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루브르 - 루브르 관람, 시작은 이렇게
나카노 교코 지음, 지종익 옮김 / 아트북스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Et in Arcadia ego."
-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 [욕망의 명화](2019), 나카노 교코, 최지영 옮김, <북라이프>, 2020.


"푸생은 나폴레옹의 어용화가였던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전부'인 프랑스 절대권력자의 취향이었다. 딱딱한 푸생에 뒤이어 향락적인 로코코가 등장한다. 로코코는 다비드의 얼어붙은 듯한 큰 그림에 밀려나고 다비드는 색채와 격정이 범람하는 로만주의(낭만주의)에 밀려 자취를 감춘다. 그 또한 지겨워지자 인상파가 등장한다. 이처럼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간다."
- [처음 가는 루브르], <5장. 아르카디아에 있는 건 누구?>, 나카노 교코, 2013.


프랑스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이 열여덟살에 집을 나와 파리의 아틀리에를 전전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인 당대의 천재화가 플랑드르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는 스물세살에 이미 이탈리아 만토바 공의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린 후였는데, 이 프랑스 젊은이는 특별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서른살이 되는 1624년경 다시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번이 세 번째 로마행이었다. 

훗날 '고전주의' 화풍의 대가로 알려진 니콜라 푸생은 로마에서 <베들레헴의 영아학살>이라는 17세기 당대 '바로크'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보내면서 스스로를 이탈리아인으로 규정했다. 르네상스의 성지였던 이탈리아 지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적인 인체상과 고대 사상에 대한 오마주의 본거지였고 바로크 화풍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로 충격을 받았던지 거의 죽을 뻔한 중병에 걸렸다가 되살아난 푸생은 깨달음을 얻는다. 루벤스와 같은 바로크식 '대중주의'를 벗어나 고전주의적 '예술주의'로 전향하는 화풍의 전환이었다. 약 3백년 후 오스트리아의 젊은 화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미술에서 펼치지 못한 꿈을 신비주의적 인종주의 나치즘으로 전환시켰다면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은 이탈리아인을 자칭하고 르네상스를 재부활시키며 '고전주의'의 문을 열었다.
푸생의 대표작은 1637~38년에 제작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또는 <아르카디아의 목자들>)라는 그림이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이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다. 푸생은 정열적으로 고전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도판(<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 [서양미술사], <19장. 발전하는 시각세계>,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예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그의 장대한 저작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에서 소개한 '고전주의자' 니콜라 푸생이다. 
곰브리치는 '~주의'로 분류하는 다양한 예술사조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미술(예술)사에서의 '변혁'들은 예술의 등불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도전하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만들어간다. 곰브리치는 '미술가'들에 주목하지만 대중들은 미술가들의 특징을 기억하기 위해 다소 도식적이지만 예술사조 별로 그들을 분류해볼 필요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니콜라 푸생을 '고전주의자'로 특정한다. 
고전 시대에 대한 지적 연구와 이상적 고전미를 예술로 실현한다는 푸생의 거만한 자부심은 그의 자화상에 배치한 여신의 아이콘에도 보인다. 좌측 그림의 여성 이마에 장식된 '제3의 눈'은 '진실'을 보는 눈을 상징한다. 푸생 자신은 고전적 아름다움이라는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지적인 '고전주의자'의 자부심이다.

루벤스로 대표되는 바로크식 '대중주의'와 다른 길을 선택한 '고전주의' 대가 푸생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명성을 날렸고 조국인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산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39점의 푸생의 대작들 중 31점을 이탈리아로부터 구입한 장본인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고전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푸생의 거만한 '고전주의'는 절대왕정 시대의 절대권력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이러한 '고전주의'는 장대한 바로크 이후 화려한 로코코 시대를 지나 18세기 자크루이 다비드의 '신(新)고전주의'로 이어지는데, 유럽의 절대권력자를 꿈꾸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 : 1769~1821) 1세는 다비드를 궁정화가로 두고 본인의 초상화와 대관식 장면 등을 최고로 이상적이며 웅장하게 그려지기를 희망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려서 유명해진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 1748~1825)의 제자였는데, 오랜 기간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남성적이고 딱딱한 역사화보다 우아한 여성미를 그리는 쪽이 자신에게 맞음을 깨닫는다. 옳은 판단이었다. 그의 그림에서는 치밀한 사실적 묘사와 달짝지근한 여성의 나신이 훌륭하게 어우러지는데, 이 그림(<그랑드 오달리스크>)이 좋은 예다."
- [욕망의 명화], <1-4. 흰 뱀처럼>, 나카노 교코, 2019.


자크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처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조직된 국민군의 젊은 장교였고, 다비드는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였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정파투쟁 혼란 속에서 혁명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단두대로 끌려가는 프랑스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조롱하는 스케치를 그렸던 다비드는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얼마 후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나던 때 이미 혁명을 배신하고 권력자의 편에 섰다. 결과는 왕정을 복고한 나폴레옹 황제의 최측근 궁정화가였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Dominique Ingres : 1780~1867)는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다. 다비드처럼 나폴레옹 황제의 초상을 그리던 앵그르는 19세기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 1798~1863)의 '낭만주의'와 대립하던 '신고전주의'의 적자였고 왕립 아카데미를 대표했다. 앵그르는 또한 19세기 출현하기 시작했던 '인상주의'를 배척하고 이 새로운 '인상주의' 화풍의 신예들을 미술계의 황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푸생의 '고전주의'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잇고 있지만, 고전적 남성미가 아닌 여성미가 주전공이었다. 당시 유럽은 동방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페르시아' 풍의 화려함과 사치, 방탕함 등이 유행했는데, 앵그르의 대표작은 '하렘(성역)'이라는 오스만식 비밀의 방(오달리스크)에서 목욕재개하고 술탄을 기다리는 후궁을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와 역시 여성 나체의 향연인 <터키탕>과 <목욕하는 여인>,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등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주의'를 부정한 앵그르의 화풍은 이후 '인상주의' 대가인 르누아르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니 역시 세상만물은 '대립(맞섬)'과 '연결(얽힘)'이 교차하고 난무하는 '변증법' 또는 '맞얽힘'의 원리가 지배한다.


