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리더 조조 더봄 평전 시리즈 3
친타오 지음, 양성희 옮김 / 더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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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영웅'
- [난세의 리더, 조조], 친타오, 2013.


"한나라 말기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중에서 원소는 네 주를 근거로 하여 호시탐탐 노렸으며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조조/위무제)는 책략을 이용할 계획을 세워 천하를 편달하고, 신불해와 상앙의 치국 방법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하여 재능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사람마다 가진 재능을 잘 살려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랐다. 옛날의 악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마침내 국가의 큰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던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 [삼국지], <위서>, '무제기-評曰', 진수, 3세기.


'치세(治世)의 능신(能臣), 
난세(亂世)의 간웅(奸雄).'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를 평가한 문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원말명초 시기에 몽골족의 압제에 맞서 중국 한(漢)족의 독립투쟁에 가담했다던 나관중은 고대 중국 한나라의 정통성을 복원하기 위해 '춘추필법'에 따라 한나라 유씨 왕조 후손을 자처했던 촉한의 유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따라서 유비의 최대 맞수 조조는 교활하고 간악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오랫동안 우리에게 전해진 조조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 4대 정사'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중 가장 문장이 유려하다는 범엽의 [후한서]의 <허소전>은 후한말 당시 인물평의 대가였던 유학자 허소가 아직 관리가 되기 전의 부잣집 건달 조조의 협박에 못이겨 "그대는 태평한 시대에는 간적(奸賊),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英雄)이 될 것"이라고 내린 평을 조조가 듣고는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고 전한다. 사실의 기록은 [후한서]가 맞을 것인데, 유비의 주적인 조조를 폄훼하려는 [삼국지연의]는 손성이 쓴 [이동잡어]의 설을 채택하여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또는 간적'이라 전한다. 어쨌든 중국의 문호 루쉰이 "세상의 어떤 잣대로 평가해도 문무를 겸비한 '최소한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한 조조는 이 '최소한의 영웅'이 되었으니 크게 웃으며 돌아간 것이다. 중국 역사가 이중톈이 [삼국지강의(品三国)]에서 말했듯 조조는 '최소한의 영웅(英雄)'이면 되었지, '간사하든(奸雄)' 아니면 '능력있든(能臣)'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촉-오 삼국 중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는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서진(西晉)의 학자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 무제 조조의 열전인 <위서-'무제기'> 말미에서 "평하여 말하기(評曰)"를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남겼다. 

'간'이든 '능'이든 신경쓰지 않고 '최소한의 영웅'이면 족했을 난세의 '실용주의자' 조조가 여전히 '72개 가짜무덤(의총)' 중 어딘가에서 크게 웃고 있다.


"사실 조조가 태어날 때부터 난세의 간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이 깨끗하고 공정했다면 그 역시 정상적으로 훌륭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조조의 인생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지만 모든 선택은 그에 합당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 [난세의 리더, 조조], <5. 삼기삼락>, 친타오, 2013.


2017년에 [노모자사마의(老謀子司馬懿)]를 통해 음흉하고 복잡다단한 인물 사마의를 후한말 난세가 낳은 극단적 '개인주의자'로 평가했던 중국의 법사학자 친타오는 이미 2013년에 [흑백조조(黑白曹操)]라는 책으로 조조를 '72가지 얼굴'을 지닌 '실용주의자'로 평가했다. 국역으로 '더봄' 출판사 '평전시리즈'로서 '평전 시리즈-1'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8)와 '평전 시리즈-3' [난세의 리더, 조조](2022)로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평전 시리즈-2'는 [제왕의 스승, 장량](위리, 김영문 옮김)인데 내가 좋아하는 인물 장자방의 흔치 않은 평전이라 나 개인적으로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하긴 위나라 관리이자 조조의 후계자 조비의 참모였고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을 이기고 결국 맞수 제갈량이 없어지자 내부로 칼을 돌려 자신이 섬기고 있던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마의를 평가함에 있어 그의 대선배 조조를 빼놓을 수는 없다. 후한말 난세가 배출한 전형적 '개인주의자'였던 노련한(老謀子) 사마의(司馬懿)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없애고 사마씨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새나라를 세우도록 판을 깔았지만, 명목상으로는 삼국 중 위나라를 '계승'했다고 선전했다. 사마의가 평생 경외했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조조였기 때문이다. 조조의 가문이 한나라 유씨 왕조로부터 선양을 받았듯,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 또한 위나라의 조씨 왕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후한말 극단의 '개인주의자' 사마의는 난세의 대선배인 극단의 '실용주의자' 조조를 유일하게 두려워 했다. 
불가능한 가정이겠지만, 조조와 사마의가 동년배였다면 승자는 조조였을지도 모른다. 

[조조 평전]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장쭤야오가 2000년도에 쓴 것이 있다. [난세의 리더, 조조]의 저자 친타오도 장쭤야오의 책을 참고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친타오는 장쭤야오처럼 장대한 정치경제학적 방식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서술로써 조조를 쫓아간다.

부잣집 환관 가문의 유협 건달(1장-난세의 악동)에서 15세 태학생 시절 겪은 '당고의 화'(2장)의 여파, 효렴이지만 환관 가문의 배경으로 출사한 벼슬직에서 세번이나 물러난 경력(5장-'3기3락'), 여백사 일가족 살인사건인 '착방조의 진실'(6장)은 물론 원소와의 건곤일척 '관도대전'(10장)과 황제를 등에 업고(8장) 시대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12장-'명법의 치'와 13장-'인재 모집령')하며 결국 '선양' 형식이지만 본인 방식으로 '혁명'의 대업을 이룬 조조의 삶(15장-대단원의 막)을 조명한다. 

