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3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 옮김, 김동택 해제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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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본 '희망의 시대'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 - 에릭 홉스봄


"앞서 출간된 두 책([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제국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자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 [제국의 시대], <서문>, 에릭 홉스봄, 1987.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20세기 초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국주의'의 아이였던 홉스봄은 1987년 자신의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저작인 [제국의 시대]의 <머리말>을 본인의 부모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만난 국제주의적 연애로 태어난 70세의 노학자가 돌아본 '제국의 시대'에 관한 개인적 기억으로부터. 
저자는 이를 '여명의 지대'라 하는데, 역사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건의 나열이 아니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해온 인류 근대사에서 '여명의 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 사회를 통과하던 70대의 홉스봄 개인을 만든 '여명의 지대'는 [제국의 시대]였고, 역시 이 시대를 거슬러오르는 '여명의 지대'는 1789년부터 시작하는 [혁명의 시대]와 1848년부터 시작하는 [자본의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초까지 돌아보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 '장기(長期)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의 정치경제, 사회문예 등 당대 모든 문명의 역사를 통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고자 한다.
3부작의 시작인 1부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2부는 1848년 유럽혁명부터, 3부가 1875년 유럽 대공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홉스봄이 주목하는 사건은 자본주의 '공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혁명'이다. 
첫 권의 제목이 [혁명의 시대]인 이유다.


1. [혁명의 시대 : 1789~1848](1962)


"1789~1848년의 위대한 혁명은 '공업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였으며, '자유', '평등' 일반의 승리가 아니라 '중류계급'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및 (영국) 랭커셔에서 근대 최초의 공장제도 건설('이중혁명')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역사적 시기는, 최초의 철도망 건설 및 [공산당선언]의 출간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혁명의 시대], <머릿말>, 에릭 홉스봄, 1962.


홉스봄은 새삼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학자로서 새롭게 평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근대 부르주아혁명의 배경인 1780년대 정치경제적 토대에 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이 [혁명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다. 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공화정을 건설한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증기기관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과 대공장제의 시초를 연 영국의 경제혁명을 지칭한다. '이중혁명'을 통해 영국은 중세농업을 청산하고 도시 중심의 대공업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는 대중민주주의의 두려움을 각국의 지배계급에 선사했다. 물론 '이중혁명'으로 신흥 부르주아지가 곧바로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지주와 귀족, 몇 나라를 빼고는 왕족이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부르주아는 경제영역에서 자본가로서 부상하고 있었고, 이 시대에는 아직 다수가 아니었던 도시 노동빈민들(프롤레타리아의 기반)은 먹고살기 힘들때 언제든 정치권력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혁명'의 담지자가 되었다. 

[혁명의 시대] 전반부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중혁명' 이야기, 1815년부터 이어진 나폴레옹의 유럽전쟁과 나폴레옹 실각 후의 평화시기와 왕족과 귀족이 아닌 혁명을 통한 국민국가 형성의 <전개과정>을 살핀다. 후반부는 그 <결과>로서 토지 문제와 산업사회, 초기 부르주아의 '능력주의'와 노동빈민 문제는 물론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축으로 예술과 과학의 영역까지 설명한다. 당시 지배적 정치권력이 왕족, 귀족 또는 지주에게 있었으므로 토지 문제는 2부인 [자본의 시대]까지 이어지나 주내용은 봉건세습이 아닌 상품으로 전환되는 경제학 3요소 중 하나로서 토지 형태 분석이다. 봉건세습을 혁파한 초기 부르주아지는 오로지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했다는 사실과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의 다수화는 "이제는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계급, 즉 노동계급인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또 하나의 계급인 고용자 또는 자본가와 맞서고"(같은책, <11. 노동빈민>) 있는 상황을 분석한다. 과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홉스봄은 이 [혁명의 시대]에 출현한 '낭만주의'에서 그 혁명성을 보는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를 쓴 미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와 맞닿는 지점이다. 
물론 '낭만주의'에 '혁명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 19세기'의 전반부를 거치면서 1840년대 후반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공황까지는 아니지만 농업사회 대기근이 발생했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다수 농민들과 도시빈민들은 또 다시 혁명을 시작한다. 

[혁명의 시대]는 이 1848년 유럽혁명을 앞두고 끝을 맺는다.
그리고 아직, 혁명을 지도하는 '사회주의'는 그 과정에서 지배적인 지도이념은 아니었다.


"지주적 귀족제와 절대군주제가,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발전해가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대중에게 정치의식과 정치적 활동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 대중에게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1848년에 마침내 폭발했다."
- [혁명의 시대], <16.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62.


2. [자본의 시대 : 1848~1875](1975)


"1848년의 혁명은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세계적인 혁명이었으니...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은 단지 (수적으로 아직 부족했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수행됐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서도 수행됐던 것이다. 그 목표는 그저 아무 공화국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2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대결의 판가름은 2월의 파리에서가 아니라 6월의 파리에서 일어났다."
- [자본의 시대], <1. '여러 국민들의 봄'>, 에릭 홉스봄, 1975.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도시빈민들의 유럽혁명을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 1부 전체를 할애하여 '여러 국민들의 봄'이라 명명하고는 그 시작과 실패를 고찰한다. 아마도 '프라하의 봄'을 연상하는 이 1848년 유럽 '여러 국민들의 봄'은 아직 다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를 소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지도했다지만 이는 결과적인 분석일 뿐 혁명에 참여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마도 사회적 민주공화국을 바랬을 게다.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되돌린 왕정체제를 다시금 타도했지만 공화국의 권력을 잡은 후 부르주아는 칼끝을 돌려 6월까지 이어진 다수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면서 결국 노동계급의 혁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후 칼 마르크스는 이 1848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양상을 고전적으로 분석했다. 구체제가 아니라 '질서'를 외친 부르주아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노동계급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를 증명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은 대놓고 [자본의 시대]를 '혐오' 또는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이룩한 그 엄청나게 거대한 물질적 성취에 대한 경탄과, 또 좋아하지 않는 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같은책, <머리말>)으로 이 [자본의 시대]를 돌아본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대공업 및 산업 대기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는 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유럽의 '발전된 국가(선진국)'와 세계 각지의 '주변부'를 나눈다. 미국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된 '먼로 독트린'으로 성장 중이었고 당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세계의 공장'은 단연 영국이었다.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농업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체해 버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1867년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이 체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전까지는 사실, 당시의 체제가 '자본주의'였는지 그 무언지 사람들은 관심 없었다. 1848년 유럽혁명이 실패하고, 부르주아 대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성장이 진행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였던 [자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본주의'가 회자되었다. 홉스봄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자본의 역사 일체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일련의 '여명의 지대'를 보여준다. [혁명의 시대]에 부르주아는 '이중혁명'을 했지만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위치짓지 못했고, [자본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인식도 부족했으며, 1848년의 혁명과 1871년의 파리코뮌을  거치면서도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다수'로서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여명의 지대'를 통과하는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종합하면서 이후에나 얻게 되는 통찰들이었다. 
홉스봄과 같은 역사가는 개인적 호불호나 감정을 절제하면서 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줄 뿐이다.

홉스봄이 정리하는 1848~1875년까지의 2부 [자본의 시대]는 그럼에도 명백한 '진보'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지는 철도를 깔고 전선을 놓으며, 엄청난 석탄을 태우고 금광을 캐면서 인류 문명의 양적 성장을 성취했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 생산의 주역으로서 그 다수의 계급의식을 각성하고는 변혁의 주인공으로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1848년 이전, 부르주아지의 안정성은 사회혁명의 공포로 말미암아 제약"되었고 "1870년 이후로는 날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공포가 또다시 그들의 안정성을 적지않게 뒤흔들게 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이 [자본의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도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고 홉스봄은 이 시기를 규정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이상 같은책, <13. 부르주아지의 세계>)라고 말이다.