"앵그르와 그 유파가 '장중한 양식(Grand Manner)'에 몰두하여 푸생과 라파엘로를 찬탄하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에 주목함으로써 감식가들을 놀라게 했다."
- [서양미술사], <25장. 끝없는 변혁>,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17세기 '고전주의자' 니콜라 푸생의 대표작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에 나오는 '아르카디아(Arcadia)'는 한적한 시골의 목가적 이상향의 상징이다. '아르카디아'는 원래 황량한 산골마을로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산양인 고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신인 '판(Pan)'을 숭배하는 지역이다. '판'이라는 용어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 전부'라는 의미인데, 고대의 범신론적 사상이 녹아있다. 
그림에는 '판'의 여사제로 추정되는 여인이 중앙에 서 있다. 아마도 그녀는 석곽에 적힌 "Et in Arcadia ego!"를 발견하고 놀라서 들여다보는 다른 목동들처럼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전적 미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관념 혹은 '성상(아이콘)'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라는 이상향에도 존재하는 '나(ego)'는 비슷한 소재를 그린 구에르치노 같은 이전 화가들의 전작에 의하면 곧 '죽음(해골)'을 의미한다. 
이상향인 낙원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 등으로 미술사의 대중화를 꾀하는 일본의 독일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처음 가는 루브르](2013)와 [욕망의 명화](2019) 등의 미술대중서를 지속적으로 내면서 미술사 속 명화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가는 루브르]는 루브르에 처음 가면 꼭 봐야 할 작품들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욕망의 명화]는 기존 [무서운 그림] 시리즈와 그 뒤를 잇는 후속작으로 [문예춘추] 같은 문예잡지에 연재하는 그녀의 글들을 편집하여 묶은 모음집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미술 이야기는 모든 곳에 깃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다. 
나카노 교코는 미술사에 관심있는 독자로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푸생의 '고전주의'와 다비드를 거쳐 19세기 앵그르로 이어지는 '신고전주의'의 물결은 '아르카디아'라는 고전적 이상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이상향에도 '죽음'이 존재한다.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와 대립했지만 미술사에서 이어지는 전후기 '인상주의'와 함께 연결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변증법'과 '맞얽힘'의 관계다.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무섭고도 낭만적인 죽음 또한 그렇다.


"Et in Arcadia ego(I'm also in Arcadia)."
"나(죽음) 또한 '아르카디아(낙원)'에도 존재한다."

***

1.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2. [욕망의 명화](2019), 나카노 교코, 최지영 옮김, <북라이프>, 2020.
3.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의 명화 - 그림 속 은밀하게 감춰진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읽다
나카노 교코 지음, 최지영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Et in Arcadia ego."
-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 [욕망의 명화](2019), 나카노 교코, 최지영 옮김, <북라이프>, 2020.


"푸생은 나폴레옹의 어용화가였던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전부'인 프랑스 절대권력자의 취향이었다. 딱딱한 푸생에 뒤이어 향락적인 로코코가 등장한다. 로코코는 다비드의 얼어붙은 듯한 큰 그림에 밀려나고 다비드는 색채와 격정이 범람하는 로만주의(낭만주의)에 밀려 자취를 감춘다. 그 또한 지겨워지자 인상파가 등장한다. 이처럼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간다."
- [처음 가는 루브르], <5장. 아르카디아에 있는 건 누구?>, 나카노 교코, 2013.


프랑스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이 열여덟살에 집을 나와 파리의 아틀리에를 전전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인 당대의 천재화가 플랑드르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는 스물세살에 이미 이탈리아 만토바 공의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린 후였는데, 이 프랑스 젊은이는 특별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서른살이 되는 1624년경 다시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번이 세 번째 로마행이었다. 

훗날 '고전주의' 화풍의 대가로 알려진 니콜라 푸생은 로마에서 <베들레헴의 영아학살>이라는 17세기 당대 '바로크'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보내면서 스스로를 이탈리아인으로 규정했다. 르네상스의 성지였던 이탈리아 지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적인 인체상과 고대 사상에 대한 오마주의 본거지였고 바로크 화풍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로 충격을 받았던지 거의 죽을 뻔한 중병에 걸렸다가 되살아난 푸생은 깨달음을 얻는다. 루벤스와 같은 바로크식 '대중주의'를 벗어나 고전주의적 '예술주의'로 전향하는 화풍의 전환이었다. 약 3백년 후 오스트리아의 젊은 화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가 미술에서 펼치지 못한 꿈을 신비주의적 인종주의 나치즘으로 전환시켰다면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은 이탈리아인을 자칭하고 르네상스를 재부활시키며 '고전주의'의 문을 열었다.
푸생의 대표작은 1637~38년에 제작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또는 <아르카디아의 목자들>)라는 그림이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이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다. 푸생은 정열적으로 고전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도판(<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 [서양미술사], <19장. 발전하는 시각세계>,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20세기 오스트리아 미술(예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그의 장대한 저작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에서 소개한 '고전주의자' 니콜라 푸생이다. 
곰브리치는 '~주의'로 분류하는 다양한 예술사조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미술(예술)사에서의 '변혁'들은 예술의 등불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도전하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만들어간다. 곰브리치는 '미술가'들에 주목하지만 대중들은 미술가들의 특징을 기억하기 위해 다소 도식적이지만 예술사조 별로 그들을 분류해볼 필요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니콜라 푸생을 '고전주의자'로 특정한다. 
고전 시대에 대한 지적 연구와 이상적 고전미를 예술로 실현한다는 푸생의 거만한 자부심은 그의 자화상에 배치한 여신의 아이콘에도 보인다. 좌측 그림의 여성 이마에 장식된 '제3의 눈'은 '진실'을 보는 눈을 상징한다. 푸생 자신은 고전적 아름다움이라는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지적인 '고전주의자'의 자부심이다.

루벤스로 대표되는 바로크식 '대중주의'와 다른 길을 선택한 '고전주의' 대가 푸생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명성을 날렸고 조국인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산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39점의 푸생의 대작들 중 31점을 이탈리아로부터 구입한 장본인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고전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푸생의 거만한 '고전주의'는 절대왕정 시대의 절대권력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이러한 '고전주의'는 장대한 바로크 이후 화려한 로코코 시대를 지나 18세기 자크루이 다비드의 '신(新)고전주의'로 이어지는데, 유럽의 절대권력자를 꿈꾸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 : 1769~1821) 1세는 다비드를 궁정화가로 두고 본인의 초상화와 대관식 장면 등을 최고로 이상적이며 웅장하게 그려지기를 희망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려서 유명해진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 1748~1825)의 제자였는데, 오랜 기간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남성적이고 딱딱한 역사화보다 우아한 여성미를 그리는 쪽이 자신에게 맞음을 깨닫는다. 옳은 판단이었다. 그의 그림에서는 치밀한 사실적 묘사와 달짝지근한 여성의 나신이 훌륭하게 어우러지는데, 이 그림(<그랑드 오달리스크>)이 좋은 예다."
- [욕망의 명화], <1-4. 흰 뱀처럼>, 나카노 교코, 2019.


자크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처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조직된 국민군의 젊은 장교였고, 다비드는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파였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정파투쟁 혼란 속에서 혁명을 배반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단두대로 끌려가는 프랑스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조롱하는 스케치를 그렸던 다비드는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얼마 후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나던 때 이미 혁명을 배신하고 권력자의 편에 섰다. 결과는 왕정을 복고한 나폴레옹 황제의 최측근 궁정화가였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Dominique Ingres : 1780~1867)는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다. 다비드처럼 나폴레옹 황제의 초상을 그리던 앵그르는 19세기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 1798~1863)의 '낭만주의'와 대립하던 '신고전주의'의 적자였고 왕립 아카데미를 대표했다. 앵그르는 또한 19세기 출현하기 시작했던 '인상주의'를 배척하고 이 새로운 '인상주의' 화풍의 신예들을 미술계의 황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푸생의 '고전주의'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잇고 있지만, 고전적 남성미가 아닌 여성미가 주전공이었다. 당시 유럽은 동방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페르시아' 풍의 화려함과 사치, 방탕함 등이 유행했는데, 앵그르의 대표작은 '하렘(성역)'이라는 오스만식 비밀의 방(오달리스크)에서 목욕재개하고 술탄을 기다리는 후궁을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와 역시 여성 나체의 향연인 <터키탕>과 <목욕하는 여인>,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등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주의'를 부정한 앵그르의 화풍은 이후 '인상주의' 대가인 르누아르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니 역시 세상만물은 '대립(맞섬)'과 '연결(얽힘)'이 교차하고 난무하는 '변증법' 또는 '맞얽힘'의 원리가 지배한다.


