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 - 철학의 탄생부터 더 나은 삶을 찾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이해하는 위대한 생각들을 한 권에!
히라하라 스구루 지음, 이아랑 옮김 / 더디퍼런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哲學), '개념의 공예'
- [철학 베스트 50], 히라하라 스구루, 2016.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공통 이해의 언어게임'이라 부른다...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철학 베스트 50], <들어가며>, 히라하라 스구루, 2016.


1.

스무살, 대학 신입생 때 내가 가입했던 영문과 '현대철학반'은 거룩했던 그 이름과는 달리 '현대철학'을 거부했다.

1993년은 30년 이상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문민정권이 출범한 해였다.
광주항쟁의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쿠데타 대통령을 처벌하자는 민중들의 요구가 있었고, 공권력없는 학생들이 '전두환 체포조'를 자청하며 연희동을 순찰하던 시대였다. 문민정부 또한 이러한 거리의 요구에 부응하듯 군부 잔존세력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부정부패를 정화하기는 하던 시절이었다.

그 해 대학 신입생이었던 우리 '93학번은 이른바 '문민정부 학번'이었다.
한 해 선배인 '92학번까지는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더 좌측에서는 백기완 민중대통령 후보의 득표 1%를 위해 거리에서 노숙을 했다던 험한 시절이었다면 '93학번은 찬란한 세대였다. 그래서 정권과 언론은 우리를 '신세대'라 불렀고, 우리 사회 진정한 '90년대의 시작은 1993년부터였다.

철학도 '신세대'에 맞게 '현대적'이어야 했겠지만, 내가 속한 영문과 학회 '현대철학반'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현대'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멈췄다. 우리에게 철학을 가르친 '90~92학번 선배들은 자기들이 아는 게 마르크스주의 뿐이라고 했고 그래도 학회의 주교재가 고대로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의 철학사를 다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였으니 2학년 학회 '교사'가 된 우리에게 시대에 맞게 '현대철학'을 펼쳐보라 권했다.

그러나 막상, 이제 본격적으로 '현대철학'을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여전히 '현대철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2.

며칠전, 1970년대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읽고는 우리 '현대철학반'의 주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의 기원을 추측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역시 일본인의 책이라 께름직하긴 했어도 일본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2016)를 연이어서 읽어보았다. 

고대철학의 출발은 역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했는데 타카다 모토무나 영문과 '현대철학반'(이하 '현철반')과 달리 19세기말 프리드리히 니체와 20세기 에드문트 후설을 넘어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를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점인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까지 철학의 고전 50권을 요약한 책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윤리 시간에 짧게 배웠던 철학사가 재미있었는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출발했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만 알다가 대학에 들어와 '현철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이하 '철철사')를 통해 나는 고대 그리스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유물론'적 기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전쟁터로 규정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 철학의 역사다.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시점이다.

1986년생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다시금 우리의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저작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편]을 통해 '보편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 했던 탈레스, '무한'으로 본 아낙시만드로스나 '공기'라 했던 아낙시메네스, '원자론'의 헤라클레이토스 등은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를 그리스 신화에서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철학 베스트 50], <1장>). 그러나 이들은 과학이라는 학문분과가 있을 수 없이 그 자체가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뭉뚱그려져 있던 고대에 그나마 '과학자'들이었던 것이고, "세계의 근거를 '선(善-행복)'이라는 가치에 두었던 (철학자) 플라톤의 통찰은 기존 철학의 수준을 현저히 발전시킨 획기적인 것"(같은책, 같은장)이라고 저자 스구루는 적고 있다. '유물론'의 경향을 갖지 않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는 철학사에서 과학적 발견의 기원보다는 철학이라는 '보편성'의 학문적 전통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대 신화를 철학적 보편성으로 표현한 플라톤이나 중세 종교의 '시녀'였으나 보편성의 끈을 놓치 않았던 스콜라철학, 내용은 종교와 같으나 형식이 다르다는 근대철학자 헤겔 등의 '관념론'이 진짜 정통 철학으로 부각된다. 고대 그리스 '자생적 유물론'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유물론'적 요소나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은 이 보편성의 철학사를 보완하는 요소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사에서 항상 '유물론'의 승리를 보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철학자 스구루는 '보편성'이라는 관념론으로 언제든 회귀한다. 물론, '관념론'에 치우치고 싶지 않은 스구루는 이 철학의 '보편성'을 '공통의 이해'(같은책, <들어가며>)로 치환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의 고전 50권을 본인만의 시각으로 쉽게 요약해주고 있는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에게 "철학은 한마디로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해가는 활동"(같은책, <들어가며>)이다. 복잡다단한 세계와 이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개별적 현상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적용할 '개념'을 도출하는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저자는 이렇게 규정하면서 '현대철학'적으로 철학은 '언어의 게임'이라 부른다. 

'현대철학'은 더 이상 종교와 같은 '관념론'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담지하는 '개념'과 '진리'를 향한 목적지향성은 철학의 불가피한 학문적 본질이겠지만, '현대철학'은 신이나 절대자 또는 '일자(一者)' 따위를 더이상 세계의 근본으로 두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이 항상 앞서고 철학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녘에 날개를 펴듯 늘 과학의 뒤를 따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자생적 유물론자'들이고 철학자들은 과학적 성과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종합하는 지식의 총결산에 복무한다.

'현대철학'에서 과학과 철학의 학문적 구분은 더욱 명확할지 모르나, '보편성'을 지향하는 학문의 본질상 인문과 자연 각 분야의 과학자들 모두가 철학자가 된다.

"주관은 어떻게 객관을 올바로 인식하는가를 묻는 '주객일치'의 구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욕구에 상관한 가치평가'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 '인식론'의 기본 원리다."
- [철학 베스트 50], <4장. 현대 1 - 니체부터 하이데거까지>, 히라하라 스구루, 2016.

히라하라 스구루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높이 평가한다. 50권 중 3권이나 니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말이다. 스구루에 의하면 니체는 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에 인간 '욕망'이라는 혁명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현대철학'을 시작했다. 스구루가 말한 인간의 '욕구'는 '욕망'이다. 철학은 '보편성'의 학문이라 주체인 인간이 객체로서의 세계를 어느정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에서도 주체의 인식이 객체를 어느정도 반영할 수 있는지가 고전적 주제였다. 주체가 먼저인가 객체가 우선인가를 묻는 '존재론' 다음으로 나오는 철학의 주요 주제가 바로 '인식론'이다.