장쭤야오는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평가인 '법가'와 '병가'의 정치인 조조에 유학의 '천명'과 '성리'를 투과하여 결론적으로 '유가'로서의 조조를 평전한다. 그에 의하면 조조는 난세에 환관 가문 출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정치에 적극 투신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을 안정시키고자 권력을 쥐고 개혁을 실시한 정치인으로서 '성리'를 현실에 조화시키려 한 그 나름의 정치이력을 통해 결국 낡고 부패한 구체제를 뒤집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 '천명'을 실현한 현실 정치가였던 것이다. 물론 조조의 '천명'은 '인의예지' 같은 높은 덕목이 아니라 지극히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정치였는데, 유학이나 성리학의 특징은 신을 모시는 관념적인 종교의 영역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현실정치를 중시한다는 지점이고 장쭤야오가 조조에게서 뜬금없이 '유가'적 측면을 끌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한고조 유방이 초한전쟁를 시작하기 전의 '법삼장'에서 시작했지만 400년간 왕조가 이어지며 복잡하고 방대해진 한나라 법률을 단순화시킨 '명법의 치'를 세웠는데 사례마다 매번 새로운 규정이 신설되는 대신 일련의 포괄적인 규칙들이 서로 연결되어 신설법 없이 탄탄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이 방식은 이후 왕조 법령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 자신도 젊은 시절 '평판'에 매달려 허소를 칼로 협박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 환관 집안 유협건달을 멸시하던 유학자들에 대한 반발심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황제를 등에 업은' 최고 권력자가 된 조조는 세차례의 '인재 모집령'을 내려서 '평판'보다는 '능력' 중심의 인재를 중시한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는데, 실제로 이 인재 모집령으로 등용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부터 실시되어 왔던 조조의 인재 모집 원칙을 더욱 공고히 밝히기 위한 반복적 선언에 불과했다. 후한말 인재들 출사의 원칙을 가문이나 허울좋은 평판이 아닌 '실용'적인 '능력'에 두었던 것이다. 뜬구름 잡는 '현학'이 사상계를 지배하며 허위적 풍류를 쫓던 후대 '위진풍도(위진풍류)'의 유래는 후한말의 이 난세였는데 당시는 유학이 장려하던 '충효'의 덕목을 지키기 위해 사기는 물론 복수와 살인까지도 불사하던 행태가 만연했다고 한다. 조조 또한 이러한 시대가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의 '비범함'은 시대에 편승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후한말 난세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조가 다양한 '능력'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용인술(用人術)'의 대가였다는 평가는 보편적이다.

물론, 조조가 펼친 이 난세의 '용인술'이 치세에도 맞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난세의 영웅'(허소)일지 '난세의 간웅'(손성/나관중)일지 알 수 없는 '72가지 얼굴'의 조조가 '치세의 간적'(허소)일지 '치세의 능신'(손성/나관중)일지 어찌 알겠는가.


"72기 의총은 사실이 아니지만, 조조에게는 72가지 얼굴이 있다."
- [난세의 리더, 조조], <16. 사후 미스터리>, 친타오, 2013.


아무튼 이토록 난세의 최강 능력자인 '실용주의자' 조조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지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갖가지 평가가 난무한다. 그래서 저자 친타오는 조조의 흑색에서 백색까지 조명한다는 의미에서 짧은 평전의 제목를 [흑백조조]로 하였을까. 결국 "매우 다양하다"는 진부하면서도 불가피한 결론이지만, 선배 역사학자 장쭤야오처럼 고전적이며 전형적인 방식의 통시적 평전이 아닌 테마를 중심으로 한 어느정도 공시적이고 간략하며 그로 인해 더욱 대중적인 평전을 시도한다. 

난세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조조가 사후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우려하여 '72개의 가짜무덤(의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실용주의자' 조조는 소박한 무덤을 지정하고 장례도 간소하게 하며 금은보화를 부장물로 무덤에 묻지 말라고 유언했다.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허위의식은 수많은 재화들을 경쟁적으로 시신과 함께 순장시키면서 실물경제를 바닥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비범한 인물'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며 시대의 경세가였던 조조가 이에 편승했겠는가. 

"내가 천하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는 하지도 않은 말로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죽어도 남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지 않겠다"며 당대의 명의 화타까지도 죽인 의심의 달인이었으며, 있지도 않은 '72기 의총'으로 교활함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지만, 욕을 먹든 말든 '72가지 얼굴'의 '실용주의자' 영웅 조조는 죽는 순간까지 시대를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3의 배수'인 '72가지'는 '36계'와 같은 논리로 '무한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3'은 완벽의 수 단위로서 '3의 배수'는 서로 교차하고 조합하며 무한한 형태로 나타난다. '36계'는 무한한 전략과 전술의 조합이고, 서유기 손오공의 '72가지 도술'은 그 자체로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조조의 '72기 의총(가짜무덤)'은 그 설 자체가 가짜지만 조조의 '72가지 얼굴'은 이 난세의 '실용주의자' 영웅이 지닌 '무한대'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

1. [난세의 리더, 조조](2013), 친타오, 양성희 옮김, <더봄>, 2022.
2. [삼국지 - 위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텐,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5. [결국 이기는, 사마의](2017), 친타오, 박소정 옮김, <더봄>, 2018.
6.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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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개정판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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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史必歸正) : 한국 '고대사'는 '현대사'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2009.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한국 고대사는 나라를 빼앗긴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이 자리의 현대사였다. '사관(史觀)'이란 말에 볼 '관(觀)' 자가 붙는 이유는 역사를 보는데는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고대사나 현대사나 일정해야 한다. 고대사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현대사는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에게 사관(史觀)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는 지금 이 자리의 '현대사'라는 사실...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4.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 이덕일, 2018.


수년 전 잡지에서 '실증주의'를 앞세운 젊은 역사학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역시 모든 학문(學問)에는 반드시 '철학(哲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유물'과 '답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들의 '실증주의'는 역사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고 싶었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관한 통찰이 없는 한 '역사' 또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사회분석과 예측이 틀리기만 하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시대 전반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회과학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와도 같다. 젊은 '실증주의' 사학 전문가들은 '고대사 전공자'로서 해방 후 선배 강단 식민사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유적과 유물을 '실증적'으로 재확인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2차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당 역사를 3차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과 같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이 거짓을 기록한 경우에도 당시의 종합적 문헌비교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당시 저자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비교에서 가장 당대와 가까운 저자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사실을 그 맥락 속에라도 담고 있다. 기록의 역사 또한 수천년의 방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유물과 유적의 건조한 사실 자체보다 당대는 물론 그 시대를 언급한 기록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더욱 풍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 또한 1차 사료로서 당대의 문헌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의 역사연구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에 맞서 현대의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고난한 작업이다. 두계 이병도를 조상으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며 이덕일 소장이 벌이는 전투는 아래와 같은 네 개의 진지전이다.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漢)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 시대에는 요동이라고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명태조(1381)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1.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 2009.


