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6 : 백가쟁명 이중톈 중국사 6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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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비판'은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 없다
- [백가쟁명], 이중톈, 2014.


"그런데 노선의 선택은 아주 분명했다. 대체적으로 도가는 천도(天道)를, 묵가는 제도(帝道)를, 유가는 왕도(王道)를, 법가는 패도(覇道)를 중시했다. 천도를 중시하여 태곳적으로 돌아가려 했고 제도를 중시하여 요순시대로 돌아가려 했으며 왕도를 중시하여 상나라,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들은 모두 과거로의 회귀였다. 오직 패도를 중시해야 다가오는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법가가 승리를 거뒀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중국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중국의 역사에서 '유년기'를 지난 '청춘기' 정도 될 수 있겠다. 주나라로부터 '국가' 문명을 매개로 덕치와 예치의 제도적 틀이 갖춰졌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사상이 다양해지고 혼란해지기도 했던 '사춘기' 같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낭만과 덕망은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눈에는 혼돈과 분열의 시대였기에 오래 전 통일의 시대 주나라를 이상으로 삼아 주공단이 정초한 '덕치(德治)'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이익'에 눈을 뜬 분열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기원전의 수백년에 걸친 이 치열한 사상투쟁이 공자 이후의 묵자와 노자 및 장자의 공자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말이다.

공자는 '인(仁)', 즉 '사랑'에 기반한 인간관계와 '덕(德)'으로 다스려지는 사회를 꿈꾸었지만, 
노동과 자치를 중시한 묵자는 공자의 '인애'가 신분제 질서에 갇힌 '사랑'이라면서 남녀노소와 국경을 초월한 '겸애'로 대체하며 '평등'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이에 노자는 더 나아가 '물'과 같은 유연함과 '무위'로써 자연과 합일을 추구했고 장자는 '소요유'를 통해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극단의 '자유'를 중시했다.
맹자는 공자의 '인'에 더하여 '의(義)', 즉 정의로운 '대장부'의 삶을 통해 공자를 계승했다.
반면 순자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총아로서 인간의 악을 방비하는 '법가'를 예비하면서 공자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렇게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마무리는 '법가'의 대명사 한비자가 맡게 된다.

'괴력난신'의 귀신도, 전지전능한 종교적 신도 믿지 않고 오로지 현세적 인간관계로서 정치만을 중시한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강조한 '이상주의자'로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실천하고자 했던(知其不可而爲之;지기불가이위지-[논어])" 불세출의 사상가였지만 제후귀족 중심의 신분제를 벗어나지 못한 다분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공자를 비판한 묵가의 묵자는 '노동'에 기반하며 차별없는 '겸애'를 실천하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군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일종의 기원전의 '사회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당시로서 유일한 국가권력 형태로서 군주제를 역시 지향하되 '무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군주를 말한 노자와, 이런 것 저런 것 다 필요 없이 극단의 자유를 주장한 장자는 두 가지 형태의 '무정부주의'의 면모도 보인다.
공자를 두 방향으로 계승한 맹자와 순자를 거쳐 한비자는 세상 가장 못 믿을 것이 '인간'임을 설파하며 '법'과 '제도'로서 인간 사회의 처절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며 그 주체로서 강력한 군국주의를 강조한 '국가주의자'였다.


"법가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동은 커녕 소강도 이미 지나가버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단지 세상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만 있어도 성공이었다. 그러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군왕이 다스리는 것이 옳았다. 또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법에 따라 다스려야 했다."
- [백가쟁명], <2. 이상적인 사회>, 이중톈, 2014.