'유물론'은 '존재론'에서 객체의 일차성을 강조하다보니 '인식론'에서도 인간의 의식 자체도 두뇌라는 물질적 요소를 통한 '물질적 반영'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철학의 '관념론'적 요소를 배제하고자 했다. 이에 니체는 '인식론'에서 주객일치의 '보편성'을 향한 경로를 이탈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한 '가치평가'가 인식론을 좌우한다고 한 것이다. 근대의 신을 죽이고 현대를 연 니체가 철학적 '인식론'에서 인간 '욕망'을 개입시키면서 '보편성' 또한 죽이고 말았다. 이제 진리를 아는 건 철학의 '보편성'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초인'으로서 주체다. 철학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전선을 이탈하고 주체로서의 인간(욕망)을 중심으로 하는 생의 철학과 실존주의 등 현대철학의 문을 연 것이 니체라고 철학자 스구루는 보고 있다.

[철학 베스트 50]에서 히라하라 스구루의 결론은 철학사를 통해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완성'하는 철학은 '개념의 공예'라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보편성'은 거추장스러워졌지만 '공통의 이해'를 지향하는 '개념'을 다듬고 또 다듬는 공예 활동이 바로 '철학'이라는 결론이다.

이를 위해 철학사의 고전 50권은 '읽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즉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하는 [철학 베스트 50]이 된다.


3.

'현철반'의 선배들이 떠나고 남은 우리 현철반 4인방, 철이엄마와 정박아와 지진아와 벅스터는 결국 '현대철학'과 인간 '욕망'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고민했겠지만 다루지 못했고, 현상학은 무시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은 철학으로 보지도 않았다. 당시 1990년대 초반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20세기 초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1995년까지 시대는 북유럽 사민주의가 '개량주의'와 비겁한 '기회주의'로 비판받던 시절이었다.

오래전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1989)까지는 아니지만,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 고전들을 읽어주는 히라하라 스구루의 [철학 베스트 50] 같은 책은 여전히 친절하고 고맙다. 살펴보니 비록 나는 50권의 10분의 1인 5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철학자 히라하라 스구루의 말마따나 '철학'은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계운동의 원리와 이에 대한 사고방식, 공통이해(보편성)를 향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세상의 '이데아'를 꿈꾸며 '개념'을 지속적으로 다듬어 가는 '공예' 활동으로서 '철학'에 동감한다. 
결국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끊임없이 도전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고, 철학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

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2.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학습 지침서], 모리스 콘퍼스, 이진영 옮김, <새물결>, 1989.
3.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4.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5. [1990's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돌베개>, 2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67
이병수 외 / 돌베개 / 199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사의 전장 속 거대한 두 개의 진영
- [유물론 vs.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1.

결국, 
그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1993년도에 스무살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나는 곧바로 영자신문사에 들어갔는데, '문민정권'임에도 신문사에 버젓이 잔존하던 군사문화가 싫어서 일주일만에 때려치우고 영문과 학생회의 철학학회에 가입했다. 
이름하여, '현대철학반'.

오로지 술 얻어마시고 놀고 싶어 들어갔는데, 역시 '현대철학'을 내건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 철학까지가 커리큘럼이었다. '문학사랑반'이나 '문학이론반' 또는 '영미희곡반'처럼 학회원이 많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떠밀려서 맡은 우리보다 1년 선배 태범이형이 교사 역할을 했고 지도고문 역할의 보현이형과 종선이형, 60년대생 회근옹 같은 몇 안되는 복학생 선배들이 다였다.
신입회원은 나(벅스터)를 포함한 진욱이(정박아), 진영이(지진아) 남학생 3명과 홍일점 여학생 윤주 1명이었다.

옥토끼 같이 귀엽고 싶어서 스스로 지은 별명이 '벅스터(The Buckster)'였던 나와 마산에서 얼굴 철판깔고 올라온 '정박아', 그리고 나름 8학군 반포동 토박이 '지진아', '현철반' 남자 신입생 3인방은 하라는 '철학'은 안 하고 거의 매일 '정박아'의 자취방 인근에서 술추렴하고 차비가 없어 외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철학학회의 커리큘럼에 맞는 주교재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도 내 고등학생 시절 [성문 기본영어]보다 더 많이 봐서 책 두께가 세 배는 불었고 공자의 '위편삼절'처럼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을 정도로 펼쳐보던 책이기는 했다. 자주 읽기도 했다지만 실은 하도 들고 다니며 함께 풍찬노숙하고 술을 마셔대서 걸레짝이 된 책이라는 게 맞다.

그 교재는 제목이 무려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 우리들끼리 줄여서 '철.철.사'였다.
2학년이 된 나는 학회장을 한 번 하고 근엄한 척, 진지한 척, 철학자인 척은 혼자 다 하다가 3학년 1학기 고문까지 하고는 그 해 늦가을에 입대를 했다. 보충대 입소 전날 난 나의 가보와 같던 '철.철.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1년 후 상병 휴가를 나와서 내가 군대 가던 해 1학년 신입회원이었던 여자 후배 미선이를 꼬셨다. 그리고는 다 낡아빠져 그지 같은 '철.철.사'를 그녀에게 맡기고는 홀연히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그렇게 그녀는 군복무 중인 나 대신 '현철반'의 후배들을 지도해야 했다. 닳고 닳은 '철.철.사'를 들고.

그리고는 몇 년 후,
그녀와 헤어지면서 수많았던 다른 책들에 묻혀 나의 '철.철.사'를 돌려받지 못했던 거다.

그녀가 '현철반' 복학생 선배 종선이형 집에 내가 준 책들을 다 맡겼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그 땐 이미 아마도 그 형이 책들을 다 처분한 후였을 게다.

스무살 초반, 
나의 3년간 철학적 투혼이 담긴 '철.철.사'는 그렇게 잊혀졌다.


2.

