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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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니
- [보건교사 안은영](2015), 정세랑 / [종의 기원](2016), 정유정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보건교사 안은영],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정세랑, 2015.


1.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한 건,
1995년 가을 군입대를 앞두고서였다.

대학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나는 철학학회 활동을 하며 문학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아읽고 공부하게 된 것도 대학 3학년 1학기부터였다. 군대를 다녀온다는 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다는 기점 같기도 했고 그러니 왠지 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스물두살,
나의 선택은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묘사하고 그 속에서 '혁명'을 부르짖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사람들의 '부재(不在)'.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변혁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반 청춘들의 '부재성'의 경험.
내 소설의 주제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

1995년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빗소리를 들으며 학교 PC실에서 나의 첫 단편소설 습작 '담배 세 까치'를 썼다. 그리고는 그 해 10월 군입대 전 학교 '심산문학상'에 응모하고는 결과는 보지 못한 채 군대를 갔다.

이듬해 첫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고 학교를 찾아 90학번 선배 대훈이 형과 술을 마시며 물었더니 내 소설이 심산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실망은 조금 했다.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고 한 줄 심사평을 전하던 대훈이형의 말에 나는 더욱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기로 찾아본 1995년 심산문학상 당선작은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과 후배의 작품이었다. 학생회에서 오며 가며 한 번은 본 듯한 창백한 인상의 남자 후배였던 것 같았는데 이듬해 등단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과도 비슷하게 싸가지 없던 그 후배의 소설에는 귀신이 등장했다. 나의 '리얼리즘' 목록에는 있을 수 없는 귀신과 환영, 개인주의와 '판타지'.

1970년대 황석영과 80년대의 방현석, 90년대의 김소진으로 연결시키던 나의 '리얼리즘' 소설계보에서는 볼 수 없는 소설 작풍의 시작이었다. 사회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던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미친 듯 팔짝 뛰다가 툭 쓰러지는 심정으로 심산문학상에 승복할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판타지'라니.


2.

20세기를 마감하던 해에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나의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에는 '귀신'이 등장한다. 
정확히는 귀신이라기 보다 일제시대 카프시인 임화에 빙의된 청춘이다. 시대의 '부재'를 은유하던 어느 복학생의 미친 영혼 또는 그를 바라보던 화자인 나의 환영(幻影)이었다. 
나 나름대로 세상과 '타협'한 판타지였다. 
대학교 정문을 마지막으로 나오기 전 학교 우체국에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두 군데 신문사에 보낸 등기에는 결국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기대는 조금 했지만, 실망은 조금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사회에 홀로 독립해야 했기에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21세기가 열린 이듬해 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며 '리얼리즘'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또 다시 혀를 찼다.
쯧, '판타지'라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이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아않을까~"

노래로만 부르던 삼십대에 접어들기 전 '4차원'을 의미하는 임화의 '제4의 점령(占領)'을 얘기하던 나의 습작 소설도 다름아닌 '판타지'였지만 정작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의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했다. 
그런 내게 '판타지'라니.


오십줄에 접어든 올해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집어든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판타지'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The Blank Slate / tabula rasa)]을 읽다가 진짜 인간은 '백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본성' 자체가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살인자의 본성을 타고난 정유정 소설 속 악인 한유진을 만났다. 작가는 단순한 살인자 DNA 소유자가 아니라 살인의 인류 진화사에서 가장 최상위 '포식자(프레데터)'로서의 악인(惡人)의 개인적 기원(The origin)을 추적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보편적' 기원, 즉 '종의 기원'이라는 근대 진화생물학의 본좌 찰스 다윈의 주저에서 제목을 차용했지만 내용은 결코 '보편적' 종(種)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살인의 오랜 진화사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살인'과 '폭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사이코패스 포식자의 이야기다. 작가는 굳이 꼭 존속살해의 과정을 세밀하게 써야 했을까. 결국 살인누명을 씌운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존속살인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도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다. 거실과 방청소만 해도 모자랄 두어시간에 어머니의 피로 온통 칠갑된 그 넓은 집을 락스로 말끔히 치우는 게 가능한가. 친구에게 자기 죄를 누명씌워 죽게 한 과정과 목포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한참 떠돌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무색할 정도의 극단적 살인 '판타지'였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저런, 극단적 '판타지'라니.


아예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김에 소설 한 권을 더 펼쳤다. 몇해 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소설가 정세랑의 이 작품은 그냥 대놓고 '판타지'라 읽기가 훨씬 편했다. 우리 사회 고등학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와 에피소드를 만화처럼 묘사하고 있어 재미지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비비탄 권총과 장난감 무지개 칼로 귀신들을 물리치는 고등학교 보건교사(우리 시절의 양호선생님) 안은영의 발랄한 활약 속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악귀들'의 전쟁터인 이 현실을 보여주는 '판타지'임에도 인간사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명랑발랄 퇴마사 안은영 쌤의 다음 활약은 아마도 또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덮었다. 
꼭 악당들에게 이기지는 못할 수도 있고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항상 '친절'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는 이야기에 나는 또 혀를 놀린다.
이런, 만화같은 '판타지'라니.


3.

