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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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그리고 사랑

김연수 저,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
동반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임사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두 번째 삶은 시간이 거꾸로 간다. 속도는 같으나 방향이 반대다. 오늘 밤을 지나면 내일이 아니라 어제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까지 두 번째 삶을 거꾸로 살게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날 때 서로를 바라보던 그 사랑스러운 눈빛과 가슴 벅찬 얼굴, 그 설레던 마음까지 그대로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이번엔 시간이 다시 반대로 간다. 동반자살하기 전과 같은 시간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삶이 이미 서로가 경험한 삶을 하루하루 다시 되짚어가는 것이었다면,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두 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과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미래의 기억을 가졌기에 현재를 충만히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단편소설 속에 소개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책 속의 책 이야기에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여행을 통해 알게 되는 현재의 소중함.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의 연속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터무니없이 평범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내게 주어진, 내가 살아내야 할 고유한 시간인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를, 지금, 여기의 삶을 마치 두 번 사는 것처럼 만끽하며 살겠다는 의미심장한 다짐과 맥을 같이 한다. 인생, 그렇게 인상 찌푸리고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 없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맛보고 사랑하면서, 즉 현재를 누리면서 살고 싶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이 작품의 키워드라고 생각되는 '세컨드 윈드'는 '운동하는 중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뜻한다. '세컨드'라는 단어로 유추할 수 있듯, 이는 운동 중 고통이 극에 달하는 사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호흡도 순조로워지며 계속 운동할 수 있는 상태다. 퍼스트 윈드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사점 이전의 의욕이 가득한 때와는 달리 세컨드 윈드는 사점을 극복해 낸 다음이므로 일종의 초월적인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김 선생의 말마따나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친구로 지냈던 두 남녀가 삼십여 년이 지나 남해의 한 작은 섬에서 우연히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현과 은정은 그렇게 낮은 확률로 섬에서 재회했다. 작가인 정현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초청을 받아서 섬으로 왔는데 거기서 우연찮게 은정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은정은 더 이상 은정이 아니었다. 손유미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명하여 손유미가 된 건 그녀의 인생이 현재 퍼스트 윈드가 아니라 세컨드 윈드를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현은 강연 후 유미에게서 그녀가 어떻게 세컨드 윈드를 살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 유미는 정난주라는 조선시대 여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각색하여 정현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을 살리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으로 옮겼으나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정난주는 하느님을 만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만 아들도 살 수 있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결국 그 기도가 응답되어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정현이 강연 차 찾아온, 그리고 은정이 아닌 유미로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섬에서 말이다. 은정은 이른 나이에 아들을 잃어 마음에 상처가 컸다. 남편과도 이혼한 뒤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 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가 은정의 인생에서는 사점과도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흘러 흘러 어쩌다 그 섬까지 오게 된 은정은 정난주의 바다를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이었다. 그녀 역시 난주처럼 세컨드 윈드를 살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삶. 인생의 사점을 지나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 삶. 유미는 은정이었을 때 바랐던 추리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점이 목을 죄어올 때 순응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성취이자 행복이었을 것이다. 은정에서 유미로의 전환은 첫 번째 삶과 전혀 다른 삶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초월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야만 했다고 여겼던 그녀의 삶이 다시 살아있기를 선택함으로 더 온전한 삶을 살게 된 것이리라. 책을 덮으며 나는 그녀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진주의 결말
사건의 결말은 나지 않았다. 유진주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홀로 모시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사건의 결말‘ 티브이 프로그램이 몰고 가듯 그녀가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인지, 아니면 범죄심리학과 교수이자 이 작품 속 화자의 예측대로 수동적인 피해자인지는 결론 나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도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녀가 아버지와 살던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밝혀졌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자신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거짓도 없이 순순히 자백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저 소방관들이 불 난 집 유리창을 깨부수는 장면을 보고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자유함을 맛보고 제주로 훌쩍 떠났을 뿐이었다. 도주도 잠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을 다 읽고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는다. 특히 그녀가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서 이 작품은 말을 아낀다. 시원하게 답이 되지는 않지만 그녀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해서, 그래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오직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니…