"철학사의 출발을 장식한 이오니아 자연학의 자생적 '유물론'과 자생적 '변증법'은 관념론과 형이상학의 도전으로 단련되면서 갈지자 행보를 거쳐, 한편으로는 프랑스 '유물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운 새로운 세계관은 이런 약점과 일그러짐을 걷어내고 '유물론'과 '변증법'을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내적으로 결합시켰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5장. 과학적 세계관의 등장: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형성>, 타카다 모토무, 1974.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린다는 타카다 모토무(高田求)는 내가 태어났던 1974년에 일찍이 [유물론 vs. 관념론]이라는 책을 써서 노동계급에게 '철학사(哲學史)'를 쉽게 설명했다. 원시 사회로부터 고대 및 봉건을 거쳐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이 성립되는 철학의 역사를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영원한 동지인 엥겔스의 선언처럼 '철학사의 전장은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 사이의 거대한 투쟁'이라는 전제 아래 철학의 역사 속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해 온 유물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몰랐다.
최근 우연히 읽게 된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의 내용은 오래전 우리 '현대철학반'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의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과 '현철반'은 적어도 1990년도 이전부터 '철.철.사'를 교재로 사용했을 텐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서인 '철.철.사'는 민주화의 격동기였던 1987년도에 출간되었다.
오랫만에 검색해 보니 오래전 공저자 중 하나였던 우리학교 선배 철학강사 우기동 선생은 빠져있었다. '80년대 좌파 운동권 냄새 풀풀 풍기며 외국 유학 없이 국내에서만 서양철학을 공부했다던 우직한 우기동 선생이 분명히 '철.철.사'의 공저자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우기동 선생의 철학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통해 오랫만에 나의 첫 철학교재인 우기동 선생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를 다시 만났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의 철저한 관점에서 2천년 철학의 역사를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의 투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의 엥겔스와 [철학노트](1914)의 레닌이 일관되게 견지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세상의 운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세계관의 역사가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보다는 물질이 일차적 근원이라는 '유물론'의 승리의 역사라는 시각이다.


3.

"... 이런 문제제기와 답변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이 탄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립된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던진 물음에 내놓은 답은 그 내용상 '원초적이고 자생적인 유물론'이라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2장. 고대 사회: 철학적 세계관의 형성,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 타카다 모토무, 1974.

철학은 고대 인류로부터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출발했다. 원시 사회에서 언어와 말의 발전과 함께 성립된 '관념론'과 종교는 자연과학과 인류인식이 발전하면서 '유물론'에게 도전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시대 구분 없이 모든 철학적 투쟁에서 '관념론'적 경향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유물론'적 경향에 의해 패퇴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4년에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자생적 유물론'은 과학의 발전을 동반하면서 점점 더 '유물론'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고대의 원자론이나 중세의 유명론 등은 직관에 기초한 '자생적 유물론이었지만, 근대 부르주아 혁명 시대의 과학 발전 과정에서는 진정한 '유물론'의 형태가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를 나선형 진보로 엮어내는 '변증법'과의 결합이다.
바로 '유물변증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2천년 철학사가 총결산되는 과정이다.
유물론의 진영에서는 '유물변증법'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세계관이 즉 '현대철학'인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1913)이라는 소논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원천을,
1) 영국의 정치경제학,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3) 독일의 관념론, 
이상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론'이고,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 대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몽철학의 '유물론'적 경향의 전통이며,
3) 독일의 관념론은 '변증법'적 나선형 진보의 사고방식을 자연과 인류사에 적용시킨 독일 고전철학의 거대한 사상체계로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관념적 사변철학의 집대성체인 독일 고전철학을 '유물론'적으로 바로 세웠다는 의미다. 
이 철학의 정수가 바로 '유물변증법'이다.

'유물변증법'의 관점으로 본다면,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념론'적 도전은 언제나 과학의 발견 및 진보와 함께 '유물론'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 여기서 다시, '어떤 관념론자가 다른 관념론자의 근거를 비판할 때 그 투쟁으로 성과를 올리는 것은 언제나 유물론이다'라는 레닌의 지적을 떠올려야 합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3장. 봉건 사회와 그 해체기의 유물론과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레닌은 1914년 [철학노트]에서 모든 철학적 투쟁의 승리와 진보는 '유물론'적 성과라고 반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면서 유럽 노동운동이 반동의 파도에 휩쓸려가던 1914년의 침체기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거대한 '관념론' 사상체계 속에서 빛나는 '유물론'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이에 역사의 나선형 운동과 변화,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을 결합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 '유물변증법'의 정당성을 이론은 물론 실천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현대철학 아닌 '현대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을 대중에게 설명해 주려던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철.철.사', 
나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4.

"공부 쫌 해라!"

신입생 시절 '현철반' 찌질이 벅스터와 정박아, 지진아 3인방이 여전히 돈이 없어 새우깡과 깡소주를 정박아 자취방 앞 골목에서 까고 있을 때, 지나가던 '87학번 복학생 찬우형이 일갈했다.

같지도 않은 철학 개념들을 남발하며 3인방이 서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한 잔 걸치고 근처 하숙집으로 올라가던 선배가 '니들, 파쇼와 독재의 차이 아나?'라고 경주 사투리로 물었고, 우리는 침묵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선배는 '폭력'이 있냐 없냐의 차이라고 개념적으로 간결히 정리해 주고는 영문과 철학떨거지 3인방을 일일이 쥐어박고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멋졌다.
나도 열심히 철학공부를 해서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순간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항상 부족하지만 끝까지 철학책들을 읽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한 장면이다.

그래서, 타카다 모토무의 오래된 철학책을 읽고, 
오래전 우리의 '철.철.사'를 추억하게 된 김에, 
'철학은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며 진짜로 '현대철학'까지의 고전들을요약하고 소개해 준다는 일본의 젊은 철학자 히라하라 스그루의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을 다음 책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우연하게도 역시 또 일본 철학자의 책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난 전혀 '친일파'가 아니며,
일본의 좌파 지성계는 그래도 건전하면서 극우 천왕파시즘과 무관하다는 위안을 스스로 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심도깊게 분석하는 일본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만 해도 나보다 젊지만 매우 뛰어난 내공과 식견을 자랑한다.

배움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지 않겠는가.


5.

책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유물변증법'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짧은 한 시절 사랑하던 후배 미선이에게 '현철반'의 운명과 함께 '철.철.사'를 맡겼지만 시대는 더 이상, '유물변증법'의 편이 아니었다.

전역을 했고 학교로 돌아가 그녀와 이후 잠시 더 만났지만, 이미 '현철반'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철학'을 내걸었음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머물렀던 학회는 20세기 말 대학 내 학회운동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소설을 써서 사라져 가던 '유물변증법', 당시의 용어로 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파하고 싶었다. '현대철학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싶었다.

내겐 지금도, 
'문사철'의 궁극적 세계관이 '유물론'과 '변증법'의 결합인 '유물변증법'이다.

내겐 여전히,
철학의 전장에서 거대한 양대 진영의 투쟁이 보인다.

'유물론' 대 '관념론'의 투쟁이.

***

1.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2.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3. [세계관 - 당신 지식의 한계](2018), 리처드 드위트, 김희주 옮김, <세종>, 2020.
4. [독일 이데올로기](1844), 마르크스/엥겔스,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88.
5.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6.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7.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9.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1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1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근본 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 역사적 갈등
타카다 모토무 지음, 최미선 옮김 / 책갈피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사의 전장 속 거대한 두 개의 진영
- [유물론 vs.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1.