고조선이 서기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자리에 한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4)군'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두계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와세다대학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스승들은 당연히 일본 역사학자였는데, 이병도는 나중에 해방후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칭송되었고 일본인 스승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되려면 근대의 후진성만으로는 모자랐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식민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거지 지역비정을 위해 유물들도 조작했다. 그런데 그 후예 이병도 무리들은 '실증주의'를 앞세운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민족사학'과 사회구성체 역사학설을 도입한 '사회경제사학'에 밀려 그나마 '과학'이나 '객관주의'를 갖다붙인 '실증주의'였지만 이들의 스승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고 그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억지주장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정치'로서의 역사학 연구자였다. '실증주의'와 정반대인 식민사학이 '실증주의'로 둔갑한 것은 해방 후 분단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남한을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떠나고 빈 자리를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일 소장이 파헤치는 이병도 무리들의 식민사학은 사료분석에 타당하게 근거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와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고대 문헌들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하여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혔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무리는 굳이 그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 확정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에 이 '실증사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가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한나라 물건은 한무제가 아니라 동한 광무제 시절 평양에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데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를 넘어서면 안되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나라 유물이 발견된 사실만 중요하다. 또한 분단반공이념으로 그동안 무시했던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 중 유일하게 동조한 것이 평양의 한나라 유물이다. 

사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즉,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에게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일제 식민사학 선배들이 비정한 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더 넘어가서는 안되었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열린 학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강단역사학으로서의 그 식민사학을 지키는 길이 곧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야역사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난 역사적 진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식민사학은 그 생존전략의 생리를 가동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위만에게 밀려 내려온 고조선 세력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 등지로 중심지를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만 또한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독립적 실력자로서 고조선 문화의 계승자였다. 고조선 자체가 요동사의 일부였는데 위만은 중국역사고 우리 고조선은 '중심지 이동설'로 한반도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 결국 식민사학이 무슨 변형과 타협안을 시도하든 그 목적은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유지일 뿐이다.

이덕일 소장에 의하면 모든 1차 사료 일체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워진 한사군은 그러므로 한반도 북부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허구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삼국사기]는 분명 신라의 건국연대를 B.C.57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7년, 백제의 건국연대를 B.C.18년으로 기록했음에도 자의적으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했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덕일, 2009.


2014년 이덕일 소장은 고려대 교수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관련 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은 이덕일 소장은 무죄확정된 2018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 2판을 내며 소회를 드러내는데, 2009년까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1차 문헌사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쟁점에서 더 나아가 이병도와 김현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 일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연다. 학문적, '실증적'으로 논쟁하고자 했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도 않은채 전혀 끄떡없는 '식민사학 카르텔'은 친일파들이 그랬듯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독립운동을 죽였고 그런 방식 자체가 유일한 생존방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국사교과서' 재편찬을 통해 역사의 사유화를 기도했음은 물론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으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등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했던 종교 이외의 동학이나 대종교(단군교) 등은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는데, 식민사학은 재야 민중적인 역사학은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전공자'의 역사학이 아닌 '유사' 역사학이라고 매도했다. 우리 한국사 주류가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독재자와 제국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아닌 독립 '경제학'을, '민족민중사학'이 아닌 '전공자'들만의 '실증사학'을 좋아한다. 그 '실증'과 '실험'에만 매달리며 사회전체적 관점에는 관심없는 '전공과학'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들은 본인이 식민주의 독재자들에게 부역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다.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일본사학자 스승 중 쓰다 소키치라는 자가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식민사학 확립을 위해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조작한 이 자는 이병도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귀국한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생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이병도는 생계와 생존을 위해 우리 역사까지 팔아먹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서 일본이 가야지역과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야 했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언급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을 주장한다. 즉 8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사실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운 지역임에도 [일본서기]를 앞세운 근대의 일제에 의해서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는데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대주의의 온상이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과의 역사투쟁을 독립투쟁 못지않게 전개하셨다. 그런 김부식에게조차도 '일나일본부 한반도 지배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2011년 북한 역사학자 조희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삼국시대 한반도와 요동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세력은 동쪽의 일본땅에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는 경쟁을 했고 실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 식민지들은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일본정부와도 교류했다는 역사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들임을 문헌과 현지 유물유적의 1차 사료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것이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가야사 연구이며 2011년 조희승 박사의 '임나일본부' 해체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조했고 남한 식민사학은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고씨 태조왕, 신라는 김씨 내물왕, 백제는 고이왕부터 고대국가를 건설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쳐왔다. 물론 [삼국사기]는 '단군설화'가 없고 동명왕' 조 등은 모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연대는 비교적 명확하다. 아마도 이는 당대 이전 중국은 물론 현전하던 역사사료 일체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 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아래 있지도 않았던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되었고 남한 식민사학은 생존을 위해 일제 스승의 학통을 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우리 '민족사학'의 탈각에 있지, '임나일본부'를 기록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의 '불신설'이 아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이었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적은 없다. 
[삼국사기]가 '임나일본부'를 기록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정설인 한국사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제 한국사는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시민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아덕일, 2009.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요 세력은 왕실이었다. 고종과 외척 민씨는 조선말 동학농민반란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함으로써 일제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씨 조선왕조는 압제를 당하던 다수 당사자인 조선민중들의 손으로 끝장나야 했는데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 없는 이씨왕조는 외세보다 조선민중을 더 두려워 했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완용 같은 왕실인사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 더러운 권력투쟁의 귀결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단독집권한 서인세력은 이후 남인과의 당파투쟁을 거치며 이 '거대양당' 체제에서 최후승자가 되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을 때 이미 노론은 국왕를 독살하고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유일당 집권세력이 되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은 실제 북벌에는 관심없었다. '북벌' 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지금의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뿌리가 바로 노론정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증명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 따위가 주류 정설로 뿌리내리는 근본 토양을 본다. 