나의 20세기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도 나의 바램과 달리 이미 '판타지'였다. 
소설가 김소진의 초기 단편소설처럼 쓰고 싶었지만 나의 경험과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빈 서판(tabula rasa)'의 백지이론을 믿는 나는 나보다 작가의 본성을 더 많이 받고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보다 노력과 근성이 부족함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내 소설습작에 '귀신'을 불러들였지만 역시 실패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원래 '백지'와 '빈 서판' 또는 '빈 공책'을 들고 나왔으니, 50년 간 이리 쓰고 저리 써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노트 구석에라도 계속 적어댈 것만은 안다. 
나의 평생 꿈 '리얼리즘'이나 '판타지'나 결국 모든 건 작가의 머릿속 '환영'일테고 그 환상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묘사하느냐에 따라 '리얼리즘'도 될 수 있고 '판타지'도 될 수 있겠기에, 나는 나의 앳된 소설관을 좀더 친절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시선으로 '리얼리스트' 나를 돌아보며 나는 혀를 낼름 또 내민다.
저런, 나 역시 결국 '판타지'였다니.

***

1.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2015.
2. [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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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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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니
- [보건교사 안은영](2015), 정세랑 / [종의 기원](2016), 정유정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보건교사 안은영], <돌풍 속에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정세랑, 2015.


1.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한 건,
1995년 가을 군입대를 앞두고서였다.

대학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나는 철학학회 활동을 하며 문학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아읽고 공부하게 된 것도 대학 3학년 1학기부터였다. 군대를 다녀온다는 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다는 기점 같기도 했고 그러니 왠지 나도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선택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스물두살,
나의 선택은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묘사하고 그 속에서 '혁명'을 부르짖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사람들의 '부재(不在)'.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변혁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그 과정에서 90년대 초반 청춘들의 '부재성'의 경험.
내 소설의 주제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

1995년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빗소리를 들으며 학교 PC실에서 나의 첫 단편소설 습작 '담배 세 까치'를 썼다. 그리고는 그 해 10월 군입대 전 학교 '심산문학상'에 응모하고는 결과는 보지 못한 채 군대를 갔다.

이듬해 첫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고 학교를 찾아 90학번 선배 대훈이 형과 술을 마시며 물었더니 내 소설이 심산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실망은 조금 했다.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고 한 줄 심사평을 전하던 대훈이형의 말에 나는 더욱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기로 찾아본 1995년 심산문학상 당선작은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과 후배의 작품이었다. 학생회에서 오며 가며 한 번은 본 듯한 창백한 인상의 남자 후배였던 것 같았는데 이듬해 등단했던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과도 비슷하게 싸가지 없던 그 후배의 소설에는 귀신이 등장했다. 나의 '리얼리즘' 목록에는 있을 수 없는 귀신과 환영, 개인주의와 '판타지'.

1970년대 황석영과 80년대의 방현석, 90년대의 김소진으로 연결시키던 나의 '리얼리즘' 소설계보에서는 볼 수 없는 소설 작풍의 시작이었다. 사회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던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미친 듯 팔짝 뛰다가 툭 쓰러지는 심정으로 심산문학상에 승복할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판타지'라니.


2.

20세기를 마감하던 해에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나의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에는 '귀신'이 등장한다. 
정확히는 귀신이라기 보다 일제시대 카프시인 임화에 빙의된 청춘이다. 시대의 '부재'를 은유하던 어느 복학생의 미친 영혼 또는 그를 바라보던 화자인 나의 환영(幻影)이었다. 
나 나름대로 세상과 '타협'한 판타지였다. 
대학교 정문을 마지막으로 나오기 전 학교 우체국에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두 군데 신문사에 보낸 등기에는 결국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기대는 조금 했지만, 실망은 조금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사회에 홀로 독립해야 했기에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21세기가 열린 이듬해 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며 '리얼리즘'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또 다시 혀를 찼다.
쯧, '판타지'라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이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아않을까~"

노래로만 부르던 삼십대에 접어들기 전 '4차원'을 의미하는 임화의 '제4의 점령(占領)'을 얘기하던 나의 습작 소설도 다름아닌 '판타지'였지만 정작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의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했다. 
그런 내게 '판타지'라니.


오십줄에 접어든 올해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집어든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판타지'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The Blank Slate / tabula rasa)]을 읽다가 진짜 인간은 '백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본성' 자체가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살인자의 본성을 타고난 정유정 소설 속 악인 한유진을 만났다. 작가는 단순한 살인자 DNA 소유자가 아니라 살인의 인류 진화사에서 가장 최상위 '포식자(프레데터)'로서의 악인(惡人)의 개인적 기원(The origin)을 추적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보편적' 기원, 즉 '종의 기원'이라는 근대 진화생물학의 본좌 찰스 다윈의 주저에서 제목을 차용했지만 내용은 결코 '보편적' 종(種)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 살인의 오랜 진화사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살인'과 '폭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특정한 사이코패스 포식자의 이야기다. 작가는 굳이 꼭 존속살해의 과정을 세밀하게 써야 했을까. 결국 살인누명을 씌운 친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존속살인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도 결코 현실적이지 않았다. 거실과 방청소만 해도 모자랄 두어시간에 어머니의 피로 온통 칠갑된 그 넓은 집을 락스로 말끔히 치우는 게 가능한가. 친구에게 자기 죄를 누명씌워 죽게 한 과정과 목포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한참 떠돌다 돌아오는 과정 자체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무색할 정도의 극단적 살인 '판타지'였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저런, 극단적 '판타지'라니.


아예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김에 소설 한 권을 더 펼쳤다. 몇해 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소설가 정세랑의 이 작품은 그냥 대놓고 '판타지'라 읽기가 훨씬 편했다. 우리 사회 고등학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와 에피소드를 만화처럼 묘사하고 있어 재미지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비비탄 권총과 장난감 무지개 칼로 귀신들을 물리치는 고등학교 보건교사(우리 시절의 양호선생님) 안은영의 발랄한 활약 속에서 '친절한 사람들'과 '악귀들'의 전쟁터인 이 현실을 보여주는 '판타지'임에도 인간사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명랑발랄 퇴마사 안은영 쌤의 다음 활약은 아마도 또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덮었다. 
꼭 악당들에게 이기지는 못할 수도 있고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항상 '친절'을 잊지 말자고 강조하는 이야기에 나는 또 혀를 놀린다.
이런, 만화같은 '판타지'라니.