선뜻 와닿지 않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화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은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박물관 안에서 내부인지 외부인지 모를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유진주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고, 귀에 들려오는 건 오로지 바람소리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번 생각을 했지만 아직 이 수수께끼 같은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는 행동은 그저 무책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힘을 얻고 있으며, 유진주가 얻은 자유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사건의 결말은 진주의 결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건의 결말은 이유를 묻고 따진다. 논리 정연해야 설득력도 높아지는 법이고, 범행과 범인의 관계 또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입각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일들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절반 이상의 일들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거나 우리의 이해가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모든 일의 이유를 밝히고 싶은 마음은 이십 대 시절의 몽상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없거나 모르지만 이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더 자주 맞닥뜨리는 일들의 본질과 더 가까운 건 아닐까. 바로 이때 진주의 결말은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와 맞닿게 된다. 일을 일어나고, 이유는 없거나 모르며, 어쨌거나 차후에 이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의 연쇄는 곧 우리의 인생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시간이었다. 광막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만큼의 사무친 그 시간은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아내 정미,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었다. 폭풍처럼 지나가버린 나날들이 몽골의 사막에서, 그 먼 이국 땅에서 열병이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작품 속 화자를 한꺼번에 찾아왔던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슬픔이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 지나간 사랑, 그리고 늙어버려 아직도 살아있어 아픔을 느끼는 나. 그 모든 생각들이 얽히고설킨 채 울란바토르에서 그를 쓰러뜨리고 펑펑 울게 만들었던 것이다. 

먼 기억 속에 묻힌 옛 추억의 이야기가 어느 날 도둑 같이 찾아올 때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밖엔 없다. 그 시간이 치열하면 할수록, 애틋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새까맣게 잊혔다가 뜬금없이 나타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삼켜버리는 그 압도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작품 속 화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나 사랑했기에 바얀자그까지 가서야 그 기억의 성벽이 무너졌느냐고, 얼마나 그녀 없는 삶을 연극하듯 살아왔기에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고. 답을 듣지 못한 나는 그저 애도할 뿐이다. 


엄마 없는 아이들
상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상실인 걸까? 상실감을 느끼고 고립을 경험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상실을 경험한 다른 사람인 걸까? 코로나 예방접종을 위해 명준이 방문했던 병원에서 명준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낸 혜진으로 인해 명준은 대학 시절을 회고하게 된다. 명준은 한때 혜진에게 잠시 사랑을 느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 명준은 연극단에서 혜진을 처음 만났고 해변에서 혜진 역시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병상련을 느낀 명준은 혜진에게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으리라. 

현재의 명준은 그때를 회상하며 생각한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연극이 끝나고 함께 사라져 버린 혜진을 잃어버림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는 것을. 상실은 그 상실을 잠시 채운 것 같았던 그 어떤 것의 잃어버림과 함께 잊히게 되는 걸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이 작품 또한 어느 날 문득 날아든 편지 한 통이 이야기를 이끈다. 십여 년 전 만나 인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둘이서 여행까지 갔던 희진으로부터 온 긴 편지였다. 보낸 곳 주소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요쓰야였다. 희진은 K-Culture진흥회로부터 한국 인디 가수 대표로 초대되어 일본 요쓰야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공연에서 여덟 곡을 부른 후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 적힌 자초지종은 한 편의 소설과도 같았다. 희진과 함께 여행했던 해,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에 이끌려 찾아온 한 일본인이 희진의 서명이 남겨진 카페 방명록을 주인 몰래 찢어 간직하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그 서명에 의지하여 희진일지도 모르는 한국 인디 밴드 가수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 일본인은 그 당시 자살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우연찮게 들려온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희진은 그저 그 노래가 담긴 CD를 카페 주인에게 틀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고, 또 깜빡하고 CD를 찾아가지 않았을 뿐인데, 그 실수인지도 모를 우연이 한 일본인 영혼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 구원의 기쁨을 보답하고자 그 일본인은 자수성가한 이후 계속해서 희진을 찾다가 기어코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희진은 작년 혼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가던 밤을 떠올린다. 인천부터 제주까지 긴 여정 중 출항 직후부터 멀미 때문에 고생했던 그 밤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한다. 작품 속 화자와 함께 갔던 일본 여행 중 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서 본 마크 로스코의 벽화 연작들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 노래의 뒷부분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가사. 희진은 그 가사에 빠져 흥얼거리며 그 고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자살의 문턱에서 한 사람 희진을 찾겠노라고 많은 세월을 보낸 그 일본인을 떠올리며 희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희진에게 한 사람이란 누구였을까? 카페 방명록에 희진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듯한 글귀를 써놓은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희진의 편지는 작품 속 화자에 대한 사랑을 회상하는 것이었을까?