"세계는 광의와 협의의 두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넓은 의미의 그것은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예컨대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의 그것은 '선진국' 지배 하의 세계경제에 '저개발국(식민지)'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보'는 확실하게 지속했다... '대불황'은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혐오스럽지만) 경제성장, 기술적, 과학적인 전진과 향상,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 [자본의 시대], <16. 결론>, 에릭 홉스봄, 1975.


[혁명의 시대]가 '정(正)'이라면, [자본의 시대]는 '반(反)'의 시대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3부 [제국의 시대]는 '합(合)'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3. [제국의 시대 : 1875~1914](1987)


"... 단순하게 시대구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시점이 존재한다면, 1914년 8월이 그것일 것이다. 그 시점은 부르주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이 책이 마지막이 될 세 권의 책들이 주제로 삼아온 '장기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에 대한 종말을 상징한다... '역설'은 끝이 없었다. '제국의 시대'는 그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겠지만, 사실 그와 같은 역설의 기본적인 전형은 자본주의가 극점에 도달함에 따라 그 진보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자체의 희생자로서, 그것의 '이상한 죽음(strange death)'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내닫고 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세계와 사회였다."
- [제국의 시대], <머리말>, 에릭 홉스봄, 1987.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분할지배하면서 '하나가 된 세계'([자본의 시대], <2-3>)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는 1871년 짧은 기간 후 "경이적, 영웅적, 극적"이자 "비극적"으로 남은 "확실한 사회주의 혁명"([제국의 시대], <2-9. 변화하는 사회>)으로서의 파리코뮌을 묘사하지만 1871년의 파리코뮌 '혁명'이 아닌 1870년대의 중반 어디쯤인 1875년에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1870년대의 상징이다. 가난하고 비참한 '노동빈민'에서 노동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각성된 산업노동자들은 그 시기까지도 아직 전세계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지도이념으로 '혁명'의 주역이 되고 있었다. 단일하거나 통일되지 못한 이 계급은 '혁명'의 시기를 기다린다. 이 시기는 바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는 '대공황'의 시간이다.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제국의 시대]는 이 '대공황' 시기의 중반 즈음인 187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즉 최초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목전이었던 1914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미국 독립전쟁(1776년)과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100주년' 기념은 19세기의 산물인데, 때는 발전된 문물을 만방에 전시하는 '만국박람회'의 세상이었다. 이 [제국의 시대]는 돌아보면 노동계급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젠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에게는 '황금시대(Golden Age)' 또는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이었다. 1815년부터 15년간 이어졌던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만연했다지만, 내적으로는 계급 불평등이 격화되었고, 외적으로는 민족 불평등이 확대심화되었다. 우리나라도 겪었듯, 굳이 1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아니더라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유럽의 자본가만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제국의 시대] 자본가들은 반세기 전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를 이룬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부의 세습과 귀족적 문화에 빠진 상태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문명의 '진보'가 아니었고, 기득권을 위해 여전히 왕정복고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체제에서 식민지는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할 운명이었고 지배계급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국제적 상황은 상존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사라예보의 총성이 아니었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이었다. 레닌은 1916년의 팜플렛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최후(latest)'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그의 사후 이 수식어는 '최고(highest)'의 단계로 수정되었다. 어쨌든 '제국주의'는 당시 일련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우연'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집중과 금융자본 과두제 및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에 이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의 단계였다. "황제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새롭고도 낡은 '제국의 시대'"(같은책, <3.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이었고, 이 '황제'들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었다. 

1917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경험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아마도 1914년을 당시 레닌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았을 것처럼 '문명'의 종말로 진단한다. '진보'의 이름으로 지속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은 아니라도, '장기 19세기' 내내 이룩해 온 문명은 "한 세계의 내재적인 죽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필요성이라는 각성"(같은책, <머리말>)의 시간을 지난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의 주역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대중정당,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민주주의와 식민지 민족주의 해방투쟁이었다.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불확실성"(같은책, <7장>)과 "혁명을 향하여"(같은책, <12장>) 전진하는 다수 노동계급의 운동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노동계급이 죽고 혁명성이 꺾이기를 바랐겠지민,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은 1차 대전이 주요 배경이었고, 홉스봄은 말하지 않지만 1949년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배경도 2차 대전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배경은, "30년간의 장기적 평화기에 영국의 석탄광부들은 연평균 1,430명이 사망했고 16만5,000명(전체 노동력 가운데 약 10퍼센트 이상)이 부상"을 당한 '아름다운 시절'과 '평화'의 실체였다.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군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었다"(같은책, <13. 평화에서 전쟁으로>)고. 지금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사를 넘나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자본가의 뜻대로 누더기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에릭 홉스봄은 '혁명'을 존중하고 '자본'을 혐오할 것이지만, 역사학자 홉스봄은 이 자본주의 근대사 일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한 점이 여실하다.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은 각 권의 사상이나 철학, 이성이나 예술 등을 논할 때 틈만 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행적과 사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당장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마르크스 조차도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후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는 아주 오랜 후의 일이며, 어쩌면 러시아 차르체제의 농노 촌락공동체(미르공동체)로부터 혁명의 동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후기의 사유행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 역사는 가장 혁명에 "적실성"(같은책, <12. 혁명을 형하여>)을 가졌던 러시아혁명의 주요 동력이었던 '소비에트'의 원형이 이 러시아식 '촌락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책이 보여주려고 했듯, 어떤 이들에게 '제국의 시대'는 커져가는 어려움과 두려움의 시대였지만 부르주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희망의 시대'였다... '희망의 여지'... 인류에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막혀있지 않다."
- [제국의 시대], <글을 마치며>, 에릭 홉스봄, 1987.


'장기 19세기'를 1962년부터 1987년까지 25년에 걸쳐 정말 장기적으로 돌아본 역사학자로서 에릭 홉스봄의 결론은 이렇다.
1789~1914년으로 특징지어졌던 그 시대는 '진보'의 '유토피아'를 누구나 꿈꾸었던 시대였던 바, "부르주아는 멈추지 않는 물질적, 지적, 도덕적 진보를 기대"했고, "프롤레타리아들 또는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혁명'을 통해 달성되기를 기대했다"(같은책, <글을 마치며>). 
그 속에서 이 노회한 역사가는 '희망의 시대'를 말한다. 

결국, 홉스봄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 3부작을 읽는 내내 나는,
흡사 런던의 대학에서 값진 역사학 강의 한과목을 들은 듯 했다.

***

1.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2.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3.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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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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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본 '희망의 시대'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 - 에릭 홉스봄


"앞서 출간된 두 책([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제국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자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 [제국의 시대], <서문>, 에릭 홉스봄, 1987.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20세기 초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국주의'의 아이였던 홉스봄은 1987년 자신의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저작인 [제국의 시대]의 <머리말>을 본인의 부모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만난 국제주의적 연애로 태어난 70세의 노학자가 돌아본 '제국의 시대'에 관한 개인적 기억으로부터. 
저자는 이를 '여명의 지대'라 하는데, 역사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건의 나열이 아니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해온 인류 근대사에서 '여명의 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 사회를 통과하던 70대의 홉스봄 개인을 만든 '여명의 지대'는 [제국의 시대]였고, 역시 이 시대를 거슬러오르는 '여명의 지대'는 1789년부터 시작하는 [혁명의 시대]와 1848년부터 시작하는 [자본의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초까지 돌아보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 '장기(長期)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의 정치경제, 사회문예 등 당대 모든 문명의 역사를 통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고자 한다.
3부작의 시작인 1부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2부는 1848년 유럽혁명부터, 3부가 1875년 유럽 대공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홉스봄이 주목하는 사건은 자본주의 '공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혁명'이다. 
첫 권의 제목이 [혁명의 시대]인 이유다.