결국, 
그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1993년도에 스무살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나는 곧바로 영자신문사에 들어갔는데, '문민정권'임에도 신문사에 버젓이 잔존하던 군사문화가 싫어서 일주일만에 때려치우고 영문과 학생회의 철학학회에 가입했다. 
이름하여, '현대철학반'.

오로지 술 얻어마시고 놀고 싶어 들어갔는데, 역시 '현대철학'을 내건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 철학까지가 커리큘럼이었다. '문학사랑반'이나 '문학이론반' 또는 '영미희곡반'처럼 학회원이 많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떠밀려서 맡은 우리보다 1년 선배 태범이형이 교사 역할을 했고 지도고문 역할의 보현이형과 종선이형, 60년대생 회근옹 같은 몇 안되는 복학생 선배들이 다였다.
신입회원은 나(벅스터)를 포함한 진욱이(정박아), 진영이(지진아) 남학생 3명과 홍일점 여학생 윤주 1명이었다.

옥토끼 같이 귀엽고 싶어서 스스로 지은 별명이 '벅스터(The Buckster)'였던 나와 마산에서 얼굴 철판깔고 올라온 '정박아', 그리고 나름 8학군 반포동 토박이 '지진아', '현철반' 남자 신입생 3인방은 하라는 '철학'은 안 하고 거의 매일 '정박아'의 자취방 인근에서 술추렴하고 차비가 없어 외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철학학회의 커리큘럼에 맞는 주교재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도 내 고등학생 시절 [성문 기본영어]보다 더 많이 봐서 책 두께가 세 배는 불었고 공자의 '위편삼절'처럼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을 정도로 펼쳐보던 책이기는 했다. 자주 읽기도 했다지만 실은 하도 들고 다니며 함께 풍찬노숙하고 술을 마셔대서 걸레짝이 된 책이라는 게 맞다.

그 교재는 제목이 무려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 우리들끼리 줄여서 '철.철.사'였다.
2학년이 된 나는 학회장을 한 번 하고 근엄한 척, 진지한 척, 철학자인 척은 혼자 다 하다가 3학년 1학기 고문까지 하고는 그 해 늦가을에 입대를 했다. 보충대 입소 전날 난 나의 가보와 같던 '철.철.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1년 후 상병 휴가를 나와서 내가 군대 가던 해 1학년 신입회원이었던 여자 후배 미선이를 꼬셨다. 그리고는 다 낡아빠져 그지 같은 '철.철.사'를 그녀에게 맡기고는 홀연히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그렇게 그녀는 군복무 중인 나 대신 '현철반'의 후배들을 지도해야 했다. 닳고 닳은 '철.철.사'를 들고.

그리고는 몇 년 후,
그녀와 헤어지면서 수많았던 다른 책들에 묻혀 나의 '철.철.사'를 돌려받지 못했던 거다.

그녀가 '현철반' 복학생 선배 종선이형 집에 내가 준 책들을 다 맡겼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그 땐 이미 아마도 그 형이 책들을 다 처분한 후였을 게다.

스무살 초반, 
나의 3년간 철학적 투혼이 담긴 '철.철.사'는 그렇게 잊혀졌다.


2.

"철학사의 출발을 장식한 이오니아 자연학의 자생적 '유물론'과 자생적 '변증법'은 관념론과 형이상학의 도전으로 단련되면서 갈지자 행보를 거쳐, 한편으로는 프랑스 '유물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운 새로운 세계관은 이런 약점과 일그러짐을 걷어내고 '유물론'과 '변증법'을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내적으로 결합시켰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5장. 과학적 세계관의 등장: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형성>, 타카다 모토무, 1974.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린다는 타카다 모토무(高田求)는 내가 태어났던 1974년에 일찍이 [유물론 vs. 관념론]이라는 책을 써서 노동계급에게 '철학사(哲學史)'를 쉽게 설명했다. 원시 사회로부터 고대 및 봉건을 거쳐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이 성립되는 철학의 역사를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영원한 동지인 엥겔스의 선언처럼 '철학사의 전장은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 사이의 거대한 투쟁'이라는 전제 아래 철학의 역사 속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해 온 유물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몰랐다.
최근 우연히 읽게 된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의 내용은 오래전 우리 '현대철학반'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의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과 '현철반'은 적어도 1990년도 이전부터 '철.철.사'를 교재로 사용했을 텐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서인 '철.철.사'는 민주화의 격동기였던 1987년도에 출간되었다.
오랫만에 검색해 보니 오래전 공저자 중 하나였던 우리학교 선배 철학강사 우기동 선생은 빠져있었다. '80년대 좌파 운동권 냄새 풀풀 풍기며 외국 유학 없이 국내에서만 서양철학을 공부했다던 우직한 우기동 선생이 분명히 '철.철.사'의 공저자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우기동 선생의 철학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통해 오랫만에 나의 첫 철학교재인 우기동 선생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를 다시 만났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의 철저한 관점에서 2천년 철학의 역사를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의 투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의 엥겔스와 [철학노트](1914)의 레닌이 일관되게 견지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세상의 운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세계관의 역사가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보다는 물질이 일차적 근원이라는 '유물론'의 승리의 역사라는 시각이다.


3.

"... 이런 문제제기와 답변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이 탄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립된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던진 물음에 내놓은 답은 그 내용상 '원초적이고 자생적인 유물론'이라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2장. 고대 사회: 철학적 세계관의 형성,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 타카다 모토무, 1974.

철학은 고대 인류로부터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출발했다. 원시 사회에서 언어와 말의 발전과 함께 성립된 '관념론'과 종교는 자연과학과 인류인식이 발전하면서 '유물론'에게 도전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시대 구분 없이 모든 철학적 투쟁에서 '관념론'적 경향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유물론'적 경향에 의해 패퇴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4년에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자생적 유물론'은 과학의 발전을 동반하면서 점점 더 '유물론'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고대의 원자론이나 중세의 유명론 등은 직관에 기초한 '자생적 유물론이었지만, 근대 부르주아 혁명 시대의 과학 발전 과정에서는 진정한 '유물론'의 형태가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를 나선형 진보로 엮어내는 '변증법'과의 결합이다.
바로 '유물변증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2천년 철학사가 총결산되는 과정이다.
유물론의 진영에서는 '유물변증법'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세계관이 즉 '현대철학'인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1913)이라는 소논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원천을,
1) 영국의 정치경제학,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3) 독일의 관념론, 
이상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론'이고,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 대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몽철학의 '유물론'적 경향의 전통이며,
3) 독일의 관념론은 '변증법'적 나선형 진보의 사고방식을 자연과 인류사에 적용시킨 독일 고전철학의 거대한 사상체계로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관념적 사변철학의 집대성체인 독일 고전철학을 '유물론'적으로 바로 세웠다는 의미다. 
이 철학의 정수가 바로 '유물변증법'이다.

