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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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힘 그리고 읽고 쓰는 삶


C. S. 루이스 저, '책 읽는 삶'을 읽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은 루이스의 여러 저작으로부터 독서에 관련된 문장들을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루이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한 독자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제목이나 프롤로그 격의 '엮은이의 글'을 읽으면 곧장 이 책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루이스를 꽤 읽은 나로선 사실 정독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조금은 낚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낚여보는 것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꽤 유쾌한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서 며칠간 십여 분 정도씩 읽어나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책이었다. 


루이스가 책, 특히 문학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면 좋은 것은 이 책의 제목 '책 읽는 삶'은 루이스가 실제로 살았던 삶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책 읽고 쓰는 삶'이라 할 수 있을 테고, 이를 좀 더 일반화시키면 '읽고 쓰는 삶'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정말 24시간 활자의 바다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범상치 않은 저작들의 출처를 그가 타고난 작가라는 이유에서만 찾는 것은 무례한 처사다. 그가 읽기와 쓰기에 들였던 시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문학에 대해, 독서에 대해, 독서모임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내겐 낯설지 않고 반가웠다.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을 좋아한다. 아마 루이스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혹은 독자가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에게 있어 책과 글이란 상상력이 전제된 열매였다. 상상력은 곧 책과 글의 생명력과도 같았다. 루이스는 어린아이에게 신화를 읽히고 동화를 읽혀서 거인과 용과 난쟁이와 괴물로 인해 무서움을 느끼도록 허락하는 편이 강도나 도둑이나 강간범이나 살인자로 인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또한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허구가 현실보다 우월할 수 있으며, 허구 덕분에 현실을 등지는 게 아니라 허구 덕분에 오히려 현실을 더욱 견뎌내고 극복하며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이스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다. 루이스가 말했듯 나도 인간은 오히려 허구가 전제된 문학을 통해 현실을 더욱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 전달 위주로 쓰인 비문학보다 흥미를 전제로 하고 상상력과 허구로 옷을 입고 그 안에서 깊은 통찰을 깨닫게 해 주는 문학을 내가 더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루이스 발톱의 때도 되지 못하겠지만, 루이스와 이런 부분에서 같은 방향이라서, 이 또한 다행이라 생각한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16. 인간 폐지: https://rtmodel.tistory.com/1662

17. 책 읽는 삶: https://rtmodel.tistory.com/1742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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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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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모든 문장이 유기적으로 짜인, 지극히 경제적이고 효율이 극대화된 글이 바로 키건의 글이 아닌가 한다. 신형철이 말한 '정확한' 글쓰기의 실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건의 작품엔 노트에 옮겨두고픈 명문도 많다. 무엇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의 힘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아, 살면서 동시대에 이런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리라.


그래서일까. ’맡겨진 소녀’에 이어 나는 책장에 일 년 넘게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책들도 무시하고 최근에 책장에 꽂힌, 작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책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어젯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가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한 폭의 감성적인 수채화로 담아냈다면,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과 달리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내용 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렸다. 모두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인간 역사의 단면을 중심 소재로 삼아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소설화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그리고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18-20세기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합세하여 ‘타락한 여성들’이라는 명분으로 미혼모를 포함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층 여성들을 집단 수용하여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공교롭게도 수녀원이었다. 성스러워야 할 장소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학대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아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죄'라는 명목을 들이대어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죄와 판단은 더 큰 죄악이 되었다. 한 사람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살인한 결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피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은 빌 펄롱, 때는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보관하고 배달한다. 한파가 몰아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래봤자 아내와 다섯 딸로 이뤄진 한 가족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또 큰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삶을 겨우 지탱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에겐 여유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며 그는 요즈음 뭔지 모를 공허를 느낀다. 


빌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빌은 뒤늦게 어머니에게 자신이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빌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비록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에 속했고, 아버지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빌은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 미시즈 윌슨을 은인으로 여긴다. 미시즈 윌슨은 빌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건 은혜였다. 특히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버렸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자라고 결혼도 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하지만 빌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흔적도 없이, 아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빌의 어머니도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수녀원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즈 윌슨은 조용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쩌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선택이었지만, 결코 큰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빌의 어머니도 빌도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의 선택이 그녀 자신에겐 사소했을지 모르지만, 빌의 어머니와 빌에게는 인생 전체였다. 