1. [혁명의 시대 : 1789~1848](1962)


"1789~1848년의 위대한 혁명은 '공업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였으며, '자유', '평등' 일반의 승리가 아니라 '중류계급'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및 (영국) 랭커셔에서 근대 최초의 공장제도 건설('이중혁명')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역사적 시기는, 최초의 철도망 건설 및 [공산당선언]의 출간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혁명의 시대], <머릿말>, 에릭 홉스봄, 1962.


홉스봄은 새삼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학자로서 새롭게 평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근대 부르주아혁명의 배경인 1780년대 정치경제적 토대에 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이 [혁명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다. 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공화정을 건설한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증기기관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과 대공장제의 시초를 연 영국의 경제혁명을 지칭한다. '이중혁명'을 통해 영국은 중세농업을 청산하고 도시 중심의 대공업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는 대중민주주의의 두려움을 각국의 지배계급에 선사했다. 물론 '이중혁명'으로 신흥 부르주아지가 곧바로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지주와 귀족, 몇 나라를 빼고는 왕족이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부르주아는 경제영역에서 자본가로서 부상하고 있었고, 이 시대에는 아직 다수가 아니었던 도시 노동빈민들(프롤레타리아의 기반)은 먹고살기 힘들때 언제든 정치권력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혁명'의 담지자가 되었다. 

[혁명의 시대] 전반부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중혁명' 이야기, 1815년부터 이어진 나폴레옹의 유럽전쟁과 나폴레옹 실각 후의 평화시기와 왕족과 귀족이 아닌 혁명을 통한 국민국가 형성의 <전개과정>을 살핀다. 후반부는 그 <결과>로서 토지 문제와 산업사회, 초기 부르주아의 '능력주의'와 노동빈민 문제는 물론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축으로 예술과 과학의 영역까지 설명한다. 당시 지배적 정치권력이 왕족, 귀족 또는 지주에게 있었으므로 토지 문제는 2부인 [자본의 시대]까지 이어지나 주내용은 봉건세습이 아닌 상품으로 전환되는 경제학 3요소 중 하나로서 토지 형태 분석이다. 봉건세습을 혁파한 초기 부르주아지는 오로지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했다는 사실과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의 다수화는 "이제는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계급, 즉 노동계급인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또 하나의 계급인 고용자 또는 자본가와 맞서고"(같은책, <11. 노동빈민>) 있는 상황을 분석한다. 과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홉스봄은 이 [혁명의 시대]에 출현한 '낭만주의'에서 그 혁명성을 보는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를 쓴 미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와 맞닿는 지점이다. 
물론 '낭만주의'에 '혁명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 19세기'의 전반부를 거치면서 1840년대 후반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공황까지는 아니지만 농업사회 대기근이 발생했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다수 농민들과 도시빈민들은 또 다시 혁명을 시작한다. 

[혁명의 시대]는 이 1848년 유럽혁명을 앞두고 끝을 맺는다.
그리고 아직, 혁명을 지도하는 '사회주의'는 그 과정에서 지배적인 지도이념은 아니었다.


"지주적 귀족제와 절대군주제가,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발전해가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대중에게 정치의식과 정치적 활동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 대중에게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1848년에 마침내 폭발했다."
- [혁명의 시대], <16.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62.


2. [자본의 시대 : 1848~1875](1975)


"1848년의 혁명은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세계적인 혁명이었으니...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은 단지 (수적으로 아직 부족했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수행됐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서도 수행됐던 것이다. 그 목표는 그저 아무 공화국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2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대결의 판가름은 2월의 파리에서가 아니라 6월의 파리에서 일어났다."
- [자본의 시대], <1. '여러 국민들의 봄'>, 에릭 홉스봄, 1975.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도시빈민들의 유럽혁명을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 1부 전체를 할애하여 '여러 국민들의 봄'이라 명명하고는 그 시작과 실패를 고찰한다. 아마도 '프라하의 봄'을 연상하는 이 1848년 유럽 '여러 국민들의 봄'은 아직 다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를 소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지도했다지만 이는 결과적인 분석일 뿐 혁명에 참여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마도 사회적 민주공화국을 바랬을 게다.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되돌린 왕정체제를 다시금 타도했지만 공화국의 권력을 잡은 후 부르주아는 칼끝을 돌려 6월까지 이어진 다수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면서 결국 노동계급의 혁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후 칼 마르크스는 이 1848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양상을 고전적으로 분석했다. 구체제가 아니라 '질서'를 외친 부르주아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노동계급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를 증명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은 대놓고 [자본의 시대]를 '혐오' 또는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이룩한 그 엄청나게 거대한 물질적 성취에 대한 경탄과, 또 좋아하지 않는 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같은책, <머리말>)으로 이 [자본의 시대]를 돌아본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대공업 및 산업 대기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는 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유럽의 '발전된 국가(선진국)'와 세계 각지의 '주변부'를 나눈다. 미국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된 '먼로 독트린'으로 성장 중이었고 당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세계의 공장'은 단연 영국이었다.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농업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체해 버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1867년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이 체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전까지는 사실, 당시의 체제가 '자본주의'였는지 그 무언지 사람들은 관심 없었다. 1848년 유럽혁명이 실패하고, 부르주아 대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성장이 진행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였던 [자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본주의'가 회자되었다. 홉스봄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자본의 역사 일체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일련의 '여명의 지대'를 보여준다. [혁명의 시대]에 부르주아는 '이중혁명'을 했지만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위치짓지 못했고, [자본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인식도 부족했으며, 1848년의 혁명과 1871년의 파리코뮌을  거치면서도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다수'로서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여명의 지대'를 통과하는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종합하면서 이후에나 얻게 되는 통찰들이었다. 
홉스봄과 같은 역사가는 개인적 호불호나 감정을 절제하면서 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줄 뿐이다.

홉스봄이 정리하는 1848~1875년까지의 2부 [자본의 시대]는 그럼에도 명백한 '진보'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지는 철도를 깔고 전선을 놓으며, 엄청난 석탄을 태우고 금광을 캐면서 인류 문명의 양적 성장을 성취했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 생산의 주역으로서 그 다수의 계급의식을 각성하고는 변혁의 주인공으로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1848년 이전, 부르주아지의 안정성은 사회혁명의 공포로 말미암아 제약"되었고 "1870년 이후로는 날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공포가 또다시 그들의 안정성을 적지않게 뒤흔들게 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이 [자본의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도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고 홉스봄은 이 시기를 규정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이상 같은책, <13. 부르주아지의 세계>)라고 말이다.


"세계는 광의와 협의의 두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넓은 의미의 그것은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예컨대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의 그것은 '선진국' 지배 하의 세계경제에 '저개발국(식민지)'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보'는 확실하게 지속했다... '대불황'은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혐오스럽지만) 경제성장, 기술적, 과학적인 전진과 향상,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 [자본의 시대], <16. 결론>, 에릭 홉스봄, 1975.