'유물변증법'의 관점으로 본다면,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념론'적 도전은 언제나 과학의 발견 및 진보와 함께 '유물론'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 여기서 다시, '어떤 관념론자가 다른 관념론자의 근거를 비판할 때 그 투쟁으로 성과를 올리는 것은 언제나 유물론이다'라는 레닌의 지적을 떠올려야 합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3장. 봉건 사회와 그 해체기의 유물론과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레닌은 1914년 [철학노트]에서 모든 철학적 투쟁의 승리와 진보는 '유물론'적 성과라고 반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면서 유럽 노동운동이 반동의 파도에 휩쓸려가던 1914년의 침체기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거대한 '관념론' 사상체계 속에서 빛나는 '유물론'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이에 역사의 나선형 운동과 변화,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을 결합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 '유물변증법'의 정당성을 이론은 물론 실천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현대철학 아닌 '현대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을 대중에게 설명해 주려던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철.철.사', 
나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4.

"공부 쫌 해라!"

신입생 시절 '현철반' 찌질이 벅스터와 정박아, 지진아 3인방이 여전히 돈이 없어 새우깡과 깡소주를 정박아 자취방 앞 골목에서 까고 있을 때, 지나가던 '87학번 복학생 찬우형이 일갈했다.

같지도 않은 철학 개념들을 남발하며 3인방이 서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한 잔 걸치고 근처 하숙집으로 올라가던 선배가 '니들, 파쇼와 독재의 차이 아나?'라고 경주 사투리로 물었고, 우리는 침묵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선배는 '폭력'이 있냐 없냐의 차이라고 개념적으로 간결히 정리해 주고는 영문과 철학떨거지 3인방을 일일이 쥐어박고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멋졌다.
나도 열심히 철학공부를 해서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순간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항상 부족하지만 끝까지 철학책들을 읽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한 장면이다.

그래서, 타카다 모토무의 오래된 철학책을 읽고, 
오래전 우리의 '철.철.사'를 추억하게 된 김에, 
'철학은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며 진짜로 '현대철학'까지의 고전들을요약하고 소개해 준다는 일본의 젊은 철학자 히라하라 스그루의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을 다음 책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우연하게도 역시 또 일본 철학자의 책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난 전혀 '친일파'가 아니며,
일본의 좌파 지성계는 그래도 건전하면서 극우 천왕파시즘과 무관하다는 위안을 스스로 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심도깊게 분석하는 일본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만 해도 나보다 젊지만 매우 뛰어난 내공과 식견을 자랑한다.

배움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지 않겠는가.


5.

책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유물변증법'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짧은 한 시절 사랑하던 후배 미선이에게 '현철반'의 운명과 함께 '철.철.사'를 맡겼지만 시대는 더 이상, '유물변증법'의 편이 아니었다.

전역을 했고 학교로 돌아가 그녀와 이후 잠시 더 만났지만, 이미 '현철반'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철학'을 내걸었음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머물렀던 학회는 20세기 말 대학 내 학회운동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소설을 써서 사라져 가던 '유물변증법', 당시의 용어로 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파하고 싶었다. '현대철학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싶었다.

내겐 지금도, 
'문사철'의 궁극적 세계관이 '유물론'과 '변증법'의 결합인 '유물변증법'이다.

내겐 여전히,
철학의 전장에서 거대한 양대 진영의 투쟁이 보인다.

'유물론' 대 '관념론'의 투쟁이.

***

1.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2.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3. [세계관 - 당신 지식의 한계](2018), 리처드 드위트, 김희주 옮김, <세종>, 2020.
4. [독일 이데올로기](1844), 마르크스/엥겔스,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88.
5.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6.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7.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9.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1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1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1963~1964.


1.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장. 판결, 항소, 처형>, 한나 아렌트, 1963.


그 속에 내가 없기를 바랬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있었다.

거대한 사회체제 속의 부품으로 살면서,
스스로의 입신양명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꿈꾸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해고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을 때려잡고,
농성텐트를 철거하는 자리에 화단을 만들겠다며 열심히 삽질해대던 '성실한' 공무원들을 떠올리면서,
수십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순리에 따라' 친일을 했던 자들과 독재정권에 본의 아니게 부역한 자들까지 상기하다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결국 펼쳤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로 유명한 그 책 속에 평범한 내가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

"피고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주장을 하게한 이유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피고측 변호인)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그래서 1943년에 괴벨스는 '우리는 역사책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기록되든지 또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장. 피고인>, 한나 아렌트, 1963.


독일 출신으로 나치의 유대인 박해 시기에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을 도왔고 1941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1906~1975)는 유대인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된 독일 나치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 1906~1962)의 재판을 기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이주와 이송전문가'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전범재판이었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처벌할 정도의 나치정권 수괴는 아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던 중 이스라엘 정보국에 의해 1960년에 체포되고 예루살렘으로 납치되어 유대인의 신생국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유대인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되어 2년간 재판 끝에 처형당했다.

아렌트는 이 2년 간 재판의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의 재판정에 선 피고 아이히만의 '평범성'에 주목한다. 
이스라엘의 "심판대에 오른 것은 아이히만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장>). 
그는 결코 나치 수괴들처럼 '악마적'이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착실히 승진하고 출세하려는 '평범(banality)'한 독일의 '공무원'이자 '시민'이었다.

피고인 아이히만의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는 전쟁 개시 전후 독일 나치정권의 법률체계는 '합법'이었으므로 그 어느 국가도 그 법률에 따른 '국가적 공식행위'를 '범죄'로서 판단할 수 없다고 일관되게 항변했다고 한다. 따라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같은 국제재판소도 아닌 이스라엘 일국의 법정에서는 아이히만을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 행위의 불법성과 합법성을 두고 우리와 일본이 끊임없이 다투는 논리와 같다.


"요약하면, 예루살렘 재판의 실패는 뉘른베르크 재판소 설립 이래로 폭넓게 논의되고 또 충분히 인식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 모두를 파악하지 못한데 놓여있다. 그것은, 1) '승자의 법정'의 훼손된 '정의'의 문제, 2) '인류에 대한 범죄'의 타당한 정의, 그리고 3)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새로운 범죄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필로그>, 한나 아렌트, 1963.