지금도 건재한 '조선후기 노론사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현재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정치도, '식민사학'의 역사도 극복할 수 없다. 이 소수 기득권은 오로지 다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 뒤집는 수 밖에 없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사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한다... 현재의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지름길..."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덕일, 2009.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와 제국, 이집트와 중국 하-상-주나라, 아메리카의 마야-잉카-아즈테크 문명 등은 서기전 5천년~2천년부터 번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좀 이른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였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국가 또는 제국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 고조선은 청동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가 아닌 부족부락이라 일축된다.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이식된 후에 고대국가가 된 고조선이 중심지를 한반도로 이동했다가 망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존재했다거나, '원삼국' 시대라는 모호한 용어로 부족국가로 산재하던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우기기 위해 [삼국사기]조차 불신하는 남한의 식민사학은 노론사관과 이복형제다.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득세한 남한에서 그나마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 선정위원회를 운영할 때 남한에는 남아있는 독립운동 투사가 거의 없었다. 김승학, 김창숙 같은 얼마 안되는 무장 독립투사가 그나마 '역사학자'랍시고 위원회에 이름을 건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게 "임자가 독립운동을 암만?"이라고 물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주로 이주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박은식, 신채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가'였는데, 해방 후 남한에는 '독립투쟁사'를 증언할 역사학 '전공자'는 이미 씨가 마른 후였다. 

이런 식민사학에는 '현대사 연구금지론'이 있었다는데, 현대사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현대사를 연구할수록 무장 독립투쟁사가 부각될테고 그럴수록 식민사학의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권과 죽이 맞는 식민사학계에서 독립투사들은 설 곳이 없어졌고 대거 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유일한 식민사학 기득권 세력의 '실증주의' 과학의 입장에서는 '현대사'는 '실증'이 어려우므로 연구가 금지되었단다. 그래서 '유사' 역사학일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사학'과 '식민사학'의 전쟁은 '고대사'의 전장에서부터 치러져 왔다.

이덕일 소장이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4장>)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

1.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역사의아침>, 2009.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만권당>, 2014~2018.
3.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5.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6.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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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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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史必歸正) : 한국 '고대사'는 '현대사'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2009.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한국 고대사는 나라를 빼앗긴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이 자리의 현대사였다. '사관(史觀)'이란 말에 볼 '관(觀)' 자가 붙는 이유는 역사를 보는데는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고대사나 현대사나 일정해야 한다. 고대사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현대사는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에게 사관(史觀)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는 지금 이 자리의 '현대사'라는 사실...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4.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 이덕일, 2018.


수년 전 잡지에서 '실증주의'를 앞세운 젊은 역사학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역시 모든 학문(學問)에는 반드시 '철학(哲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유물'과 '답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들의 '실증주의'는 역사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고 싶었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관한 통찰이 없는 한 '역사' 또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사회분석과 예측이 틀리기만 하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시대 전반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회과학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와도 같다. 젊은 '실증주의' 사학 전문가들은 '고대사 전공자'로서 해방 후 선배 강단 식민사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유적과 유물을 '실증적'으로 재확인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2차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당 역사를 3차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과 같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이 거짓을 기록한 경우에도 당시의 종합적 문헌비교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당시 저자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비교에서 가장 당대와 가까운 저자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사실을 그 맥락 속에라도 담고 있다. 기록의 역사 또한 수천년의 방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유물과 유적의 건조한 사실 자체보다 당대는 물론 그 시대를 언급한 기록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더욱 풍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 또한 1차 사료로서 당대의 문헌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의 역사연구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에 맞서 현대의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고난한 작업이다. 두계 이병도를 조상으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며 이덕일 소장이 벌이는 전투는 아래와 같은 네 개의 진지전이다.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漢)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 시대에는 요동이라고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명태조(1381)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1.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 2009.


고조선이 서기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자리에 한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4)군'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두계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와세다대학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스승들은 당연히 일본 역사학자였는데, 이병도는 나중에 해방후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칭송되었고 일본인 스승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되려면 근대의 후진성만으로는 모자랐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식민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거지 지역비정을 위해 유물들도 조작했다. 그런데 그 후예 이병도 무리들은 '실증주의'를 앞세운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민족사학'과 사회구성체 역사학설을 도입한 '사회경제사학'에 밀려 그나마 '과학'이나 '객관주의'를 갖다붙인 '실증주의'였지만 이들의 스승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고 그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억지주장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정치'로서의 역사학 연구자였다. '실증주의'와 정반대인 식민사학이 '실증주의'로 둔갑한 것은 해방 후 분단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남한을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떠나고 빈 자리를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일 소장이 파헤치는 이병도 무리들의 식민사학은 사료분석에 타당하게 근거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와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고대 문헌들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하여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혔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무리는 굳이 그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 확정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에 이 '실증사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가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한나라 물건은 한무제가 아니라 동한 광무제 시절 평양에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데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를 넘어서면 안되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나라 유물이 발견된 사실만 중요하다. 또한 분단반공이념으로 그동안 무시했던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 중 유일하게 동조한 것이 평양의 한나라 유물이다. 

사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즉,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에게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일제 식민사학 선배들이 비정한 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더 넘어가서는 안되었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열린 학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강단역사학으로서의 그 식민사학을 지키는 길이 곧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야역사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난 역사적 진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식민사학은 그 생존전략의 생리를 가동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위만에게 밀려 내려온 고조선 세력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 등지로 중심지를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만 또한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독립적 실력자로서 고조선 문화의 계승자였다. 고조선 자체가 요동사의 일부였는데 위만은 중국역사고 우리 고조선은 '중심지 이동설'로 한반도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 결국 식민사학이 무슨 변형과 타협안을 시도하든 그 목적은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유지일 뿐이다.

이덕일 소장에 의하면 모든 1차 사료 일체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워진 한사군은 그러므로 한반도 북부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허구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삼국사기]는 분명 신라의 건국연대를 B.C.57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7년, 백제의 건국연대를 B.C.18년으로 기록했음에도 자의적으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했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덕일, 2009.