'중국사 시리즈' 통사 36권을 집필 중인 중국의 대중역사가 이중톈도 중국의 '사춘기' 또는 '청춘기'로서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이중톈 답게 군더더기 없이 요점과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추리소설을 엮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제6권 [백가쟁명(百家爭鳴)](2014)은 유가는 무엇이고 묵가와 도가, 그리고 법가는 무엇인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 사상들의 정의와 기원 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라 치면 수백수천 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것이며 대중역사서가 될 수도 없을게다. 이중톈은 다만, '백가쟁명'의 문을 연 공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 '인애'와 '덕치'의 사상을 주장했고, 이를 반박한 묵자의 '사회주의'는 '겸애'와 '노동'을, 다른 한편의 '무정부주의' 노자와 장자는 '무위'와 '자유'를 통해 공자가 시작한 유가 사상이라는 '무기'에 대한 '비판'을 행했다는 식으로 역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상대를 죽여야만 나의 생존이 보장되는 전국시대에 들어 선 후, 공자의 뒤를 이어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맹자는 '선을 지향'하는 사회를 꿈꾸는 정의로운 대장부였지만, 이런 맹자의 '이상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의 본래적인 '악을 방비'하는 사회제도를 주장하는 순자를 거친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백가쟁명], <6장>)로서 전국시대의 끝장과 함께 '백가쟁명'을 마무리한다.

기원전 6세기 공자의 유가가 '백가쟁명'의 시작이었다면, 기원전 3세기 법가의 '한비자'는 그 길고 긴 사상투쟁의 끝이었다.


"한비가 서민의 검을 든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비는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 역사는 이미 귀족과 군자의 시대에서 평민과 소인의 시대로 바뀐 상태였다. '이상주의'가 잦아들고 '공리주의'와 '실용주의'가 대두되었다, 상앙에서 한비를 거쳐 결국 법가가 우위를 점하고 새로운 시대의 대변인이 된 것은 그런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이상주의'는 언제나 필수 불가결했다. 사실상 꼭 실현될 보장이 없었던 그 이상들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명이 아시리아 문명과 로마 문명처럼 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망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했다."
- [백가쟁명], <1. 세상을 구원하라>, 이중톈, 2014.


전국시대 분열의 종말과 함께 진시황의 중국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통일국가 문명 정초 과정에서, 그렇다면 법가의 '승리'가 과연 '덕치'와 '법치'의 대립으로 정리된 '백가쟁명'의 결론이었을까.

공자와 묵자, 노자/장자는 각자의 주장을 통해 오랜 옛날의 '좋은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묵자가 돌아가고 싶어했던 요순시대든, 공자가 꿈꾼 주공의 덕이든, 노장자의 자연적인 원시사회든, 이 모든 지향점들은 '과거'에 불과했다. 이익투쟁도 모르고 도둑도 없던 그 '대동사회'는 이중톈에 의하면 사회발전이 더디었으니 이익이랄 것도 없었고 물자도 부족했으니 훔칠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이었던 것이다.  반면, 서로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전국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익투쟁의 문명시대로서 당시의 형벌 위주의 '법치'로서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양면삼도(兩面三刀-[한비자])'가 필요한 시대였다. '양면삼도'의 '양면(兩面)'은 '상'과 '벌'이고, '삼도(三刀)'는 '권세'와 '권모술수', 그리고 '법'이다. 처절하고 잔혹한 전국시대를 끝낸 것은 유가와 묵가, 도가의 '과거'가 아니라 법가와 병가의 '현실'과 '미래'였다.

그러나 이중톈은 말한다.
'백가쟁명'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법가와 병가, 술가와 같은 '양면삼도'적 현실과 그들이 대비한 '미래'가 분명 존재하지만,
'인의예지'와 '덕치'라는 '이상주의'가 중국문화의 흐름 속에 도도히 흐른다고 말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교환양식D'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역사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원시 상태인 '교환양식A'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자본-네이션(민족/인민)-스테이트(국가)'의 교환양식 역사에서의 현재적 '삼위일체' 요소들이 융합된 '미래'의 형태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식 사상투쟁 또한 그렇다.
현재의 구체적 치열함을 기반으로 하면서 인류 역사가 일궈온 과거의 '이상주의'를 복원하는 미래가 유보되는 한, '덕치(德治)'와 '법치(法治)'가 대립하는 '백가쟁명'의 결과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지속되는 미래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무기의 비판'도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없다. 치국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전제주의인) 진시황과 한무제가 제자백가의 칼과 권한을 빼앗았어도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안 그랬으면 훗날 (민권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났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300년 간의 '백가쟁명'은 사실상 결론을 내지 못했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

1.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2.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3. [세계사의 구조 -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2015),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비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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