빌이 느끼는 공허가 어쩌면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탄 배달을 하러 수녀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를 보고 난 이후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졌을 것이다. 석탄 창고에 갇혀 밤새 추위에 떨다가 빌에게 우연찮게 발견된 그 소녀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막달레나 세탁소에 잡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평행우주 속 빌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소녀를 본 순간 자신의 평안한 삶이 결코 평안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듯하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마주친다. 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져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꿋꿋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공허가 사라짐을 느낀다. 비로소 은혜로 비롯된 삶의 향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두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합작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빌은 몰랐지만, 그의 아내 아일린은 동네 주민들처럼 수녀원의 은밀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딸 다섯이 그곳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만족해했다. 그들은 그들 사정이고, 내 딸은 내 소관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일린은 빌을 제외한 많은 주민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않을까, 하고 나는 해석해 본다. 작품에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빌이 그 소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빌일 수 있는지, 혹시 아일린이나 동네 주민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불의를 묵인하는 건 사소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사소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대단한 일이다. 큰 파급효과를 낸다. 불의를 묵인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을 돌리고 정의 앞에서도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을 둘 데가 없어 그저 허공이나 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방어적이고 사적이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작은 선택을 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타자를 살려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것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살리는 일이면 된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라도 좋다. 살릴 수 있다. 나의 사소한 선택은 대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내리읽으며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글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된다. 


책을 다 읽고 책 앞부분에 적힌 헌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한 몇 문장도 다시 읽었다.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읽혔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졌다. 행간이 이해가 되고 왜 그 글이 거기에 쓰여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왜 크리스마스 시즌인지, 왜 그해 12월엔 까마귀의 달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덩달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클레어 키건 읽기

1. 맡겨진 소녀: https://rtmodel.tistory.com/1740

2. 이토록 사소한 것들: https://rtmodel.tistory.com/1741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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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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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칼의 예리함

클레어 키건 저, '맡겨진 소녀'를 읽고

여백이 많은 글은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저자의 배려이자 독자가 그 여백으로부터 숨은 의도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 저자의 믿음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속도감을 내기에 적당하지만 그것보다는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뿐더러 글의 여백을 강화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단문으로 가득하면서 여백이 많은 글을 만났다.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압도되는 기분. 나의 내면은 고요해지고 청명하게 깨어난다. 마치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검색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 두 작품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전작 읽기 작가 명단에 조용히 한 명 더 추가한다.

'아이를 맡아 기르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원제는 'foster'이다. 한국어 제목은 '맡겨진 소녀'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작품은 한 소녀가 잠시 친척 집에 맡겨져 짧은 여름을 보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동사 한 단어를 한국어 제목으로, 그것도 직역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은 소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이긴 했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은 '맡아 기르다'라는 원제가 나타내는 의미보다 그 동사가 실행한 대상인 '소녀'에 집중되는 효과를 낸다. 마치 소녀에게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 소녀가 어떤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추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번역이란 행위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한국어 제목이 자아내는 추측과는 달리 이 작품은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한 소녀의 짧은 일상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기발함이 강조되는 현대소설이나 웹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뻔한, 식상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 클레어 키건은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보편적인 인간의 깊은 감성을 터치한다. 함축적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장들은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놓치기 쉽고 쉬이 무시되곤 하는 한 가닥의 감정선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잡아낸다. 세월에 무뎌진 과도가 잘 벼려진 칼도 해내지 못한 폐부를 깊숙이 찔러 쪼개는 느낌이랄까. 그저 한 끝 더 나아갔을 뿐인데,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건드릴뿐인데 나는 이런 문장들 앞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무너짐이라니. 나는 다시 겸손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배자가 되어 읽기와 쓰기의 신성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도스토옙스키를 재독하고 클레어 키건을 초독하는 이런 일상. 나의 ‘동수’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다산책방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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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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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지


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을 읽고


일주일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 영국 요크셔에 위치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로부터 4마일 정도 떨어진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다녀왔다. '워더링 (Wuthering)'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방언이고, '하이츠 (Heights)'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뜻과는 별 상관없이 어떤 장소를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참고로 내가 거주한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쉐이커 하이츠 (Shaker Heights)였고, 캘리포니아에 살 때 옆 동네는 아시엔다 하이츠 (Hacienda Heights), 라 하브라 하이츠 (La Habra Heights), 롤랜드 하이츠 (Rowland Heights)였다). 둘을 합친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는 자연스레 '바람이 거세게 부는 높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작품의 원제가 되었다. 