한나 아렌트는 결론부를 이루는 <에필로그>에서 이 기록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이 기록은 '악의 평범성'의 한 전형으로서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피고인에 관한 실제적 묘사라는 것이다. 

악마와도 같은 수천만 유대인 대량학살의 부역자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단지 그가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 시민의 면모와 품성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은 '하사관에서 8천만 독일인들의 총통이 된' 히틀러를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던 출세지향적 인물로서 어떤 점에서는 '평범'하지만은 않았고, 히틀러의 나팔수였던 괴벨스가 말한대로 '위대한 인물'이 될지 '흉악한 범죄자'가 될지 양자간 하나라는 생각으로 앞만보고 달린 '유대인 이송전문가'였다. 스스로를 히틀러처럼 순수한 '이상주의자'로 규정했던 아이히만은 자신의 임무에 있어서는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았단다. 패전의 분위기가 감돌자 하인리히 힘러 같은 나치 친위대 직속상관이 히틀러의 '최종적 해결책'(유대인 대량학살)을 지연시키고 회피하려 할 때에도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정도로, 책임질 때가 되면 '웃으며 무덤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장담하는 자부심과 책임감까지 겸비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평범한' 독일시민들 대부분은 히틀러의 유럽정복전쟁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같은책, <에필로그>)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편,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 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가 전후 유대인의 신생국 이스라엘 법정의 '정당성' 논란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국제재판소도 아닌 피해민족으로서 유대인의 국가법률로 패전국인 가해국 독일인을 단죄할 수 있는가, 유대인의 민족적 보복이 아닌 보편적 '정의'를 담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첫번째 문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법정은 '정의의 집'이 되는데 실패했다고 본다. 결코 아이히만이 무죄라고 옹호할 수는 없지만, 국제재판소가 아닌 이스라엘 단독의 아이히만 체포와 납치는 '불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번째로 민족적 복수에 불과한 예루살렘의 법정은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을 '보편적'인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데 또한 실패했다는 결론이 따른다. 유대인을 넘어 폴란드인과 집시들 같은 소수자는 물론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같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전반에 대한 단죄가 아닌 유대인 문제에만 국한된 민족적 보복행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번째 요소로서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의 특별한 '악마성'을 구축하지 못했다. 수백수천만 유대인이 학살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자 집행자임에도 아이히만은 히틀러나 괴벨스 같은 '악마'적 이미지나 '악의 화신'이 아니라 출세지향적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남고 말았다.


"이 회담(1942년 1월 '반제회의') 날이 아이히만에게 잊혀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가 '최종 해결책(유대인 대량학살)'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여전히 '폭력을 통한 그러한 피투성이의 해결책'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의구심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이 곳에서, 이 회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제3제국의 교황들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히틀러 뿐만아니라,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뿐만 아니라, 친위대나 당 뿐만 아니라, 착하고 연륜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장. 반제회의, 혹은 본디오 빌라도>, 한나 아렌트, 1963.


여기에 아이히만을 그답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있다. 바로 1942년 1월 독일 반제에서 열린 회담, 이른바 '반제회의'였다.

원래 특출나지 못했던 아이히만이 그나마 독일 군부에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게, 그가 '유대인 전문가'였다는 사실 그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많은 유대인 지도자 집단과 연결이 되었고 그들을 통해 다수 유대인들을 각국으로 이송시키는 전문가였다. 다수 유대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무국적자로 만들고 대량이주시키는 대신 소수 유대인 지도집단의 특권과 기득권은 보장하는 식이다. 식민지배에서 피식민 민중들을 분리통치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그러던 그가 나치정권의 고위층들이 모여 유대인 대량학살 집행을 결정하는 반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나치당 제3제국의 '교황'들이 모여 거리낌없이, 나아가 경쟁적으로 '최종적 해결책'의 주도적 집행자가 되려는 모습을 보며 죄의식 자체를 씻어버렸다고 한다. 마치, 유대인 랍비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죽게 만든 과정에서의 예루살렘 로마인 총독 본디오 빌라도처럼.

예수를 죽게 만든 건 빌라도 본인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유대인 랍비들이라고 말하며 손을 씻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유대인을 이송만 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총통 히틀러의 '최종적 해결책'인 대량학살을 집행할 수 있게 한 건 결정권한이 없는 아이히만 본인이 아니라 독일 나치정권의 성실하고 지적이며 선량하고 연륜있는 고위공무원 전부와 그들에 협조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소수 유대인 지도자들이라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유대인 이송전문가는 성실하고 착실하게 출세를 꿈꾸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이 되었고, 비록 직무상 한계로 인해 독일 나치정권의 고위공무원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자부심은 패전 15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국원에게 체포될 때 "내가 아이히만이다(Ich bin Eichmann)!"라고 바로 신분을 까는 당당함의 근원이 되었다.

정신이상도, 사이코패스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법정의 의도와 달리 괴물이나 악마도 아닌, '악의 평범성'의 한 전형으로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항소심 판결 후 3일만에 집행된 사형대에서 본인의 죽음을 주재하는 식의 진부(banality)한 장례연설을 유언으로 남기는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며 생을 마감했다. 

아렌트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세뇌하고 속인 아이히만 자신의 기억이 바로, '말과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같은책, <15장>), 철학없는 사고, 반성하지 않는 사유,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같은책, <후기>)로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두려운 교훈'(같은책, <15장>)을 남긴다고 말한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후기>, 한나 아렌트, 1963~1964.


거대한 체제에서 톱니바퀴와 나사와 같은 부품으로서 철학없는 '무지'와 반성없는 '무사유'는 '악의 평범성'의 기본조건이다.


3.

악(惡)에 대한 심판 과정을 통해 현실적으로 드러난 '악의 평범성' 속에서 '평범'한 내 모습을 얼핏 보았을 때, 사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전에도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입신과 출세를 위해, 가정의 안녕과 부를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시대에 따라 친일도 되었고 독재정권의 지지기반이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역시 모두가 무죄라는 생각으로 성실하게 살았던 독일 시민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국 유대인의 법정에서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 되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성실함이 '악(惡)'이 된 건 성실함 자체가 아니라 식민시대 또는 반민주 독재정권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상대성이 있다.
아이히만의 성실함이 평범한 악(惡)이 된 것 또한 예루살렘 법정의 '정의의 집'(같은책, <1장>) 여부에 대한 논란의 상대성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또 묻는다.
평범한 내가 사는 이 체제는 '정의'로운가.
과연 시대의 '악(惡)'은 무엇인가.

지금, 평범한 나의 성실함 속에 '악(惡)'은 얼만큼이나 있는가.