[혁명의 시대]가 '정(正)'이라면, [자본의 시대]는 '반(反)'의 시대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3부 [제국의 시대]는 '합(合)'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3. [제국의 시대 : 1875~1914](1987)


"... 단순하게 시대구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시점이 존재한다면, 1914년 8월이 그것일 것이다. 그 시점은 부르주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이 책이 마지막이 될 세 권의 책들이 주제로 삼아온 '장기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에 대한 종말을 상징한다... '역설'은 끝이 없었다. '제국의 시대'는 그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겠지만, 사실 그와 같은 역설의 기본적인 전형은 자본주의가 극점에 도달함에 따라 그 진보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자체의 희생자로서, 그것의 '이상한 죽음(strange death)'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내닫고 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세계와 사회였다."
- [제국의 시대], <머리말>, 에릭 홉스봄, 1987.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분할지배하면서 '하나가 된 세계'([자본의 시대], <2-3>)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는 1871년 짧은 기간 후 "경이적, 영웅적, 극적"이자 "비극적"으로 남은 "확실한 사회주의 혁명"([제국의 시대], <2-9. 변화하는 사회>)으로서의 파리코뮌을 묘사하지만 1871년의 파리코뮌 '혁명'이 아닌 1870년대의 중반 어디쯤인 1875년에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1870년대의 상징이다. 가난하고 비참한 '노동빈민'에서 노동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각성된 산업노동자들은 그 시기까지도 아직 전세계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지도이념으로 '혁명'의 주역이 되고 있었다. 단일하거나 통일되지 못한 이 계급은 '혁명'의 시기를 기다린다. 이 시기는 바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는 '대공황'의 시간이다.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제국의 시대]는 이 '대공황' 시기의 중반 즈음인 187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즉 최초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목전이었던 1914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미국 독립전쟁(1776년)과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100주년' 기념은 19세기의 산물인데, 때는 발전된 문물을 만방에 전시하는 '만국박람회'의 세상이었다. 이 [제국의 시대]는 돌아보면 노동계급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젠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에게는 '황금시대(Golden Age)' 또는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이었다. 1815년부터 15년간 이어졌던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만연했다지만, 내적으로는 계급 불평등이 격화되었고, 외적으로는 민족 불평등이 확대심화되었다. 우리나라도 겪었듯, 굳이 1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아니더라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유럽의 자본가만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제국의 시대] 자본가들은 반세기 전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를 이룬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부의 세습과 귀족적 문화에 빠진 상태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문명의 '진보'가 아니었고, 기득권을 위해 여전히 왕정복고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체제에서 식민지는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할 운명이었고 지배계급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국제적 상황은 상존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사라예보의 총성이 아니었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이었다. 레닌은 1916년의 팜플렛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최후(latest)'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그의 사후 이 수식어는 '최고(highest)'의 단계로 수정되었다. 어쨌든 '제국주의'는 당시 일련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우연'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집중과 금융자본 과두제 및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에 이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의 단계였다. "황제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새롭고도 낡은 '제국의 시대'"(같은책, <3.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이었고, 이 '황제'들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었다. 

1917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경험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아마도 1914년을 당시 레닌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았을 것처럼 '문명'의 종말로 진단한다. '진보'의 이름으로 지속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은 아니라도, '장기 19세기' 내내 이룩해 온 문명은 "한 세계의 내재적인 죽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필요성이라는 각성"(같은책, <머리말>)의 시간을 지난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의 주역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대중정당,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민주주의와 식민지 민족주의 해방투쟁이었다.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불확실성"(같은책, <7장>)과 "혁명을 향하여"(같은책, <12장>) 전진하는 다수 노동계급의 운동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노동계급이 죽고 혁명성이 꺾이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은 1차 대전이 주요 배경이었고, 홉스봄은 말하지 않지만 1949년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배경도 2차 대전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배경은, "30년간의 장기적 평화기에 영국의 석탄광부들은 연평균 1,430명이 사망했고 16만5,000명(전체 노동력 가운데 약 10퍼센트 이상)이 부상"을 당한 '아름다운 시절'과 '평화'의 실체였다.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군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었다"(같은책, <13. 평화에서 전쟁으로>)고. 지금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사를 넘나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자본가의 뜻대로 누더기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에릭 홉스봄은 '혁명'을 존중하고 '자본'을 혐오할 것이지만, 역사학자 홉스봄은 이 자본주의 근대사 일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한 점이 여실하다.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은 각 권의 사상이나 철학, 이성이나 예술 등을 논할 때 틈만 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행적과 사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당장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마르크스 조차도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후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는 아주 오랜 후의 일이며, 어쩌면 러시아 차르체제의 농노 촌락공동체(미르공동체)로부터 혁명의 동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후기의 사유행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 역사는 가장 혁명에 "적실성"(같은책, <12. 혁명을 형하여>)을 가졌던 러시아혁명의 주요 동력이었던 '소비에트'의 원형이 이 러시아식 '촌락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책이 보여주려고 했듯, 어떤 이들에게 '제국의 시대'는 커져가는 어려움과 두려움의 시대였지만 부르주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희망의 시대'였다... '희망의 여지'... 인류에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막혀있지 않다."
- [제국의 시대], <글을 마치며>, 에릭 홉스봄, 1987.


'장기 19세기'를 1962년부터 1987년까지 25년에 걸쳐 정말 장기적으로 돌아본 역사학자로서 에릭 홉스봄의 결론은 이렇다.
1789~1914년으로 특징지어졌던 그 시대는 '진보'의 '유토피아'를 누구나 꿈꾸었던 시대였던 바, "부르주아는 멈추지 않는 물질적, 지적, 도덕적 진보를 기대"했고, "프롤레타리아들 또는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혁명'을 통해 달성되기를 기대했다"(같은책, <글을 마치며>). 
그 속에서 이 노회한 역사가는 '희망의 시대'를 말한다. 

결국, 홉스봄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 3부작을 읽는 내내 나는,
흡사 런던의 대학에서 값진 역사학 강의 한과목을 들은 듯 했다.

***

1.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2.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3.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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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대 -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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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적 이상'
- [제국의 시대], 백승종, <김영사>, 2022.


"세계를 지배하려면 '보편적 이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공한 제국은 개인과 민족을 평등하게 대접하였다. 고대 로마제국이든 몽골제국이든 그런 점에서 자국의 지배를 설득할 수 있었다."
- [제국의 시대], <7. 현대의 세계제국들>, 백승종, 2022.


