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인간의 증명 - 합본판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9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 해문출판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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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증명'의 추리
- [인간의 증명], 모리무라 세이치, 1975.


1.

책 한 권을 오롯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건,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인가 5학년,
지금 우리집 막내딸과 같은 나이가 되어서였던 걸로 기억된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이문시장 통에서 알게된 동갑내기 다른 학교 친구집에 있던 '셜록 홈즈 단편전집'을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한참이나 더 지나서야 책 한 권을 겨우 읽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집에는 '세계명작동화'와 '세계위인전집'이 있었지만, 나는 TV에서 방영해주던 '어린이 명작동화'를 주로 보았고, 만화영화를 통해 노란색 표지의 '세계명작동화'와 위인전을 주로 삽화 위주로 펼쳐보았다. 
국민학교 4학년 특활시간에 전집 중 뽑아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한 학기 내내 매번 앞장부터 펼쳤던 걸 보면 당시까지 나는 책 한 권을 다 읽는 방법을 몰랐다.

그랬던 내가 '셜록 홈즈'를 만나 별로 친하지도 않던 그 친구 집에 들락거린 건, 단편 추리소설을 한 권 씩 빌려서 보기 위해서였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집은 어린 내가 얇지만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순식간에 난, 셜록 홈즈의 열성 독자가 되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오락실을 전전하다가 만난 동네 형의 집에서 또 우연히 발견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통해 장편소설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셜록 홈즈'는 내게 '단편'을 읽는 힘을, 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밀실살인자와 엘러리 퀸은 '장편'의 바다에서 헤쳐나오는 힘을 내게 주고 떠났다.

그리고 중년이 된 지금 내 손에는 언제나 책 한 권이 들려져 있다.


2.

"야스기 교코는 자기 안에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 무네스에는 교코가 자백한 뒤, 자기 마음의 모순을 알고 놀랐다. 그는 인간을 믿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결정적 증거를 손에 쥐지 못한 채 교코와 대결했을 때 그는 그녀의 '인간'적인 마음에 승부를 걸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역시 '인간'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의 증명], <18. 인간의 증명>, 모리무라 세이치, 1975.


보통 19세기 말 영국의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20세기 초 미국의 엘러리 퀸 또는 바너비 로스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독자와 추리대결을 한다. 즉,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이 누군지 모른 채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를 추리하도록 한다. 엘러리 퀸은 아예 모든 증거를 다 풀어놓은 다음 "자, 이제 모든 증거를 늘어놓았으니 어디 한 번 문제를 풀어보시라"며 독자에게 공개 도전장을 소설의 중간에 내걸기도 한다.
물론, 문제 풀기나 머리 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굳이 작가와 추리대결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가 풀이해 나가는 과정을 즐길 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같은 일본 추리소설은 약간 결이 다르다.
물론, 독자와 함께 살인자를 추적하는 전통적 추리소설 기법도 있지만, 이미 사건의 전말을 다 풀어놓고는 그 조각들을 엮는 방식도 있다.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 : 1933~2023)의 1975년작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은 서로 무관한 듯한 두 건의 살인사건의 전말을 여기저기 플어놓은 후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가 누구인지 전지적 시점에서 다 알 수 있도록 해놓고는 경찰관이나 탐정 비슷한 민간인들을 풀어 증거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간다. 