***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1963~1964), Hannah Arendt, 김선욱 옮김, 정화열 해제, <한길사>, 2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신과 설문해자 한국한자연구소 번역총서 1
요효수 지음, 하영삼 옮김 / 도서출판3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
- [허신과 설문해자], 요효수, 1980년대.


"중국문자는 몇몇 기본형체가 조합되어 만들어진다. 상대적으로 말해, "'독체(獨體)'를 '문(文)'이라 하고, '합체(合體)'를 '자(字)'라 한다(獨體爲文, 合體爲字)"라는 말이 있지만,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자(文字)'라는 말이 전체적인 개념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8장. [설문해자]의 부수>, 요효수.


1.

내가 다닌 남자고등학교에는 여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녀는 전혀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이과 3반과 문과 4반의 총 일곱반이었던 우리 남학생 약 5백명은 그 홍일점 여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대단하게도 뻗쳤다.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오면 수업시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고, 신혼여행 다녀온 그녀에게 첫날밤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겠다며 야유를 보내고 버티다가 선생님이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탁자에 회초리질을 수차례 해댄 후에야 수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한자(漢字)를 좋아했던 거였지,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의 과목이 한문 시간이어서가 아니었다. 혈기왕성 사춘기였던 나 또한 혼자 몰래 그녀의 성숙하고 탱탱한 육체를 흘끔거리고 온갖 상상을 하며 수업시간에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한문 시간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었다고 '청렴결백한 모범생'을 감히 자칭하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지금 쯤은 어느덧 환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경희남고의 홍일점 김금희 선생님은 다시 말하지만 전혀 예쁘지 않았음에도 1990~91년 당시에는 이십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을 테고,
나는, 재차 강조하지만, 그녀의 한때 싱싱했고 탱글탱글했던 육체와는 상관없이, 본래부터 그림 그리듯 한자를 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마지막 한문 선생님으로 남았고, 나는 연습장에다가 열심히 한자들을 그려대면서 가끔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고 기대했으며, 학력고사를 포함하여 모든 한문 시험문제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2.

"'육서(六書)'에 대한 허신의 명칭과 순서는,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문자학의 기본이론-六書>, 요효수.


한자를 좋아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축의금이나 조의금 봉투에다가 쓸데없이 이름까지 한문으로 써대던 나였지만 오래전 배운 한자의 이론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몇해 전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쳤다가 진짜 아쉬운 점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한자의 문자이론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 몇주 전 우연히 [갑골문자]라는 피터 헤슬러의 책을 읽던 중,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을 알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잠재되어 있었을 한자 이론에 관한 흥미가 다시 생겼다.

서기 100년 동한(東漢/後漢) 시대의 학자 허신(許愼)은 현존하는 최초이자 최고(古)의 한자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었고, 그의 아들 허충이 아버지 허신이 이미 늙어 병상에 있었을 서기 121년에 후한 조정에 이 책을 바쳤을 때, [설문해자]가 담은 총 한자의 수는 허신이 지었을 당시의 9,353자에 1,163자가 추가된 1만자가 이미 넘었다고 전한다. 이후 5대10국 말 남당과 송나라 초의 서현과 서개 형제가 허신의 [설문해자]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대서본]과 [소서본]도 약 1만자 이상, 진(晉)나라 학자 여침이 역시 [설문해자]를 기초로 지었다는 [자림(字林)]은 12,825자에다가, 이후 양(梁)나라 고야왕의 [옥편(玉篇)]은 16,917자의 한자를 담고 있단다.
아마도 한자에 관한 이 고전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의 유래일 것이며, 그 기원은 바로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일 것이다.

[설문해자]는 그 제목의 뜻 그대로 '문을 설명(說文)'하고 '자를 분해(解字)'하여 한자라는 '문자(文字)'를 해설(解說)하는 책이 되겠다. 

한자에 대해 새삼스레 흥미가 재발된 내가 차마 허신의 고전 [설문해자]를 읽을 엄두는 못내고 그 책에 관한 해설서를 찾던 중 발견한 중국학자 요효수의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는 1980년대의 [설문해자] 연구서다. 이 책은 [설문해자]의 구조와 분석 및 한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 요효수에 의하면 허신은 후한의 광무제의 후대 명제 때인 서기 58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허신과 설문해자], <1장. 저자 허신>). [설문해자]가 완성된 해가 서기 100년이면 허신은 42세 즈음 한자에 관한 이론을 총망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기 100년 경에는 아직 한자의 원시 형태인 '갑골문'이나 청동기 '금문' 등의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라 허신은 전국시대의 '대전(大篆)'체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 시기 전국통일체인 '소전(小篆)'체에 주로 근거했다. 서기전 14세기경 은나라에서 거북의 배딱지와 짐승 어깨뼈 등을 태워 점을 치고 결과를 기록하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처음 발굴된 것이 19세기 말이라서 그렇다고는 하나 서기 1~2세기 허신의 시대에 상형문자의 원조 갑골문과 금문이 과연 전해지지 않았을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다만, 갑골문에 관한 '문자학'은 분명 없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허신은 갑골문보다는 아직 상형문자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던 춘추전국시대와 진한(秦漢) 시대의 '전서(篆書)'체에 주로 근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문자학의 기본이론'으로서 '육서(六書)'를 정리한다.

이 '육서'가 바로, 내가 고등학교 때 학교 유일한 여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그 이론으로,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를 이른다([허신과 설문해자], <7장> 참고 및 재인용).

1) 지사(指事)

"'지사'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고 살피면 뜻이 드러나는 것으로 '상'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지사(指事)'는 사물의 형상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 의미를 뜻하며, '윗 상(上)'이나 '아래 하(下)'처럼 '땅(一)'의 '위(•)'나 '아래(•)'를 의미하는 한자들이 일례들이다.

2) 상형(象形)

"'상형'이라는 것은 해당 사물을 그림으로 그리고, 형체를 따라 그려낸 것으로, '일'과 '월'이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상형(象形)'은 말 그대로 사물의 형태 자체를 그림처럼 표현한 '표의문자'의 본질적 형태로, '일(日)'과 '월(月)' 또는 '용(龍)', '호(虎)', '마(馬)', '어(魚)' 등의 동물이나 '사람 인(人)' 등의 기본 형태가 그 예다.

3) 형성(形聲)

"'형성'이라는 것은 사물이 성질을 이름으로 삼고 비유되는 바를 취해 서로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강'과 '하'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형성(形聲)'은 뜻과 소리가 합체한 문자로서 허신의 [설문해자]의 문자 분석의 대부분을 이룬다는 한자 발전의 주요 형태다. 즉, 기본부수와 다른 기본 형태의 결합으로서 하나 또는 여러 문자는 뜻을, 그 중 하나는 소리부를 형성한다. 기본 예는 '강(江)'이나 '하(河)'라고 [설문해자]는 말한다.