세계사의 무대에서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했다. 인류 사회의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축적된 잉여가치를 사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지역의 씨족들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정치경제적 권력투쟁을 위해 부족연합이 결성되었다. 무력을 독점하는 고대국가 중앙권력의 시초는 이 부족들의 연합체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고대국가의 형태가 그랬다. 부족연맹체에 머물렀던 가야는 고대국가체제를 건설하지 못했기에 '삼국시대'라 불린다. 고구려를 북방의 대제국으로 보는 민족사학의 견해도 있다. 7세기 들어 고구려 영양왕 대에 '고구려왕조실록'으로 추정되는 [대경]을 정리한 100권에 이르는 역사서 [유기]를 왕명에 따라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 5권으로 요약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아쉽게도 고구려의 '정사' [유기]는 후세에 남지 못하였다. 역사작가 정재수 선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박물관에서 필사한 [고구려사략]이 아마도 [유기]의 요약본이라고 하나 아직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다. 5세기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는 [유기]로 추정되는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고구려사략]에 더 가까운데도 말이다. 주류 실증주의 역사학은 아직 고구려가 '제국'이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역사고증은 유물은 물론 문헌기록 자료가 매우 중요한데, '제국(帝國)'이 되려면 '민족' 단위를 초월하는 '보편적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그 증거가 부족한것도 사실이다.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2022년에 '역사를 움직이는 힘과 원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을 파헤치는 책 [제국의 시대]에서 '세계를 지배'하려면 '보편적 이상'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보편적 이상'이란 구체적으로 특정하기 쉽지 않다. 각 시대의 계급과 민족의 역관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제국'이 되었든 그 어떤 체제가 되었든, "세계를 지배"하려는 집단은 "개인과 민족을 평등하게 대접했다"(같은책, <7장>)는 사실이 중요하다. 백승종 선생은 유발 하라리처럼 "제국이 가장 효율적인 체제"([사피엔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제국'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이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저자는 로마의 역사에서 인상깊은 점을 '시민의 권리존중'과 '실용정신'을 든다. 제국은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아카드 제국에서 유래했겠지만 해당 지역 뿐만 아니라 지중해 일대를 넘어 유럽과 근동지역까지 광대한 영토를 최초로 경영했던 로마는 단연 본격적인 '사상 최초의 초강대국'이었다. 로마 멸망의 원인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할 수 없었던 본질적 한계였든, 그로 인한 이민족의 유입이었든, 5세기 '소빙하기' 같은 기후변화와 전염병이었든 전성기 후 쇠락과 멸망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다만, 서로마와 동로마(비잔틴)를 아울러 2천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점은 '시민의 권리존중'과 이로 인해 가능했던 '실용주의'였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의 역사는 한 세기 정도로 짧지만, 북방 초원의 타타르족 고유의 신앙은 물론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까지 아우르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했던 '포용정신'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와 동유럽까지 이어지는 그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없었다. 몽골족은 기병 중심의 전투를 수행했고 이슬람 상인들은 이 침략전쟁의 병참을 도맡았다. 그 '실용성'으로 인해 실크로드를 매개로 상업이 활발해졌다. 원나라로 중원에 정착한 몽골제국은 그들이 두려워했던 중국 한족을 너무 심하게 차별한 나머지 결국 한족의 독립투쟁으로 인해 멸망했지만 몽골제국의 짧은 역사는 기존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온 동서 문화교류(전염병까지 포함)를 인류 역사에서 기정사실화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차르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 조롱받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이슬람 종교만을 인정하기 시작한 제국 후반에 이르렀을 때는 '환자'가 맞았다. 제국의 권력은 '하렘'의 왕후와 간신들에게 있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술탄은 제왕의 수업은 받을 새도 없이 향락에 취해 살다가 죽어갔다. 그러나 막강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건 전성기의 오스만 투르크였고 이 당시만 해도 그들은 동서양 문화의 중간지대로 로마와 몽골제국 못지 않은 '포용'과 '실용'을 갖추었다. 오죽하면 오스만 투르크에 막힌 육로를 피해가려고 스페인과 영국 등이 노력한 결과가 16세기 바다로 돌아가는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라 하겠는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이 '1789~1914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3부작의 마지막 권인 1987년 저서와 동명의 책 [제국의 시대]를 통해 저자 백승종 교수는 제국의 '포용성'과 '실용성'의 중요함을 보여준다. '제국'이라는 특정체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보편적 이상'이 투영되고 실현되었던 특정 '제국'들이 잠시나마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역시 역사학자 선학인 에릭 홉스봄의 뒤를 이어 '제국'의 역사를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그 '제국'들이 남긴 '시대'의 유산을 이야기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믿을 만한가... 역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란 극히 어렵다... 모두가 신뢰할 만한 역사지식을 얻으려면 자국 중심의 편향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물론 겸허한 모습으로 역사의 거울 앞에 서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 [제국의 시대], <저자의 글>, 백승종, 2022.


역사학자이기에 저자는 더더욱 "역사 앞에서 겸손하기"(같은책, <저자의 글>)를 강조한다. 모든 것이 아마추어의 눈에는 만만해 보이는 것 같지만 깊이 연구하고 성찰한 전문가일수록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만물을 용광로처럼 녹여서 '보편화'시켰던 제국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한 자리에 후세들은 또 다시 '보편적 이상'에 따른 문명을 만들어낸다.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것이든 진부한 것이든 다시금 건설이 시작된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한 시대를 주도했던 대영제국과 독일,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조선의 역사를 거쳐 미소 냉전과 현재의 러시아, 중국, 미국의 강대국 경쟁을 살피는 저자는 역시 역사 앞에 '겸손'하지 못한 '제국'의 미래는 밝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제국의 시대]는 현재 '기후위기'로 인한 '생태주의'와 '에너지 전환',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 영토의 '제국'이 아닌 '강소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마치는데, 역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제국'이 아니라 '보편적 이상'이다. 

그 실체가 무엇이 되었든, '보편적 이상'은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까지 관통하는 사상이다. 
'제국'이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이상'이 '세계를 지배'한다. 아직 어리숙한 나의 눈에는 그 '보편적 이상'은 역사를 움직여온 다수 민중들의 '평등'이다. 한편, 역사학자인 저자에게는 다수 시민들의 '자유'로 보인다. 물론 '평등'과 '자유'는 서로 비교할 개념은 아니다.
노동역사기록자 안재성 선생의 말처럼,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평등'이 없는 곳에서는 '평등'을 위해 싸울 뿐이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님 덕분에, 그 동안 미뤄왔던 에릭 홉스봄의 고전,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 3부작을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 3부작을 통독하기 전까지 '주간 문사철' 내 마음대로 '서평'은 잠시 멈추기로 한다.

***

1. [제국의 시대], 백승종, <김영사>, 2022.
2.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3. [로마의 운명](2017), 카일 하퍼,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4.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5.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6.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7.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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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브랜드가 되다 - 역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의 글쓰기, 인쇄, 출판 전략
앤드루 페트그리 지음, 김선영 옮김 / 이른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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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배반'의 시간 : 1999~2022년
- [루터, 브랜드가 되다], 앤드루 페트그리, 2015.


"인쇄술은 루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다. 루터 역시 독일 인쇄업을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힘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에 많은 것이 서로 협력하며 불가능해 보였던 루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그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쇄술'이었다...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합심한 독일인들의 결의였다... 하지만 '저술가'로서 본능적이고 빼어난 재능이 없었다면 루터는 결코 독일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 이후 '출판업'과 대중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는 비범한 인물에 걸맞는 비범한 유산이었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4-12. 유산>, 앤드루 페트그리, 2015.


1.

90학번 선배가 입당원서를 내밀었다. 
눈앞에 한 줄기 빛이 잠시 스쳤다. 나는 바로 서명했다. 아직 학생이었으니 당비는 아마 매월 5천원이었을 게다. 
민주노총이 결국 해냈다, 고 판단했다.

1999년도 민주노동당 창당준비를 할 때 우리 학교에도 입당원서가 돌았다. 내가 군입대 전이었던 1995년은 1990년 설립된 전노협의 중소기업 직종연대의 선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줄곧 강화되어 온 대기업 노동조합 흐름과 결합하여 전국 단위의 노동조합 총연맹을 추진하던 해였다. 이승만 분단정권의 '대한노총'이 전신인 '한국노총'은 애초에 어용노조들의 연합이니 이제 진정한 민주노조들의 '내셔널센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름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줄여서 '민주노총'이었다. 민주노총은 경제투쟁을 앞세우는 '조합주의'가 아니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전면에 걸었다. 민주노총은 창립과 함께 '노동자정당'을 건설할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다가올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함께 이야기하고 기대하던 나는 아쉽게도 민주노총 창립대회 한달 전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노동자가 될 내 눈 앞에 역시 한 줄기 광명의 빛이 내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6년에 나는 부대에서 민주노총의 구조조정 저지 총파업 소식을 들었고, 전역을 한 1997년 12월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위였던 민주노총이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고 본격적 노동계급 대선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물론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탈계급적 슬로건을 내건 권영길 후보의 결의에 찬 삭발투혼이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치던 호국당 스님후보와 헷갈리면 어쩌나 염려되기도 했던 군소후보 상황이었지만 학교앞 친구의 자취방에서 군소후보 티비토론을 보던 나는 그래도 조금 가슴이 벅차 올랐다.