한국어판 제목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의역의 결과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한국어판 제목도 원제를 그대로 살렸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풍의 언덕'은 폭풍이 부는 그 어떤 언덕이라도 될 수 있지만, 그래서 낭만성과 막연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워더링 하이츠'는 작품의 주 배경이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저택으로써 구체성과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잔상도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이고, 막연한 풍경이 아닌 그곳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굳이 폭풍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곳은 폭풍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분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폭풍이 외부에서 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 속 폭풍의 근원은 자연이 아닌 한 사람이다). 그 폭풍은 '사랑'보다는 '증오' 또는 '복수'에 가깝고, '선'보다는 '악'이, '낭만'보다는 '욕망'이 도드라진 실체로써 인간의 어떤 내면이나 특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다. 그 이름은 '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이자 모든 불행과 악행의 시작인 사람.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히스클리프의 등장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워더링 하이츠'의 본체는 곧 '히스클리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원제를 ‘히스클리프’라고 했다면 작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마치 증오하고 복수할 대상이 존재할 때만 생기가 도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그 대상(들)이 존재했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워더링 하이츠이기도 하고, 그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을 느낄 만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캐서린 언쇼를 처음 만난 장소이자, 그가 기록된 삶을 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 역시 워더링 하이츠이기에, 이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워더링 하이츠가 가장 적절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작품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막연한 인상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도 바로 이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보기 좋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작품은 낭만과는 무관한, 오히려 광기어린 한 사람의 지독한 이기심 내지는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한 사람의 냉혹한 분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이다. 


작품 후반에 히스클리프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자신의 모든 분노, 증오, 복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때문에 불행을 넘어 파멸에 이른 사람이 한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 것처럼 당당했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고아이자 이방인으로 캐서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푸대접을 받는 등 차별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불행으로 밀어 넣을 필요까진 없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순수한 표현들은 종종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세기 초라는 시대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는 그 시절 그 공간 덕분에 캐서린이라는 한 사람을 영혼 깊숙이 사랑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성숙하지 못했고 더욱 비뚤어져갔다. 캐서린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채 수년간 타지로 떠나버리고 만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해 거주지를 드러시크로스로 옮긴 캐서린에게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 그를 가장 학대했던 힌들리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가 살기 시작한다. 그가 그곳으로 간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복수. 피를 부르는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힌들리와 도박을 해서 야금야금 그로부터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힌들리는 정신쇠약까지 걸리며 점점 자멸하게 되고, 히스클리프는 드디어 워더링 하이츠의 실제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계획한 복수가 가시적인 열매를 맺은 첫 번째 사례였다. 


히스클리프가 증오한 대상은 두 저택의 모든 어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치 복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늘 자신을 피해자로 여겼던 듯하다. 그의 과도한, 인정할 수 없지만 스스로는 절제하고 있는 듯한, 분노는 결국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이 시기가 리스클리프에겐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더욱 비뚤어져간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르러 남은 거라곤 더욱 망가지는 길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이후 어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으로 변모해 간다. 


이 작품을 히스클리프를 중심으로 보면 그의 복수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장점도 많이 가진다. 물론 히스클리프를 제외하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총 세 세대에 걸친 여러 다른 인물들 사이의 사랑과 일상 이야기는 이 작품을 충분히 매력적이게 한다. 특별히 캐서린 언쇼가 죽는 날 태어났던 그녀의 딸 캐서린과 힌들리가 남기고 간 아들 헤어튼, 그리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워더링 하이츠의 하인 조셉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잘 그리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와는 달리 에밀리 브론테는 이 작품에서 서사와 대화 위주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공통점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도스토옙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찰과 분석과 통찰로써, 에밀리 브론테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인 흥미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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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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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삶

조르주 페렉 저, ‘보통 이하의 것들’을 읽고

처음 읽는 조르주 페렉. 그에게 ‘일상의 글쓰기’라는 타이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소개된, 다분히 실험적이고 집요하여 당황스럽기조차 한 그의 글들은 넌지시,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 대부분의 일상을 이루지만 익숙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느새 일상에서 탈락되고 배제되어 버린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전이 빛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장소들, 공간들이 다르게 보였다. 

페렉의 글이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기억나게 해서 여기 소환해 본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의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쓴 감상문의 앞부분이다. 일상에 눈을 돌린 작가들의 글은 한결같이 조용히 마음 깊은 곳을 터치하는 것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문득 어른으로 성숙해졌다는 지표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눈이 깊은 자의 시선은 어디를 향할까.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 낯선 영화 같은 찰나가 아닌 묵직하게 삶을 차지하고 있는, 빛바랜 일상이 아닐까.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페렉의 낯선 글쓰기 덕분에 평범하고 익숙했던 내 삶을 낯설게, 하지만 더욱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미지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내 손에 쥐어진 보석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다. 

페렉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경험과 적극성을 갖고 작은 행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한가로이 산책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로부터 배제되었던 익숙한 것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며 보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저 높고 빛나는 곳을 향한 눈을 낮추어 겸손하고 경건한 자의 마음으로 내 소소한 일상을 기꺼이 껴안는 삶을 살고 싶다. 페렉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을 결코 제대로 알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친분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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