"앵그르와 그 유파가 '장중한 양식(Grand Manner)'에 몰두하여 푸생과 라파엘로를 찬탄하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에 주목함으로써 감식가들을 놀라게 했다."
- [서양미술사], <25장. 끝없는 변혁>,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17세기 '고전주의자' 니콜라 푸생의 대표작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에 나오는 '아르카디아(Arcadia)'는 한적한 시골의 목가적 이상향의 상징이다. '아르카디아'는 원래 황량한 산골마을로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산양인 고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신인 '판(Pan)'을 숭배하는 지역이다. '판'이라는 용어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 전부'라는 의미인데, 고대의 범신론적 사상이 녹아있다. 
그림에는 '판'의 여사제로 추정되는 여인이 중앙에 서 있다. 아마도 그녀는 석곽에 적힌 "Et in Arcadia ego!"를 발견하고 놀라서 들여다보는 다른 목동들처럼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전적 미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관념 혹은 '성상(아이콘)'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라는 이상향에도 존재하는 '나(ego)'는 비슷한 소재를 그린 구에르치노 같은 이전 화가들의 전작에 의하면 곧 '죽음(해골)'을 의미한다. 
이상향인 낙원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 등으로 미술사의 대중화를 꾀하는 일본의 독일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처음 가는 루브르](2013)와 [욕망의 명화](2019) 등의 미술대중서를 지속적으로 내면서 미술사 속 명화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가는 루브르]는 루브르에 처음 가면 꼭 봐야 할 작품들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욕망의 명화]는 기존 [무서운 그림] 시리즈와 그 뒤를 잇는 후속작으로 [문예춘추] 같은 문예잡지에 연재하는 그녀의 글들을 편집하여 묶은 모음집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미술 이야기는 모든 곳에 깃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다. 
나카노 교코는 미술사에 관심있는 독자로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푸생의 '고전주의'와 다비드를 거쳐 19세기 앵그르로 이어지는 '신고전주의'의 물결은 '아르카디아'라는 고전적 이상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이상향에도 '죽음'이 존재한다.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와 대립했지만 미술사에서 이어지는 전후기 '인상주의'와 함께 연결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변증법'과 '맞얽힘'의 관계다.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무섭고도 낭만적인 죽음 또한 그렇다.


"Et in Arcadia ego(I'm also in Arcadia)."
"나(죽음) 또한 '아르카디아(낙원)'에도 존재한다."

***

1. [처음 가는 루브르](2013), 나카노 교코, 지종익 옮김, <아트북스>, 2016.
2. [욕망의 명화](2019), 나카노 교코, 최지영 옮김, <북라이프>, 2020.
3.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혁명의 '백년 동안의 고독'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 올랜도 파이지스, 조준래 옮김, <어크로스>, 2017.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을 혁명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1장. 시작 - 1891년 대기근>, 올랜도 파이지스, 2014.


나는 어지간하면 한 번 펼쳐든 책은 다 읽는다. 어려운 책이든 재미없는 책이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듯이 건너뛰지 않고 이해하든 못하든 끝까지 본다. 그러나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은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대부분 건너 뛰었고, [유러피언]이라는 책은 아예 중간도 못 가서 덮었다. [율리시스]는 난해하기도 했지만 정말 너무 지루했고, 올랜도 파이지스의 [유러피언]은 읽는 동안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인물들 중심으로 오랜 기간 고심해서 썼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사실 올랜도 파이지스에 대한 기대로 펼쳐든 책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었던가 보았다.


영국의 역사가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를 알게 된 건, '러시아혁명'에 관한 그의 책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을 통해서였다. 역시 반세기 전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분석한 '러시아혁명사'였는데, 1917년 또는 1905년이 아니라 아예 소비에트가 망한 1991년부터 무려 백년 전인 1891년부터가 '러시아혁명'의 시작점이라는 분석 자체가 눈에 띄었다. 즉, '러시아혁명'은 1891년의 러시아 동남부 대기근과 이에 대한 차르 전제체제의 무능한 대처가 불러온 '대참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지하조직', '음모', '폭력'과 거리가 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 레닌을 혁명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러시아 특유의 지하조직과 전위정당, 레닌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들의 머리통을 후려갈겨야 할" 폭력혁명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 시작이 바로 '차르' 체제였고, 그 객관적 배경이 바로 '1891년 대기근'이었다.


"만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유럽의 노동운동이 선택한 중도적 개혁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그들을 극단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지하혁명 운동의 지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던 것은 바로 차르 정부였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1장>, 올랜도 파이지스, 2014.


마르크스주의는 보통 '폭력혁명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실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전이었던 농업 제국인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 볼셰비키 소비에트 혁명을 지도했던 레닌주의와 결합한 '마르크스-레니니즘(Marx-Leninism)'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사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부르주아-지주 계급연합에 의해 거부되던 19세기의 노동자 계급에게는 '폭력'으로 체제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 말고는 사람답게 살 방도가 없었다. 20세기에 노동자 민중들이 보통선거권으로 투표용지와 도장을 들었다면, 19세기에는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20세기 노동자 보통선거권 쟁취로 유럽의 사회주의 진보정당은 대중정당으로서 '의회주의' 전술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다수화'를 목표로 할 수 있었고, 그 과학적 배경은 자본주의 고도 발전의 결과 '생산력'의 '사회화'가 '생산수단'까지 '사회화'하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필연적 전환이었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공황과 체제의 이행을 암시했지만 만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를 연구하는 자연과학 공부의 심화와 함께 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와 러시아의 전통공동체 '미르'를 연구하면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지 않은 사회에서도 '생태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다수설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과학적으로' 체제 이행이 된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자본주의 후진국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1891년 대기근이 닥치고 그 이듬해 콜레라와 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50여 만명의 다수 농민이 죽어가도 차르는 자본가들의 곡물 수출을 허용하고 독려하면서 자본의 이윤 증식을 비호했다. 사람 사는 러시아를 바라는 톨스토이와 체호프를 비롯한 수많은 진보적 인사들은 황야의 인민들에게 돌아가(브나로드 운동) '혁명'적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이 1867년에 독일어로 첫 출간되고 5년 후인 1872년에 플레하노프라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을 때, 영문판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는 '인민주의'의 동력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실천했다. 러시아의 차르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상적'인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정상적'인 의회주의 정치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1920년에 레닌이 "1917년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되었을 '최종 리허설"(같은책, <2장>)이라고 규정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후 조직된 입헌군주제 의회인 '두마'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차르의 귀족 출신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은 영국보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을 모델로 러시아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무자비한 러시아 차르의 체제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같은책, <3장>).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사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달리 무장한 전위부대가 되어야 했다.
결국, 레닌의 '폭력혁명'을 촉발한 것은 다름아닌 '차르'였다.

