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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고(vigo) / 2024년 11월
평점 :
'교환양식'의 구조적 세계사
-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2015.
"이 책은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재검토함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스테이트)'를 넘어서는 전망을 여는 시도다... 새롭게 '헤겔(법철학) 비판'을 시도한다는 것... 나는 '교환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시 파악하기로 했다...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다시 하는 것... 헤겔이 관념론적으로 파악한 근대의 사회구성체와 그것에 도달한 '세계사'를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유물론적으로 계속 전도시키면서 헤겔이 파악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사'를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으로 보는 시점이 불가결하다."
- [세계사의 구조], <서문>, 가라타니 고진, 2015.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는 마르크스주의는 다소 도식적이지만 '역사발전단계설'을 통해 일체의 계급이 철폐된 공산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다.
인류 최초의 자유롭던 유동적 사회인 원시 공동체에서 국가와 계급의 출현과 함께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를 넘어 근현대 자본주의를 거치고 이후 다수 노동자민중의 국가권력 전유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히려 다수 민중의 직접적인 '민주주의'적 권력체제 형태로 계급의 철폐와 국가의 소멸을 완성한다는 '역사발전단계설'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지배의 현실태로서 국가가 소멸된 공산주의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인류의 미래였다.
이러한 역사의 필연적 발전 과정에서는 인간의 '노동'에 기초한 생산력(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이 필수요소다. 이 둘은 변증법적 관계로 일정 기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둘러싼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견인하지만 계급 불평등이 심화되면 특정 생산관계는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는 상호 모순의 관계가 된다. 이러한 변곡점에서 노예제나 봉건제 같은 특정 생산양식은 새로운 생산양식, 즉 새로운 정치경제체제로 이행한다. 봉건제를 이은 자본주의체제는 생산력 발전의 최고 수준을 담보하는 한편 소수 자본가들의 생산수단 사적독점이 다수 노동계급을 소외시키면서 계급투쟁의 대단원을 기록한다는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과 '생산'의 관점에 철저한 '노동가치론'에 기반한다.
다수의 '자유'를 위해서 '평등'이 전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를 소멸시키기 위해 우선 국가권력을 잡아야 한다. 국가를 지양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이 모순적 정치상황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복지국가든, 사민주의 정당이든 '혁명'이라는 계기만 제외한다면 동일한 정치사상이 된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1941~)은 칸트주의적 초월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다. 마르크스 철학의 헤겔 극복 작업을 칸트 철학에서 찾는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The Structure of World History)](2015)라는 제목의 그의 주저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 이론을 넘어서는 '교환양식(Modes of Exchange)' 이론을 제시한다.
인류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생산양식'에만 국한된 '평등'에서만 멈춰서면 안되고 생산과 유통, 소비 일체를 아우르는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는 세계사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생산양식'을 넘어선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세계사의 구조'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 [세계사의 구조(The Structure of World History)의 부제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From Modes of Production to Modes of Exchange)'다.
"내가 여기서 쓰려는 것은 역사학자가 다루는 '세계사'가 아니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복수의 기초적 '교환양식'의 연관을 '초월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사에서 일어난 '세 번의 이행'을 구조론적으로 명확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네 번째 이행', '세계공화국으로의 이행'에 관한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 [세계사의 구조], <서설 : 교환양식론>, 가라타니 고진, 2015.
가라타니 고진 또한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발전단계설'을 지지한다. 다만, 기존의 원시 공동체와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와 근현대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미래의 공산주의 등의 '생산양식' 개념을 넘어, 각 시기별 '교환양식'의 단계적 개념으로 구분한다.