사랑의 단상 2014
이 단편소설 역시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기억을 기술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과거에 머물 뿐이고 그래서 사랑도 끝난 것 같지만,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종종 작품 속 화자의 현재 일상 속으로 침투하여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사랑은 기억되는 한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억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일까? 혹시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어도 남아 있는 옛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다는 말일까? 여러 해석되지 않는 질문들이 남는 작품이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세 명의 바르바라가 있다. 시대를 달리하지만 이 세 명의 바르바라는 공교롭게도 어떤 신앙 혹은 신념 때문에 명을 다하지 못하고 타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작품의 주제를 고려하며 이를 바라보면, 육체의 삶은 연결되지 않지만, 정신적 삶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육체는 이번 생을 살다갈 뿐이지만, 정신은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억으로 말미암아 이전 생과 다음 생까지도 살아있다는, 다소 상상력이 필요한 해석도 이 소설은 요구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만큼은 이 소설집을 이루는 나머지 일곱 편의 단편소설처럼 시간고 기억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야기의 일환이라는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뿐, 정작 저자 김연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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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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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도리스 레싱 저, ‘다섯째 아이‘를 읽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남편 데이비드와 함께 아이 여덟을 낳고 큰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졌던 헤리엇이 다섯째 아이 벤을 가졌을 때부터 다소 목가적이고 낭만적일 것 같았던 이 소설의 장르는 호러가 된다. 다섯째 아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꿨던 삶에 단절을 가져왔고, 급기야 그들의 오랜 꿈이 과연 실현 가능했는지, 그저 몽상에 불과했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부모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지며, 첫째부터 넷째 아이들과의 관계도 깨지거나 소원해지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다섯째 아이 벤의 존재는 모두의 불행과 저주의 씨앗이었던 걸까?

저자 도리스 레싱이 벤을 태어나기 전부터 폭력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리엇은 이미 아이를 네 번 낳은 경험이 있는 터라 벤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다. 임신 기간이 고통스러웠고, 급기야 아이는 평균적인 아이들에 비해 약 두 배 정도 큰 상태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에도 성장이 두 배 정도 빨랐다. 벤에게서는 아이의 순수하고 귀여운 눈빛과 얼굴 표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벤은 마치 조그만 악마가 들어가 있는 존재처럼 비열하고 이기적인 어른의 차가운 시선으로 주위 모든 사람을 바라보았으며, 그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피하게 만들었다. 또한 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친척의 애완동물을 목 졸라 죽이는 행동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과연 벤은 아이의 몸에 들어온 악마였을까? 

소설은 그리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벤이 악마가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처럼 좀 더 원시적인 종족인 것처럼 묘사한다. 벤의 폭력성과 이기성을 악마와 같은 영적인 이유나 환경의 영향이라는 학습적인 이유도 아닌, 선천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이유로 설명하려는 듯하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데이비드와 해리엇 사이에서 벤과 같은 야만인 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말한다. 어쩌다가 이런 아이가 태어나게 된 걸까?