레온 트로츠키(L.Trotsky)가 "군주정이 민중의 목에 두 번 다시 올라타지 못하도록 격하게 토해냈다."([러시아혁명사], <5장>)고 묘사한 1917년 2월 '부르주아 혁명'으로 차르 체제를 종식시키고 들어선 러시아 케렌스키 정부는 이미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의회인 '두마'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자발적'으로 들불처럼 결성된 다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소비에트(평의회)'와 병립하는 '이중권력'의 상황이었다. 자유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속 밀어붙였고 러시아 민중들은 전쟁터에서 죽느냐 혁명의 내전에서 죽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시의 노동자와 각 지방의 농민들은 물론 병사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평의회인 '소비에트'로 계속 활발하게 뭉쳤고 이런 '이중권력'의 정세에서 소비에트의 힘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능가했다.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인 레닌과 트로츠키는 대중의 '자발성'이나 자본주의 고도발전의 사회주의 필연적 체제 이행을 믿지 않았고 볼셰비키의 전위적이고 주도적인 혁명적 실천을 강조했으나, 사실 트로츠키는 1905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소비에트 지도자였고, 레닌은 1917년 독일로부터 러시아로 귀국하는 봉인열차에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즉각적인 무력혁명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유럽과 같은 대중정당이 아니라 전위적 지하조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볼셰비키(다수파)들은 이렇게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다수 민중들의 소비에트의 평등과 평화 운동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건국한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인 이유다. 미국의 러시아 출신 역사학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Rabinowitch)는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의 의지적 실천보다는 '소비에트'의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혁명적 동력을 강조한다.

이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와 스탈린 사후 '스탈린 비판'을 시전한 흐루쇼프나 1991년까지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한 고르바초프 모두 사실은 '레닌주의자'였다. 스탈린이 교조화시킨 '레닌주의', 즉 실상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다시금 1914~1917년의 '레닌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은 '대기근'의 1891년이나 '피의 일요일'의 1905년,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4년이나 '이중권력'과 '이중혁명'의 1917년과 달랐다. 
그렇게 '레닌주의'의 부활은 실패했다.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사회적 트라우마와 질환으로부터 치료받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정치적으로 혁명은 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혁명은 100년 동안의 그 폭력적인 사이클 속에 휩쓸린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사후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20장. 심판 - 혁명의 후기>, 올랜도 파이지스, 2014.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항한 스탈린주의 소련의 '대조국전쟁'은 사실 러시아 민중의 대규모 시체 더미 위에서 펄럭인 피의 깃발이었다. 히틀러 나치군의 동진을 막은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정의의 반(反) 파시즘 전쟁'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2천5백만 소련군이 죽어가며 지켜낸 것은 결국 그들의 조국이 아니라 스탈린의 권력이었을 수도 있다.  이후 세계의 1/3을 미국과 나눠먹은 소련은 스탈린의 국가였고 그 스탈린은 1917년 10월 혁명 초기 인민위원회의 초대 '민족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가 주장한 사회주의적 우애와 평화에 기초한 '민족해방'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식민지'만을 양산하다가 결국 민중들에 의해 연쇄적으로 해체되었다. 
다시금 '레닌주의' 혁명정신을 부활하기에 스탈린 이후 소련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스탈린 시대에서 나고 자라며 교육받은 소비에트 민중들이 바라는 국가는 '자유'와 '평등'의 사회주의 세상이 아니라 기존 차르 체제와 같은 '러시아 대제국'이 되어 있었다. 
이는 차르나 스탈린 못지 않은 지금의 러시아 푸틴의 절대권력과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한 러시아 정교회의 '정교일치' 국가로 이어졌다.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은 철학자이나 정교회 사제와도 같은 자로 차르 체제 말기의 라스푸틴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민주화'된 러시아연방은 '전범 재판'과 같이 스탈린 시절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를 법원을 통해 사법적으로 단죄하려고도 했다. 이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범 재판'과는 달리 '피의자'가 없는 희귀한 재판이었다. 소련공산당은 대법원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은 스탈린의 '일국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불법화된 '만년여당' 소련공산당은 '만년야당' 러시아공산당으로 부활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적 실천을 봉쇄했다. 아직도 다수 러시아 민중들은 스탈린주의를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억하는 스탈린의 조국은 '자유'와 '평등', '우애'와 '평화'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차르의 대제국이었다.

그렇게 1891년부터 1991년까지 '러시아혁명'은 러시아 민중들의 '제국적 추억'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주의적 본질'을 다수가 알아주지 않는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 잠기게 된다.

***

1.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 Orlando Figes, 조준래 옮김, <어크로스>, 2017.
2.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1979), E.H.Carr,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3.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 A.Rabinowitch,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4. [러시아혁명사](1932), L.Trotsky,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5. [유러피언](2019), 올랜도 파이지스, 이종인 옮김, <커넥팅>, 20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쾌한 랄라 씨, 엉뚱한 네가 좋아 - 맞선 둘이 하나인 맞얽힘으로 바라본 인생
이은미 지음, 박예지 그림 / 움직이는책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역]을 읽는 시간 : 2021년
-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주석,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곤(困)'은 '형통'하고,
바르고 대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이 있으면 믿지 않으리라.
...
[상전]에서 말하기를, 못에 물이 없는 것이 '곤(困)'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목숨을 다하여 뜻을 이루느니라."
- [주역], <47괘. 곤(困)>, 왕필 주석, 3세기.


1.

- 아주 좋은 궁합이야.

탑골공원 옆 사주팔자 점을 치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 근데, 올해는 안돼. '반.드.시.' 헤어져.

2005년 5월 경이었겠다.
아내인 안은미 양과 결혼 날짜를 잡고 어두워진 종로 거리를 걷던 주말에 재미삼아 탑골공원 담장 옆 점보는 천막에 들어갔을 때가.

