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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베이비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우 외 출연 / 필림21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反수태고지'의 '기원'
-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1968.
1.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5분 사(巳)시에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듣는 내내 단 하나의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피청구인측에 의해 항변되던 '계엄령' 발동은,
'전시'와 같은 실체적 요건도, 결의 과정의 절차적 요건도 모두 부정되었고,
다수 민중과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배반'의 혐의로 위헌이 되었다.
군통수권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대는 더이상 45년 전의 그 군대가 아니었고,
불의한 권력에 항거한 민중들은 더욱 더 강고한 민주주의 정신으로 무장했으며 그만큼 더 강해졌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여전히,
다수 대중이 정치적 '리더십'을 획득해 온,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이다.
2.
모든 것에는 '기원'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별다른 걸 설명해내지 못한다. 인류의 노동과 창조의 역사는 이 조상들의 초원지대로의 이동과 직립보행으로 인한 양손의 자유를 그 '기원'으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역사 속 모든 '기원'의 위상은 그런거다.
영화로 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쟝르는 종교적 '이단'을 주제로 하는 '오컬트'인데, 역시 그 '기원'이 궁금해졌다.
1976년작 [오멘]은 사탄의 아이가 세계적 강국인 미국의 유력 정치인 로버트 쏜의 아들로 '지정'되는 '1편'을 시작으로,
1979년 '2편'에서는 유력 정치인의 집안인 쏜 가문의 경제적('쏜 인더스트리') 권력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는 성장기를 거쳐,
1981년에는 청장년의 사탄이 되는 '3편'으로그려졌다.
그 후 '1편'의 리메이크도 있었고 숨겨진 사탄의 여동생 이야기도 후속작으로 나왔다지만, 나는 그 속편들까지 굳이 찾아서 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2024년에 [오멘] 시리즈의 '프리퀄', 즉 '사탄의 아이'가 태어나는 근원적 내용, 전작들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의 공백을 설명해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바로, 사탄의 아들, 데미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날 영화 [오멘](1976~2024)에 관한 이야기를 마을의 '영화 전문가' 이진 형님과 술 한잔 하면서 나누던 나는, 내친 김에 이 '적(敵)그리스도(Anti-Christ)' 탄생의 영화적 '기원'까지도 추적하고 싶어졌더랬다.
그렇게 이진 형이 알려준 영화가 [악마의 씨](1968)였던 거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666)'이니라."
- [성경], <요한계시록 13:18>
[오멘] '1편'은 머리통에 '666'이 새겨진 사탄의 아이, 데미안의 유년 시절을,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성경], <고린도후서 11:13>
[오멘] '2편'은 사관학교에 들어간 청소년 데미안이 시나브로 본인이 사탄의 아들임을 인식해가는 과정과 그런 데미안을 위해 희생하는 수많은 '거짓 사도'들을 그려낸다.
"...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성경], <루가복음 1:26~38>.
그러다가 2024년의 [오멘] '프리퀄'은 이 '사탄의 자식'이자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탄생을 '혼돈의 시대'였던 1968년부터의 신좌파 혁명의 물결을 배경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 만큼 동정녀와 같은 수녀를 통해 태어난다.
'수태고지(受胎告知)'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反)수태고지'인 것이다.
[악마의 씨]는 역시 가톨릭 종교와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냈던 1968년에 프랑스 감독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 1933~)가 만든 영화로, 원제는 [로즈마리의 아기(Rosemary's Baby)]다. 근본은 없지만, 영화 역사상 '사탄의 아이', 즉 '적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최초의 영화일 거라고 한다.
자식을 갖기 위해 밥먹다가도 옷을 벗어 제끼고는 엉켜붙는 신혼부부의 이야기지만 아기는 그 숱한 성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사탄의 추종자들인 '거짓 사도'들의 환영 속 비밀의식을 통해 잉태된다.
적그리스도의 엄마의 이름은 '로즈마리'인데, 순수의 '백합'이 아닌 하필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장미(rose)'를 앞에 붙인 '마리아(Mary)'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신약성경]의 <루가복음>에서 기록한 '수태고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숫처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인데, 이 때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책이 있고 가브리엘에게는 순수의 상징인 백합이 있다.
한편, 영화 [악마의 씨](1968)와 [오멘]의 '프리퀄'로서 [오멘 -저주의 시작](2024)에서의 '반수태고지'는 정상적 생식 과정이 아닌 '거짓 사도'들의 비밀의식을 통한 잉태와 무당과 같은 '신기'를 품은 수녀의 일탈로 인한 잉태를 암시한다.
[악마의 씨]는 오래된 영화인 만큼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지루하기도 하고 어딘가 악마적 본질이 근본 없어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영화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그랬다는 말이지만 1968년도에 아마도 영화사상 처음으로 '이단'과 '사탄의 자식' 이야기를 담은 '오컬트' 쟝르의 '기원'으로 생각하면서 본다면, 어느 정도 영화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공고했던 가톨릭의 종교적 권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이단'과 '사탄의 아들' 이야기의 '기원'으로서의 기념비적 의미 말이다.
3.
'영화'는 끝났다.
1968년의 '혼돈' 속에서 '오컬트' 영화의 '기원'으로서의 [악마의 씨]가 주인공 로즈마리가 악마같은 자신의 아기를 지키기 위한 모성애로 불타는 눈빛으로 끝남으로써,
이후 영화사에서 '이단'과 '사탄의 자식' 이야기를 계속 이었던 반면,
2025년의 대한민국의 일대 내전적 '혼돈' 속에서의 불의한 절대권력자의 '영화'는 '탄핵'과 '파면'이라는 희비극으로 끝남으로써,
이후 예측이 어려운 내전의 소용돌이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었든 상관없이 말이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불러올 '메시아'가 '그리스도'일지 '적그리스도'일지는,
그를 만드는 다수 민중인 우리의 선택이다.
'수태고지'를 할지 '반수태고지'를 하게 될지 또한 천상의 하느님이나 대천사가 아닌,
현실의 다수 대중이 주체가 되는 선택 과정이 될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의 '리더십'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아닌, 다수 '대중'의 것으로 넘어온지 이미 오래다.
결과는 알 수 없이,
여전히 '혼돈'이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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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마의 씨(Rosemary's baby)], Roman Polanski 감독, 1968.
2.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 아카샤 스티븐슨, 2024.
3. [오멘(The Omen)], 리처드 도너 연출, 그레고리 펙 주연, <20세기폭스>, 1976.
4. [오멘 2], 돈 테일러, 1979.
5.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