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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빈 서판 :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가 - 사이언스 클래식 02 ㅣ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3월
평점 :
'빈 서판'에 '인간 본성'을 적다
- [빈 서판], 스티븐 핑커, 2002.
"문제는 인간 본성에 있고,
해결책도 인간 본성에 있다."
- [빈 서판], <5-17. 폭력>, 스티븐 핑커, 2002.
1.
20세기 말이었던 이십대에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분명,
사회는 결국 '혁명'적으로 진화할 것이며,
인간은 새로운 체제 속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개조'될 것이라 믿었다.
내가 쓰고 싶었던 '리얼리즘 소설'은,
현재 불평등한 체제의 '본질'을 그리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인간 주체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어야 했다.
젊었던 내가 믿었던 인간 과학은,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 이론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백지'에서 항상 다시 출발해야 했다.
2.
"'빈 서판(blank slate)'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scraped tablet)'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 [빈 서판], <1-1. 공식이론>, 스티븐 핑커, 2002.
미국의 진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 1954~)는 언어 심리학과 인지 심리학을 주제로 '인간 본성' 및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 과학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빈 서판], <2016년판 발문>).
그는 '언어' 3부작과 '마음' 3부작을 발표했다는데, '마음' 3부작의 두 번째 저서이자 본론과도 같은 책이 [빈 서판(The Blank Slate)](2002)이다.
'빈 서판'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전 유럽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정치철학자 존 로크의 '백지 이론'에서 유래한다. 즉, 왕족이나 귀족 및 성직자 따위의 타고난 '본성'이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근대적 '인권 선언'이었다.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신분을 넘어선 개인들의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사회와 집단적 문화를 통해 인간 마음의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넣을 수 있다는 개념"([빈 서판], <머리말>)인 것이다. 로크와 루소 등으로 이어진 이 '빈 서판' 이론은 중세적 계급구조를 침식시켰고 더 거슬러 노예제 등 인류사에서 이어져온 '계급투쟁'의 역사를 폭로하며 세계를 변혁하는 기본 이론이 되었다.
스티븐 핑커의 책 [빈 서판](2002)은 그 제목과 반대로 위와 같은 '빈 서판' 이론이 현대의 진화 생물학 등의 과학적 발견에 의하면 틀린 이론이 되었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서판이 비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해 왔고, 이제는 문화를 제자리로 되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생명과학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 그리고 사회과학, 인문과학, 예술까지를 관통하는 일치가 완성될 것이다."
- [빈 서판], <1-4. 문화의 탐욕>, 스티븐 핑커, 2002.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진화 생물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다윈주의'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뇌 또한 다른 종들과 함께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고, 게놈 연구 및 신경망 설계의 '선천성'에 관한 신경과학의 발견에 기초하면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은 "선천적으로 설계되고 주어진 과제에 맞게 조립되어야 한다"(같은책, <1-5>)는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 본성' 이론이 기존의 '빈 서판' 이론을 대체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대 '평등주의'적 인간 본성론의 '성삼위일체' 구조가 무너지는데, '성삼위'의 각 꼭짓점에는 '빈 서판'과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이 위치한다. '빈 서판'은 '영구적인 인간 본성은 없다'는 이론이고, '고상한 야만인'은 '이기적이거나 악한 인간 본능은 없다'는 주장이며, 데카르트의 '기계 속 유령'은 '마음'이나 '정신'을 물질적 육체와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이다.
스티븐 핑커는 '인간 본성'이나 '마음'은 물질적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함께 선천적으로 발생하고 진화한다는 '일원론' 철학을 통해 '빈 서판'을 필두로 한 위 '성삼위일체'의 "마지막 항전"(같은책, <1-5>)을 격파한다.
"이 책은 어떤 설명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나든, 그 정확한 설명 속에는 보편적이고 복잡한 '인간 본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견해를 기초로 한다... 마음에는 추리와 의사소통를 위한 한 벌의 감정, 충동, 능력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문화'를 뛰어넘는 공통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지우거나 처음부터 다시 설계되기 어려우며, 진화의 전 과정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기본설계의 일부(그 변화의 일부)는 게놈의 정보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다. 이 전반적인 설명을 통해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이론, 그리고 앞으로 예견되는 광범위한 과학적 발견들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 [빈 서판], <1-5. 서판의 마지막 항전>, 스티븐 핑커, 2002.
이 책이 '빈 서판' 이론으로 대표되는 인간 '평등주의' 철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인간 본성'을 입증하는 현재의 과학적 성과를 개괄적으로 설명"(같은책, <3장~5장>)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과 '정치'와 '도덕' 같은 "인간적 가치를 구별하는 것이 핵심"(같은책, <3-8>)임을 강조한다.