어릴 때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던 종로3가 탑골공원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돌면 낙원상가 들어가는 방향에 어딘가에서 사진으로 본 인디언 천막이 연상되는 것이 자세히 보니 '사주팔자', '주역' 어쩌고 써붙인 할아버지 점집이었다. 두 어개 있었나. 탑골공원에는 무료한 어르신들이 한담이나 장기를 두거나 낮술 한 두잔 주고받는 장소만이 아니라 '점'도 쳐주는 곳이란 걸 몰랐었다.
그 중 가까운 천막에 무작정 들어가 나와 안은미 양의 사주를 물었다. 지긋한 연세의 점쟁이 할아버지는 정체모를 책첩을 펼쳐 손가락으로 한참을 짚어 나갔다. 그러더니 우리 둘 각자의 매우 '불우'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정말 '쪽집게'처럼 맞추셨다. 양가 부모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나 우리 둘다 어려서 '부모덕은 없었다'. 하지만 성장해서는 잘 풀릴 거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각자는 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한다. 지난 8~9개월의 연애 과정에서 우리 두 청춘은 가난했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공유했고 물론 둘 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의 대표적 '소년/소녀 가장'이기는 했으나 이제 같은 직장에서 자립했으니 우리 힘으로 가정을 꾸리자고 작정한 터였다. 같은 직장에서 만난 후 농담따먹기나 하다가 내가 다른 곳으로 인사발령 받게된 2004년 10월부터 6개월 정도 짧은 연애를 했고, '같이 살자'고 2개월 정도 꼬셔서 안은미 양의 승락을 받았다. '부모 덕'은 없었기에 양가 부모님께는 '허락'이 아닌 '통보'를 했고 결혼 날짜도 우리 둘이 잡았다. 2005년 음력 단오였던 양력 6월 11일이 예정일이었는데, 당연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 민족적 축제날 '단오'를 알고 정한 건 아니었고 우연히 현실적으로 가장 후딱 해치울 수 있는 날로 잡다보니 공교롭게도 민족의 잔칫날인 '단오날'이었다.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건 있을 수도 없고 한창 마이너스였던 안은미 양한테는 언감생심이었으니 우리의 결혼자금은 내 마이너스 통장 1,20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제 '오르막길' 더 가팔라지기 전 호주 신혼여행으로 결혼자금의 절반을 쓰기로 하고 그냥 부모님과 함께 살던 우리 전셋집 내 방에 80만원 '아씨방' 신혼가구를 들였고 예식비용은 축의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아마도 5월의 그 주말 저녁에 종로 거리를 거닐었던 날은 종로5가 금은방에서 18만원짜리 결혼반지를 산 날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아무튼 우리는 결혼 날짜를 정했다는 말은 안 하기로 하고 '불우'한 소년/소녀 가장인 우리 둘의 궁합이나 보자며 무심히 천막에 들어갔던 터였다. 우리 둘의 사주를 듣고는 거의 정확하게 두 사람 각자의 과거를 짚어주는 할아버지의 영험함에 우린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가정을 꾸리면 삶은 더 힘들고 가팔라질 거라는 각오를 한 우리에게 그 점쟁이 할아버지는 이제 슬슬 '풀릴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해주셨는데, 신뢰도는 이미 200프로 이상이었고, 할아버지 앞에 미래를 내다보는 '수정 구슬'이 있는 듯 했다. 예비신랑인 나는 '칼'을 쥐고 있어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어려움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 하여 순간 근심했으나 예비신부 안은미 양은 '금'을 깔고 앉아서 나중에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을 거라는 후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사주명리학'의 주요 역술인으로 보이던 할아버지가 점쳐준 우리 둘의 '과거'는 정확한 '역사과학'이었고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 희망이었다. 
그래, 이제 '현재'를 물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받은 결혼의 여신 헤라로부터의 '신탁'은 "궁합은 잘 맞으나 올해는 안된다"였다.

'과거'와 '미래'에 관한 '신탁'을 듣고는 신뢰도 급상승하여 나는 내처 결혼날짜인 '현재'를 털어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궁합에도 불구하고 2005년 그 해에 결혼하면 우리 장인장모처럼 헤어질 거라는 헤라의 '신탁'은 금세 카산드라의 '저주'가 되었다. 나는 점값을 황급히 지불하고 안은미 양의 손을 잡고 천막을 나왔다. 황망히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얼떨결한 안은미 양은 그 와중에도 "아이는 셋이야~"라는 점쟁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예언을 들었단다. 

어언 17년이 지난 지금, 신통했던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지금 우리는 자녀 셋을 기르고 있고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원래 자녀 한 명을 두자는 나와 적어도 셋은 있어야 한다는 안은미 양의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칼'을 쥔 나는 하나라도 잘 키워보자, 였고, '금'을 깔고 앉은 그녀는 식구는 많을 수록 좋다, 였다. 
결국,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던 나는 그 해에 결혼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던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자녀 다다익선주의자인 안은미 양은 '아이 셋'이라는 그 할아버지의 예언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2.

물론 2005년 당시에 나는, [주역]과 '사주명리학', '음양오행'이 다 같은 건 줄 알았다. 뭔가 '과학'적이지 못한 '미신' 같은 그런.

스무살 이후 20세기 내내 서구의 '사회과학'에 익숙하던 나는, 21세기 첫 해에 <한겨레21>을 구독하며 읽었던 이상수 기자의 '동서횡단'이라는 코너를 좋아라 읽어댔고 중국 전문가이자 [주역] 연구자가 된 이상수 기자가 2001년 낸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2001)이란 책을 계기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 '최고의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도 그 이후로 읽었다. 노동계급의 사회변혁은 여전히 중요했고 소비에트도 해체된 지 오래였고 옆동네의 '인민공화국'에는 노예적 '노동' 또는 '소비' 밖에 모르는 '축생'들 뿐 '인민'은 없으니 이제 아시아에서 그 방향은 공자의 '인'과 맹자의 '의'를 통한 '대동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묵자의 '노동'에 기반한 '겸애'가 그 '평등'한 나라의 주요 덕목이었다. 노동자 보통선거가 없던 마르크스-레닌 시대의 불가피한 '폭력혁명'과 '기동전'보다는 손자처럼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헤게모니 '진지전'의 '평화의 병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중 너무 중국사람이 될 것 같아 뒤돌아 우리 역사를 다시 보니 역시, 1997년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1997) 이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게 된 '불세출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 선생이 다시 생각났다.

물론 정도전 선생을 따라 '성리학'을 따로 보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인데, 삼봉 선생과 성리학자들이 바라본 세계가 그 형이상학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유물론'적 요소를 지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게 바로 [주역]이었다. 예의 이상수 기자가 2014년에 낸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2014)는 내게 [주역]과 '동양사상'이 점치는 '미신'이 아니라 집단지성에 의한 '(사회)과학'임을 알려줬다. 중국 은나라 때부터 불에 지져대던 거북이 등딱지의 '갑골문'이나 주나라 문왕이 칩거시절 정리했다는 [주역] '64괘'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이 아니라 그 방대한 기록을 통해 인류의 선택과 방향점을 '대수의 법칙'인 통계로 보여주는 고대의 '빅 데이터'와도 같았다. '사주명리'는 개인들 각각의 데이터에 어거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이 짙고, '음양오행설'은 세상 운영의 이치를 규명하고자 하나 다분히 관념적 형상(달/해/목-화-토-금-수)을 우선으로 끼워맞추는 관념론이었다. 반면 [주역] 또는 성리학 '경전'으로서의 [역경]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세상의 운동원리를 기존의 '빅 데이터'를 통해 규명하고 해석하며 주석을 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맹아를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위대한 동양 역사가 사마천도 [사기]의 서문, <태사공자서>에서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등과 따로 '음양가'를 구분하며 [주역]에 기초한 앞의 사상들에 비해 '음양가'는 관념과 형상에 세상을 끌어 맞춘다고 평가했다. 
근대와 현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기원전 고대에는 '철학'은 '과학' 또는 '학문'의 최고 경지였고, 점치는' 책 [주역]이 바로 '과학'이었다.