3.

나의 20세기 마지막 단편소설 습작 '제4의 점령'도 나의 바램과 달리 이미 '판타지'였다. 
소설가 김소진의 초기 단편소설처럼 쓰고 싶었지만 나의 경험과 필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빈 서판(tabula rasa)'의 백지이론을 믿는 나는 나보다 작가의 본성을 더 많이 받고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보다 노력과 근성이 부족함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내 소설습작에 '귀신'을 불러들였지만 역시 실패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원래 '백지'와 '빈 서판' 또는 '빈 공책'을 들고 나왔으니, 50년 간 이리 쓰고 저리 써서 얼마 남지 않은 내 노트 구석에라도 계속 적어댈 것만은 안다. 
나의 평생 꿈 '리얼리즘'이나 '판타지'나 결국 모든 건 작가의 머릿속 '환영'일테고 그 환상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묘사하느냐에 따라 '리얼리즘'도 될 수 있고 '판타지'도 될 수 있겠기에, 나는 나의 앳된 소설관을 좀더 친절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시선으로 '리얼리스트' 나를 돌아보며 나는 혀를 낼름 또 내민다.
저런, 나 역시 결국 '판타지'였다니.

***

1.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민음사>, 2015.
2. [종의 기원], 정유정, <은행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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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빈 서판 :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가 - 사이언스 클래식 02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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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에 '인간 본성'을 적다
- [빈 서판], 스티븐 핑커, 2002.


"문제는 인간 본성에 있고,
해결책도 인간 본성에 있다."
- [빈 서판], <5-17. 폭력>, 스티븐 핑커, 2002.


1.

20세기 말이었던 이십대에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분명,
사회는 결국 '혁명'적으로 진화할 것이며,
인간은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개조'될 것이라 믿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리얼리즘 소설'은,
현재 불평등한 체제의 '본질'을 그리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인간 주체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어야 했다.

젊었던 내가 믿었던 인간 과학은,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 이론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백지'에서 항상 다시 출발해야 했다.


2.

"'빈 서판(blank slate)'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scraped tablet)'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 [빈 서판], <1-1. 공식이론>, 스티븐 핑커, 2002.


미국의 진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 1954~)는 언어 심리학과 인지 심리학을 주제로 '인간 본성' 및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 과학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빈 서판], <2016년판 발문>).
그는 '언어' 3부작과 '마음' 3부작을 발표했다는데, '마음' 3부작의 두 번째 저서이자 본론과도 같은 책이 [빈 서판(The Blank Slate)](2002)이다.

'빈 서판'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전 유럽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정치철학자 존 로크의 '백지 이론'에서 유래한다. 즉, 왕족이나 귀족 및 성직자 따위의 타고난 '본성'이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근대적 '인권 선언'이었다.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신분을 넘어선 개인들의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사회와 집단적 문화를 통해 인간 마음의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넣을 수 있다는 개념"([빈 서판], <머리말>)인 것이다. 로크와 루소 등으로 이어진 이 '빈 서판' 이론은 중세적 계급구조를 침식시켰고 더 거슬러 노예제 등 인류사에서 이어져온 '계급투쟁'의 역사를 폭로하며 세계를 변혁하는 기본 이론이 되었다.

스티븐 핑커의 책 [빈 서판](2002)은 그 제목과 반대로 위와 같은 '빈 서판' 이론이 현대의 진화 생물학 등의 과학적 발견에 의하면 틀린 이론이 되었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서판이 비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해 왔고, 이제는 문화를 제자리로 되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생명과학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 그리고 사회과학, 인문과학, 예술까지를 관통하는 일치가 완성될 것이다."
- [빈 서판], <1-4. 문화의 탐욕>, 스티븐 핑커, 2002.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진화 생물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다윈주의'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뇌 또한 다른 종들과 함께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고, 게놈 연구 및 신경망 설계의 '선천성'에 관한 신경과학의 발견에 기초하면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은 "선천적으로 설계되고 주어진 과제에 맞게 조립되어야 한다"(같은책, <1-5>)는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 본성' 이론이 기존의 '빈 서판' 이론을 대체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대 '평등주의'적 인간 본성론의 '성삼위일체' 구조가 무너지는데, '성삼위'의 각 꼭짓점에는 '빈 서판'과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이 위치한다. '빈 서판'은 '영구적인 인간 본성은 없다'는 이론이고, '고상한 야만인'은 '이기적이거나 악한 인간 본능은 없다'는 주장이며, 데카르트의 '기계 속 유령'은 '마음'이나 '정신'을 물질적 육체와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이다.

스티븐 핑커는 '인간 본성'이나 '마음'은 물질적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함께 선천적으로 발생하고 진화한다는 '일원론' 철학을 통해 '빈 서판'을 필두로 한 위 '성삼위일체'의 "마지막 항전"(같은책, <1-5>)을 격파한다.