- 1부. 미니세계시스탬(교환양식A) : 원시 공동체 유랑(유동성) 이후 정착사회인 씨족(부족)사회는 '증여'와 주술 중심의 상호(호수) 사회 / '네이션'(부족 또는 씨족)의 최초 출현
- 2부. 세계=제국(교환양식B) : '국가(스테이트)'의 등장으로 '폭력' 또는 강제에 기반한 국가중심주의와 절대왕권의 '주권' 개념과 '주술'을 넘어선 '보편종교'의 확립 / 부르주아 시민혁명으로 등장하는 '국민국가'와 '네이션(인민/민족)'의 진화 및 강화
- 3부. 근대세계시스템(교환양식C) : 절대왕정의 중상주의(상업자본주의)를 넘어선 산업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자본'의 부상 / 자본의 '제국화' 또는 '세계화'와 '국민국가(스테이트)'와의 모순
- 4부. 현재와 미래(교환양식D) : '자본'의 '제국화'와 '국민국가(스테이트)'간 모순을 극복하는 '세계공화국' / 칸트의 루소적 근대 시민국가와 프루동과 마르크스 등 사회주의자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사회(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건설을 통한 상호(호수)주의적이고 증여적인 '교환양식A'의 회복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를 통해 생산력이 최고로 발전한 상태에서 계급 불평등과 국가를 지양하면서 '공동체주의(코뮤니즘/공산제)'를 현대적으로 복원한다는 칸트식 '규제적 이념'이다. 즉, 논리적으로 완벽하여 필연적 결론에 도달하는 '구성적 이념'이 아닌, 일관성과 경향성을 지닌 좌표적 개념으로 끊임없이 그에 수렴해 나가는 '규제적 이념'인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생산양식) 관점은 최초의 단계에 존재하는 '평등성'을 중요하게 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유동성(자유)'이라는 사상을 무시한다. 즉, '코뮤니즘'을 '유동성(자유)'이 아니라 '부의 평등'이라는 점으로만 보는 사고가 되기 쉽다.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과 같은 결함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 [세계사의 구조], <1-2. 증여와 주술>, 가라타니 고진, 2015.
이 '교환양식A-B-C'들은 각 시기단계별로 하나씩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기마다 각각의 교환양식이 '네이션-국가(스테이트)-자본'의 형태로 복합되어 있으며, 원시 공동체는 '교환양식A(증여)'가,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 또는 아시아적 전제주의와 유럽의 절대왕정 등은 '교환양식B(국가)'가, 근현대 산업자본주의 체제는 '교환양식C(자본)'가 우세한 시기다. 미래의 '세계공화국(교환양식D)'은 이 모든 '교환양식'들이 혼재하지만 '증여'와 '상호(호수)주의'적인 '교환양식A'의 현대적 복원을 기획한다.
"호수(상호/증여) 원리에 기초한 세계시스템, 즉 '세계공화국'의 실현은 쉽지 않다. '교환양식A,B,C'는 집요하게 존속한다. 바꿔 말해 '네이션-국가-자본'은 집요하게 존속한다. 아무리 생산력(인간과 자연의 관계)이 발전해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 '교환양식'에서 유래하는 그와 같은 존재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교환양식D' 또한 집요하게 존속한다...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이란 그런 것이다."
- [세계사의 구조], <4-2.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2015.
이 과정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1,2차 세계대전의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자본-국가-네이션)'간 대전쟁 후 결성된 국제연맹과 국제연합(UN)에 희망을 건다. 국가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간의 연대 못지 않게 국가들간의 연대가 미래의 '세계공화국' 건설의 필수요소다.
'생산양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환양식'까지 아우른다는 것은, 생산과 노동의 노동자계급을 넘어 총자본의 입장에서 역시 노동 못지않게 잉여가치와 자본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대다수 '소비자'로서의 '다중(다수 대중)'에 주목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현대화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틀 하트의 '제국' 및 '어셈블리' 개념을 지지한다.
이렇게 '노동'을 넘어 '소비'와 '유통'까지 아우르는 '교환양식' 관점에 입각한 가라타니 고진의 사회구성체는 '노동'과 '생산양식'에 머물던 마르크스주의적 경제결정론을 극복한다. 하부구조(토대)의 경제적 '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되던 상부구조로서 정치적 '국가'의 자율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즉, '자본'을 키운 것은 '국가'이며,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의 현대적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교환양식D(코뮤니즘/어소시에이션)'로서 '교환양식A(증여/호수)'를 복원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 헤겔의 근대적 국민국가주의를 넘어선 칸트의 '목적의 나라'다.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은 마르크스가 헤겔을 넘어선 그 이상의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제,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을 역주행하여 칸트식으로 마르크스를 읽고 접속시키는 [트랜스크리틱](2010)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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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사의 구조 -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2015),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비고>, 2024.
2. [트랜스크리틱](2010), 가라타니 고진, 윤인로 옮김, <비고>, 2024.
3.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1848),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93.
4.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5. [제국(Empire)](1998),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