2014년 이덕일 소장은 고려대 교수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관련 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은 이덕일 소장은 무죄확정된 2018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 2판을 내며 소회를 드러내는데, 2009년까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1차 문헌사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쟁점에서 더 나아가 이병도와 김현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 일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연다. 학문적, '실증적'으로 논쟁하고자 했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도 않은채 전혀 끄떡없는 '식민사학 카르텔'은 친일파들이 그랬듯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독립운동을 죽였고 그런 방식 자체가 유일한 생존방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국사교과서' 재편찬을 통해 역사의 사유화를 기도했음은 물론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으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등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했던 종교 이외의 동학이나 대종교(단군교) 등은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는데, 식민사학은 재야 민중적인 역사학은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전공자'의 역사학이 아닌 '유사' 역사학이라고 매도했다. 우리 한국사 주류가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독재자와 제국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아닌 독립 '경제학'을, '민족민중사학'이 아닌 '전공자'들만의 '실증사학'을 좋아한다. 그 '실증'과 '실험'에만 매달리며 사회전체적 관점에는 관심없는 '전공과학'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들은 본인이 식민주의 독재자들에게 부역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다.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일본사학자 스승 중 쓰다 소키치라는 자가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식민사학 확립을 위해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조작한 이 자는 이병도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귀국한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생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이병도는 생계와 생존을 위해 우리 역사까지 팔아먹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서 일본이 가야지역과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야 했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언급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을 주장한다. 즉 8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사실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운 지역임에도 [일본서기]를 앞세운 근대의 일제에 의해서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는데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대주의의 온상이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과의 역사투쟁을 독립투쟁 못지않게 전개하셨다. 그런 김부식에게조차도 '일나일본부 한반도 지배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2011년 북한 역사학자 조희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삼국시대 한반도와 요동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세력은 동쪽의 일본땅에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는 경쟁을 했고 실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 식민지들은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일본정부와도 교류했다는 역사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들임을 문헌과 현지 유물유적의 1차 사료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것이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가야사 연구이며 2011년 조희승 박사의 '임나일본부' 해체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조했고 남한 식민사학은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고씨 태조왕, 신라는 김씨 내물왕, 백제는 고이왕부터 고대국가를 건설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쳐왔다. 물론 [삼국사기]는 '단군설화'가 없고 동명왕' 조 등은 모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연대는 비교적 명확하다. 아마도 이는 당대 이전 중국은 물론 현전하던 역사사료 일체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 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아래 있지도 않았던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되었고 남한 식민사학은 생존을 위해 일제 스승의 학통을 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우리 '민족사학'의 탈각에 있지, '임나일본부'를 기록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의 '불신설'이 아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이었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적은 없다. 
[삼국사기]가 '임나일본부'를 기록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정설인 한국사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제 한국사는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시민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아덕일, 2009.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요 세력은 왕실이었다. 고종과 외척 민씨는 조선말 동학농민반란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함으로써 일제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씨 조선왕조는 압제를 당하던 다수 당사자인 조선민중들의 손으로 끝장나야 했는데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 없는 이씨왕조는 외세보다 조선민중을 더 두려워 했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완용 같은 왕실인사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 더러운 권력투쟁의 귀결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단독집권한 서인세력은 이후 남인과의 당파투쟁을 거치며 이 '거대양당' 체제에서 최후승자가 되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을 때 이미 노론은 국왕를 독살하고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유일당 집권세력이 되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은 실제 북벌에는 관심없었다. '북벌' 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지금의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뿌리가 바로 노론정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증명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 따위가 주류 정설로 뿌리내리는 근본 토양을 본다. 

지금도 건재한 '조선후기 노론사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현재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정치도, '식민사학'의 역사도 극복할 수 없다. 이 소수 기득권은 오로지 다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 뒤집는 수 밖에 없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사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한다... 현재의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지름길..."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덕일, 2009.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와 제국, 이집트와 중국 하-상-주나라, 아메리카의 마야-잉카-아즈테크 문명 등은 서기전 5천년~2천년부터 번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좀 이른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였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국가 또는 제국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 고조선은 청동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가 아닌 부족부락이라 일축된다.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이식된 후에 고대국가가 된 고조선이 중심지를 한반도로 이동했다가 망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존재했다거나, '원삼국' 시대라는 모호한 용어로 부족국가로 산재하던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우기기 위해 [삼국사기]조차 불신하는 남한의 식민사학은 노론사관과 이복형제다.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득세한 남한에서 그나마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 선정위원회를 운영할 때 남한에는 남아있는 독립운동 투사가 거의 없었다. 김승학, 김창숙 같은 얼마 안되는 무장 독립투사가 그나마 '역사학자'랍시고 위원회에 이름을 건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게 "임자가 독립운동을 암만?"이라고 물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주로 이주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박은식, 신채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가'였는데, 해방 후 남한에는 '독립투쟁사'를 증언할 역사학 '전공자'는 이미 씨가 마른 후였다. 

이런 식민사학에는 '현대사 연구금지론'이 있었다는데, 현대사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현대사를 연구할수록 무장 독립투쟁사가 부각될테고 그럴수록 식민사학의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권과 죽이 맞는 식민사학계에서 독립투사들은 설 곳이 없어졌고 대거 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유일한 식민사학 기득권 세력의 '실증주의' 과학의 입장에서는 '현대사'는 '실증'이 어려우므로 연구가 금지되었단다. 그래서 '유사' 역사학일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사학'과 '식민사학'의 전쟁은 '고대사'의 전장에서부터 치러져 왔다.

이덕일 소장이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4장>)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

1.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역사의아침>, 2009.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만권당>, 2014~2018.
3.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5.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6.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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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국가 전략 - 스웨덴 모델의 정치 경제학 논형학술총서 1
미야모토 타로 지음, 임성근 옮김 / 논형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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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모델 : '선택적 경제정책'과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의 결합
- [복지국가 전략], 미야모토 타로, 1999.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

1975년 '임노동자기금안'을 마련하여 들고 찾아간 메이드네르(마이드너)에게 94세의 비그포르스가 한 말이란다.
루돌프 메이드네르는 예스타(구스타) 렌과 함께 1950년대부터 '연대임금정책'과 '임노동자기금' 등을 통해 스웨덴 복지정책에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담고자 했던 경제학자이고,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이 의회 다수당으로서 장기집권하기 시작할 당시부터 한손 총리와 함께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정착시킨 정치인이자 재무장관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엄밀한 의미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정책을 확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등주의'와 '보편주의' 이념의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장의 '혁명'적 '정치'가 아닌 '개혁'적 '정책'의 길에서도 '이상'을 폐기하고 '운동'만을 본 서유럽의 베른슈타인식 개량주의와 달랐다. 