"이 책은 어떤 설명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나든, 그 정확한 설명 속에는 보편적이고 복잡한 '인간 본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견해를 기초로 한다... 마음에는 추리와 의사소통를 위한 한 벌의 감정, 충동, 능력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문화'를 뛰어넘는 공통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지우거나 처음부터 다시 설계되기 어려우며, 진화의 전 과정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기본설계의 일부(그 변화의 일부)는 게놈의 정보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다. 이 전반적인 설명을 통해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이론, 그리고 앞으로 예견되는 광범위한 과학적 발견들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 [빈 서판], <1-5. 서판의 마지막 항전>, 스티븐 핑커, 2002.


이 책이 '빈 서판' 이론으로 대표되는 인간 '평등주의' 철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인간 본성'을 입증하는 현재의 과학적 성과를 개괄적으로 설명"(같은책, <3장~5장>)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과 '정치'와 '도덕' 같은 "인간적 가치를 구별하는 것이 핵심"(같은책, <3-8>)임을 강조한다.


"(빈 서판 이론의 반대로서)... '비지 않은 서판'은 자유와 물질적 평등 간의 취사선택이 모든 정치체제에 고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정치철학이란 그 균형을 어떻게 달성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다시 말해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선천적 차이에 대한 발견을 억눌러야 할 금단의 지식이 아니라, 이 취사선택을 지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추진하고 결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이다."
- [빈 서판], <3-8.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스티븐 핑커, 2002.


즉, 이 책의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빈 서판' 자체가 아니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악용될 위험성이다. '백지'와 같은 인간이 새로운 체제에서 새롭게 '개조'될 수 있다는 '빈 서판' 이론이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극우 전체주의는 물론 다른 극단의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와 같은 극좌 전체주의 마르크시즘의 대학살에 이용되는 역사적 교훈을 수차례 강조하면서 말이다. 
존 로크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빈 서판' 이론이 맞았지만 근대를 거쳐 현대의 진화과학의 발전에 따라 현재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제 인류는 현대에 이르러 '빈 서판'을 선천적 '인간 본성'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티븐 핑커는 정치적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적 보수파('비관적 전망')와 극좌 마르크스주의 진보파('유토피아적 전망') 일체의 정치투쟁 전선을 거부한다. 이 책은 현대 과학이 300년 전 멘델과 다윈 시절의 그것과 다른데 왜 아직까지 좌우익 정치전선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같은책, <5-16>). 기독교 근본주의 못지 않게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하는 이 책의 저자 스티븐 핑커는 실질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현실적 차선으로 강조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2002년이 초판인 이 책의 <2016년판 발문>에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주의자'인 스스로를 '비극' 쪽 전망에 가깝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현 체제를 '차선이나마 현실적으로 최선'이라 믿고 싶어하는 지식인이라면 당연 현 체제에 '비관적'이고 현 체제에 안주하는 '인간 본성'을 '비극'으로 볼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책의 용법에 따르면 저자 본인은 '빈 서판'에 보이지 않게 적혀 있는 '혁명'이나 '유토피아'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인간 본성'이나 '빈 서판' 이론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미국 지식인은 결국, '자유주의자'로서 심리학적 정치 선언을 하고 있다. 인류의 커다란 비극이었던 '전체주의적 대학살'의 역사적 오류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본인이 공부하며 읽은 책이란 책은 다 인용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장황한 주장을 이어가며 쓰잘데기 없이 책만 두껍게 만들었지만, 결국 결론은 그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 '선천적' 능력에 따른 차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급격한 '혁명'이든 뭐든 집어치우고 '열심히' 타고난 본성을 발휘하여 부자가 된 사람들을 괜히 미워하지 말고 각자 타고난 대로 잘 갈고 닦으며 살자는 것. 그래도 정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조금씩 천천히 해보라는 것. 
단, '빈 서판' 이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선천적 인간 본성론'만 좋다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라는 익숙한 먹물 '양비론'.


"'빈 서판'은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그것은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적 편견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빈 서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빈 서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공백이 생겼고, 전체주의적 체제가 그 공백을 열심히 채웠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의 대학살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빈 서판')은 교육, 양육, 예술을 사회개조를 위한 형식으로 악용하고 있다."
- [빈 서판], <6. 인류의 목소리>, 스티븐 핑커, 2002.


3.

"... 그 속에는 '인류의 목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격노와 사랑과 신비와 영원한 매력이 가득하며 (과학적으로) 예측이 가능한 그것을 우리는 '인간 본성'이라 부른다."
- [빈 서판], <6. 인류의 목소리>, 스티븐 핑커, 2002.


중년이 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리얼리즘 소설'이 정말 있는 건지.

한때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느냐며 혀를 차기도 한다만, 
나는 아직도 내가 보던 세상이, 변혁에 대한 열망이 어떤 것이었는가 알고 싶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가 모르겠다.

'빈 서판'이고 뭐고 불평등했던 세상은 반복적으로 크게 한 번 뒤집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에 맞게 긍정적으로 '개조'되어 온 게 인류의 역사 아니었는가. 

문제는 우리의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에 어떻게 '인간 본성'을 적어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가일텐데,
이렇게 적고 나니, 
나 역시 중년의 익숙한 '양비론자' 아닌가.


"나는 여전히 인간의 전망은 '유토피아'보다는 '비극' 쪽을 향하고, 인간성이라는 비뚤어진 재목으로는 똑바른 물건을 만들 수 없고, 우리는 티없이 맑지 않거나 황금처럼 빛나지 않으며, 낙원으로 돌아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고약한 면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인간 본성'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답이기도 하다..."
- [빈 서판], <2016년판 발문>, 스티븐 핑커, 2016.

***

- [빈 서판(The Blank Slate)](2002~2016), Steven Pinker,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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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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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꿈을 꾸었다
- [불편한 편의점](2021), 김호연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 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2021.