21세기 초벽두의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대회에서는 신입사원 노동자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 최초의 진보정당의 이름을 짓는 데 작지만 한 표를 행사하기도 했다. 지금은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이 된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선배는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밀었고, '정치'적 등급으로 친다면 그보다 좀 아래였을 다수의 노동자들, 아마도 대부분 민주노총 조합원이었을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지지했을 것이다. 최초의 진보정당의 당명에는 반드시 '노동'이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민주노총 조합원인 나도 '민주노동당'에 한 표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알았지만 '민주노동당'은 오롯이 '노동자정당'은 아니었다. 민주노총은 물론 전국연합의 민족주의 세력,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거대 보수정당 연합에서 배제된 소수 재야정치인 등이 뭉친 '정파연합당'이었다. 무릇 정치란, 통합과 합의, 타협과 연합의 예술이라지만 그 당시 이십대의 나에게 그러한 '정치'의 역사는 타파해야할 구습이었다. 신입사원이라 정신도 없었지만 선배의 지역구에 페이퍼당원으로 남아있던 나는 결국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보고는 내가 사는 지역구 민주노동당 지구당사를 찾아갔고 그 동안 밀린 당비를 특별당비 형식으로 내고는 지구당적을 거주지로 옮겼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우리 사회 '부르주아민주정권'의 마지막 징후였다. 이제 다음은 '노동자민중권력'의 시대라고 나는 감히 예측했고 그 무기는 바로 '진보정당'이었다. 
도봉구 지구당으로 당적을 옮긴 나는 퇴근 후 많은 사람들을 지역에서 만났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은 공직선거와 같은 의회주의 투쟁을 하기 위해 활동가가 필요했고 상근자가 절실했다. 노동자들의 소박한 활동만으로는 보수정당과 선거투쟁을 치를 수가 없었다. 점점 더 많은 활동가와 명망가까지 진보정당의 지역구에 연결되었다. 사람들과 만나서 놀고 이야기하고 술마시는 게 실은 더 좋았던 나는 점점 진보정당 지역운동보다 내가 일하는 직장의 노동조합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건 나의 조직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퇴행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편'을 정하고 싶었다.

'의회정치'가 아니라 '계급정치'의 '편'으로 말이다.


2.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이런 기존 독자층에 속하지 않는 많은 구매자에게 책을 제공했다...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종류의 책을 요구했다. 디자인과 관련된 이런 도전을 해결해 나가면서 독일 인쇄업자들은 점차 독특하고 즉각 알아볼 수 있는 스타일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바로 '루터 브랜드(Luther Brand)'였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2-6. 루터 브랜드>, 앤드루 페트그리, 2015.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다. '반대하는 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운동은 천 년 왕국의 권위를 누려 온 '보편적 교회' 가톨릭 교황에 명확히 반대하기 시작한 대중운동이었다. 독일봉건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북독일 지역 소도시 비텐베르크가 그 중심지였고, 대부분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강직한 사제 루터는 평생 교황과 타협하지 않았다. 파문당하고 목숨도 위태로운 이 투쟁에서 루터를 지켜준 것은 그의 글쓰기, 인쇄술과 출판업, 그리고 교황에 적대적인 제후들의 기득권 정치권력동맹이었다. 
그리고 잊으면 안되는 요소, 바로 민중에 대한 '배반'도 빠뜨릴 수 없겠다.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루 페트그리(Andrew Pettegree)는 종교개혁의 역사와 인쇄술 및 출판업, 그리고 책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가 2015년에 낸 [루터, 브랜드가 되다(Brand Luther)]라는 책은 단순한 루터의 전기는 아니다. 루터의 결연한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객관적 요인으로 페트그리는 루터의 왕성한 자국어 글쓰기 능력과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 50년 후 시골도시에서 인쇄업을 대중적으로 번창하게 만든 루터의 관심,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변함없는 출판업의 대성공을 주목하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교황의 '면벌부(면죄부:Indulgence)'의 문제점을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교회문에 게시했을 때, 사실 '면벌부' 반박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단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도 가톨릭 교황의 이런 행태를 비판했고 정신 제대로 박힌 각지 민중의 성직자들은 이미 자신의 지역에서 반교황의 종교개혁 투쟁을 전개해 온 터였다. 루터보다 한 세기 전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 1372~1415)가 화형에 처해진 후 오랜 동안 '후스운동'으로 봉기한 농민반란은 교황은 물론 당시 농노들을 착취하던 정치권력에 대한 반정부투쟁의 성격도 강했다. 그러나 백년 후 루터에게는 있었으나 백년 전 후스에게는 없었던 것이 바로 '인쇄술'이었다. 루터 시기 바로 전에 시작된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혁명은 르네상스 본거지 이탈리아나 남독일 또는 절대왕정 프랑스에서는 활발했을지 모르나 루터가 자리잡은 북독일 비텐베르크 지역에서는 운영 자체가 어려웠다. 라틴어로 낸 인쇄물을 읽을 사람도, 유통할 필요도 없었던 것인데, 라틴어도 유려하게 구사한 젊은 성직자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수 루터는 반교황 투쟁을 라틴어만이 아니라 주로 자국어인 독일어로 썼고 지역 인쇄업자가 자신의 저작들을 출간하는 과정을 일일이 관리했다. 디자인과 판형, 문체와 교정 일체를 인쇄업자가 아닌 저자인 루터 자신이 지휘했다. 또한 한 곳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다소 부족한 업자라도 고르게 배분했단다. 루터가 탐욕스러운 교황체제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규정하며 열었던 '새로운 교회'에서는 독일어로 된 성경을 누구나 읽으며 설교를 들었고 자국어로 찬송가를 함께 불렀으며 소년과 소녀를 망라하면서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을 강조했다. 이것이 루터가 쓴 반교황 반박문건에 대해 라틴어로만 반박하려던 그의 친교황 논적들이 결코 루터를 이길 수 없었던 배경이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루터는 도시 시민들의 지지와 함께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했고, 도시산업으로서의 '인쇄술'과 '출판업'이라는 무기를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대폭 강화하고 증폭시켰으며 전유럽으로 확장시켰다. 물론 교황과 대립하던 비텐베르크의 프리드리히 현공의 정치적 후원이 없었다면 루터 또한 파문에 이어 화형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한 저작권이나 저작료 일체를 주장하지 않은 강직하고 단호한 성직자 루터는 한편으로 인쇄업을 실질적으로 경영했고 정치권력과 실질적으로 결탁했다. 루터를 보호해 준 프리드리히 현공은 반교황의 기치는 내걸었으되 교황이 팔던 '면벌부(면죄부)'와 '성유물'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수집했다. 

루터의 추종자 중 급진적이었던 토머스 뮌처가 농민반란군의 반정부투쟁에 개입하고 이 농민투쟁이 루터를 보호해주던 봉건지주계급에 도전했을 때 루터는 어쩔 수 없이 '편'을 정해야 했다. 지주의 세속권력과 그리스도의 영적권력의 통합을 바라던 루터는 현재의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계급투쟁과 선을 그었다. 교황의 탐욕과 부패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던 루터의 단호함은 1525년 농민전쟁의 참혹한 패배 후 민중들의 생존투쟁도 용인하지 않았다. 어쩌면 종교개혁의 '대의'를 위한 현실적 계급타협이었을 수도, 애초부터 계급투쟁일 수가 없었을 종교개혁 자체의 한계였을 수도 있겠다.


"가난하고 재산을 박탈당한 자들은 1525년에 루터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가혹한 깨달음을 얻었다. 1525년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결국 그 순수성을 상실한 해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쇄신과 갱신 운동을 이끌던 루터의 지도력이 고취한 원대한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프랑켄하우젠에서의 (농민전쟁의) 끔찍한 결말은 루터가 말한 희망은 내세에서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루터가 보기에 사회 복음의 약속은 당치 않은 것이었고 결국 참혹한 망상이었다."
- [루터, 브랜드가 되다], <3-9. 결별>, 앤드루 페트그리, 2015.