4) 회의(會意)

"'회의'라는 것은 부류를 나열하고 의미를 합쳐서,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와 '신'이 그 예에 해당한다."
- 허신, [설문해자].

'회의(會意)'는 여러 의미부가 결합하여 아예 새로운 의미의 한자로 파생된 사례로서 '형성'과 구분되며, '무기를 그치는 전쟁무기 무(武)'는 '창 과(戈)'와 ''그칠 지(止)'의 결합, '사람(人)의 말(言)을 믿는 신(信)' 등의 조합이 그 예가 아닐까 하는데, 허신의 후학들의 이에 관한 다른 이론도 있단다.

5) 전주(轉注)

"'전주'라는 것은 부류를 세우고 하나를 우두머리로 삼아, 같은 뜻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하며, '고(考)'와 '노(老)'가 그 예이다."
- 허신, [설문해자].

'전주(轉注)'는 '마음 심(心)'이나 '말씀 언(言)'을 부수로 하는 수많은 한자들처럼, '서로서로 전환하며(轉) 비슷한 뜻으로 주석(注)을 다는' 한층 더 파생된 형태의 글자들이다.

6) 가차(假借)

"'가차'라는 것은 본래 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탁하여 개념을 빌린 것으로, '영(令)'과 '장(長)'이 그것이다."
- 허신, [설문해자].

'가차(假借)'는 갑골상형문자를 보지 못했던 한계로 일부 억지 조합으로 분류했던 허신의 해석과는 달리,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을 가리키는 문자와 '부정사'인 '아닐 부(不)', '하여금 령(令)' 같은 글자들이 그 일례들이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문자는 그 형체구조로 말하자면, '상형문자(象形文字)'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문자의 형체는 대단히 복잡하고, 게다가 부호의 수도 매우 많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자는 이미 부호화한 문자이며, 그 발전단계로 말하자면, 이미 어음(語音)과 매우 긴밀하게 결합한 일종의 '표음문자(表音文字)'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음의 기록을 통해 개념을 전달하지, 문자의 형상 그 자체로써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장기간의 발전과정 속에서 문자의 형체(形), 독음(音), 의미(義)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한자 자체의 특징과 그것의 형체, 독음, 의미 간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해를 위해서는 이해방법과 이론에 관한 체계가 필요한데, 이러한 이론과 방법의 하나가 바로 '육서(六書)'이다."
- [허신과 설문해자], <7장>, 요효수.


고대 은(상)나라 시기 동물뼈에 새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 새긴 금문 등의 원시 상형문자는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전서(篆書)와 대전(大篆) 또는 주문(籀文), 진시황의 전국통일 승상 이사의 소전(小篆)과 고문(古文)을 거쳐 진한의 전국통일 왕조의 표준문자로서 예서(隷書)체가 되면서 둥근 모양의 상형그림에서 정사각형의 추상문자가 된다. 아마도 후한 시대 서기 1~2세기의 허신은 갑골문자학은 몰랐겠지만 그 당시까지 아직 둥근 형태의 그림과 같은 '전서체'에서 각진 문자로서 '예서체'로 전환되던 국가문명의 시기에 한자라는 중국문자학을 총망라하고 체계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현존하는 유일한 '표의문자'로서 한자는 우리 한글이나 서양 알파벳의 '표음문자'와는 구별되나, 그 한자의 파생과 확장 과정은 요효수에 의하면 '어음(語音)'과 긴밀히 결합되어 '표의문자'로서의 발전과정을 겪게 된다. '문자'는 글과 그림으로 쓰고 새기는 '문'과 여기에 말과 소리로 파생된 '자'로 구성된 것이라 허신이 [설문해자]를 통해 한자의 기본체계와 발전단계를 통해 규정한 것처럼, 모든 문자와 언어는 '표의'와 '표음'의 조화로써 발전한다.

아무튼, 이후 현대 한자의 본격적인 형태가 된 '해서(楷書)체'는 삼국시대 위나라 시기나 되어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니, 서기 100년 '갑골문자'를 몰랐을 허신의 [설문해자]는 '전서체'와 '예서체'를 기본으로 한다.


"창힐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대체로 부류에 근거해형체를 본떴는데, 이 때문에 '문(文)'이라 했다. 이후형체와 소리가 서로 더해졌는데, 이를 '자(字)'라 한다. '자(字)'라는 것은 파생하여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허신, [설문해자], <서(敍)>, 서기 100년.


3.

"허신은 자신이 처했던 시대적 한계 탓에, 그는 단지 주(周)나라 후기 이후부터 진한(秦漢) 때에 이르는 문자자료로만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문자는 원시 상태로부터 이미 상당히 떨어진 이후의 문자자료였다. 그래서 그가 지은 [설문해자]는 단지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문자의 본래 형체, 본래 독음, 본래 의미를 파헤쳐야 했는데,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 [허신과 설문해자], <10장. [설문해자]의 평가>, 요효수.


갑골문자학을 알 수 없었던 허신은 와변(訛變)'된 형체에 근거한 해석의 오류를 다수 범했다고 [설문해자] 연구자 요효수는 말한다. 그러나 이는 허신의 [설문해자]의 역사적 한계를 이해하면서 접근해야 할 문제로서, 후학인 청나라 고문학자들처럼 위대한 [설문해자]를 '경전화'시켜서는 안될 일이라고 [허신과 설문해자]의 저자 요효수는 여러 번 강조하면서 논문을 맺는다.

그래서 나는 한자학의 고전 [설문해자]는 존중하되,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한자학을 보기 위해 중국 한자학자 랴오원하오의 [한자나무(漢字樹)] 1~2권으로 한자공부를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2천년 전 허신의 [설문해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오래전 전혀 예쁘진 않았던 우리 경희남고의 유일했던 '여신'이자 '만인의 연인'이기도 했던 김금희 선생님을 추억하며,
다시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에 재도전해 보리라.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로서의 한자의 본질을 중심으로 삼아서 말이다.

***

1.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1980년대), 요효수, 하영삼 옮김, <도서출판3>, 2014.
2. [한자나무(漢字樹) 1~2](2012), 랴오원하오, 김락준 옮김, <교유서가>, 2021.
3. [갑골문자(甲骨文字)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Oracle Bones : A Journey Through Time in China)](2006), Peter Hessler, 조성환/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2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