1. '불편한' 꿈

'불편한' 꿈을 꾸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1년 넘게 홀로 자취생활을 하며 생긴 습관은 퇴근 후 혼자 도라도 닦는 듯 원룸에서 책을 읽다가 가끔 초저녁에 설핏 잠에 드는 거다. 평일 저녁시간에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책도 보고 종이접기를 하다보면 한없는 시공간에서 막막함에 젖어든다. 지나고 나면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이지만 그 일분일초의 시간 속에서는 진공에라도 빠진 듯 시각이 멈춘 듯 공연히 막연해지는 거다. 그럴 때 읽고 있던 책이나 접고 있던 종이 쪼가리를 들고 자리에 눕는다. 그러고는 깜빡 초저녁 잠에 빠져든다. 

눈을 뜨면 밤은 깊어져 있다.
역시 읽던 책을 마저 읽거나 종이를 접다보면, 왠지 이대로 다시 잠들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꼼지락대다가 새벽에 다시 잠자리에 든다. 

어떤 날은 그 새벽잠에 악몽도 꾼다.
생전 꾸지 않던 지각하는 꿈도 꾸고, 무서운 꿈에 빠져 가위눌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깰 수가 없다. 얼른 깨어야 하는데 도통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을 내 기억에 처음 겪어본다. 언젠가는 주말에 서울 집에서 자다가 가위눌려 옆에 잠든 처와 막내를 놀래킨 적도 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내가 갑자기 한순간에 쫄딱 망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며칠 전에는 생전 꿈에 보이지 않던 첫사랑 후배가 등장했다. 
나와 그녀는 그 때 그 시절처럼 다시 만나고 있었다. 분명 육신은 중년인 지금의 모습인데 정신은 이십대 초중반 그 시절 그대로 생생했다.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또 찾아 만나겠다고 내가 입버릇처럼 호언장담하는 나의 아내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는 아주 '불편한' 꿈이었지만, 그 잔상은 깨어있는 며칠 동안에도 아주아주 오래도록 이어진다.


2.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는 곳임을"

인천에 있던 첫사랑 후배의 부모님께 나를 믿고 딸을 달라고 당차게 요구하던 나는, 그러나 사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음에도 변변한 취업준비도 안하고 있었다. 후배의 부탁으로 토익시험도 4학년 2학기에 처음 봤다. 취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동기들과 달리 나는 깊은 강물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먼저 취업한 첫사랑 후배 그녀는 바쁘다며 나를 피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불평등한 세상을 뒤집어 엎지 못할 바에야 이 세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었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스물예닐곱의 나는 그런 소설이 분명 있다고 믿었다. 

정확하지는 않다.
나를 뒤늦게 취업의 전선으로 나서게 만든 게 첫사랑 그녀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눈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부모님을 건사해야 하는 가난한 내 형편을 그제서야 새삼 깨달아서였는지.

운이 좋아 대기업에 취직한 나는 대학의 마지막 강의를 듣고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단편소설을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만약 당선이라도 된다면 나는 그 길로 나설 것처럼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문사에서는 연락이 없었고 그 덕에 나는 이십년 넘게 한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 첫사랑 그녀는 잃었지만 그 덕에 같은 직장에서 만난 지금의 착한 아내와 한 가정을 꾸리고 부모님 모시며 세 자녀와 큰 개 한 마리, 작은 고양이 한 마리까지 거느리며 아주 잘 살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일년 전부터는 그 직장 덕에 팔자에 없을 것 같던 자취생활도 겪어보고 있다. 

이십년 전 나를 떠난 첫사랑 그녀만 빼고 모자랄 것 없던 삶에 불쑥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묻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살게 될 거면서 그 때는 자기한테 왜 그랬느냐고. 애초에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느냐고 말이다. 

꿈 속에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서울시역사박물관 뜰에서 내가먼저 그녀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게 눈빛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나자던 그녀의 전화기 너머 목소리에서 이미 이별을 감지하고 있었다. 모질지 못한 나는 애초에 그런 말을 할 위인이 못되었으나 그녀의 슬픈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가 나로 인해 더이상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웃어보이며 아주 발랄하게, 이제 좀 웃고 살자는 어울리지 않는 이별통보를 남기고는 먼저 돌아섰다. 
이제 돌아서면, 뜨겁고 아프고 설레고도 슬펐던 내 젊은날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터였지만 나는 그 화창한 여름날의 햇살 속에 그녀를 홀로 남겨두고 말았다.
너무도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그 사랑 때문에 경제력 없는 나의 불쌍한 부모를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은,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씩씩했지만 나 때문에 많이 울던 그녀가 오늘 이후 더 이상 울지 말았으면 했다.
그 여름의 서울시역사박물관 뜰에 내리쬐던 햇살처럼 항상 웃기를, 원래 그녀의 모습 그대로 언제나 씩씩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돌아선 나는 눈물을 삼켰다.

지금도 그 햇살은 며칠 전의 '불편한' 꿈처럼 잔잔한 영상으로 떠오른다.