1920년대 스웨덴 사민당 '예테보리 강령' 시기에 비그포르스는 전통적 사회주의 생산수단 사회화 과정에서 국유화 같이 거대한 소유를 넘어 노동자와 시민의 자율적 소유 등의 개념을 포함시키려 했고, 그의 경쟁자이자 이후 사회당 내각의 사회부장관 묄레르는 보다 좌파적 관점에 입각한 '보편주의 복지이념'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1932년 사민당 한손 내각은 재무장관 비그포르스를 앞세워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을 통해 노사정이 경제성장과 연대임금, 중앙집중적 노사교섭, 정리해고 요건 규정 등의 사회협약의 틀을 정하는데, 바로 '코포라티즘' 시대의 시작이었다. 
인구 1천만의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분기점이다. 

1944년 이른바 '전후 강령'은 한손 총리의 '인민의 집'이라는 상징적 구상을 바탕으로 '나라살림의 계획'의 프로그램을 담게 되는데, 국가 자체를 '계급투쟁'의 전장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가정'으로 상정하고는 경제성장을 통한 부의 축적과 분배, 가족(국민/인민/시민) 모두가 '보편'와 '평등', '자유'의 이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국가를 만드는 '나라살림'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후 1960~1970년대 초까지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번영기',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20세기 '극단의 시대'에서도 또 하나의 '황금시대'가 다 지나간 1970년대 초 '위기의 몇십년'(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에 들어서며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에도 위기가 닥치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스웨덴 '복지국가 전략'의 기본정책은,
1) '선택적 경제정책'과,
2)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이었다.


"1950~1960년대에는 새로운 '(선택적) 경제정책'이 완전고용을 정착시켜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1930년대에 제기되었던 복지정책에는 적어도 묄레르의 견해에 따르는 한, '보편주의'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수직적인 재분배에 대한 강한 지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1950~1960년대 전개에서는 세대간 혹은 개인의 생애단계(질병/출산/실업/노령) 간의 수평적인 재분배를 강화하면서 철저한 '보편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1930년대부터 사민당이 내걸었던 복지이념은 수직적 재분배를 중시한 것이며, 이 점에서는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을 주도한 묄레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비해 경제정책이 '완전고용'을 실현시켜 연대임금정책 등을 통해서 경제격차가 어느정도 축소됨에 따라서 복지정책은 개인의 생활기회 확대에 중점을 둔 새로운 이념('전후 강령')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 [복지국가 전략], <3-3.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의 전개>, 미야모토 타로, 1999.


일본의 복지정책론자 미야모토 타로 교수는 지난 세기말인 1999년에 위와 같은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복지국가 전략]이라는 논문을 냈다. 북유럽 사민주의는 세계전쟁과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 역사(에릭 홉스봄) 속에서도 '이론'과 '이데올로기(이념)'가 아닌 '실용'과 '생활'의 정치로 복지국가를 이루었다. 노사간 '계급투쟁'의 권력자원론은 기본바탕으로 하되, 노사정이 모여 함께 국가살림을 계획하는 '나라살림의 계획'으로서의 '코포라티즘'의 세계를 열었다. 결과는 체제의 '혁명'적 전환이 아닌, '개혁'을 통한 체제 이행이었지만, 체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였고 국가모델 또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복지자본주의'였다.
20세기 초 전투적 '사회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또는 '수정자본주의' 내지 '혼합경제' 등으로 불렸다.

1930년대부터 노사정 코포라티즘을 통해 1970년대까지 경제적 번영과 연대임금을 이룬 스웨덴 사회는 노동자 권력의 증대를 기획하며 '체제 이행'을 꿈꾸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길드사회주의에 가까운 비그포르스였지만, 그의 '예테보리 강령'에서도 그는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를 버리지 않았다. 사회부장관 묄레르의 '보편주의적 평등'과 대치하면서도 비그포르스의 복지정책에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전제가 붙었다. 그리고 '전후 강령'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국가살림의 계획'을 꾸리고자 했다. 이제 비그포르스가 은퇴하고 그의 후배들인 렌-메이드네르(마이드너)가 제시한 1975년 '임노동자기금'은 '나라살림의 계획'의 소박함을 넘어 '생산수단 사회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고 하나의 '체제 이행' 계획이었다. 실제로 '임노동자기금'의 설계자 메이드네르는 당시 임노동자기금 관련한 인터뷰에서 "일종의 사회주의로 받아들여도 좋다"고까지 말했다는데, 강화된 노동자 사회권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정책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한편, 이 생산수단 사회화 방안으로서 '임노동자기금'을 상의하러 간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메이드네르에게 늙은 길드사회주의자 비그포르스가 건넸다는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라는 염려의 말 자체도 부럽기만 하다. 체제 이행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방안에 대한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이견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나라살림' 차원에서 '체제 이행'이니 '사회화' 논의 자체가 '이단'으로 취급된다.


"원래 중앙정부에 대해서 코뮌(지자체)이 복지공급 주체였던 스웨덴에서 시민부(관청)가  지향한 것은 '시민의 영향력 확대'였다... (복지국가 비판의 우파 자유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등장한 좌파 사민당 개념인) '자유선택사회'와 '보편주의적 복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시민에게 공공서비스 자체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움직임..."
- [복지국가 전략], <4-4.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전략>, 미야모토 타로, 1999.


1975년에 작성되고 1976년 LO(스웨덴 블루칼라 노총) 대회에 제출된 [노동자기금을 통한 집단적 자본형성]이라는 보고서는 기업의 초과이윤으로 조성된 '임노동자기금'으로 기업의 주식을 노동계급이 소유하고 점차로 이러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본소유'를 통해 노동계급의 사회권력을 강화한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었다. 당연히 자본가계급과 사용자단체(SAF)는 극렬하게 반대했고 일부 상층 사무직-전문직-화이트칼라 노조(TCO)와 자유주의 정객들은 '노동자'가 아닌 '시민'이라는 탈계급적 용어로 무장한 채 메이드네르가 말한 '노동자 권력 이행'으로서의 '임노동자기금' 문제를 '경제활성화를 통한 자본형성'이라는 문제로 희석시키고 실제로 전환시켰다. 결국 1978년과 1981년 두 차례의 수정을 통해 '시민적 노동자기금' 형태로 1983년에 도입한 이 정책은 1991년 우익 보수정권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역시 이러한 '노동자 사회권력' 문제와 '체제 이행' 사안이 구체적인 정책의 형태로 논의되는 과정 자체가 경이롭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소유 문제만 거론해도 '자유민주주의'적 '신성'을 모독한 심각한 '이단'이 된다.

