에서 기업의 생산활동을 통제하고 노사간 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노동자 이사' 역시 "그들이 기업 이사로서 임무를 수행한다면 동시에 노동자를 대변할 수는 없다(같은책,5장)"며 "실제로 늘 소수 입장일테니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같은책,5장)"고 단언한다. 


"사회주의자로서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의 모든 장치에 반대한다. 또한 나는 결코 노동자를 열등한 종류의 자본가로 전환시키길 바라지 않으며, 노동자가 외양만 조금 바뀐 자본주의 착취 체제의 수용에 얽혀들게 만들길 원치 않는다... 나는 노동자 급여를 정하는 방식은 노동조합이 모종의 사용자 기구...(중략)...와 협상하는 단체교섭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윤공유제'에 반대한다."
- G.D.H.Cole, 같은책, <5장. 이윤공유제는 반대한다>, 1957.


콜은 명백히 '사회주의자'로서 자본주의에 분명히 반대한다. 그는 "민중이 모든 핵심 생산수단을 소유할 날을 고대한다(같은책,5장)." 그러나 당시로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현실적으로 '국유화' 형태로 실현되었다. 콜은 이를 넘어 지자체나 협동조합 형식의 '사회화'도 그 특성에 따라 실시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 또한 '길드사회주의' 영향이다.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생산수단 '사회화'인 국유화는 전력(에너지)과 철도(교통), 보건(의료) 등 보편적 기간산업(공기업)에 적용하되 다른 산업(사기업)은 지역적, 산업적 특성에 따라 지자체나 협동조합 형식으로 '사회화'할 수도 있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확장된 '공통적인 것(commons)'의 '사회화'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로 인해 일상을 영위하는 공장과 가정 현장의 다수 민중들이 소유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사회화'다.


"'평등'은 본질적으로 '소득격차 해소'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더 관련된 문제다."
- G.D.H.Cole, 같은책, <1장. 서론>, 1957.


사회주의자로서 콜의 주요 개념은 역시 '평등'이다. 보통선거권으로 정치적이고 형식적인 '평등'을 쟁취한 노동계급이 산업의 현장에서 경제적이고 실질적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산업민주주의론'이다. 이는 '분배'에 중점을 둔 '경제민주주의'를 넘어선다. 소득격차 해소도 중요하지만, 산업의 영역에서 자본가와 실질적으로 대등한 '협업자'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더디더라도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을 통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민주적 '단체교섭'을 통해 스스로가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어찌보면 낙관적인 주장이다. 

콜의 '산업민주주의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국가가 책임지는 '완전고용'이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초중반 대공황 이후 당시 자본주의 국가 조차도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완전고용'을 수용하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겠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승리 후 자본주의 주류는 '완전고용'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민영화'에 열을 올리면서 '길드사회주의' 주장을 무시해 버렸으며 노동자들은 더더욱 기업의 '소모품'이 되어갔다. 노동자가 산업의 영역에서 자본가와 대등한 '협업자'가 되는 길은 더 멀어져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초중반을 향하는 이제 다시 시대는, 노동계급 뿐만 아니라 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 인종, 소수자, 그리고 자연(환경/기후위기)까지 더이상은 참을 수만은 없는 때가 되었다. 이제 다수가 '공통적인 것'을 함께 소유하고 영위하는 시대에서 '포퓰리즘'의 벽을 넘는 것은 '산업민주주의'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자 콜은 [산업민주주의](1957)에서 '생산수단 사회화' 같은 사회주의적 주장까지 나가지 않는다. 다만 그 전제로서 "노동자를 대등한 '협업자'로 인정하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제기한다. 
생산과 소비, 생활의 주체로서 당당히 '공동체'를 조직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 콜의 '길드사회주의'가 변함없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사상적 유산이다.

탁월한 진보정치 이론가인 옮긴이 장석준 선생의 <해제>는 콜의 '길드사회주의'와 '산업민주주의론'으로부터 현재의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편의 훌륭한 논문을 읽는 듯 하다. 
콜의 원문보다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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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D.H.콜의 산업민주주의 - 노동자를 협업자로 인정하라](1957), G.D.H.콜, 장석준 옮김, <좁쌀한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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