소설가 김호연이 2021년 발표한 소설 [불편한 편의점]은 노숙인에서 편의점 야간알바가 된 '독고'라는 덩치 큰 중년사내가 본인의 후원자 역할을 해준 편의점 사장 할머니 염여사와 그 주변 인물들과의 에피소드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기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백지 또는 아마도 '빈 서판(The Blank Slate/tabula rasa)'과도 같이 모든 걸 잃은 독고를 통해 알바생과 세일즈맨, 극작가와 흥신소 노인 등 여러 인물들의 시각으로 소설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장면이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른 시각으로 그려지는 입체적 관점이다. 독고가 혼술에 찌든 세일즈맨 가장을 위로하던 장면이 벼랑에 선 극작가의 시선에서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이 모든 에피소드들은 독고가 자기 기억을 되찾아가는 마지막 장에서 총정리되듯 독고의 시선으로 곱씹어진다. 결국 다른 인물들에게 따뜻한 기운과 함께 각성과 갱생의 계기를 주던 독고가 사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게 되는 입체적 관계다. 아픈 과거로 인해 한강다리에 올라 강에 뛰어들고자 했던 독고는 결국 깨닫는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는 곳임을"([불편한 편의점], <ALWAYS>).
그렇게 그는 아픈 삶의 심연에 빠지는 대신 그곳을 건너 "부끄럽지만 다시 살아보기로" 한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쓴다.
한때는 사회를 고발하고 싶었고, 유명한 작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욕망에 달떠있었다. 그렇게 잘난체 하고 싶어 두껍고 어려운 책들을 열심히 읽어댔고 글을 썼다. 아마도 작가가 되었다면 [불편한 편의점] 에피소드에 나오는 극작가처럼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며 벼랑 끝에 섰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써댄다. 나 스스로 매주 마감을 정해 매주 짧은 글을 한 편씩 써대고 있다. 전형적인 자아도취이자 자기만족이겠지만 이제 내 꿈에서 남은 건 나와의 약속 뿐이다. 매일 아침 집앞을 쓸었다던 다산 정약용처럼 가급적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집어든 책이 사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이었다. 이번주 읽고자 했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The Blank Slate)]이 너무 두꺼워 다 읽지도 못했으니 하루만에라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집어들고 나온 거다. 그리고 출근길에서 생각지 못하게 감동을 받았다. 가장으로 다시 힘을 내기로 한 세일즈맨 에피소드에서 울컥하기도 하고 글쓰기의 벼랑에서 독고와 함께 갱생했을 작가 김호연 스스로의 모습도 얼핏 본다.

매년 '이상문학상'과 '현대문학상' 등을 빼먹지 않고 챙기며 유명 소설가들의 작품들을 열심히 읽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내 글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읽은 책을 인용하며 서평을 꾸준히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소설'은 아니고 '서평'을 빙자한 독후감을 소설 비슷한 형식을 빌어 매주 쓰는데 정작 소설은 몇 년만에 읽어본 듯 하다.

이제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매주 나와의 약속을 지키듯이 글을 쓴다. 소설 속 독고가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는 곳"이라 말하듯 글은 그냥 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3.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선배가 취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바로 말했어야 했다. 오빠는 재능이 없다고. 그런 소설은 지금 세상에서 먹힐리도 없고 운이 좋아 등단했다손 치더라도 굶어죽기 딱 좋다고. 헤어질 결심으로 직언을 해야 했지만 못했다. 그가 아직도 내가 예전처럼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내게 도움이 안될 것 같으면 언제든 그를 버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했어야 했다. 주변 사람 누구도 아는 사실을 그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처럼 자기가 특별한 줄 아는 듯 하지만 사실 뭐 하나 다를 것 없는 그는 남들처럼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하라는 토익시험도 잘 안보고 취업준비도 소홀한 그가 내가 마지못해 다니던 회사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는 것도 싫었고, 만나면 예전 사회과학 학회 세미나에서나 하던 말들을 지껄여대는 모습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어쩌다 데이트라도 할라차면 돈도 없으면서 모텔이나 찾아다니려던 꼴도 너무 보기 싫었다. 더이상 대학 신입생도, 연인의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밤새 꽃편지를 쓰던 가련한 여인도 아닌 나는 매정하지만 이제 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쥐구멍만한 무역회사도, 미래가 없는 그와의 만남도 참을 힘이 없었다. 다 때려치우고 임용고시 준비나 제대로 하고 싶었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동기들은 이미 교사가 되었거나 나보다 한참 멀리 가 있었다. 그래. 이제 떠나자, 생각하며 나는 커피숍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던 그를 두고 일도 없는데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 때문에 허비한 내 젊음이 아깝고 억울해서 언제나 씩씩한 나였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2004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해 달라는 문자가 왔다. 5년만에 그가 보낸 문자였다. 잘 지냈느냐는 안부 따윈 없었다. 아직도 나를 대학시절 그 후배의 모습으로 대하는 듯 내게 했던 일들은 아랑곳 없는가 보았다. 학교 친구와 선후배에게 물어보니 그 남자는 이제 정신차리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잘지내고 있다고 했다. 임용고시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던 나는 그를 다시 만나보았고 예전같은 감정은 없지만 결혼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몇 번 우리 부모님께도 다시금 찾아와서 결혼허락을 받고자 했지만 엄마는 하나 뿐인 딸인 나를 가난한 집 외아들에게 보내고 싶지 않다고 완강히 버티셨다. 사실 나 또한 그 남자의 부모님까지 모시고 살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언제 어떻게 또 나를 실망시킬지 모를 그 남자도 모자라 그 부모까지 책임지며 살 수는 없었다. 나는 또 다시 헤어질 궁리를 하는 나를 발견했고 햇살 맑은 어느날 서울시역사박물관 뜰에서 이별통보를 하고자 했다. 

의외였다.
이제 정신차렸으니 자기가 더 잘해보겠다고 하기는 커녕, 그는 이제 서로 각자 웃으며 살자면서 내게 먼저 이별을 고했다. 황당해하는 내게 그는 끝까지 되지도 않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행복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먼저 등을 돌려 가버렸다. 
햇살이 눈부시던 그 여름의 박물관 정원 풍경은 그 후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장면에서 그의 뒷모습만 파버리면 딱 좋았을 풍경이었다.