한 가지 가능성으로 저자는 해리엇 부부의 부주의함과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이었던 꿈을 원인으로 드는 것 같다. 넷째 아이까지 낳고 나서 그들 역시 다섯째를 가지기 전에 시간을 가지자고 생각했었으나 피임도 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하룻밤의 정욕으로 결정해 버린 이 부부를 부주의하다고 말하는 건 결코 과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미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그들은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육아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일에 열중하는 부부가 이미 낳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아이는 그냥 낳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부모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해리엇 부부는 이 당연하고도 신성한 진리를 함부로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그들의 무모할 정도로 부주의한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행복의 열매만을 바랐을 뿐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짧았던 듯하다. 그러니 그 긴 과정 자체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가 있었겠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 눈에 그들은 거짓 행복을 위해 참 행복을 잃어버린 자들과 같았다.

이런 점에서 다섯째 아이 벤의 탄생은 여덟 아이를 낳겠다는 해리엇 부부의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벤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의 이기적인 부주의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벤을 요양원에 보내는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데, 모두가 반대했으나 모성애에 충만했던 해리엇은 홀로 요양원을 찾아가 벤을 다시 데리고 온다. 벤의 복귀는, 아니 벤을 복귀시킨 해리엇의 독단적인 행동은 데이비드와 네 아이들, 그리고 부모와 친척들과의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벤을 선택한 행동으로 해석되고, 그 이후 해리엇은 벤을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키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게 된다. 과연 이러한 해리엇의 행동을 모성애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할 수 있을지, 혹시 자신의 죄책감 아닌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은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부분일 것이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리엇 가정은 벤의 탄생과 복귀 이후 와해되었고 회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벤을 평범한 아이들처럼 키우려고 했던 해리엇의 시도도 실패로 귀결되는데, 벤 안에 각인된 야만과 폭력의 디엔에이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벤을 선택했던 해리엇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벤은 갱들과 어울리며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존재로 그려지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메시지를 나는 벤이 아닌 해리엇에서 찾는다. 저자 도리스 레싱은 전통적으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해리엇의 꿈과 모성애, 그리고 행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롱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텍스트에 숨기지 않으면서 독자들에게 그것들의 의미와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윤리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벤과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해리엇 같은 인물도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눈을 빌려 자명한 개념, 통념들에 대해 다시 묻고 의심하며 내가 사는 이 시대와 문화라는 콘텍스트에서 해석해 보는 기회를 갖는 건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영원한 건 없기 때문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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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무라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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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이 아닌 예술성의 이면


레프 톨스토이 저, '하지 무라트'를 읽고


아바르인 산민 하지 무라트는 캅카스의 이름난 전사이자 나이브였다. 나이브는 이슬람사회 부족장 또는 장수를 뜻한다. 하지 무라트는 실존 인물이었다. 톨스토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꺾어 던져버린 '타타르 풀'이라고도 불리는 엉겅퀴의 굴하지 않는 생명력에 경탄하며 오래전에 들은 하지 무라트에 관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하지 무라트가 꺾인 엉겅퀴처럼 잘린 머리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짧은 기간을 재구성했으며, 1828년생인 톨스토이가 많은 시간 깊은 애정을 들여 1904년 완성했지만 그의 의지에 따라 1912년, 그러니까 그의 사후 2년 뒤에 출간되었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러시아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남하정책을 펼치던 시기를 조준한다. 러시아는 캅카스까지 내려왔지만 캅카스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영토 확장이 난항에 빠지게 된다. 1834년 체첸, 다게스탄 일대의 통치자 이맘이 된 샤밀은 러시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 무라트는 샤밀 휘하 아래 용맹을 떨치던 장수였다. 