일본 도쿄에 와서 살해당한 미국인 조니 헤이워드는 흑인이지만 동양인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전후 패전국 일본에 주둔한 미군 흑인병사와 일본여인 사이의 혼혈인임을 여러 차례 암시하고 동시에 등장하는 유명인 야스기 교코는 그녀가 살해된 혼혈흑인 청년의 어머니임을 역시 충분히 암시한다. 
한편으로 유명 정치인의 부인이자 자녀와의 소통과 육아의 달인으로 유명세를 탄 야스기 교코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는데, 그녀의 아들 교헤이는 착실한 아들을 연기해주며 어머니의 유명세 유지를 돕지만, 자기를 '장사' 도구로만 이용하지 엄마로서 부양하지 않는 야스기 교코에 대한 반항심으로 뒤에서 방탕하고 음란한 삶으로 시간을 허비하다가 뺑소니 교통사고 및 사체유기까지 저지른다. 
'인간'에 대한 환멸로 살아온 도쿄 형사 무네스에와 뉴욕 형사 켄은 각자의 자리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활약하나 잡을 듯 말 듯 사건의 실마리들은 나타나자 마자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미국인 조니의 살인사건을 쫓던 경찰과 뺑소니 범인을 추적하던 피해자의 남편 및 불륜남의 증거들이 교차하면서 살인범 야스기 교코와 도주범인 그녀의 아들 고오리 교헤이가 잡히고 마는데, 마지막에 친자살인범 야스기 교코를 잡은 결정적 증거는 물질적 확증은 아니었다.

소설의 제목 그대로,
'인간'의 '증명'이었던 거다.


"어머니, 내 그 모자 어찌되었을까요?
그래요, 여름날 우스이에서 기리즈미로 가는 길에,
골짜기에 떨어뜨린 그 밀짚모자 말이에요..."
- 사이조 야소, '밀짚모자'


일본의 근대 상징주의 시인 사이조 야소의 '밀짚모자' 시가 모리무라 세이치의 대표작 [인간의 증명]의 주요 매개다.
이 시에서는 엄마가 준 밀짚모자를 바람에 날려 잃어버린 아이가 역시 떠나버린 어머니와 밀짚모자를 동일한 상징으로서 등치시키고 있다. 

어릴 때 엄마를 떠나 밀짚모자만 품고 있던 조니 헤이워드를 없애야 하는 비정한 모성과 인간 자격과의 모순을 건드려 살인자로 하여금 자백토록 하는 소설의 결말과, 모리무라 세이치 자신이 대표작으로 꼽는 이 소설 [인간의 증명]을 쓰기 20년 전 기리즈미의 온천에서 우연히 접한 '밀짚모자' 시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매개체다.

살인자로 하여금 모성과 '인간'으로서의 '증명'을 요구하는 매개체이자, 작가가 20년 후 소설을 쓰도록 이끌어 준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치는 일본의 대표적 '사회소설'가였고, 1975년작 [인간의 증명]은 제3회 가도카와소설상을 수상하며 그의 대표적 추리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3.

스무살 넘어 나도 일종의 '사회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불평등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싶었다.
1970년대 일본 도쿄와 미국 뉴욕의 '기계문명'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광범위하게 퍼지는 '인간'으로서의 실격현상을 드러내는 세이치의 소설 [인간의 증명]이 '사회소설'이었다면, 20세기말 불평등의 계급투쟁이 극으로 치닫는 후기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는 역시 대량의 인간실격을 양산하며 우리에게 '인간의 증명'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소설가의 희망이 멀어진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증명'의 방식은 달라질지라도,
'인간의 증명'을 요구해 온 사회적 배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

1.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1975), 森村誠一,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2011.
2.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황금가지>, 2002. / <해문>, 1985.
3.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주영아 옮김, <검은숲>, 2012. (그리고 1980년대 <해문출판사>판.)4. [그리스 관 미스터리](1932), 엘러리 퀸, 김희균 옮김, <검은숲>, 2012.5. [로마 모자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기원 옮김, <검은숲>, 2011.
6.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1929), 엘러리 퀸, 이제중 옮김, <검은숲>, 2011.7.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1931), 엘러리 퀸, 정영목 옮김, <검은숲>, 2011.8. [미국 총 미스터리](1933), 엘러리 퀸, 김예진 옮김, <검은숲>, 2012.
9. [XYZ의 비극](1932~1933), 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7.
10.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Drury Lane's Last Case)](1933), Barnaby Ross/Ellery Queen,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3.
11.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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