감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의 마지막 장면에서 독고라는 남자가 기억을 찾아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깨달았듯, 사랑은 상대방을 향해야지 자기만을 향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원래 모든 사랑은 자기애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 뭐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그도 나도, 각자 자기만 바라보는 그런 사랑, 내 젊음이 너무 아쉽고 억울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냥 우린 그렇게 열병과도 같던 청춘의 다리를 건넌 거였다. 같이 뛰어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가 뛰어내리자고 할 때 내가 손을 놓을지도.

그 여름의 햇살 속에서 그가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먼저 손을 놓아준 게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쉽게 변할 사람이 아니니 이 모진 세상에서 그 선배가 상처나 덜 받고 살기를 바라는 수 밖에.

아직까지 글이나 써보겠다고 방에 틀어박혀 궁상이나 떨지 말기를.

안녕.
한 많았던 내 청춘.


4. "부끄럽지만 살기로"

좋은 글을 쓰려면 깊이있게 구상도 하고 그 생각들이 농익은 다음 저절로 터져나와야 할게다. 소설가 김호연도 [불편한 편의점]에서 극작가인 정작가를 통해 생각의 속도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보다 빠르다면 글을 잘 쓰고 있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작가 본인의 경험이자 글쓰기 지론이겠다.

나는 사실,
글을 쓸 때는 어쩔 수 없이 첫사랑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 때문에 글을 쓰고 싶었던 건 결코 아니었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내 옆에 있었기도 했고 군대에서 서로 주고받던 장문의 편지를 통해 어설프게나마 습작 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또한 그녀에게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더더욱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결국 나는 소설도, 첫사랑 그녀도 잃었지만, 그 때는 그게 나의 전부였다.

젊은 치기로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를 돌아본다. 며칠 전의 '불편한' 꿈처럼 다시 돌아간들 잘해볼 자신은 없다. 다시 돌아가보았자 난 여전히 그 시절의 나일테니 말이다. 정말 미치도록 사랑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그녀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자 집착이었다. 상대방이 아닌 나만을 향했던 사랑, 이것이 젊었던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의 근원이었다. 부디 그녀가 꿈에서나마 그 아픔과 아쉬움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불편한 편의점]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수 밥 딜런의 자서전을 인용하며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하셨다는 말을 하나 소개하고 있다. "네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같은책, <불편한 편의점>)고. 편해야 하는 '편의점'임에도 '불편'하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되면서 인생의 '편안함'을 되찾게 된다는 일종의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삶의 역설(paradox)일 수도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생각의 속도보다 아이폰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이 먼저 가는 글쓰기임에도 당분간 나는 계속 해보려 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라든가, 소설을 써보겠다는 그럴듯한 구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다소 부끄럽지만 그냥 글을 써보기로 한다.
그게 지금의 내가 사는 길이다.

강은 빠지는 게 아니라 건너는 것이고,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니듯,
글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일테니 말이다.

(2023.2.22.)

***

-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나무옆의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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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레의 민중
쥘 미슐레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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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벗은 누구인가
- [민중], 쥘 미슐레, 1846.


"Vox Populi, vox Dei.
(민중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다)."
- [민중], <2-7. 단순한 자의 본능과 천재의 본능>, 쥘 미슐레, 1846.


1.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었지만, 더 이상 내 아버지를 '노무자'라 부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는 부모님 몰래 아버지 직업을 '노무자'로 써서 내려다가 아버지한테 걸려서 '기술자'로 바꿔쓰기도 했지만, 나는 내심 부끄러웠다.
헛기침하시며 '노무자'를 '기술자'로 수정하던 아버지가 실은 나보다 더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게 된 건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스무살의 나는,
내 아버지를 굳이 '자랑스럽다'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이 땅의 '노동자'로 생각했고 나 자신을 '노동계급의 아들'로 규정했다.

그렇게 나 역시,
'노동계급'이 될 터였다.


2.

"외로운 몽상가에 불과한 불쌍한 나는 침묵을 지키는 그 거대한 '민중'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은 내 목소리 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지금까지 그들을 배제했던 '올바름의 나라'로 그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이 책에서 자신들이 이 세계에서 권리를 갖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침묵 속에 신음하며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향해 여망을 갖고 상승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나의 '민중'이다. 그들이 '민중'이다. 그들이 나와 함께 가게 되기를."
- [민중], <2-9. 2부의 요약과 3부의 도입>, 쥘 미슐레, 1846.


그렇게 '계급적 각성'을 했다고 해서 내가 뭐 투철하게 '혁명' 운동을 했는가 하면, 그러기에 나는 너무 소심했고 헌신을 진짜 헌 신발짝 만큼이나 가볍게 여겼던지 주변만 기웃거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노동자'가 되기는 했다.

내가 생각했던 '노동계급'은 이 땅 '민중'의 대다수이자 선봉대였고, 이십대의 내가 추앙하던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가 레닌의 말대로 '노동계급의 아들'이면서 '배운' 나는 '지식인'으로서 '인민(민중)의 벗'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읽었고 '리얼리즘' 소설를 써보겠다며 더더욱 책 속으로 침잠했다.

결국 '혁명'은 커녕 '소설'도 쓰지 못한 나는 지금, 
금융노동자로서 '민중의 벗'이 아니라 '민중' 자체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 : 1798~1874)는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46년에 [민중(Le Peuple)]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로부터 2년 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은  1789년에 이어 다시금 타도되었지만 이 혁명을 이끌었던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는 2월 혁명의 주력군이었던 대다수 노동계급을 배반했고, 혁명의 국면에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며 다수 노동계급을 지도할 '공산주의자'의 역할을 강조했던 칼 마르크스는 이후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부터 나폴레옹 3세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와 파리코뮌까지 이어진 프랑스 '반혁명성'의 역사를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엮어낸다.

