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칼의 예리함 클레어 키건 저, '맡겨진 소녀'를 읽고 여백이 많은 글은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저자의 배려이자 독자가 그 여백으로부터 숨은 의도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 저자의 믿음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속도감을 내기에 적당하지만 그것보다는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뿐더러 글의 여백을 강화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단문으로 가득하면서 여백이 많은 글을 만났다.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압도되는 기분. 나의 내면은 고요해지고 청명하게 깨어난다. 마치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검색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 두 작품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전작 읽기 작가 명단에 조용히 한 명 더 추가한다. '아이를 맡아 기르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원제는 'foster'이다. 한국어 제목은 '맡겨진 소녀'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작품은 한 소녀가 잠시 친척 집에 맡겨져 짧은 여름을 보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동사 한 단어를 한국어 제목으로, 그것도 직역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은 소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이긴 했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은 '맡아 기르다'라는 원제가 나타내는 의미보다 그 동사가 실행한 대상인 '소녀'에 집중되는 효과를 낸다. 마치 소녀에게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 소녀가 어떤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추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번역이란 행위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한국어 제목이 자아내는 추측과는 달리 이 작품은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한 소녀의 짧은 일상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기발함이 강조되는 현대소설이나 웹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뻔한, 식상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 클레어 키건은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보편적인 인간의 깊은 감성을 터치한다. 함축적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장들은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놓치기 쉽고 쉬이 무시되곤 하는 한 가닥의 감정선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잡아낸다. 세월에 무뎌진 과도가 잘 벼려진 칼도 해내지 못한 폐부를 깊숙이 찔러 쪼개는 느낌이랄까. 그저 한 끝 더 나아갔을 뿐인데,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건드릴뿐인데 나는 이런 문장들 앞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무너짐이라니. 나는 다시 겸손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배자가 되어 읽기와 쓰기의 신성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도스토옙스키를 재독하고 클레어 키건을 초독하는 이런 일상. 나의 ‘동수’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다산책방 #김영웅의책과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