"(빈 서판 이론의 반대로서)... '비지 않은 서판'은 자유와 물질적 평등 간의 취사선택이 모든 정치체제에 고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정치철학이란 그 균형을 어떻게 달성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다시 말해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선천적 차이에 대한 발견을 억눌러야 할 금단의 지식이 아니라, 이 취사선택을 지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추진하고 결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이다."
- [빈 서판], <3-8.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스티븐 핑커, 2002.
즉, 이 책의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빈 서판' 자체가 아니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악용될 위험성이다. '백지'와 같은 인간이 새로운 체제에서 새롭게 '개조'될 수 있다는 '빈 서판' 이론이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극우 전체주의는 물론 다른 극단의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와 같은 극좌 전체주의 마르크시즘의 대학살에 이용되는 역사적 교훈을 수차례 강조하면서 말이다.
존 로크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빈 서판' 이론이 맞았지만 근대를 거쳐 현대의 진화과학의 발전에 따라 현재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제 인류는 현대에 이르러 '빈 서판'을 선천적 '인간 본성'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티븐 핑커는 정치적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적 보수파('비관적 전망')와 극좌 마르크스주의 진보파('유토피아적 전망') 일체의 정치투쟁 전선을 거부한다. 이 책은 현대 과학이 300년 전 멘델과 다윈 시절의 그것과 다른데 왜 아직까지 좌우익 정치전선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같은책, <5-16>). 기독교 근본주의 못지 않게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하는 이 책의 저자 스티븐 핑커는 실질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현실적 차선으로 강조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2002년이 초판인 이 책의 <2016년판 발문>에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주의자'인 스스로를 '비극' 쪽 전망에 가깝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현 체제를 '차선이나마 현실적으로 최선'이라 믿고 싶어하는 지식인이라면 당연 현 체제에 '비관적'이고 현 체제에 안주하는 '인간 본성'을 '비극'으로 볼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책의 용법에 따르면 저자 본인은 '빈 서판'에 보이지 않게 적혀 있는 '혁명'이나 '유토피아'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인간 본성'이나 '빈 서판' 이론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미국 지식인은 결국, '자유주의자'로서 심리학적 정치 선언을 하고 있다. 인류의 커다란 비극이었던 '전체주의적 대학살'의 역사적 오류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본인이 공부하며 읽은 책이란 책은 다 인용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장황한 주장을 이어가며 쓰잘데기 없이 책만 두껍게 만들었지만, 결국 결론은 그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 '선천적' 능력에 따른 차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급격한 '혁명'이든 뭐든 집어치우고 '열심히' 타고난 본성을 발휘하여 부자가 된 사람들을 괜히 미워하지 말고 각자 타고난 대로 잘 갈고 닦으며 살자는 것. 그래도 정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조금씩 천천히 해보라는 것.
단, '빈 서판' 이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선천적 인간 본성론'만 좋다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니라는 익숙한 먹물 '양비론'.
"'빈 서판'은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그것은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적 편견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빈 서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빈 서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공백이 생겼고, 전체주의적 체제가 그 공백을 열심히 채웠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의 대학살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빈 서판')은 교육, 양육, 예술을 사회개조를 위한 형식으로 악용하고 있다."
- [빈 서판], <6. 인류의 목소리>, 스티븐 핑커, 2002.
3.
"... 그 속에는 '인류의 목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격노와 사랑과 신비와 영원한 매력이 가득하며 (과학적으로) 예측이 가능한 그것을 우리는 '인간 본성'이라 부른다."
- [빈 서판], <6. 인류의 목소리>, 스티븐 핑커, 2002.
중년이 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리얼리즘 소설'이 정말 있는 건지.
한때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느냐며 혀를 차기도 한다만,
나는 아직도 내가 보던 세상이, 변혁에 대한 열망이 어떤 것이었는가 알고 싶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가 모르겠다.
'빈 서판'이고 뭐고 불평등했던 세상은 반복적으로 크게 한 번 뒤집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에 맞게 긍정적으로 '개조'되어 온 게 인류의 역사 아니었는가.
문제는 우리의 '빈 서판(blank slate/tabula rasa)'에 어떻게 '인간 본성'을 적어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가일텐데,
이렇게 적고 나니,
나 역시 중년의 익숙한 '양비론자' 아닌가.
"나는 여전히 인간의 전망은 '유토피아'보다는 '비극' 쪽을 향하고, 인간성이라는 비뚤어진 재목으로는 똑바른 물건을 만들 수 없고, 우리는 티없이 맑지 않거나 황금처럼 빛나지 않으며, 낙원으로 돌아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고약한 면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인간 본성'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답이기도 하다..."
- [빈 서판], <2016년판 발문>, 스티븐 핑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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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서판(The Blank Slate)](2002~2016), Steven Pinker,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