미야모토 타로의 이 논문은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전반적으로 분석한 흔치 않은 책이다. 다수의 책이 있지만 그 단편을 그릴 뿐 본격적으로 모델 분석을 시도한 책은 의외로 거의 없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난 세기말의 이야기일 테다. 21세기에는 우리 사회는 크게 변한 게 없어도 북유럽 사민주의를 다룬 보다 대중적인 책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스웨덴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의 두 이념으로,
1) '자유선택사회'
2)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을 든다. 

'자유선택사회'는 전술한 정책이념으로서 '선택적 경제정책'에 맞물린다. 즉, 경제성장과 초과이윤 달성의 '선택적 경제정책'으로 사회적 부가 축적되고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으로 배분된 부를 통해 '풍요로운 사회'를 일군 스웨덴이 지향한 사회의 상이 바로 '자유선택사회'다. 물론 노동계급의 좌파적 용어는 아니다. 사민당의 좌파정책에 계속 반대해온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중도보수 정당들의 '복지국가비판'에 응답하는 대항개념이다. 노동계급의 권력강화를 넘어 모든 시민(국민/인민)의 '자유'를 강조한 사회의 상이 '자유선택사회'인 것이다. 이 사회의 대전제는 확고하게 '완전고용'에 기초한다. 이 '완전고용'이 무너지면 보편적 복지국가는 없다. 실제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민주의 전략이 필요하게 된 이유도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로 인해 1980년대부터 실업률이 급증한 배경이었다. 우리 사회 우파들이 말하듯 북유럽 복지국가의 위기는 '복지병'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체제 위기로 무너진 '완전고용'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20세기말부터 맞닥뜨린 [복지국가 전략]의 모색과 전환의 배경은 여전히 실업률의 극복과 '완전고용'의 문제다.

여기에 '잠정적 유토피아'와 '나라살림의 계획'이 있는 '인민의 집'으로서 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여전히 남는다. 바로 '보편주의적 복지이념'이 그것이다. 
경제성장과 풍요는 우리 삶에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즉, 인간적인 삶은 '풍요'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롭게 분배되고 영위되는 부,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복지를 통해서만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체제가 가능하다. 또한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에는 소득과 자산에 따른 누진적 과세가 필수다. 소득비례만이 아니라 누진적 '부유세'를 통해 만인의 복지를 실현하는 사회가 바로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정책적 기초다. 


"자네는 굳이 할 작정인가?"라는 메이드네르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질문은, 굳이 그러한 방식이 아니어도 '보편주의적 복지이념'과 '잠정적 유토피아'를 견지하는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새로운 '체제 이행'을 할 수 있다는 체제의 자부심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20세기 1천만 인구의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이,
21세기 5천만 인구의 남한의 복지국가 모델로 다시금 새롭게 시도될 시간이다.

***

1. [복지국가 전략 - 스웨덴 모델의 정치경제학](1999), 미야모토 타로, 임성근 옮김, <논형>, 2003.
2.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신정완, <사회평론>, 2012.
3.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 니크 브란달/외이빈 부라트베르그/다그 토르센,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14.
4.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책세상>, 2011.
5.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6.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최연혁, <쌤앤파커스>,2012.
7. [세계화와 노동개혁], 김인춘 외, <백산서당>, 2005.
8. [세계화시대 노사정의 공존전략], 한국정치학회, 심지연 외, <백산서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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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까치글방 131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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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1994) - 에릭 홉스봄
- 불확실한 시대의 '묵시록'


"오직 이러한 도전세력(파시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만이 민주주의를 구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赤軍)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 동맹의 이 시기-기본적으로 1930~19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다. 여러 점에서 그 시기는 세기 대부분 동안-짧았던 반파시즘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상태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관계로 볼 때 역사적인 '역설'의 시기이다... 전세계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10월 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결과가, 전쟁에서나 평화에서나-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자극과 공포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을 개혁시키고, 경제계획의 인기를 확립하여 그들에게 개혁절차들 중 일부를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의 적대자들을 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기묘한' 세기의 아이러니들 중 하나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20세기 : 개관>, 에릭 홉스봄, 1994.


19세기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이 바라본 20세기는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였다. 
'극단(extreme)'의 시대는 또한 '역설(paradox)'의 시대였다. 1914년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개시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전쟁' 시대는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과 제3세계 '혁명'의 시대였고, 미-소 초강대국 간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후 더이상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새로운 천년기'인 21세기를 앞둔 시기였다.