이후 샤밀의 독재적인 통치에 반발한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에 투항하여 샤밀에게 복수를 꾀한다. 샤밀은 하지 무라트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에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군과 동맹한다고 해도 마음껏 샤밀을 공격할 수 없었다. 하지 무라트는 러시아 측에 자신의 가족과 사로잡은 포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출해 달라고 요구한다. 가족 문제만 해결되면 목숨을 바쳐 러시아군과 함께 샤밀과 그 일당의 항복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하지 무라트의 말과 행동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어떤 거짓과 불의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전사였으나 얼굴엔 늘 앳된 선량함이 묻어났다. 잘린 머리에서도 유지되었을 만큼. 그러나 러시아 측에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투항한 하지 무라트를 도와주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 여겼던 하지 무라트는 차라리 러시아를 다시 탈출하여 샤밀을 직접 공격하고 가족을 구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자기와 함께 하는 정예대원이 소수 있었지만 그 계획은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죽음을 각오한, 어쩌면 무모한, 결단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샤밀과의 전투를 시작도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탈출하는 도중에 러시아군으로부터의 공격으로 그는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소설은 꿈을 꾼 듯 끝을 맺는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대문호로 자리매김했던 톨스토이는 인생 중반에 순수문학에서 벗어나 종교와 윤리에 천착한 작가로 거듭난다. '하지 무라트'는 그의 말년에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나는 종교와 윤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 작품 안에 듬뿍 담겨있으리라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내가 '하지 무라트'에서 만난 톨스토이는 설교자가 아닌 순수문학가였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대중성은 온데간데없고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의 내용만이 가득했다. 역사책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왜 톨스토이는 대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이 작품을 그렇게나 공을 들여 완성하고 사후에 출간되도록 계획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하지 무라트가 아무리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또 그가 아무리 불의에 저항하며 끝까지 명예롭고 정의롭게 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이 작품에 대한, 혹은 하지 무라트에 대한 톨스토이의 각별한 애정을 이해하기엔 부족했다. 특히나 기독교적인 색채를 진하게 띠게 된 그의 인생 말년에 이슬람교도였던 한 사람에 대한 짧은 생을 다룬 이유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찾아보면 기독교 측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설사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구를 더 동원하여 기독교 버전의 '하지 무라트'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실존 인물의 프로필을 그대로 사용했는지 톨스토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톨스토이는 1910년 사망했다. 이 작품은 6년 전인 1904년 완성되었다. 왜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자신의 사후에 출간하길 원했을까? 그 이유가 혹시 위에서 말한 궁금증에 대한 답과 연결되진 않을까? 혹시 기독교적 윤리와 도덕 선생으로 말년을 살았던 톨스토이의 내면에 다른 생각이 꿈틀대고 있진 않았을까? 기독교도가 아닌 이슬람교도의 순박함, 용기, 정의로움, 선량함 등을 책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런 가치들은 한 종교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진 않았을까? 생전에 출간했다면 생겼을지도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후 출간을 원한 게 아니었을까? 


톨스토이는 동방정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한다. 톨스토이는 기독교가 민중을 등한시한다고 여겼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기독교관이 우리가 아는 그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건 신학적인 내용이므로 여기선 언급을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가 이 작품 '하지 무라트'를 쓰고 사후 출간을 기획한 이유가 그의 기독교관과 동방정교회의 관점 사이에 생긴 마찰과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 무라트'가 1896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톨스토이가 파문당한 사건이 8년간 이 작품을 집필하는 중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다 읽고, 감상문을 이렇게 쓰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대중성을 과감히 저버리고 문학적 예술성의 옷을 입혀 이 작품을 쓴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정말 궁금하다. 이 작품이 가진 예술성의 이면이.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만 톨스토이 역시 내적인 변화를 크게 거친 작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책장엔 몇 년째 '전쟁과 평화'가 꽂혀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인생이란 무엇인가'도 책장에서 나를 노려본다. 언제 읽을진 알 수 없지만 '하지 무라트' 덕분에 시기가 앞당겨질 것 같은 예감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 톨스토이 읽기

1. 고백록: https://rtmodel.tistory.com/824

2. 이반 일리치의 죽음: https://rtmodel.tistory.com/853

3. 안나 카레니나: https://rtmodel.tistory.com/1173

4.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250

5. 부활: https://rtmodel.tistory.com/1336

6. 하지 무라트: https://rtmodel.tistory.com/1902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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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주는 소녀 2~3 세트 - 전2권 영생을 주는 소녀
김민석 지음, 안정혜 그림 / IVP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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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는 공감