반교황 종교개혁운동의 지도자 마르틴 루터에게는 논적도 많았지만 정치적 후원자는 물론 실천적이고 지적인 동지도 많았다. 이 동지들은 루터 사후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계승권 투쟁을 벌이지만 정작 종교개혁가 루터는 그 어떤 성상과 성인숭배는 배척했다. 아마도 예수도 마르크스도 같았겠지만, '개인숭배'는 인류의 역사에서 인상깊은 운동의 후유증과도 같다. 루터와 동시대 스위스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돼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발하며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는데, 츠빙글리의 후예 칼뱅은 루터 사후의 '유산싸움' 중에 종교개혁계에 '칼뱅주의'를 확장한다. 1세대 루터처럼 지역 권력과 결탁하여 지역 도시민에 밀착한 운동보다는 영국과 프랑스까지 넓혀가는 종교개혁운동 두번째 시즌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드루 페트그리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전공인 '인쇄술'과 '출판업', '글쓰기'와 '책', 그리고 '대중 커뮤니테이션'의 역사에서 루터가 남긴 유산 일체를 '루터 브랜드([Brand Luther])'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3.

역시나 2022년의 이번 대선에서도 수구정당과 '민주당'이라는 오랜 역사의 보수정당이 대격돌을 하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 후보의 발차기와 야당인 검찰총장 출신 후보의 어퍼컷이 난무하고, 또 역시나 '노동'은 오래전 '노동운동'을 했던 명망가들이 명판만 챙겨서 들고는 '민주당'으로 대거 들어갔다.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기대했던 '노동자정당'은, 2016~2017년 촛불항쟁 후 들어선 민주정권의 정체와 퇴행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십대와 삼십대에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에 언뜻 보았던 '한 줄기 빛'의 환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이미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운명은 항상 나를 빗겨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 또한 루터처럼 '편'을 정하기 시작했는가 보다. 차이가 있다면, 루터의 당파성은 '대의'가 있었고 지금의 나는 다분히 '생계'형이라는 점 뿐이다. 반교황적이었으나 반민중적이었던 루터의 단호함은 얼핏 '생계형'으로 볼 수 없겠다.

말과 글로만 씨부리던 르네상스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적그리스도' 교황에게 말과 글은 물론 온몸으로 끝까지 저항하던 루터의 손을 끝내 잡지 않은 이유가 '평화'를 사랑해서였다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보고 그 옛날에 훈족 아틸라를 보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 '신의 채찍' 또는 '하느님의 회초리'로 여기던 루터는 말년에 정치권력과 더 견고히 결탁하면서 그 '이단적 악마'인 투르크 무슬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해서 그렇지 종교개혁 내내 '평화'를 옹호했음에도 말이다. 다수 농민들의 생계형 '전쟁'을 루터는 한사코 거부했다.

21세기 초에 노무현 정부를 '마지막' 민주정부로 오판하고 다음은 '노동자 진보정당'의 차례라고 내가 생각했을 때, 그 근거는 말할 것도 없이 다수 노동자와 민중의 일상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믿음이었다. 
대선 후보 발차기의 원조와 짝퉁을 가리자는 희극과 느닷없는 어퍼컷 응수가 재미있기는 해도 나는 대선토론회는 물론 관련 뉴스도 잘 읽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변함없이 거대보수정당들의 기득권동맹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편' 들어주는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다.

단호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농민들을 '배반'했던 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듯이, 나 또한 당선 가능성 없는 '사표'를 행사할 이유가 있다.

나의 생활은 거대 보수양당이 발차기와 어퍼컷을 주고받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그랜드 슬램 한 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1. [루터, 브랜드가 되다(Brand Luther)](2015), 앤드루 페트그리, 김선영 옮김, <이른비>, 2022.
2. [유럽민중사](2016), 윌리엄 펠츠,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18.
3.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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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2-02-27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63빌딩에서 당명 정할 때 투표했었어요... ^^

beatrice1007 2022-02-27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활기차고 희망 가득했던 그 공간에 함께 계셨군요! ^^*
 
국가와 혁명 :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더 레프트 클래식 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문성원.안규남 옮김 / 돌베개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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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제국주의론] / [국가와 혁명] 외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변증법의 '본질'이다... 과학사를 통해 분명히 검증...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화학에서는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란 자연(여기에서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 레닌, [철학노트], <6장.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4.


1.

-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20대 내내 여차하면 내가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혼자 잘근잘근 씹던 말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거나, 나보다 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줄곧 혼자 내뱉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심 '보수'였다.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에서 김일성이 제일 싫었고, 사립대학 병설 사립중고등학교인 모교에서 알려준 대로 '전교조' 선생님들도 싫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패는데 비범한 기술과 특별한 조예를 갖춘 선생들은 어째 모두 '전교조' 가입했다는 소문이 몇년간 횡행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이었던 정치경제 선생님은 다행히 제자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또라이'로 소문났다. 아마도 그 선생님도 '전교조'였을 것 같았는데, 사립고등학교의 그 어떤 교사도 '전교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교조'는 말없이 음험한 소문으로 퍼지던 '학교괴담'과도 같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때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였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나는, 2차대전의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킹타이거(티거)나 야크트판더 전차와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전함, 융커스 폭격기 및 메서슈미트 전투기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친일파'는 싫었던지 일본군국주의 전투기와 전함은 숨어서 좋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딱 '수구꼴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아직 애기였으므로 다행히 아직 '정치'에 관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오락실이나 학교운동장에서 보냈다.

스무살이 되어 대학 오리엔테이션 참가하는 버스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알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상에는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얘기하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아무튼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고만고만한 동네친구들만 득시글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스무살의 세상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재수생과 삼수생, 군대까지 다녀온 형들도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로 가끔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왠지 다들 부잣집 자제들 같아서 가난했던 나는 겉으로는 결코 아닌척 했지만 속으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우리집을 보고 친구 아닌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대진 않을까 찜찜해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 가서 주눅들지 말라고 만원짜리 몇 장을 자주 쥐어주시던 가난했지만 통큰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네가 아닌 학교 앞에 가면 적어도 나와 대학 사람들은 모든게 '동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영어만은 1%였다. 나는 '영문과' 말고 다른 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하면서 내 인생에도 '법대'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싶기도 했고, 마흔이 넘어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라는 깨달음에 왜 '사학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내 지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난 역시 똑같이 살았을 거라는 거다. 다시 돌아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문학'은 아직 잘 몰랐고, 1993년 2월의 대학 오리엔테이션 버스 안에서 만난 같은과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잘나 보였다. 충남 태안에서 온 공부 잘해 보이는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배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딱 서울 뺀질이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생긴 데다가 말도 품위있게 잘했다. 경남 마산 출신 친구는 얼굴이 철면피 자체로 워낙 여기저기로 나대는 바람에 '정박아'라는 별명을 바로 득템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출신임에도 시골 어디서 왔느냐, 삼수생이냐 초면에 숱한 질문을 받던 나 또한 동기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었지만 내세울 게 없어 최신곡 랩이었던 김건모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전날 내내 외워서 자기소개 시간에 불렀다. 관광버스 앞뒤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읊은 그 노래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이후 일년 내내 술집과 엠티 등지에서 나는 그 노래를 줄창 불러댔다. 
나의 궁핍함과 열등감은 가수 김건모가 대충 상쇄시켜주었지만,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자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기자를 꿈꾸고자 했다. 영자신문사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 첫 신고식에서 신문사의 전통과 같았던 학군단 선배들이 시키는 말도 안되는 행태에 기겁을 한 나는 바로 영자신문사를 때려치웠다. '수구꼴통' 기질에 지금으로 치면 '일베' 끼가 다분하던 내가 보기에도 영자신문사의 쓰질데기 없는 역사와 전통은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난 '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영자신문사의 전통이 너무도 비루해 보였다. 저렇게 영어공부나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어봐야 뭐하나 싶었고 학과의 선배들과 잘나보이던 자유로운 영혼의 동기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91, 92학번 선배들의 후배 '의식화'가 꽤 성공적이었던지 파시즘을 동경하던 '수구꼴통'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빌어먹을 영자신문사 덕분에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신고식 며칠 후 사직서를 내는 나에게 이렇게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던 영자신문사의 편집장의 말과 반대로 난 그 신문사 일을 계속 했으면 두고두고 더 크게 실망했을 거였다. 