[주역]은 단순한 '점술책'이 아니다.
집단지성의 '빅 데이터' 기록을 토대로 세계를 '유물론'적으로 바라본 [주역]과 그 주석들 속에서 자연의 운명론 같은 걸 봐서는 안된다. 그 점괘와 해석을 통해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인간이 [주역]의 '주역'이다. 그 인간은 도둑질이나 사기 등 소인배의 정신이 아니라 하늘의 '도(道)'를 이어받아 실현하는 '덕(德)'을 갖추고 미래를 내다 보아야 한다. 
2005년 탑골공원에서 '신탁'했던 나의 '현재'는 오로지 나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였다. 결혼 후 나의 마음가짐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안은미 양과 헤어지지 않고 오래오래 백년해로할 것인가"에 맞춰졌다. 점쟁이 할아버지의 '사주명리'는 내게 '예언'이 아닌 '경계'였다.
'사주명리'나 '음양오행'이 아니라, '변화'와 '유물론'적 동양 사상의 경전인 [주역]을 읽는데 가장 중요한 게 인간의 '주체성'과 '덕성'임을 이상수 선생의 책으로부터 배운 후 2014년은 내게 [주역]의 시간이었다.

그 시기는 내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강력한 회사에 맞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야 했던 노동조합 간부의 시기였다. 시대는 이제 임단협에서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복지증진을 요구하기만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진 극우 파시즘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수시로 밀어붙였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우리 집행부 임기는 이런 극우 막장정권이 임금피크제 도입과  성과형 임금체계 확대, 파견비정규 노동시장을 제도화하려는 노동법 개악을 강력 추진했고 이에 편승한 자본가들과 그 대리인들은 이제 임단협에서 회사의 요구안을 강력하고 집요하게 밀어붙이던 시기의 한 가운데를 통과했다. 계급투쟁을 시작한 건 역시나 자본가들이었고, 투쟁할 단결력을 확보하지 못한 노동조합은 판판이 깨졌다. 노사협상장에서는 '권리'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이익'만이 판을 쳤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협상 결과'는 '패배'의 다른 이름이었다.


3. 

"'감(坎)'을 익힘(習)은,
믿음이 있어서 오직 마음이 형통하리니,
행하면 승상함이 있으리라.
...
[상전]에서 말하기를,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 '습감(習坎)'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서 항상 덕행을 지키며 정교의 일을 익히느니라."
- [주역], <29괘. 감(坎)>, 왕필 주석, 3세기.


'가이태서유상(假爾泰筮有常)'
"떳떳함이 있는 크나큰 시초를 빌립니다."

이 말을 두 번 외치고 나는 책상 앞에 정좌했다.
모두들 패배한다고 했고 나의 예측도 사실 그랬다. 응원하는 사람들보다는 만류하고 외면하며 심지어는 비웃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회사는 스리슬쩍 '10%도 안되던데 할 수 있겠냐' 나를 떠보았다.
손자는 그 '평화'의 [병법]에서 '난타전'은 하책이며 먼저 이겨놓고 싸움에 임하는 것이 상책이라 했지만 2005년 5월의 나처럼 2016년의 나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간 모자란 머리로 읽었던 3세기 위진남북조 시대 '도가'적 현학자 왕필이 주석한 [주역]을 놓고 산가지는 없으니 이쑤시개 쉰다섯개를 늘여놓고는 책상에 좌정했다.

그때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주역점'이었다.
그 이전에는 몰라서 못쳤고, 그 이후에도 역시 몰랐지만 그 하루에 더듬더듬 삼세번 정도를 쳐봤다. 그리고 이제 설령 [주역]에 대해 더 알게 된다 해도 칠 생각은 없다. 
나는 그 한 번으로 '주역점'이 뭔지 알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첫 번째 나온 괘는 47번째 '곤괘'였다. 한자 그대로 '곤'란하고 피'곤'했다. 괘상은 위의 삼효인 상괘가 '연못'을 상징하는 '태'괘이고 아래는 '물'을 뜻하는 '감'괘다. '택수곤'이라 하여 쉬운 말로 다 '물'인데, 물은 아래로 흐르나 위로 향하는 양과 아래로 향하는 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용]이거늘 둘다 아래로 흘러봐야 물에 잠기기만 한다. [주역]에서 '물'의 '감괘'만 따지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물은 '형통'하지만 대체로 흉하다. 공자 이래 지은 [주역]의 해석에 따르면 연못 아래 큰 물이 있어 정작 연못에는 물이 말라 '궁'하고 '곤'하다 했으니 이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물론 '물극필반(物極必反)', 즉 '극에 닿으면 반대로 전환된다'는 [중용]의 원리에 따라 '궁즉통', 즉 '궁하면 통하여' 다음의 길함을 징조하여 결국 '대인', '군자'가 '뜻을 이룬다'고 나와 있으나 당장은 흉하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각 효는 '변효'를 포함한다. 봄을 뜻하는 '소양'의 숫자 7은 변하지 않지만 여름의 '노양' 9는 극에 달했으므로 곧 가을의 '소음' 8로 변한다. 겨울의 '노음'인 6 또한 극에 닿아 '대한'의 절기를 지나면 '입춘', 즉 7로 순환한다. 산가지 남은 갯수로 나온 이 숫자에 따라 각 효는 변하거나 불변하면서 다른 괘를 그리는데 그에 따라 나온 괘가 29번째 '감'괘였다.

또 다시 '물'에 빠졌는데 이번에는 상괘와 하괘가 모두 '물'이다. '중수감'이라 하여 온 지구의 육지가 온통 바다에 빠졌다. 흉 중의 흉이었다. 물론 도교에서 말하는 '상선약수'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 최고의 '선'이라 하고 그 주요 덕목은 '겸손/겸애'다. 하지만 [주역]의 괘로만 치면 물에 빠지는 '흉괘'다.

계속 '길함'과 '흉함'만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뜻인데, 사실 [주역]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만물의 '유물론'적 이치는 길 속에 흉의 조짐이 있고 흉 속에 길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양질전화'하듯 길흉과 흉길은 서로 전환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히 동양에서 먼저 발견한 '유물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수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오래전 2005년 점쟁이 할아버지의 예언대로 '아이 셋'은 현실이 되었고, '그 해 결혼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나의 '주체적' 결단과 '덕성'으로 그 길만은 피해가고 있는 이 다복한 2021년에 동양 고전과 서양 과학 연구자인 이철 선생은 이 고전적인 사물관계를 '맞얽힘'이라 선언했다. 모든 물질은 '맞섬'의 서양식 세계관과 만물이 하나로 '얽힘'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한데 '맞얽혀' 새로운 용어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자 단어를 찾았으나 적절한 작명에 실패했음을 토로하는 이철 선생은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움직이는 책>, 2021)에서 공자와 손자, 노장사상은 물론 이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물극필반'의 개인 윤리인 [중용]과 사회사상으로서 '평천하'의 [대학]까지 요약한다. 이를 관통하는 객관적 배경이 바로 [주역]이다. 기존 강단학계와는 다르게 '맞얽힘'의 원리로 동양 고전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저자의 공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굳은 내 머리로는 아무리 봐도 '맞섬'은 '대립'으로, '얽힘'은 '통일' 또는 '연결'로, '맞얽힘'은 '대립물의 통일'의 '변증법'으로만 읽혔다. 저자가 애써 공부하고 궁리한 새로운 세계관의 법륜을 다시 허무하게 200년 전으로 돌리는 듯 하여 매우 송구했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물아일체'나 '일국사회주의 완성'과 같은 단순무식한 '통일'이 아닌 끝없는 '연결(얽힘)'과 교차를 꿈꾸는 '유물변증법'의 '현대화'라 급마무리하는 내 마음대로 '서평'은 하나 써서 정리해 두었다. 바야흐로 현재는 토마 피케티 같은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도 '사회주의'의 '현대화'로 급전화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싫어하는 피케티 조차도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급전향하게 만든 정치경제사회 배경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극한의 '불평등' 사회는 '물극필반'의 원리에 의해 '평등'이라는 가치와 '맞얽힘'의 관계이기 때문이며, 시대는 다시금 '평등'의 '유물변증법'을 소환하고 있다. 그렇게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역]과 함께 '현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4.