김민석 글, 안정혜 그림, ‘영생을 주는 소녀’를 읽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책. 텍스트가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여백을 그림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책. 세 권으로 구성된 ‘영생을 주는 소녀’는 만화책이다. 두 시간 만에 세 권을 내리읽었다. 나도 모르게 몰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폭력과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이다. 에붐의 대표 이도연은 스스로가 성폭력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윤민후 목사, 윤다라의 아버지다. 주인공 윤다라는 아버지가 강단 앞에서는 훌륭한 목사이지만 강단 뒤에서는 어머니를 때리고 여러 여성 교인들을 성추행 및 성폭력 대상자로 삼는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간접 피해자이자, 아버지의 철저한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직접 피해자다. 이도연과 대립 각을 세웠으나 결말에 가서 무너진 윤다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는 장지오 목사 역시 장환의 딸로서 처음엔 몰랐으나 나중에 아버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폭력자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윤다라와 장지오는 모두 아버지의 그늘 아래 눌려 순응적인 삶을 강요받았던 피해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윤민후와 장환, 이 두 사람은 모두 1세대 아버지, 목사, 회장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가부장적 폭력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소설의 구도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특히 성폭력으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오점을 기록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얼마나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다행히 ‘영생을 주는 소녀’는 이런 타락한 한국 교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 파렴치한 폭력자들을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말하자면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갚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월터 윙크가 말한, 이른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 매몰될 뿐이다. 대신 이 작품 속에서는 직간접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한 윤다라, 이도연, 장지오, 이 여성 트리오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해결하기 위해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황금률로 알려진 예수의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의 가시적인 성취로도 보인다. 폭력의 희생자가 가해자를 향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택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잠재적 폭력의 가해자가 잠재적 희생자의 마음을 공감하여 잠재적 폭력을 예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상과학적 장치 '토브'의 메커니즘이 바로 '공감'이기 때문이다. '토브'는 히브리어로 '좋았더라'의 의미를 가지며 성경의 창조기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도연이 개발한 프로토 타입을 윤다라가 개량하여 작품 속에서 폭력에 저항하고 해결하는 키로 작동한다. 즉, 이 작품의 시작은 폭력이었으나 끝은 공감을 통한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아간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의 시작이 폭력이고 끝이 공감이라면 중간과정은 어떠한가? 세 권으로 구성된 이 장편 만화는 기본적으로 공상과학을 기반으로 하지만 폭력, 살인, 강간, 배신, 복수가 넘실대기 때문에 스릴러 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겠다 싶다. 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스릴러 혹은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페이지 터너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비단 흥미를 유발하는 목적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윤민후나 장환이라는 개별적인 악에 머무르지 않고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드러낸다. 특히 폭력성이 원래 인간에게 내재된 것인가, 아니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인가, 하는 폭력의 탄생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축은 정의와 공의다.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손길 혹은 흔적이라고 믿는 나는 바로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유전자나 환경 혹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 때 비롯되는 ‘인간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인간다운‘ 모습을 추구하고 구현하기 위한 정석이자 좁은 길이라 믿는다. 또한 이 공감이라는 소중한 힘은 이 책에서도 소개되듯,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보상 심리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의 한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길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토브'라는 공상과학적인 도구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해 낼 때 나는 그 힘이 충분히 발현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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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2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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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그늘 밑에