문과대로 다시 돌아온 탕아인 나를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반겨주었고, 난 다시 술집과 과 학생회 행사에서 소주병에 꽂은 숟가락을 김건모 마이크처럼 잡고 "쓸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를 불러 제꼈다.
다들 반갑고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집도 부자인 친구들에게 가진 모종의 열등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해졌는데 나를 버티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말이 이 말이었던 거다.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이니까', 라는.


2.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 공부는 안 했고, 영자신문사를 초단기간에 때려치우면서 신문기자의 꿈은 바로 접었다. 나는 영문과 내 철학학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함께 읽었고 숱하게 데모대 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전경한테 두들겨 맞고 달려갈까봐 무서워 제일 먼저 내빼기 일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 덕분에 어느새 '노동자의 아들'에서 '노동계급의 아들'로 진화한 나는 아쉽게도 투쟁의 최전선에 파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사'는 못 되었다. 똑똑하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닌 나는 '전투력' 조차도 없어 술만 마시다가 돈도 없으니 친구 자취방 앞 골목에서 새벽 깡술을 마셨다. 그때 당시 하늘과 같던 87학번 선배가 지나던 길에 '정박아', '지진아', '벅스터(내가 벅스터다)' 우리 셋의 깡술판에 앉아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뭐냐 물었고 횡설수설하는 우리 삼인방에게 경주 출신의 그 선배는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는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면서 "공부 쫌 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멋졌다. 
그 순간 '나도 공부 쫌 해서 저런 선배가 되자'고 나는 내심 결심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선생의 우정이 깃든 글들을 읽어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군에서 제대한 199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저작들은 대부분 1993년에 읽었다. 이제 '공부 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했다. '철학'이나 붙잡고 아는 척이나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실천'을 할 것인가. 
그렇게 1994년의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다. 나보다 말도 잘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정박아'는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고 다녔지만, 혼자 틀어박혀 자습을 했던 나는 1908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불꽃(이스크라)' 같은 혁명가의 지하조직과 실천을 불같이 토했지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싸운 유물론자 엥겔스의 전통에 따라 당대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로 대표되는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에서 보면 20세기 초 레닌의 교조적 유물론보다 마흐의 '경험비판론'이 더 설득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오스트리아 '경험비판론'은 지금이 아닌 20세기 초의 이론이었고 당시 다수 노동계급이 상속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반박되어야 했다. 레닌은 선학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이비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 씨를 신랄하게 까댄 [반뒤링론]의 전통을 이으며 '경험비판론'의 사이비 과학주의를 거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2단계 혁명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1단계를 우선 거쳐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레닌은 역시 '반동'으로 몰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부터 노동자-농민 독재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투쟁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전통을 잇는다. 즉 부르주아지는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여 집권하지만 이내 다수 노동계급을 배신하는 '반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므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다수의 독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광범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1920년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나 1940년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론]과도 맞닿는 면이 있지만, 20세기 벽두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레닌의 시간은 '폭력'에 의한 즉각적 혁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러시아 레닌주의와 서유럽 카우츠키의 논쟁을 읽어야 할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칼 카우츠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 '교황'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99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대중투쟁과 의회전술이 결합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단순한 전술이나 운영원리가 아니라 운동의 중심이 된 이후에야 나는 카우츠키를 읽었다. 1994년의 내게 카우츠키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자' 또는 '배교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에 안중에 없었는데, 이후에 보니 지금의 진보정당 노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카우츠키의 강령이었던 것이다. 

카우츠키는 투사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는 엥겔스의 '제2인터내셔널' 교리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관계의 사유화의 모순에 의해 생산양식이 사회화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자연이행된다는 매우 낙관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실현되던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가능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러시아 차르의 압제 아래 살아온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할 방법도, 가능성도 없었으니 민주주의를 보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카우츠키에게 보통선거로 노동계급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였다면, 레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한 계급의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였다. 따라서 부르주아 독재정권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94년 레닌을 읽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독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적합한 권력론이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론'과 '혁명론'은 불가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레닌을 읽는 이유는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1916~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종착점이었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말이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구축된 국가기구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수대중 독재에 의해 다시 건설되는 것. 이것이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미완의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실제로 레닌은 마지막 장을 쓰기 전에 "난 이제 그만 펜을 놓고는 총들고 혁명하러 나간다~"며 책을 마치고 있다. 매우 위험했지만 '노동계급의 아들'인 스물한살의 나에게 이만한 매력적이고 고마운 인물과 사상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3.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레닌, [철학노트], 1914.


1995년 10월에 군대 가기 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을 때 나와 놀아주는 선후배나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입대 전까지 나는 아마도 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지구전론], [신민주주의론]을 읽었지만 그 속에 온통 레닌 뿐이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1917년 러시아 억압 문명에서 레닌주의로 실현되었고 1949년 중국의 유교 문명에서 마오쩌뚱주의로 실현되었기에 내 사상의 경로는 마오주의로까지 가야했지만 사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하고 실천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레닌에서 멈췄다. 더구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주체사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성론'이니 '품성론' 따위를 거론하며 주석을 옹립하고 세습시키는 북조선은 애초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오주의까지 가지 못하고 1995년까지도 레닌에 머물렀던 건, 그의 [철학노트]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목전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앞세웠던 '배신자' 카우츠키의 후예들 대부분이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국수주의(쇼비니즘) 제국전쟁을 옹호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그랬듯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으로 의회에 들어간 진보정당 의원들 중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소수였다. 카우츠키도 전시공채 법안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당을 이끌었지만 법안에 찬성한 다수 사회민주당 의회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 후예들이었다. 
1914년의 레닌은 이들 모두가 [자본론]을 오독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그 거대 관념론 체계 속에서 '유물론' 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다. 변증법적으로 전도되는 그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철학노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14년의 암울한 제국주의 전쟁의 세계 정세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심장 런던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물론 헤겔 철학을 다시 읽으며 '유물론'을 재정립하고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의 칼날을 갈았다.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론]을 썼는데 사실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두뇌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을 따른 것이지만 레닌 특유의 신랄함과 이론적 단순화의 미학을 담고 있어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레닌의 저작이다.

한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소비에트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서라 집권세력의 변명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은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책을 들고 다녔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혁명가 레닌의 1914년 [철학노트]에서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레닌의 [철학노트]는 정식 출간을 위한 저작이 아니라 자습을 위한 학습노트였고 나는 '혁명가'로서의 레닌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레닌을 읽었다. 
잠시의 공백 후 1998년 내게 알튀세르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읽든 내게는 언제나 레닌이 보였다.

레닌을 읽던 시간, 
1993년부터 1995년 10월까지의 이야기다.


***

1.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3.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4.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5.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6. [국가와 혁명](1917),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7.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4), 레닌,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8. [민주주의와 독재](1976),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9. [에르푸르트 강령](1891), 칼 카우츠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10.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1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1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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