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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2 - 진실로 용기있는 자는 가볍게 죽지 않는다
사마천 지음, 김진연 옮김 / 서해문집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법삼장(法三章)’, 그 개혁(改革)의 정신으로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8)
: ‘항우본기(項羽本記)’, ‘고조본기(高祖本記)’를 통해 본 초한전쟁(楚漢戰爭) - 1
어느 사회에든, ‘법(法)’이 있다. 어떤 이에게 이 ‘법’은 외부의 어떠한 개입이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가치중립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기준을 설정하고 제약하는 규범인 반면, 어떤 이는 지배-피지배계급의 국가권력 관계와 결부시켜 이 ‘법’을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 있다. 어떤 이에게 이 ‘법’은 남북의 체제대립 하에서 국가의 ‘안보(安保)’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인 반면, 어떤 이에게 이 ‘법’은 사회적 부와 권력을 독점한 세력들이 허위적인 ‘국가안보’가 아닌 실질적인 자신들의 오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치(存置)시키려는 낡은 지배기제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탄압하여 수많은 ‘빨갱이’들을 양산하는데 주요한 무기가 되었던 이 국가보안법의 존폐(存廢)를 두고 벌어지는 쟁투(爭鬪)의 전선(戰線)은 이 ‘법’에 대한 시각의 다름에 따라 합치될 수 없는 커다란 차이를 두고 그어진다.
法三章 (法:법 법 / 三:석 삼 / 章:문장 장)
세 장의 법.
민중들의 생활을 어우르는 올바른 통치를 위해서는 복잡하고 엄격하기만 한 법보다는 단순한 법이 더 긴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유방이 관중을 지나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기존의 법을 폐지하고 사람을 죽인 자, 사람을 상해한 자, 도둑질을 한 자 등의 처벌에 관하여 단순히 세 가지 법만을 공표하여 민심(民心)을 사로잡은 고사로부터 유래한다.
이와 같이 엄격한 법제도 아래서 억압받던 민중들을 해방시킨 유방은 관중의 부로(父老)들로부터 ‘패상의 진인 유방(覇上之眞人 劉邦)’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들 앞에서 행한 그의 연설을 들어보자,
“여러분은 오랫동안 가혹한 억압에 시달려 왔습니다. 국정을 비판했다가는 일족이 몰살당해야 했고, 길에서 쑥덕거리기만 해도 잡혀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리에서 참수를 당할 정도였습니다. 제후들은 약속했습니다. 관중에 먼저 들어간 자가 왕이 되기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관중의 왕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왕의 자격으로 나는 여러분과 약속합니다.
우선 법은 세 가지만 정합니다(법삼장;法三章). 즉 사람을 죽인 자, 사람을 상해한 자, 도둑질을 한 자는 그 죄에 따라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진나라가 정한 모든 잔인하고 복잡한 법령들은 모두 즉시 폐지합니다. 앞으로는 모두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당부합니다.
우리가 관중에 들어온 목적은 오직 여러분을 위하여 학정(虐政)을 없애자는 데에 있으며, 결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또한 우리 군사가 다시 패상으로 철수한 것은 여기서 제후들의 도착을 기다려 그들과 정식으로 협의를 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 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나라 최후의 맹장 장함의 항복을 받고 거세게 함양으로 쳐들어 온 후, 언급했듯이 진왕을 비롯한 진나라 사람들을 살육하고 함양의 모든 유산들을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민중들을 위한 정치는 파탄이 나지만, 민심을 바로 읽은 유방이 내건 ‘법삼장’의 개혁(改革)정신은 이후 천하패권(天下覇權)을 둔 쟁패(爭覇)에서 항우에 대항할 때마다 민중들이 유방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되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세 가지 법,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그 죄에 따라 처벌하며,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 또한 그에 따라 처벌한다, 는 ‘법삼장(法三章)’은 온갖 엄격한 법령에 시달리던 진나라 치하의 민중들을 해방시켜 진제국 체제 이전의 평화롭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뜻이었기는 하나 또 다른 제국(帝國)을 건설하여 민중들을 지배하려 했던 한고조 유방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선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랜 전쟁과 폭정으로 억눌리기만 하던 사회구성의 기반인 대다수 민중들에게 ‘법’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보기 좋은 한 일례가 되기도 한다.
‘법(法)’은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을 조정하여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끔 행동규범을 설정하는 것을 주된 존재이유로 한다. 나름의 역사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국가권력(國家權力)이 시대가 흐르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독립된 정치적 생명체가 된 현대사회에서,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법’ 또한 갈수록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소외(疎外)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권력투쟁의 정점에는 언제나 ‘법’을 중심으로 하는 헤게모니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법’이 지니는 중요한 존재가치를 정확히 증명해 준다, 그런 만큼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국가권력의 기반이 되는 거대한 토대가 그 국가의 구성원이고 그들의 생활이듯이, ‘법’이 사회구성원들의 정치사회적 생활 자체를 억압하거나 구속하는 기능을 하고, 해당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과 다른 다양한 생각들이 공개적으로 경쟁하여 보다 나은 대안들을 창출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결국에는 사회의 발전에 질곡(桎梏)으로 작용하는데 그 존재목적을 두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반세기 이상 냉전체제를 통해 사회적 부와 권력을 독점해 온 소수 기득권 세력들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했던 낡을 대로 낡은 ‘국가보안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