칼 마르크스는 혁명의 주체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노동자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켰다. 이들은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에 의하면 19세기 당시 실제로 대다수는 아니었지만 생산수단의 독점화가 필연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결국 대다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대전제였다. 그러므로 원래 '민중'은 '과학적 사회주의' 개념은 아니었지만 절대다수가 될 '노동계급' 자체가 바로 '민중'이었다. 

쥘 미슐레의 [민중]은 원제가 'Le Peuple(The People)', 즉 '민중' 또는 '인민'이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정신의 '조국 프랑스'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 '민중' 모두가 "신념"(같은책, <3-8>)을 기반으로 "사랑"과 "우정", "희생" 같은 덕목을 통해 "정신적인 결속"(같은책, <3-3>)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국민공회가 확립한 '공교육'을 통해 모든 '민중'이 "모두가 똑같은 정신적인 의자에 앉아있는 '평등의 나라'로서, '궁극적인 나라'로 가기 이전의 좋은 나라"(같은책, <3-9>)를 만들자는 것을 결론으로 삼는다.
'혁명'으로 복권된 미슐레의 '조국 프랑스'는 "올바름의 나라"(같은책, <2-9>)로 표현되고 있는데 '민중'이 주인되는 '권리의 나라'이자 '신의 나라'다.


"중세는 결속을 약속했지만 전쟁만을 주었을 뿐이다. 신에게 두번째의 시대가 필요했고 그는 1789년에 육화되어 지상에 나타났다."
- [민중], <3-3. 결사에 대하여>, 쥘 미슐레, 1846.


미슐레의 '민중'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으로 '조국 프랑스'를 재건할 대다수 인민이었다. 이를 위해 미슐레는 당시 프랑스의 경쟁국이었던 영국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농업국가인 프랑스에 도입된 자본주의 도시화를 "기계주의"(같은책, <1-8>)로 묘사하며 초기 자본주의화되는 프랑스 현실에 "예속"(같은책, <1부> 전체)되어가는 농민과 도시 노동자, 공장주와 상인, 심지어 부자와 부르주아의 처지까지 설명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민중'의 '본능'을 '자연'이라는 주제어로 풀어나가는데 지식인들의 사상은 복잡하지만 '어린이'와 같이 단순한 '민중'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예로 '천재의 단순성'과 '비지성주의'를 '민중'에 비유하고 있는데 19세기 '고전'이라 읽어주지 지금 책이 이런 식의 논리를 폈다면 바로 책을 덮고 말았을 게다.
아니 실제로도 여기서 그만 덮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읽어야 했다. 그 자체로 다수 '노동계급'이자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중'의 역사와 기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민중(인민:people)'에 관한 최초의 저술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미슐레의 [민중]은 서양에서 중세를 넘어 근대에 이르러 하층의 다수 사람들(민중)을 거지나 범죄자로 보는 게 아닌 '공공성'의 담지자로, 나아가 근대적 '신의 목소리'로 여긴 최초의 저작이다. 동양은 이미 기원전 공자의 '인'이나 맹자의 '의' 개념에서 다수 '민중'의 힘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지배받아야 하는 '백성'이었다. 

쥘 미술레의 이 저작은 서양에서 '민중'을 처음 주제로 삼은 고전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보면 거의 한 세기 전 미국 독립혁명 투쟁과 공화국 건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 1737~1809)의 [상식]이나 [인권]보다는 조악하다. 그럼에도 미슐레의 [민중]이 고전인 이유는 지금 읽기에 다소 유치한 내용 때문이라기 보다는 절대군주의 목을 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험을 토대로 모든 '민중'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당한 사상에 있다. 

이 책의 마지막 <3부>의 핵심어는 바로 '조국'이다.
미슐레가 비록 '조국 프랑스'를 재건할 '민중'으로 프랑스 전체 국민을 포괄함으로써 자본주의 계급투쟁을 간과했다 해도 이 고전의 역사적 의의는 '민중'의 '주체화"에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 '노동계급'이나 현대의 민주주의에서 '대중' 개념의 뿌리가 사실 '민중'이다. 
미슐레가 추종하듯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중세를 넘어 부르주아 사회를 열었지만 더욱 중요한 의의는 다수 '민중'을 '혁명'의 주역으로 처음 상정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분석을 통해 이 '민중'을 필연적으로 다수가 될 '노동계급'으로 구체화시켰다.
이제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확장에 따라 다수 '민중'은 사회 전영역에서 '주체화'의 가능성 일체를 담지한 '대중(mass)' 또는 '다중(multitude)'으로 치환해서 부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만약 지금도 '신'이 죽지 않았다면,
가령 그 '신'이 모두의 복지를 증진해주는 '공공성'이라면,
그 '신의 목소리(Vox Dei)'는 '민중의 목소리(Vox Populi)'일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에 대한 염려 따윈,
다수의 '민중', '인민', '노동계급', '대중'의 '주체화' 뒤로 잠시 미뤄둘 일이다.

미슐레의 말대로 '민중'은 '사랑'과 '우정'과 '희생'의 덕목을 통해 '정신적'으로 결속한다.

'민중'의 벗은 다름아닌 '민중' 스스로다.

***

- [민중(Le Peuple ) ](1846), Jules Michelet, 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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