헤르만 헤세 저, '수레바퀴 밑에'를 다시 읽고


재독의 힘은 초독 때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로 발현된다. 또한 독자의 눈을 넘어 작가의 눈으로 읽는 텍스트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멀리 떨어져 관조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 그것과 동화되어 이전보다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 7년 만에 다시 읽은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는 특히 그랬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나는 재독이 아닌 삼독을 했다. 중학생 시절에 가장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헤세를 찾았던 것 같다.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을 거치고 마침내 합일에 이르는 내면의 여정을 중심으로 한 숱한 이야기들이 내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을 뚜벅뚜벅 걷게 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준 게 아닌가 싶다.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헤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렇게 나는 헤세를 다시 만난다.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를 가장 먼저 고른 이유는 선집 읽기에 앞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또한 재독의 고유한 맛이리라). 이 책을 다시 읽는 내가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그랬을까? 이번엔 억압의 상징인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음을 맞이했던 한스를 이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그리고 마울브론 신학교를 담당하는 교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이 이루는 수레바퀴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희생자의 입장을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유지하고 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혹은 답습한) 그들의 무의식적인 삶의 패턴이 후대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과연 그들은 인지라도 하고 있는지, 혹시 그들 역시 더 큰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가 아닌지, 그렇다면 가해자는 도대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구두장이 플라이크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스를 자살로 몰아갔던 그 무거운 수레바퀴의 본질은 아마도 질서 유지를 위한 규율, 규범, 규칙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 답으로 권위자, 혹은, 좀 더 넓게는, 생각 없이 순응적으로 사는, 인간답지 못하고 인간스럽기만 한, 기성세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씁쓸해졌다. 7년 전 읽었을 땐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기성세대인, 한스의 아버지, 마을 목사, 학교 교장 등의 어른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이 단순하게 비난할 대상이기보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수레바퀴의 중추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들의 주체성을 고려할 때 그들 중 그 누구도 주동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어떤 능동적이고 악한 의도로 한스를 파멸시키려고 애쓴 사람이 없었다. 또한 한스가 주검으로 변한 이후에도 구두장이 플라이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한스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주체를 상실한 채 무의식적으로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를 넘어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보일 만큼.


순응. 나는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는 장본인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순응'이라는 단어를 고른다. 그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이기도 하며, 아이들의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애쓰는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타이틀 뒤에 숨어 개성을 거세당한 채 그저 그 타이틀에 걸맞은 일을 해댈 뿐이었다. 마치 큰 기계의 부속품처럼, 마치 그것이 자기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 속에 빠져 있으면서 말이다. 


수레바퀴는 개성이 거세된 획일성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억압의 중추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고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수레바퀴는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인 의도가 아닌 무의식적인 본성이 발휘된 실체,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성된 유기체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 나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스는 수레바퀴라는 유기체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사고사도 자살도 아닌 타살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다. 한스는 생각 없는 어른들의 순응이라는 수레바퀴가 낳은 범죄에 희생당한 셈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한스도 어른들도 아닌 수레바퀴 밑에서 순응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 아이들은 선택받은 모범생이라고도 불리고 엘리트라고도 불리게 된다. 그들은 그저 수레바퀴에 굴복하고 순응했을 뿐인데 주류라는 견고한 성역에 진입하게 되고 사회적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수레바퀴가 만드는 피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올라가 더욱 거대한 수레바퀴를 이루는 주요 부속품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수레바퀴는 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삶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수레바퀴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기전이다. 생각 없는 어른들과,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라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대체하게 될 생각 없는 아이들이 이루는 완벽한 조화가 빚어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획일성에 저항한다. 질서라는 멋들어진 용어 이면에 숨은 인간의 탐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생명의 가장 큰 신비를 다양성이라고 보는 나는 순응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의 옷을 입고 행하는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당신에게 주어진 일과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그것이 남을 파괴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만 없을 뿐 남을 죽이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른 사람을 죽일 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라고. 죽일 의지 없이 행한 살인은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될뿐더러 의도적인 살인보다 훨씬 쉽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게 아니었냐고. 당신의 그 생각 없는 순응이 비겁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그것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수레바퀴가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나는 감히 순응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순응으로 말미암아 거세된 자신의 주체를 꼭 찾아 회복시켜 보라고 말이다. 그것도 가능한 이른 나이에. 자칫 교만의 구렁텅이로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이 시도가 꼭 해볼 만한 과업이라고 믿는다. 교만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만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교만을 느껴보지도 않고서 겸손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동경하고 지향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응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를테면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애써 보길 권한다. 그래야 생각 없이 순응하지 않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발적인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게 돌리고 있는 수레바퀴의 참혹한 본질을 의심하여 알아채고, 나아가 고발하고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밑에 깔려 죽는 영혼이 더 이상 없는 세상, 우리 모두의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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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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