64괘 중 47번 '곤괘'에서 29번 '감괘'로 변화하면서 물에 퐁당 빠진 것도 모자라 아예 잠겨버렸지만, 오히려 그 이후 마음을 다스리고 지금 있는 곳에 좌정하여 다복하게 잘 지내는 지금, 잼처 [주역]을 읽던 시간을 생각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고, 물에 빠진 생쥐꼴 보이기 싫어 물 속에서 나오기를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만물은 흘러가고 변화한다. 그리고 적절히 잊혀지고 오늘의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보는 곳이 다를 수도, 아니면 같은 곳을 보더라도 보는 방식과 자세가 다를 수도 있겠다. 
내게는 지금까지도 [주역]이 이 원리를 담고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주역]이 워낙 어려운 것과 같이 솔직히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나인가 당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역시 "너 자신을 알라"가 제일 어려운 철학적 명제가 맞다.


2005년 '사주명리'의 점괘를 경계하며 사는, 2016년까지 읽다만 [주역]을 이철 선생의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덕분에 다시 펼쳐본 2021년, 다시금 [주역]을 읽는 시간을 지나겠지만 '주역점'은 다시는 치지 않을 것이다. [주역]은 어려운 책이고 [맞얽힘]도 쉽지 않은 원리지만, 그래서 이은미 작가의 [유쾌한 랄라씨, 엉뚱한 네가 좋아](<움직이는책>, 2021)라는 책처럼 '맞얽힘'의 원리를 유쾌발랄하게 재해석할 재주은 없지만, [주역]과 [맞얽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내 나름대로 정리했으니 이제 다시 읽던 [주역]을 잠시 덮고 '주역점'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 사상의 새로운 해석'을 선언한 이철 선생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맞얽힘'을 '새로운 (유물)변증법'으로 '현대화'시키고자 하는 지금 내게 [주역]을 읽는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1.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2. [유쾌한 랄라씨, 엉뚱한 네가 좋아], 이은미, <움직이는책>, 2021.
3.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4.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5.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6.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지음 / 움직이는책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변증법, '맞얽힘'
-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 '입자(粒子)'라는 이름은 정확한 이름이라 할 수 없다. '입(粒)'은 낟알, 알갱이를 뜻하는데, 전자나 쿼크와 같은 물질들은 알갱이 성질만 지니지 않아서이다. 모든 입자는 때로는 '입자'로 존재하지만 때로는 '파동(波動)'으로 존재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부른다... 하나의 물질이 서로 대립하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지닌 것은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맞얽힘'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입자'는 물질의 한 측면만을 일컫는다. 정확하게 이름을 짓자면 물질은 '파립자(波粒子)' 또는 '입파자(粒波子)'이다."
- [맞얽힘], <서론. '맞얽힘',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 이철, 2021.


서양의 세계관은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구분의 종교에 뿌리를 둔 '이분법'에 기초한다. 한편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대일통'으로 여겨진다. 물론 서양 문명의 시작인 그리스 신화는 선악이 혼재했고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사상은 '하늘(자연)'을 섬기면서 다분히 범신론적이었으나, 서양의 '이분법'과 동양의 '합일론'은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유교/불교가 오랜 기간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며 고착된 세계관일 것이다.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복희씨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8괘'를 지었는데 그 머리는 사람이되 하반신은 뱀 또는 용으로써 아마도 뱀을 토템으로 삼은 종족의 상징이었을 지도 모른다. 복희씨는 여와씨와 함께 서로 맞서면서도 하반신의 뱀은 교차하는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남녀를 포함한 세상만물의 '맞섬'과 '얽힘'은 한나라 시기 무덤에서 출토된 문양으로 대표된다.

19세기 서양철학사에 헤겔이 등장했을 때, '철학은 종교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으나 인류는 태초의 '빛'은 '어둠'이 있었기에 존재 가능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깨달았다. 헤겔은 선학자 셸링처럼 "총구에서 갑자기 발사된" 것이 아닌 의식과 개념의 긴 여정 현상을 기록했다. 이 과정은 '변증법(辨證法)'이 되었고 마르크스와 같은 후학 유물론자들은 '정신'을 앞세운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워 '유물변증법(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상적 체계를 구축했다. 
12세기에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性理學)'으로 집대성되었을 때 '유일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온 자연에 존재하는 '혼백귀신'과 함께 살던 동양인들은 [주역(周易/易經)]의 원리를 통해 자연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역(易)'의 원리는 결국 사물의 '연결'과 '하나됨'을 의미하지만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조차도 그 과정에는 사물의 '대립'과 '맞섬'을 품고 있다.
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 물질의 이 '대립'과 '통일'을 '(유물)변증법'으로 여지껏 이해하고 있다. 


동양고전과 과학을 공부하는 독립연구자 이철 선생은 내 페친이기도 하다. 아직 확인은 못해봤지만 예전 내 살던 지역의 진보정당 당협위원장이 아니었나 싶다. 2008년 이후였을텐데, 당시 <마티> 출판사에서 낸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9)의 편집자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처음 읽게 된 슬라보예 지젝은 이 난해한 저작을 통해 결국 '변증법'적 '통일'은 더 이상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립'된 물질은 '시차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연결되지만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서양 현대철학사의 전형이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는 '동양사상'과 대립되는 듯 하나, 나는 동양의 고전인 사마천 [사기]의 '기전체' 서술방식에서 드러나는 이 '시차성'의 모순과 연결을 주제로 서평을 써보기도 했다. 
2010년의 이야기다. 

내 추측이 맞다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은 그 이철 선생은 동양 고전과 서양 물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2021년, '맞얽힘'의 세계관을 내놓았다. "맞선 둘은 하나다"라는 표제로 내보인 '맞얽힘'은 저자가 <덧붙임 글>에서 말하듯, 작명에 실패한 용어이기는 하나 현재로서는 이 것 말고는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든 용어다. 


"'맞선 둘의 하나됨'이라는 원리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맞섬', '대립'이라는 뜻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로는 '하나'라는 뜻이 들어가야 한다. '맞선 하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나 읽었을 때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맞얽힘], <덧붙임 글. '맞얽힘'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이철, 2021.