'장기 19세기(1789~1914)'를 돌아본 [혁명/자본/제국의 시대]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 역사를 통해 에릭 홉스봄이 내린 결론은 그래도 '희망'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 70년 이상을 살아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기록하는 이 [극단의 시대]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묵시록(默示錄/Apocalypse)'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는 지금도 이 노회한 역사가의 전망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전쟁과 대공황)...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확실히 히틀러도 없었을 것이고, 거의 확실히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대공황은 서방정부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가정책애서 경제적 고려(자유시장)보다 사회적 고려(보호무역)를 우선시하도록 했다... 양대 군사강국-일본(1931)과 독일(1933)-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이며 매우 공격적인 체제가 거의 동시에 승리한 것이, 가장 영향력 크고 가장 불길한, 대공황의 정치적 결과였다는 점만큼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문이 1931년에 열린 것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3. 경제적 심연 속으로>, 에릭 홉스봄, 1994.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은 "전쟁에 대한 혐오"(같은책, <1-2. 세계혁명>)로 발생한 혁명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이 일어난 배경은 제국주의 '러-일전쟁'이었고 1914년에 제1차 대전 참전한 러시아 차르체제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끝장났다. 러시아 농촌공동체(미르)를 모태로 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이중권력'의 반전투쟁을 기민하게 지도하며 케렌스키의 '2월 임시정부'를 타도한 볼셰비키 '10월 혁명'은 19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거대한 대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같은책, <20세기 : 개관>) 관계를 자본주의와 맺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 내내 서방 자유주의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였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인 이들 '제1세계'를 위협한 것은 소련이 지도하던 '제2세계'도,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같은책, <1-7. 제국들의 종식>)과 "전세계에 분포한 혁명지대"(같은책, <3-15. 제3세계와 혁명>)인 '제3세계'도 아니었다. 
"위협은 (좌파가 아닌) 우파로부터만 나왔다."(같은책, <1-4. 자유주의의 몰락>)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만든 자유주의 세계의 괴물 '파시즘'은 본질적으로는 폭력으로 지배했지만 자유주의 대의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자유주의의 적으로 간주된 '파시즘'은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낳은 괴물이었다. 홉스봄에 의하면, "1930년대에 '파시즘'은 '미래의 물결'로 보였던 것"이고 대중동원 포퓰리즘으로서 "파시스트들은 반(反)혁명의 혁명가"(이상 같은책, <1-4>)였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결국 20세기 역사는 '경제대공황'과 '세계전쟁', 그리고 '혁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모든 '위협'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제2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핵전쟁'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품은 '냉전' 시기 소련은 실질적으로 결코 그런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소련의 '제2세계'는 단지 미국(레이건주의)과 영국(대처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파를 꺾고 집권하기 위한 과장된 '위협'이었다. 소련(스탈린주의)은 이미 1930년대에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하며 '세계혁명'의 의도를 포기한 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것에 그쳤다. 소련은 중국과 베트남, 쿠바 등지의 '제3세계' 혁명을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그들의 자력 혁명 이후에 마지못해 그들의 혁명국가를 지지했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20세기 '자유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된 '대공황' 및  '파시즘'과 '전체주의'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제2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의 '제1세계'와 경쟁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2세계'가 파산한 이유는 '냉전'이 아니라 '데탕트(해빙)'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자유시장'보다는 '보호무역'과, 작은 '야경국가'보다는 강한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홉스봄은 "냉전의 '역설'은 소련을 패배시키고 결국 파산시킨 것이 결국 '대결'이 아니라 '데탕트'였다는 데에 있었다"(같은책, <2-8. 냉전>)라고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인 경제적 대공황과 그 상황이 낳은 파시즘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그 대안 체제로 등장했던 공산주의는 '역설'적으로 '케인스주의' 또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혼합경제'의 모티브가 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므로 "냉전의 종식은 국제분쟁의 종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낡은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성격과 전망은 전혀 불확실했다."(같은책, <2-8. 냉전>)
즉,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자'로 추정되는 홉스봄이 보기에 인류의 '미래'인 '혼합경제'가 폐기되는 '냉전의 종식'은 또 하나의 '20세기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공산주의 몰락 후 힘을 얻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의 '주류경제학'과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자유시장'의 신화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자국 보호주의로 연명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천년왕국의 사제들 조차 그 체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홉스봄이 말한 20세기의 '불확실성'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위기의 몇십년에 관한 중심적인 사실은 자본주의가 더이상 '황금시대'만큼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몇십년(1973~)은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였던 것이다... (경제적) '자유시장'과 정치적 '민주주의' 사이에 선천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위기의 몇십년의 역사적 비극은 이제는 생산에서 인간들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가, 시장경제가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낳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포퓰리즘/개인숭배/배외주의 정치세력 등의 부상으로 인한) '배타적 정체성 정치의 비극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4. 위기의 몇십년>, 에릭 홉스봄, 1994.


1945년 종전 후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전까지 '냉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황금시대(Golden Age/같은책, <2부>)'를 열었다.  1914년부터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같은책, <1부>)'를 통과한 20세기는 '냉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경제'를 통해 강력한 "공적 권위체"(같은책)로서의 국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황주기(콘드라티예프의 대략 10년주기)에 따라 1973년 '오일쇼크'는 이후 이 책이 씌어진 1994년까지 '위기의 몇십년(The Crisis Decades)' 또는 '산사태(The Landslide/같은책, <3부>)'라는 모호한 용어로 명명된다. 
역사가로서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기존 '장기 19세기(The long nine-teenth century)'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역사'를 통해 힘들지만 '희망의 시대'를 전망하던 이 노회한 역사가의 눈에 당장 본인이 살고 있는 '극단'과 '역설'의 '단기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는 그 자체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일종의 '불확실성'의 시대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

21세기의 1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20세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같은책, <3-19>) 흘러가던 1994년의 에릭 홉스봄은 당시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20세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단기 20세기에는 아무도 그 해결책을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세기말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인 안개를 뚫고 세번째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 나아갔을 때 그들이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 뿐이었다... 20세기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전지구적 무질서(신자유주의)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를 끝내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분명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인간사회의 구조 자체...가 인류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의 잠식을 통해서 이제 막 파괴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외적 폭발과 내적 폭발 둘 다의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 뿐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9.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94.


과학기술을 진보시키고 대량생산체제를 발전시킨 대량전으로서 '총력전'(같은책, <1-1. 총력전의 시대>)의 20세기 '세계전쟁'을 거치며 발전한 과학기술은 문예 분야에서 '전위예술' 및 혁신적 '모더니즘'의 패퇴와 현실괴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같은책, <3-17. 전위예술의 사멸-1950년 이후의 예술>)과는 달리 '민주주의'적 '대중소비사회'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의 '도제'로서 다수 소비대중은 "더 이상 자신의 (과학기술적) 지식 부족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같은책, <3-18. 마법사와 도제-자연과학>)이란다. 과학자가 아닌 소비자 대중 그 누구라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다면 자동차의 과학원리를 몰라도 운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경제기적은 '자유주의'적 주류경제학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케인스주의적 '보호무역'과 완전고용 및 수요창출에 기인했다(같은책, <3-19>).
'국민국가'는 약화된 반면, 사회 재분배의 주체로서 '공적 권위체'인 '국가' 자체는 강화된 '단기 20세기'의 세계정치는 '인구 문제'와 '생태학적 (환경)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에릭 홉스봄은 자기통제력을 상실한 20세기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더이상 '희망'이 아닌 '암흑' 뿐이라는 '묵시록(默示錄)'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19세기를 전공하고 20세기를 관통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세기간 엇갈리는 '희망'과 '암흑'의 전망은 과연 21세기 후세 역사가들에게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그래도 인류는 살아야 하니 세계의 미래는 '희망'일 수 밖에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이다.

***

1.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2.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3.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4.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5.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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