'맞얽힘', 발음도 뜻도 생소하나 사물의 '맞섬'과 '얽힘'이라는 현상을 하나로 표현하는 다분히 "직관적"인 단어다. 
2009년의 [시차적 관점]도, 기원전 사마천의 [사기]도, 대립된 '맞섬'이 결코 교차되지 않아도 서로 '연결'되는 '얽힘'의 관계였다. 
서로 다른 '맞섬'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맞얽힘'의 '동시태'이고, 그 양적인 운동으로 극에 달해('물극필반') 질적인 '맞섬'으로 전환되는 것이 '맞얽힘'의 '통시태'이다. '맞얽힘'에서 맞선 물질은 '동시태'와 '통시태'의 현상으로 얽힌다. 이 과정에서 길함을 유지하고 흉함을 피하는 방법은 치우치지 않게 '중용'을 지키는 절제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절제'만으로는 천하를 평화롭고 조화롭게 만들기 어려우니 '대학'의 '3강령(명명덕-친민-지어지선:明明德-親民-止於至善) 8조목(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라는 '큰 배움(대학)'의 도가 필요하다.

'맞섬'과 '얽힘'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본질은 '변화'다. 그리고 '변화'의 본질은 바로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동양 고전 중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본 내용인 '1부'에서 '노자(1장)', '공자(2장)', '손자(3장)', '장자(4장)'를 이야기한다. 나아가 유학의 중요한 고전인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경전 [중용(中庸)]과 그 속에서 강조하는 '중화(中和 : '中'은 천하의 근본이며 '和'는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 하는 道)'의 개인적 수양을 넘어, '평천하/천하평(平天下/天下平)'의 대동세상을 기획하는 '큰 배움'으로서 [대학(大學)]까지 요약한다. <부록>과 같은 '2부'에서는 은나라의 점술 방식이었던 '갑골복'에서 세상의 운영원리를 이해하려는 '주역점'으로 넘어오는 역사를 서술하며 '점술책'을 넘어서는 '철학서'로서의 [주역]을 설명하고 있다. 거북등짝이나 짐승뼈 굽기가 아니라 대나무 또는 산가지로 치는 '주역점 치는 방법'은 덤이다. 

[주역]의 가르침은 '점술'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중 하늘과 땅의 자연을 잇는 인간의 주체적인 '덕(德)'으로 자연 속 '변화'의 이치를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다. 
[주역]의 길한 괘사나 효사가 나온들 흉한 조짐이 있고, 흉한 괘효사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달하면 길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은 '변화'에 기반한 '유물론'과 '변증법', 그리고 '맞얽힘'의 경전이다. 이와 같은 동양 고전 사상은 서양의 뉴턴식 물리학적 세계관과 '맞섬'의 관계였을 수 있으나 아인슈타인을 너머 현대의 '양자역학'의 세계관과 교차됨이 없었음에도 동양과 서양이 '양자역학'적으로 감응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뉴턴의 '절대적' 물리학 패러다임을 극복한 아인슈타인은 마지막까지 '양자역학'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논증은 '양자역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그만큼 '양자역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영역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물론 [코스모스] 시리즈를 이어가는 칼 세이건의 동료이자 배우자인 천체물리학자 앤 드루얀 조차도 확실히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양자역학'에 따르면 '입자'는 '파동'이며 '물질'은 '에너지'다. 
고전의학 또한 '에테르체'라는 '파동' 에너지와 화학적 호르몬체의 대균형을 통해 예방의학으로 이행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내과 의사 리처드 거버가 1980년대에 발표한 '양자역학'적 [파동의학]은 2001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2021년에 국내 진보적 동서의학자에 의해 재번역되어 다시 나왔다. 
[맞얽힘]에서 '맞선 둘'인 동양의 [주역]과 서양의 '양자역학'은 '얽히고' 연결되는 '하나'다.

따라서 나는, '모든 물질의 본질은 운동'이고 '운동은 변화를 수반'하며 '양질 전환'을 그 내용으로 하는 '변증법'으로 '맞얽힘'을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데, 아마도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맞얽힘'을 선언한 저자 이철 선생의 의도를 거스르며 다시 고전적으로 곡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잠시 알았을 수도 있었을 저자 이철 선배님께 송구한 일이겠다. 
그러나 '맞얽힘' 또한 완성된 용어가 아니기에 나는 다시 새로운 '유물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소환한다.

새롭게 복원되는 우리의 '맞얽힘'의 변증법은 역시 완성되지 않은 '양자역학'과 함께 갱신되고 '현대화'되어야 한다.
'맞얽힘'은 새로운 '변증법'이다.


"... 서양의 세계관인 '분리'와 '맞섬'의 세계관과 동양의 세계관인 '얽힘'과 '연결'의 세계관을 통합해야 한다. 그 통합한 세계관이 바로 '맞얽힘'의 세계관이다. '맞얽힘'의 세계관은 나와 남을 별도의 존재로 간주하면서도 서로가 존재근거임을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분명히 인지하는 세계관이다... '양자역학'... '[주역]'... '물극필반(物極必反)'의 법칙... '맞얽힘'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모두 그 변화가 궁극에 도달한다. 이 법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中)'이다... '[중용]'... '평천하' 사상이 등장한 것은 개인에게 '중용(中庸)'을 맡겨둘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 [맞얽힘], <결론. '맞얽힘'으로 세계관을 바꾸자>, 이철, 2021,


***

1.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2.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3.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4. [파동의학](2001), 리처드 거버, 최종구/양주원 옮김, <에디터>, 2021.
5.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철 2021-11-2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철입니다.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시차적 관점 출간 당시 마티에서 편집이 아니라 영업을 했습니다. 맞얽힘을 변증법으로 얘기하자면, 제 생각에는 변증법은 맞얽힘을 일부만 이해했거나, 오해한 것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글 서두에서 서양의 사상이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씀하셨던데, 제가 요즘은 서양 고대 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출간된 고전을 읽고 있는데, 서양 고대 철학자들도 ‘대립자는 하나다‘라고 이미 얘기했더군요. 아마도 변증법은 엠페도클레스, 아낙시만도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말한 ‘대립자의 하나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헤겔 등을 연구하지 않아서 확언하기는 힘듭니다. 아무튼, 서양 고대 철학은 이분법적 사상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서양고대철학과 고대 동양철학은 모두 똑같이 ‘대립자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는 서양고대철학이 말하는 ‘대립자의 하나됨‘에 관한 책을 내고자 합니다. 그때쯤이면 서양고대철학에 관한 저의 공부도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것이며, 변증법에 관해서도 더 확실한 의견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eatrice1007 2021-11-3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철 선배님, 무지 반갑습니다~ ^^*
[시차적 관점] 관련 제 초라한 서평을 칭찬해 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제 생각에도 인류의 성장단계로 추정컨대 동서양 막론 고대 철학은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서양에 ‘이분법‘ 종교와 동양의 ‘합일설‘ 종교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이후 서로 ‘맞선‘ 길을 갔던 게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맞얽힘]의 가르침과 ‘맞얽혀‘ ‘유물변증법‘적 사고와 비슷한 점을 찾아보고자 한 서평을 썼더니 ‘일빠‘가 되었네요. 영광입니다.
제가 천착하는 ‘변증법‘은 선배님 말씀대로 헤겔 이후의 개념 ‘변증법‘이라 내용은 같되 적합한 용어를 찾는 작업 또한 ‘유물변증법‘의 ‘현대화‘라는 지난한 여정 중 하나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철 작가님의 분투를 기원하며, 다음 연구 또한 기대합니다!
제 공부가 얕고 부족함에 언제 한 번 뵙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